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과 어업 민족이었던 일본인의 식생활은 530년경 중국에서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된 불교와 함께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700년경에 이르러 궁중의식과 신에 대한 의식 등의 필요성에 의해 일본 요리의 규범인 다이호우리쓰료우(대보율령 : 대보 원년 701년에 제정된 율령 11권의 명칭)가 제정되었다. 이 율령은 972년 요우로우리쓰료우(양노율령)에 의해 보정되어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하는 방법과 요리를 만드는 방법,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방법 등이 세밀하게 규정된 연희식이라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연희식에는 향응(음식, 술 등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연희)의 선형식과 연중행사 오절구(성인의 날, 여자 어린이의 날, 어린이날, 칠석날, 중양절) 등의 각종 계절행사 요리도 정해졌다. 이때에는 조리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에서도 현저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밥과 부식을 담는 그릇을 시작으로 술잔, 받침대 등에도 고도의 예술성이 가미된 작품이 등장하였다. 이 무렵은 헤이안지다이(평안시대)라고 불리는 귀족 지배의 시기로 신분에 따라서 그릇이 달라지는 도구의 계급제도가 생겨나 귀족은 청동기, 은기, 옻기 등을 사용하였다. 당시의 고고덴노우(광효천황 : 9세기 중엽)가 요리를 좋아하여 요리 연구에 열성적이었다. 이 고고덴노우가 요리 연구를 정리하여 더욱 더 많은 요리를 후세에 전해 주었는데, 이것이 <시죠쥬우나곤후지와라죠우신산인교우(사조중납언등원조신산음각)>이다. 고고덴노우는 현대에 전해져 오는 요리도의 사조류의 개조로서 요리의 신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와같이 요리의 연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왔지만, 귀족사회의 식사가 아침, 저녁 두끼로 형식화됐고, 이와 함께 살생금지령 등 포유동물의 식육금지로 인하여 영양의 균형이 맞지 않아 영양실조와 같은 상태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때에 지금까지의 공가(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 귀족의 사치로 여겨져 왔던 형식적인 식사 풍습 등을 혁파하는 질실강건을 첫째로 하는 무가정신의 경향이 다시 대두되었다. 무사는 항상 심신을 단련하여 전시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사냥 등이 부활되었고, 부식으로 고기도 먹을 수 있도록 식사 관습이 바뀌었다. 또한 삼식주의의 관습도 정착되어 무가사회의 시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중국과 조선과의 교류도 활발해짐에 따라 스님 등에 의하여 국내에 선종이 확산된 것을 계기로 사찰에서는 정진요리와 보차요리가 생기게 되었다. 두부 등이 처음 만들어진 것도 이때쯤이며, 또한 차, 점심(차에 곁들이는 것, 과자, 절임 등), 짜노고 등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사회 상황 속에서도 귀족과 공가의 향응에 있는 선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고 계속 지속되었다..
1338년, 바쿠후(막부)가 가마쿠라에서 교토 무로마치로 옮겨 무가와 공가의 교류가 성행하고 도산(모모야마)문화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 시대는 우아한 생활을 과시하는 사회가 되어 요리의 세계에서도 사조류, 대초류, 진사류, 그리고 생간류 등의 다양한 세력들이 형서오됐다. 각파는 요리 만드는 법을 포함하여 조리기술, 자르는 방법에 기교를 집중시킨 고도의 기술을 개발하는 등 경쟁이 심화됨으로써 일본의 요리 기술과 조리법이 두드러지게 진보하는 요리계의 전국시대를 열어나갔다. 아울러 공가사회와 무가사외의 쌍방에 예법이 생겨나 축의의 의식이 더욱 더 엄격해져 식의 선이 정해지고 식사의 예법에 따른 본선요리의 향응 형식이 생긴 것도 이때쯤이다. 1500년경 천리휴(오차나 오차를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를 만드는 사람)들에 의해서 차도가에 따라 다도와 차회석이 완성되었다.
이 당시에는 외국과의 교류무역이 성행하여 남만요리(쇠고기나 닭고기, 생선들에 파를 넣어 조린 음식) 등도 건너와서 일본인의 식생활도 점차 육식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1639년 에도도쿠가와(강호덕천)에 쇄국령이 떨어져 다시 생선과 야채를 위주로 하는 식생활로 되돌아갔다. 이때는 완전한 무가정치의 시대였지만 중산층의 활약이 눈부셔 상인들의 부가 위력을 발휘하여 사치스런 요리와 호화스러운 그릇을 쓰는 주연요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많은 고급 요리점과 차실(다과회실)이 생겨나 요리리문화의 발전이 지속되었다. 염격한 예의작법의 얽매임 속에서도 더욱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본선요리와 회석요리는 어지럽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요리다실에서 소외되어 그것에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요리다실에서 소외되어, 그것에 대응되는 주연을 중심으로 한 회석요리가 생겨났다. 중산층의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은 순수한 미각과 식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에 이르러 음식이 유희화되고, 그 위에 연석이 사교의 장으로서 이용하게 되었다.
1800년경에는 본선요리, 정진요리, 회석요리, 중국요리, 남만요리 등이 상호 융합하여 소화, 흡수되는 시대로서 일본의 독특한 요리문화가 완성되었다. 많은 국가가 그러하듯 요리의 발전 과정은 그 나라의 종료와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일본 요리의 발전 과정은 신과 불교의 공물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또 일본 요리는 요리 전국시대에 많은 유파가 생겨 서로 경쟁해 가며 기술이 발전함에 따리 일본 요리의 이론적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요리의 큰 흐름을 총괄해보면 귀족, 무가 지배의 봉건사회에서 향응의 접대연회는 상층계급이 하층계급에게 '밥상을 받게 해주고', '위로해준다'라고 하는 형식이었고, 엄격한 식사 작법이 요구되었다. 그것이 명치 후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는 변화에 오면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안락한 분위기에서 즐기는 식미본위의 주연을 중심으로 한 향응의 회석요리가 주류르 이루어 왔다.
현재 이 회석오리(가이세끼요리)는 결혼필연, 희수(77세의 잔치), 미수(88세의 잔치) 등의 축하연과 일반 연희 등 모든 초청연회에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회석요리는 때로는 본선형식을 도입하기도 하고 차회석의 흐름을 추가하기도 하면서 제각기 응용할 수 있게끔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