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현장에서 본 국제협력: 연구장비 인프라를 중심으로
이기욱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책임연구원
사실 우리나라의 연구장비 인프라 현장에서 경험하는 과학기술 국제협력은 불편함의 연속이다. 연구실험실 대부분이 대도시가 아닌 한적한 지역에 있는 이유로 직접 찾아오는 해외 과학자를 위해 교통정보를 안내하고 게스트하우스 숙박 예약을 하는 데만도 꽤 많은 시간이 든다. 방문 전에 영상회의를 하려고 해도 출연연 보안정책으로 방화벽 접근 사전 승인 절차가 필요하다. 시료 접수나 기기 이용료 납부를 위한 행정 낭비는 가끔 인내심의 한계를 초월하곤 한다.
국제협력의 어려움
이뿐만이 아니다. 국내에서만 사용되는 특정 문서작성 소프트웨어의 내용과 양식을 일일이 변환해야만 하고, 특히 표 위주의 표준양식을 수작업으로 풀어서 완전히 새로운 파일을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환율변동으로 견적금액이 입금 금액과 차액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 매번 소명이 필요하다. 연구 장비에서 획득한 분석결과와 해석 내용도 메모리스틱에 직접 저장해 줄 수는 없고, 기관에서 제공하는 대용량 파일 전송방식을 이용해야 하는데 가끔 영어로 제공이 안 되는 서비스가 있어 어려움을 겪는다. 외국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무료 공유 드라이브는 물론 사용할 수가 없다.
대외적으로는 오픈사이언스 정책을 선언하고 국내외 우수연구자와의 연구 장비 공동 활용과 협력을 추구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실무담당자의 맨투맨 밀착수비를 통해서만 가까스로 운영되는 현실이다. 심지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국가 R&D 비용이 투입된 연구 장비의 공동 활용이 국내 과학자만을 대상으로 수행하고 외국인에게는 서비스를 줄여야 한다며 핀잔을 주는 동료도 있었다.
과학기술 분야 현장 연구자들이 국제공동연구 과정에서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은 많은 국제협력이 의전 중심의 행사로만 진행되는 데에서 기인한다. 단체 사진과 보도자료만을 위한 업무협약 행사 이후 실무연구부서 간에 실질적인 국제교류나 해외 협력의 성과가 축적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대규모 국제협력 행사일수록 과학기술적 성취는 저조해지는데, 과학기술 전 분야를 아우르는 재외 한국인, 여성과학기술인 주최의 국제학회들의 경우 너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억지로 모아놓아 구색 갖추는 발표만 진행될 뿐 실질적인 토론과 아이디어 공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대형 국제협력 쇼윈도에 현장 연구자들은 억지로 동원되어 영어 발표를 하거나 자리를 채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한편으로 상대 국가 연구자에게 무리한 일정이나 글로벌 스탠다드를 넘어서는 의전을 부탁하다가 수년간 쌓아온 신뢰가 무너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국제협력의 즐거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국내외 전문가들과 교류, 협력, 경쟁하고 토론하며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모든 과학기술인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큰 즐거움이다. 필자가 담당하고 있는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의 고분해능이차이온질량분석기 연구실은 지난 15년간 네델란드, 노르웨이 등 25개국에서 50여 개 그룹의 연구진과 총 99건의 연구 장비 공동 활용을 수행했다. 감염병 등의 상황으로 시료만 보내어 대신 분석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해외 연구자들이 멀리 한국의 실험실까지 직접 방문해 연구 장비 인프라를 밤새 활용하고 연구결과를 토론하곤 했다.
해외 연구자들의 재방문 신청 비율은 78%로, 연구시설 및 결과에 대한 만족도 및 성취감이 매우 높은 편이었다. 이를 통해 SCI 논문도 124편 출간되었고, 해외 이용자들이 지급한 기기분석료 수입도 약 3억 원에 달했다. 올해만 해도 폴란드, 네델란드, 독일, 일본, 영국, 터키, 스웨덴, 아르헨티나, 사우디아라비아, 노르웨이의 과학자들이 실험실을 직접 방문해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이런 실적 외에도 국내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시료를 접할 수도 있고, 최근의 해외 연구동향에 대한 정보와 독창적인 아이디어도 얻게 되고, 새로운 연구분야를 국내에서 최초로 경험하게되는 수많은 장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연구장비 인프라를 통해 국제공동연구에서 주도권을 가지게 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성과였다.
필자는 25년 전 대학원생 시절 캐나다 오타와에 위치한 지질조사소 연대측정 연구실을 방문해 실험했던 경험이 있다. 강원도 화천 지역 변성암 시료를 이용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우라늄-납 동위원소 마이크로빔 표면분석을 측정한 시도였다. 연구비도 충분하지 않았고 분석장비 사용경험도 적었던 터라, ‘맨땅에 헤딩’하는 절실한 심정으로 구구절절 장문의 이메일을 여러 차례 보내 가까스로 성사된 기회였다. 분석 결과는 18억 7,200만 년으로 당시에는 굉장히 낯선 결과였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 거의 모든 곳에서 확인되는 한반도의 중요한 지질 역사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이와 같이 외국 연구자들의 도움에 의존해 첨단 연구시설 장비를 어렵게 이용했던 과거의 경험을 국내의 많은 과학기술인들은 비슷하게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불과 25년 만에 우리나라가 과학 인프라의 선진국이 되어 수많은 해외 연구자들이 스스로 찾아와 함께 측정하고 결과의 논의를 주도할 수 있는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큰 감격이자 보람이다. 바다 건너 직접 찾아오는 과학자들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즐거움과 뿌듯함을 가지게 되는 것은 지난 수십 년간 모든 과학기술인들의 땀과 노력으로 성취한 우리나라 연구 수준과 인프라 환경의 큰 발전에 기인한 것이다.
K-인프라 주도의 과학기술 국제협력
국제적으로 과학기술 연구시설 장비는 OECD의 연구개발 조사 표준지침인 프라스카티 매뉴얼에 따라 연구 인프라(Research Infrastructure)로 분류되고, 다수의 선진 국가에서 예산 및 인력자원과 함께 과학기술 핵심 요소로 중요하게 간주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연구 방식이 전통적으로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이론으로 해석하던 것에서 첨단 연구 인프라를 통해 데이터를 생성하고 이를 컴퓨팅리소스를 통해 연구하는 방식으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연구시설장비진흥센터(NFEC)의 통계에 따르면 국가 R&D로 구축된 공동 활용 연구 장비는 무려 4만 점이다. 국가연구시설은 모두 556곳이 등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국가적 대형 연구 장비는 210점이 별도로 등록되어 있는데, 대형연구시설정보서비스를 통해 전 세계에 연구시설 장비 공동 활용을 안내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구축된 최첨단 국가 인프라는 과학기술 국제협력의 중심축이 되기에 충분한 역량을 이미 가지고 있다. 이를 ‘K-인프라’라는 브랜드로 국제활용을 추진하면 국가적 과학기술의 위상이 크게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선제적으로 우리나라의 연구 장비 인프라를 전세계 과학자들에게 개방하고 그 국제적 연구 흐름에 리더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책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연구 장비 현장 담당자들이 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국제 공동 활용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플랫폼 시스템 구축 및 운영이 절실히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