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사37:33-38
https://www.youtube.com/watch?v=oWchis-gF2E 이학권
https://cafe.daum.net/rnjstlgur/9oZC/544 권시혁
이사야서 37장 마지막 부분이죠. 예 이제 이사야에서 36장 우리가 많이 망설이고 기도해서 36장 들어왔죠. 36장의 시작이 히스기야 왕 제14년에 앗수르 왕 산혜립이 침입하여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취하니라. 이게 시작이에요.
그 결과를 오늘 만나는 거예요. 예 그러니까 이 말씀은 지금 유다가 멸망하고 있을 때 선지자가 하는 말이 아니죠. 멸망한 말을 포로지에서 선포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포로지에서 이 BC 701년의 사건을 선포하는 이유는 BC 587년에는 하나님이 안 지켜주시고 멸망했잖아요. 00:59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더라면 너희가 멸망하지 않고 701년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텐데 하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적고 있다.
성경은 무엇을 믿느냐를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믿음은 통일됐잖아요. 뭐로? 돈으로 힌두교인이든 이슬람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무슨 종교 교인이든 지금 세계 종교는 다 돈으로 통일됐죠. 모든 종교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이에요. 어쩔 수 없잖아요.
이 내가 삶을 사는데 이 현상 세계에 모든 것은 돈으로 이루어져 있고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아무리 뜻이 좋아도 할 수 없어요. 그러니 돈이 중요할 수밖에 없어요. 01:58
그걸 잘못이다. 잘한 것이다. 그런 얘기로 할 수 없죠. 그냥 돈이 중요해요. 성경은 그 얘기가 아니고 어떻게 사느냐 하는 얘기예요.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자기 삶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내 가정에는 어떤 삶이 피어나고 있는가? 내 자녀는 어떤 삶을 키우고 있는가? 그것을 보는 것이지. 뭐 이런 걸 믿느냐 안 믿느냐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절대 선택권을 주셨죠. 그것을 다스리라. 이렇게 표현하셨죠.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내가 어떻게 살지는 완전히 나에게 위임되었어요. 이 온 우주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어요. 그런데 모세 오경은 그 얘기를 다 한 다음에 결론이 뭐예요? 02:56
choose life (삶을) 생명을 선택하라.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너의 그 권세로 생명을 택하라고 했어요. 생명은 무한해요. 생명에 죽음이 있으면 생명이 아니지 죽은 다음에 생명 아니잖아요. 생명은 무한한 것이고. 영원한 것이에요. 생명은 하나님밖에 없어요. 모든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에요. 내 생명도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그러므로, 생명을 택하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생명 씨앗 하나님의 형상을 피우고 살고 누리라는 것이죠.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뭐 온 세상 정복해야 돼요. 아니요. 세계에서 제일 잘난 사람 돼야 돼요. 아니 제일 잘난 사람 됐다고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예 우리가 원하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 원하지 않아요. 03:56
잘 생각해 보세요. 그냥 내가 너그럽고 자유하고 나 됨이 좋은 것 내가 사는 삶을 내가 보니까 아이 기특해. 그리고 뭐 떳떳하게 누리고 있다. 이런 정도면 좋은 것이지. 다시 말해서 작고 치열하고 강박적인 그런 삶이 아니면 좋겠다. 그렇잖아요.
그냥 한평생 사는데 뭐 그렇게 쩨쩨하고 치졸하게 살 건 없죠. 그렇게 사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첫째로, 실제로 본 것이 없어요. 인간 게임 이 겉의 평면만 보았지. 그 실제를 만난 적이 없어요. 경험한 적이 없어요. 그러면 기억이 없는 거예요. 이 죽음을 넘는, 그렇잖아요. 내가 육체를 벗어도 내 영혼은 여전히 존재하고 영혼의 기억은 영원한 거잖아요.
그런데 죽음을 넘는 영혼의 기억이 아무것도 없어요. 죽을 때 보면 그냥 일생이 그냥 휘익 떠내려간 것 같아요. 왜요 현상에 up and down 업 앤 다운만 가지고 몸부림을 쳐 왔으니까.
그러므로,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구도하는 것이에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에요. 무엇을 나는 이렇게 산다를 선포하기 위한 이것이 나고, 나는 이렇게 살기를 원해. 내가 너보다 잘나야 되는 것도 아니고, 잘날 이유도 없고 또 너보다 못난 것도 아니고 못날 이유도 없고.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이 세상 속에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나는 산다. 이런 것을 선포하게 만드는 것이죠. 05:51
그런 교회를 다니셔야 됩니다. 가짜 구원 주는 교회 다닌다고 구원받았다고 하고 심리적인 위로나 주는 이 문제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굉장히 통렬하게 외쳐요.
