우리가 크라이스트처치 시내로 들어선 때는 이미 도시의 불빛조차도 하나 둘씩 꾸벅거리기 시작하는 꽤 늦은 밤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몇 년 전에도 우리가족 모두가 방문한 적도 있었고 혼자서도 몇 번인가 들렀던 적이 있어서 인적이 거의 끊어진 시간이었지만 차창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들이 정겹기 그지없었다. 하긴 끊임없이 펼쳐진 허허벌판을 죽기살기로 달려 왔으니 사람냄새가 나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인들 정겹지 않으리오만....
크라이스트처치는 1850년에 크라이스트 쳐치, 옥스퍼드 칼리지 출신인 영국인 John Robert Godley가 영국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보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영국사회를 뉴질랜드에서 다시 한번 구현해 보고 싶은 소망으로 도시건설을 시도하였고 그의 신념은 이후 정착자들에 의해서도 이어지면서 영국 밖에서 가장 영국적인 도시라고 알려지고 있는 지금의 크라이스트처치가 건설되게 되었다고 한다.
크라이스트처치라는 영국적인 도시명과 거리곳곳에 자리한 영국풍의 건축물들과 사시사철 아름다운 영국식 정원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보수적인 영국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곳 시민들의 모습에서 이민 온 지 몇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고향을 향한 깊은 그리움을 감추지 못하는 듯하여 이민자라는 공감적 입장에서의 찡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남섬의 대 옥토, 캔터베리 평원 위에 편안하게 자리잡은 크라이스트처치는 지금은 약35만 인구가 살고 있는, 남섬에서는 가장 큰 도시로, 대부분의 남섬관광 일정이 이곳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들르게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뉴질랜드에서는 대도시로 손꼽히는 오클랜드, 웰링턴, 해밀턴 등과 같은 도시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최근에 건설된 젊은 도시여서 고풍스런 영국 풍의 석조건물들과 제각각 개성을 뽐내는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울창한 숲 사이로 어우러져 보기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시 외곽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방사형의 일직선 도로망과 중심가의 바둑판처럼 짜여진 거리에서 이 도시가 계획적으로 설계된 도시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시내로 들어오면서 누구든지 감탄하게 되는 것은 도심 한 복판을 가득히 차지하고있는 해글리 공원이다. 그곳에 들어서면 우선 그 드넓음에 한번 놀라고 그 드넓음 위로 묵묵하게 버티고 서있는 웅장한 아름드리나무들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무려 182헥터(참고로 1헥터는 100m x 100m인 10,000제곱미터의 정사각형의 넓이) 면적의 이 공원은 크라이스트처치의 허파와도 같아 이곳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그들의 삶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곳이다.
촉촉한 새벽이슬이 내린 이른 아침이면 공원 안으로도 이어져있는 에이번 강 주변과 호숫가를 끼고 난 산책길을 따라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교복차림의 학생들과 직장으로 향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공원을 거쳐서 하루를 시작하게 되며 또다시 오후가 되면 하루 일을 마친 이들이 집으로 향하게 되는 길목이 되어 주기도 한다. 휴일이면 낙엽과 꽃잎으로 포근하게 뒤덮인 잔디밭 위에서 맘껏 뒹굴거나 고목나무 넝쿨에 매달려 노는 아이들과 함께 편안히 잔디밭에 자리피고 누워 한 주의 피곤을 삭히기도 한다.
또한 공원 안에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공원인 Botanic Garden(식물원)이 있어서 그곳으로 들어서면 아름다운 꽃들이 지천으로 만발하고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임직한 신비스런 자태의 나무들과도 만날 수 있게 된다. 공원 안에는 식물원 외에도 미술관과 골프장도 있고, 일요일이면 집시들의 벼룩시장이 펼쳐지기도 하고, 공원 안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만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공원 밖으로도 공원을 끼고 캔터베리 박물관과 크라이스트처치의 명문고교인 크라이스트 칼리지가 위치해 있다.
이 공원의 바로 건너편이 역사 깊은 건축물들과 관공소, 상점, 관광호텔 등이 모여있는 크라이스트처치의 중심가이다. 남섬관광이 시작되는 곳인 만큼 거리에는 여행의 꿈으로 잔뜩 부푼 세계 각지로부터 모여 든 여행객들이 많이 보인다. 이 주변에는 수많은 호텔들과 모텔들이 모여있고 세계의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들과 어울려 한국음식점들도 반갑게 눈에 들어온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지금도 중심가 일대에는 빨간색의 전차(Tram)가 다니고 있으므로 여러분도 이곳을 여행하게 된다면 한번쯤 이 역사 깊은 빨간 전차를 타고 이 일대의 고풍스런 석조건물들과 아기자기한 도심을 둘러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크라이스쳐치를 저욱 인상깊게 하는 풍경중의 하나는 해글리 공원과 시내곳곳으로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고 있는 에이본 강이다. 사실 그 이름처럼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강이라기 보다는 마음속에 고향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려보는 아름다운 실개천으로 수양버들 둑 가에 앉아서 평화로이 노니는 물오리 떼와 물고기무리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그리 깊지도 넓지도 않은 시냇물 위로 길다란 장대 노를 저으며 우아하게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유람의 무리도 만나볼 수 있게 된다.
크라이스트처치는 대평원 위에 자리잡은 도시답게 도시 전체가 평평한 평지 위에 세워져 있다보니 편안하고 드넓은 느낌은 있으나 언덕 위에 올라서서 도시전체를 훤히 내려다 볼만한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캐시미어 힐로 올라가면 캔터베리 평원위에 자리잡은 크라이스트처치와 그 너머로 이어지는 웅장한 서던 알프스 산맥까지 한눈 가득히 들어온다. 그리고 이곳에서 좀더 구불구불한 능선을 따라 오르면 어느새 리틀톤 하버의 새파란 바다와 하늘이 하나의 색으로 맞다은 곳까지도 이를 수 있다.
우리는 노을지는 캐시미어 언덕에 올라 모처럼 찾아 온 크라이스트처치를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서던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도시는 가을빛에 물들어 있는 한 폭의 그림처럼 정갈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오늘 밤 자고 나면 떠나가기에는 아쉬우리 만치 아름다운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