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믿는 하나님
막12:18-27절. 204.210.493장.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불란서의 소설가 알버트 까위의 작품 중에는 오해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깊은 산골에 어머니와 딸이 조그마한 호텔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골의 암담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화려한 생활(生活)을 하려고 투숙객(投宿客) 중에서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수면제를 먹이고 죽여서 돈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저축(貯蓄)을 했습니다. 어느 날 중년 남자가 투숙했습니다. 그는 20년 전에 집을 나간 아들이었으나 어머니와 동생을 놀라 게 해주려고 신분을 감추고 투숙했습니다. 모녀는 그것을 모르고 그를 죽인 후에야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오해가 낳은 비극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줍니다. 오해가 빚어낸 결과로 말미암아 역사가 바뀌고 인생이 바뀌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당시 유대나라에 가장 권세 있는, 당파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 와서 예수님의 입지를 흔들고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고단위의 술수를 썼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사두 개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한데서 부터 그룻된 발상이 나왔음을 질타했습니다. 오해는 바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오해는 인생을 파멸로 몰아가기도 하고 오해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합니다.
사람은 거울 앞에 설 때 자기 모습을 바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야 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옳게 깨달을 때만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바로 살아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 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하면서 이 본문을 통해서 주시는 오늘의 메시지를 함께 깨닫고 은혜를 받읍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경하신 후에 그를 파멸로 몰아가기 위한 도전들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예수님들 정치적이건 종교적이건 법망에 걸려서 제거하려는 움직임은 도처에 널려 있었습니다.
지난 단락에서 살핀 대로 바리재인들과 헤롯당들도 서로가 정치적 노선이 다르고 철학이 달랐지만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요즈음 식으로 합종연횡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나 로마 당국에게 가장 민감한 사항이었던, 세금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수렁에 빠지게 하려 했습니다.
어느 쪽의 대답이던 간에 법망에 걸리고 어느 쪽이든 여론의 질타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진리를 선포 하심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공격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또 다른 세력 제사장급의 가장 힘 있는 사두개인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사두개인은 귀족적인 제사 계급이요 수적인 면에나 인기 면에서는 바리새인에게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영혼의 불멸을 의심했으며 천사나 영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종교적으로는 합리주의자들이요 자유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의 유물주의자 또는 합리주의자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극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고집해온 구전과 유전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의미에서 보면 성경에 대한 태도는 보수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에게 동시에 미움을 샀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서로가 미워하는 사이였으나 예수를 제거하는 일에는 모두가 한마음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정치적인 질문이 아니라 성경해석과 사상의 문제였습니다.
또 그들의 질문은 윤리적인 문제보다 교리적 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예수님을 웃음거리로 만들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매장해서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태도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로 사람을 흉기로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언론과 여론이 사람을 죽여서 매장시키는 것을 늘 보고 있습니다. 한번 언론과 여론의 재판을 받으면 인생이 완전히 끝나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질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여자가 남편과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없이 결혼 생활을 하다가 남편이 죽었으므로 당시의 이른바 수혼 법에 의해서 남편의 형제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죽어서 차례로 일곱 남편의 아내 노릇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 후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정말 합리주의자들의 궤변 치고는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예수께서 전통적인 부활 신앙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죽은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는 것을 인정하는 모세의 율법에 배치되는 말씀을 하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예수를 여론의, 도마에 올려놓고 매장하는데 적절한 소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막12:24). 본래 이 법의
취지는 최대의 비 참사에 대한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 그리고 가문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또한 자식이 없는 과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법은 종족의 영속을 필요로 하는 이 세상의 문제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세의 생활은 단순히 현재 생활의 반복이 아닙니다.
사람이 부활한 후에는 장가도 시집도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때는 영광의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의심하는 사상들을 일축하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회상시켜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심을 통쾌하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면 이 본문에서 우리가 특별히 맛볼 수 있는 한두 가지 진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불신앙과 비 진리를 용납 치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원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성경대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날도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어떤 사람은 기독교의 전통이 곧 진리인 듯이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기독교적 문화를 복음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두개인들처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바로 기독교 신앙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기 자신을 믿는 철저한 에고이스트가 기독교인으로 비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비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합리주의로 때론 신비주의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 세상에서 물질의 축복만을 소망하고. 물질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맘몬이즘을 기독교 신앙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신앙들은 예수님이 지적한 대로 기독교 신앙의 오해입니다.
성경대로의 신앙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온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 타락하여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고 메시야를 주시기로 했습니다.
때가 됨에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모든 구체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며 성경을 믿는다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장차 우리 자신들의 부활을 믿는 것도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이유는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주이시며 구속 주이심을 계시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이삭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출애굽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홍해를 육지 같이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간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만나를 내리시고 메추라기를 보낸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외 하고는 성경을 바로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곧 하나님이십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은 그가 천지를 지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자신이 3일 만에 부활하신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단순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믿음뿐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중심의 믿음 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만일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날도 일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能力)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가 창조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역사가 공의대로 움직이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악한 자는 반드시 정죄되며 옳은 사람들은 언젠가는 상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런 저런 일로 낙심하고 지치고 병들고 엉망진창이 긴 상태입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며,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시며, 추한 것을 아름답게 바꾸시며 절망을 소망으로 역전시키십니다. 우리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암울한 시대이지만 소망을 갖고 힘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한다면 역사를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성경대로의 신앙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죄와 세상을 정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료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