렘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여기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이것이 교회다. 교회다 교회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죠. 머리 되신 주님으로 우리가 상합되고 연랍되는 것이죠. 그런데 각자 단절된 종교 생활하면서 나는 구원에 확신이 있다. 그런 얘기 하지 말라는 거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06:45
렙8: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여기 평강은 샬롬이에요. 우리 신약적으로 얘기하면 구원이에요. 구원받았다. 구원받았다. 하는데 구원이 없어. 불안과 상처와 어둠투성이야.
렘8:12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가증한 일은 종교를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이 중심에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아파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수치를 아는 유일한 동물이에요. 그런데 수치를 못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디드니븐 블러쉬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어. 정말 거짓에 아바타가 마귀의 아바타가 되어 있어요. 07:42
결국 우리의 삶은 현상을 사느냐, 영원을 사느냐 하는 것이에요. 현상을 산다는 말은 현상이 전부예요. 그러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요 사이가 전부예요. 요 사이는 이 현상은 뭐로? 돈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러니까 돈은 중요하고 욕심 낼 수밖에 없고 그게 삶이에요.
삶 | 현상 | 현상이 전부 | 출생 to 죽음 |
영원 | 현상을 통해 | 출생 이전 꿈 |
그러나 영원을 사는 사람은 현상을 통해서 내가 이 현상 세계로 하나님이 불러내실 때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지 않아요.
내게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내가 하나님 안의 가능성으로 있을 때 내가 저 현상 세계에 나아간다면 이렇게 한번 피어나고 싶다. 이렇게 한번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싶다. 하는 그 출생 이전의 꿈이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의 꿈을 안고 내가 태어났어요.
태어났으면 그걸 찾는 거예요.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나는 왜 있을까? 나는 정말로 무엇을 원할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다른 사람하고 경쟁해서 이기는 것일까? 다른 사람보다 잘나야 되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니라고요.
우리의 생명은 그것보다 훨씬 더 귀해요. 내 안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과 의와 사랑이 있어요. 그것을 피워 보고 싶고 그것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 더 고귀한 꿈이 있어요.
자 이건 뭐 이해가 가시죠. 그렇죠. 이해가 가는데 영원을 산다는 건 내가 결단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오늘부터 난 영원히 살겠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 말이죠. 영원히 느껴져야 돼요. 09:34
영원히 느껴져야 돼. 여기 느낀다는 말은 감각적인 느낌이 아니고 존재 야다 예요. 존재 야다 현상의 사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가 전부인 사람은 제 설명을 100만 번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해는 가요. 그러나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살 수는 없어요.
자 이사야 37장33-38 마지막 부분 주제는 I will deliver 내가 구원한다. 이사야라는 이름의 뜻이 내가 구원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드디어 우리가 눈치를 받아요.
그러니까 이사야서라는 말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는 말씀을 받으면 구원받는다. 36-39장까지는 8개의 신탁이 나오는데 그중에 셋째와 넷째를 오늘 보는데 8개 다 히스기아에 관한 신탁이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눈치를 채야 돼. 예 그 말은 뭐예요? 10:34
이사야의 말씀을 받은 히스기야를 본받아라는 게 이 신탁의 핵심이에요. 왜요 선지자의 가슴은 무척 안타깝고 아프기 때문입니다. 701년에 구원을 받았지만, 므낫세 이후에 계속 앗수르의 속국으로 앗수르에 짓밟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만 요시아 때 그때 잠깐 멸망 전에 반짝이 나타났죠.
그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듣고 있는 포로지의 사람들은 587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나서 계속 약탈당하는 이 황폐하고 폐허가 된 땅 이웃 족속들이 수시로 침입해요. 이방 족족들이 쳐들어와요. 11:28
도적 떼가 들어와야 유목민들이 들어와 그 살아남으려고 황폐해진 땅에 농사를 조금 지으면 추수 때만 되면 벌떼같이 달려들어.
멸망 이러니까 뭐 간단한 것 같습니까? 무척 비참한 것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버리신 것인가? 결국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선지자는 아니라는 거죠. 어떻게 이 저주와 멸망을 넘어서서 약속받는가 하는 얘기를 선지자는 하고 싶어서 39장까지 701년 얘기를 하고 40장부터는 이제 약속을 받은 회복을 노래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귀절이 43장 18절 19절이에요. 사43: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널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전 일이 뭐요? 종교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며 옛날 일이 성전에서 제사드리던 것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반드시 내가 광야의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 광야와 사막은 광야 사막을 얘기하는 게 아니죠. 광야와 사막은 종교 생활하다 멸망한 민족.
