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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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10)
잘못된 간구보다, 은혜는 더욱 크다
삼상 8:1-22 (봉독: 1-9, 19-22)
지난번 시간에 에벤에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그 이후로도 인도하실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 고백대로, 그 이후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사무엘과 달랐던 두 아들
이러한 평화에 위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사무엘이 늙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7장과 8장은 적어도 수십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1절에 보니, 사무엘이 늙었고 그는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습니다.
사무엘은 아들들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한 자녀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신앙인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소망이 그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이름이 나옵니다.
(삼상 8:2) 맏아들의 이름은 요엘이요,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비야다.
그들은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일하였다.
요엘의 의미는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아비야의 의미는 “여호와는 내 아버지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무엘의 아들들은 사무엘을 닮지 않았습니다. 3절에 보면,
(삼상 8:3)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서, 치우치게 재판을 하였다.
자녀들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들들은 아버지 사무엘의 길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부모라 할지라도 신앙이 약하거나 부도덕한 자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저를 비롯하여 모든 믿는 이들로 하여금 겸손케 하는 부분입니다.
오직 그분의 은혜만 의지할 뿐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에 이은 사무엘의 부정적인 사례는 하나님 나라에 헌신된 이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땅 끝은 그리 생각보다 멀지 않으며, 오히려 가정이 땅 끝이요, 선교지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왕을 세워 달라
사무엘이 늙어가고 있다는 점과 그의 아들들은 사무엘을 닮지 않은 점들이
이스라엘의 영적 위기감을 증폭시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은 나라 걱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들은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어른께서는 늙었고 아들들은 어른을 닮지 않았으니 대안을 마련하자는 겁니다. 그 대안은 바로 왕을 세워 달라는 겁니다. 5절 보세요.
(삼상 8:5)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방금 장로님들이 모여 만장일치로 결의하여 간구하는 것은 ”왕을 세워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을 세워 그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달라는 겁니다. 사무엘은 이 요청과 간구에 마음이 상합니다.
왜죠?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점이자 동시에 엄청난 특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인간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셔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간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왕을 거부하고 보이는 인간 왕을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마음이 상한 겁니다. 그들이 사실상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인간 왕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을 하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 17: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어찌 보면 이것은 예견된 일입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이전,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해 이미 왕을 세울 경우를 대비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왕정 제도를 하나님께서도 고려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신 17:14-15a) 14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주시는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살 때에, 주위의 다른 모든 민족같이 당신들도 왕을 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 15 당신들은 반드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을 당신들 위에 왕으로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들이 때가 되면 왕을 세워달라고 간구할 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 왕을 구한 것 자체는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떠한 동기로 간구하고 있는 것인가?”입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구하는 대상이 무엇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동기로 그것을 구하는가?
우리가 간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이유가 크게 2가지가 있지요. 야고보서 4장에 보세요.
[약 4:2-3] ...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얻지 못하는 것은 간절히 간청하는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간구할 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하는 정도의 간구는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울한 과부의 간청처럼, 밤새 매달리는 기도가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쾌락을 누리기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유, 재산, 나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 구하려고 할 때,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고 남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구하여도 실은 나의 뜻으로 포장하여 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핵심은 어떠한 동기로 간구하는가? 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들은 어떠한 동기로 왕을 구하는 것입니까? 5절에 나옵니다.
(삼상 8:5) ...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되기 위해서입니다.
11절부터 보면 사무엘은 왕이 세워지게 되면 그 왕이 너희를 착취할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의 재산도, 그들의 자녀들도 데려가 징병하여 전쟁에 끌고 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한마디로 사무엘은 “너희가 지금 간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간구하는 것이냐?” 묻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면서 구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하며 구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너희는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요청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달라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밥은 먹지 않고 과자나 아이스크림만 달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셨어요.
그때 이들이 간구한 것이 무엇이었나요?: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지금 이들은 선생님이 영광 받으실 때, 즉 왕위에 즉위할 때, 우측과 좌측에 앉게 해달라는 겁니다. 하나는 국무총리, 하나는 비서실장 자리 달라는 겁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막 10:38] ...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지금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이 무슨 기도를 하고 있고 어떤 간구를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동기로 구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왕의 권력을 나눠 갖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간구하고 있어요.
그러나 사실 지금 이들이 구하고 있는 것은 죽음의 잔이요 순교의 세례입니다.
이중 소명을 거부하다
왕이 착취할 것이라는 사무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왕을 세워달라고 반복해서 간청합니다.
19-20절 보세요.