저는 지난 목회 교회 이름을 이 귀절에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개척을 하고 사역을 시작할 때 저는 종교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선포하고 훈련시키면 종교가 고쳐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엄청난 착각이었습니다. 종교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깨져야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깨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13:18
다시 말해서 종교는 거듭나야 하지. 결코 고쳐지지 않아요. 개척해서 7년째 되는 해 이것을 알았습니다. 되지 않는다. 그런데 차마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3년을 지나갔어요. 갈등과 기도 속에서 10년 되었을 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제 아내에게 얘기했습니다.
나 이 사역 계속할 수 없다고 사임해야 되겠다. 우리 와이프가 뭐 난리가 났죠. 이민교회 개척 장난이 아닙니다. 첫 3~4년에서 5년째까지 무척 고생합니다. 저만 고생이 아니오. 아내도 고생하죠. 아이들 그때 우리가 아파트를 사는데 아파트에 살 수가 없었어요. 14:12
공장 고층 거기서 사는데 아이들이 스쿨버스에서 내리는데 우리 집 앞에서 내리지 않고 한 블락 지나가서 내려요. 거기서 내리는 게 챙피해서. 그게 아이들 5살 7살 이럴 때 얘깁니다.
그러니 제 아내가 자기는 한 번이면 충분하지 다시 개척 못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할 말이 없었죠. 뭐 한 2년 계속 기도만 했습니다. 12년째 됐을 때 제 아내가 허락했어요.
당신 사임하려면 해라. 그런데 찬성해서 허락하는 건 아니고 내가 끝까지 막았다가는 나 때문에 못 했다. 소리 들을까? 봐 예 허락하니까 하라. 그러더라. 이거 당회 얘기했더니, 당회가 월급 올려준다고 그러더라고요. 15:09
야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더라고요. 그 소리가 어떻게 돈 더 달라는 소리로 들려요. 2년 6개월 만에 허락을 받고 14년 6개월 후에 사임하고 이 하나임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막 종교의 물결이 생기더라고요. 팬데믹 직전에 우리 교회 방문 카드를 다 정리했습니다. 그때 정리한 방문 카드가 거의 1500개 되었습니다. 한 가정당 하나예요. 1500개면 3천 명에서 4천 명이에요. 교회를 개척하니까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새 교우 환영 테이블에 30명 40명이 앉을 때가 있었어. 그런데 왜요 자리 잡으러 오는 거예요. 자리 잡으러 오는 거야. 16:08
저 교회 될 것 같으니까 거기 자리 잡으려고 이 환영 테이블에서 같이 앉아 대화를 나누는 채 갔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오는데 새까매져요. 구도자를 찾을 수가 없어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겁니까? 하나님 계시면 저는 하나님 좀 만나보고 싶습니다. 왜 제 일생은 이런 것입니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정말 천명에 하나 만나요. 이 교회 와서 자리 잡고 인정받고 그럼 다인 것 같아요. 그분들 잘못 아니죠. 기독교가 해 온 것이 그거니까. 17:07
33절에서 34절은 세 번째 신탁이에요. 이건 표본신탁이에요. 공식 그대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로 시작하여서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로 마감합니다.
사37:3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수르 왕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그가 이성에 이르지 못하며 화살 하나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흉벽을 쌓는다는 것은 성벽이 높으면 공격을 못 하니까 그 성에 바짝 붙여서 또 하나의 성벽을 쌓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부터 공격해 들어오고 공격하는 거죠.
34 또 그가 오던 길로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5번 뭐가 강조됐죠? 이 성에 접근조차 못 한다. 접근되지 않는다. 이유가 뭐예요?
하나님의 임재가 계시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현상과 싸우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임재가 있으면 막 적이 쳐들어오면 막 싸우다가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모든 현상은 소멸돼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수백만 번 읽었는데도 그거를 몰라요. 18만 5천 명이 어떻게 하룻밤에 죽냐? 지금도 그런 얘기하고 있어. 소멸되는 거예요.