(삼상 8:19-20) 19 이렇게 일러주어도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20 우리도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그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다른 이방 나라들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들처럼 되고 싶다는 것,
그 말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포기하겠다는 겁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무엇이죠?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언약 백성입니다.
이 정체성의 핵심은 다른 나라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다름이 되는 것, 바로 다름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의 핵심에는 “거룩”이 있습니다.
거룩은 “구별되다”입니다. 거룩의 단어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일을 위해 따로 떼어낸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과 같지 않음처럼, 그들도 다른 나라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중 소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경배하며 사랑하라는 소명과 세상을 본받지 말고 구별되라는 소명,
이것이 이중 소명입니다. 출애굽기 23장을 보세요.
(출 23:24-25) 24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
[롬 12: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거룩함, 이것이 그들의 소명입니다. 이것은 동일하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이제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 구별된 공동체가 싫다는 겁니다. 지겹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되고 싶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실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요 도전입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알고 계세요.
그래서 7, 8절 보세요.
[삼상 8:7-8] ...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8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하는 일마다 그렇게 하여,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더니, 너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버린 것이다. 너는 처음 겪겠지만, 그런데 이것은 내가 지난 수백 년간 느꼈던 마음이고, 그들의 선조들이 출애굽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내력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하는 배우자가 나를 버리고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꼭 그 마음이라는 거예요.
지금 이들은 잘못된 동기로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르고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되라는 이중 소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구별되기를 창피해하고 부끄러워하며, 남들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 우리의 마음 아닐까요?
미혹의 본질: 시선 분산
사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과 동화되지 않으면서 구별되기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영화와 음악과 영상을 통한 미디어를 통해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고 세속적으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세이렌이 나옵니다. 오늘날 구급차의 사이렌은 바로 이 세이렌에서 유래한 것이지요. 많은 분들이 가시는 “스타땡땡”, “별다방” 커피숍의 로고도 바로 이 세이렌입니다.
세이렌은 바다에서 항해하는 선원들을 세이렌의 노래로 매혹시켜 목숨을 잃게 만드는 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체의 일부는 여성이고 일부는 독수리였다가 중세를 넘어가면서 여성의 상체와 물고기의 꼬리가 합쳐진 인어의 모습으로 바뀌었지요.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세이렌이 사는 섬을 지나게 됩니다. 그는 선원들에게는 밀랍으로 귀를 막게 하고 자신의 몸만 돛대에 묶게 합니다.
절대로 그 줄을 풀지 말라고 부탁을 하지요. 세이렌들이 노래하며 그들을 유혹합니다. 유혹의 메시지는 미래에 대한 비밀, 노래를 들으면 더욱 현명해지고 위대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해요. 그러나 선원들은 귀를 막았습니다. 오디세우스는 귀는 열었지만 몸을 묶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가던 길에서 미혹되지 않고 귀향할 수 있었습니다. 미리 대비한 까닭에 그 섬을 무사히 빠져나오게 됩니다.
이 세이렌의 목소리가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매일 같이 마주하는 유혹입니다.
사무엘서 8장은 왕을 세워야 한다는 미혹된 여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론이 되어 다수의 의견이 되어 사이렌처럼 울려 퍼집니다. 그 여론은 사무엘에게 전달이 되지요.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되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른 길입니다.”
마귀는 믿는 이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데 달인입니다.
마귀 미혹의 본질은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반면 거룩은 하나만 보는 것, single focus입니다.
그렇기에 거룩의 반대는 시선이 나뉘는 것, 분산되는 것, 마음이 두 마음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돌립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 이스라엘이 평안했던 것은 사무엘 때문인가요?
물론 사무엘이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향해 있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마치 사무엘이 한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분, 이단의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특정 사람을 신처럼, 신격화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JMS든, 신천지든, 하나님의 교회든, 사람을 신처럼 여기게 하는 것, 이것이 마귀의 미혹입니다.
마귀 미혹의 본질은 우리의 시선을 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대상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사실 사무엘이 늙어갔을 때,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가 마귀가 틈탈 때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님에게서 사람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사무엘로 옮겨졌을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왜요? 지금 사무엘은 나이가 들었습니다. 나이든 사무엘을 바라보니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두려움은 시선을 분산시킨 마귀의 미혹의 결과입니다.
또한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는 이유는 역시 두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모든 장로들이 다른 나라처럼,
왕을 세우려고 하는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두려움입니다.
“사무엘이 죽으면 어떡하지? 사무엘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는데 그럼 우릴 누가 인도하지?”
그들의 시선이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자,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마태복음 14장에서, 풍랑 중에 물 위를 걷던 베드로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걷던 베드로의 시선이 예수님에게서 멀어지고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마 14:30), 그는 곧바로 무서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런 식으로 마귀는 그 두려움을 심어줍니다.
지금 여러분 왜 두렵습니까? 주님을 향한 시선이 흐려졌거나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온전히 주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고 영적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분산된 것이고 두려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동기가 무엇인지 점검하고,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자신의 것만 구하는 “이기적인 기도”에서 탐욕을 “이기는 기도”로,
그저 “바라는 기도”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기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 은혜의 눈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왕의 제도를 허락하시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연약함을 뛰어넘을 정도로 풍성합니다.
왕을 세워달라는 그들의 요구에 놀랍게도 하나님은 허락하십니다.
[삼상 8:9] 그러니 너는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 주되, 엄히 경고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 주어라
왜 하나님이 사실상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간구를 들어주실까요?
먼저는 왕이신 하나님을 떠나 살고 싶은 인간의 완악함이 본성임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허용함으로써 잘못을 스스로 깨닫도록,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사울 왕을 택함으로써 위기를 겪습니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배우게 하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구하지만,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다스릴 인간 왕을 구했지만, 하나님은 참된 왕을 보내달라는 것으로 받으신 겁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십니다(롬 8:26).
또한 하나님은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실 분이 아닙니다.
[눅 11:11-13] 11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12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이겠습니까?
우리가 악해도, 우리가 잘못 구해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 아닙니까?
말씀드린 대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좌우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구했습니다.
지금은 이들은 생선을 달라고 간구하지만, 실은 뱀을 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채 구했습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축배가 아니라 죽음의 잔이었고, 물세례가 아니라 순교라는 피의 세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구한대로 주셨어요.
야고보는 사도행전에서 가장 먼저 순교하는 사도가 되고, 요한은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서 요한계시록까지
기록하고 순교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생선이 아니라 뱀을 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구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들이 받은 것이 “뱀”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생선”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순교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지한 간구”보다 “무지하게”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배우자와 결혼하실 때 생선인 줄 알고 결혼하셨지요? 생선 맞지요? 정말인가요?
어떤 분이 자신이 좋아하던 남자와 기도 중에 응답받고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몇 번 교회 나가더니 안 나갑니다. 그리고는 얼마나 속을 썩이는지 그 남편 때문에 얼마나 기도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생선을 구한 줄 알았는데, 뱀을 구한 겁니다. 그런데 그 남편 때문에 기도하게 되었고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남편 때문에 이 아내가 바뀝니다. 뱀을 받을 줄 알았는데, 생선이었습니다.
지난주에 한 가정이 찾아오셨습니다. 자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들어가고 싶은 특정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셔서 들어가게 되었어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수업 중에 네가 좋아하는 것이 뭐냐고 했는데,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답니다. 과학 시간에는 창조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때 이후로 아이들이 집단으로 이 아이를 힘들게 한 겁니다. 학교를 다니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생선을 구했는데 뱀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이렇게 힘들어할 때에 가정에서 가정예배하면서 부모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믿음이 더 자라게 되었습니다. 아이만이 아니라 부모님도 이 문제로 인해 주님만 더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온 가족이 말씀과 기도로 오직 한 분만 바라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뱀인 줄 알았는데 생선을 주신 것 맞습니다.
저는 신학생 때 친구들과 기도하면서 한국교회를 살려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한국교회를 살리는 데 저를 써 달라며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간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를 향한 시선을 놓치면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더 주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 생선을 주신 것이 맞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선을 구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한대로 사람이 세운 사울을 주십니다. 승리도 하지만 실패도 경험합니다.
그리고 결국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시대를 맞이하게 하시지요.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더 나은 다윗이신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주십니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다윗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예언을 성취할 구원자요 선한목자이시며,
참된 왕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삼하 7:16] 네(다윗)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
[미 5:2]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기원은 아득한 옛날, 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실 사무엘의 마지막 임무는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조차도 그저 자신의 혈통에서 일어날 참되고 위대한 왕의 선구자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 통치 계획은 영원히 왕으로 통치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백성들로부터 빼앗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는 빼앗는 왕이 아니라 주는 왕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는 왕입니다(마 20:28).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그 왕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왕, 에벤에셀, 여기까지 도우셨고 앞으로도 도우실 왕이십니다.
우리는 무지함과 연약함으로 잘못 구할 때가 있습니다. 뱀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의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기도에서 정욕을 이기는 기도로
바라기만 한 기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기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잘못된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연약함을 덮고도 남습니다.
여러분, 뱀을 받은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선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요 자비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넘치도록, 더욱 응답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