우리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벗고 하나님 영광 앞에 나와 하나님이 영광이시니까 우리가 소멸되어 버리는 거죠. 하나님의 형상이 씨앗만 남습니다. 한알 그대로 하나님 임자 앞에 소멸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야다한 하나님과 하나 된 생명뿐입니다. 19:02
그 이야기를 오늘 우리 나눈 것이에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누구예요? 인제 보니까 1장에서 35장까지가 비로소 이제 보이는 거예요. 이사야는 임재를 만난 자 얘기예요.
하나님이 이사야를 쓰시는 이유는 이 사회가 무슨 영민해서 영성이 남달리 탁월해서 아 인격이 훌륭해. 그런 게 전혀 아니에요. 이사야서에 의하면은 그는 임재를 만난 사람이에요.
사6:5그래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
인간은 임재 앞에 나갈 수 없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랬는데 왜 이사야는 소멸되지 않았죠. 사6:7 예 스랍이 나타나서 제단 숯불을 입에 대며 악을 제하고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20:01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누군가를 보내야 되는데 그러니까 사6:8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내신 거예요.
보내신 사명이 뭐요? 사6: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20:22
이 무슨 말이에요. 유다 종교인들이 하는 말이죠. 그죠 종교를 안 버린 채 구원을 원해요. 종교인은 종교로 구원해 주세요. 그래요. 제가 예배드리잖아요. 제가 하나님 섬기잖아요. 예 제가 헌신도 하잖아요. 그러니 나를 구원해 주세요. 이게 종교예요. 종교는 주권 이양이 안 된 상태예요. 20:53
내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기고 다 아는데 주권은 나에게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하는 거예요. 왜 내가 알아서 해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모르는 거예요.
이 부르심은 신약에 와서 아주 선명해집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나 자기 동역자를 소개할 때 항상 하나님께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다른 소개가 없어요.
그리고 성도들에 대해서도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고린도에서도 읽어보세요. 마찬가지예요. 고린도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가면 17장이 이 인류 최후의 전투예요. 최후의 전투인데 그 전투에서 주와 함께하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이긴다. 이렇게 나와요. 종교는 내가 예배를 드리든 섬기든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로 부르셨다는 걸 몰라요.
그래서 내가 예배드려 주는 줄 알아요. 내가 하나님께 무슨 봉사해 드리는 줄 알아요. 연보해 드리는 줄 알아요. 이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에요. 복이 회복되기를 원하시면 모든 것을 부르심으로 받으십시오.
내가 나인 것부터 내가 나인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모르면 이 불안하고 갈등이 많아집니다. 왜 내가 나를 만들어야 되니까. 22:49
나는 만들 수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이 모습으로 이러한 자리에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피워 내시는지 바라보고 소망하고 믿고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아름다움이 가득히 피어나는 데 불안함 때문에 내가 뭘 만들어 내려고 하는 자는 점점 ugly 해집니다.
이 세상에 잘난 사람 성공한 사람 많은데 아름다운 사람은 드물어요. 그렇게 성공했는데도 ugly-추해요. 그 모습이 아름답지 않아요. 그 이유가 만들기 때문이에요. 가족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아버집니까 내가 어머니입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부르심이에요.
1820 델리브레드 순도 마찬가지예요. 그게 내가 부르심 받은 거예요. 거기 순원들이 내 마음에 딱 맞어. 그럼 하나님이 버리신 거라니까요? 그 사람에게는 섭리 입체 역사가 결코 나타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종교를 붙들고는 종교로 구원해 주세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막으신 것처럼 이 종교를 깨시는 거예요. 끝까지 종교 얘기를 고집하면은 이것을 예수님이 다시 설명해 주시죠. 24:37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예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는 데서 다시 풀어줘요. 마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지금 이건 누구에게 하는 얘기예요. 유대 종교인들에게 하는 얘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종교가 깨어져야 돼요. 그런데 종교가 안 깨어지기 위해서 말씀을 안 듣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다음 말씀을 잘 보세요.
마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으므로 복이 있도다.
이게 누구예요? 지금 예수님 말씀 앞에 있는 제자들이죠.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 말씀 앞에 있는 우리들이에요. 너희는 복이 있어요. 왜
17 많은 선지자 의인이 내가 보는 것을 보기 원했고 듣는 것을 듣기 원했지만,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25:29
마13:18 그런즉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으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바로 이 10절에 종교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이걸 막 갖다 붙여서 얼마나 휘황찬란한지. 원 세상에 아니 이 비유 가지고 책 1권이 나오기도 했더라고요.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뭐예요? 말씀을 받아 품으면 100배 60배 30배 된다는 거예요.
길가 밭은, 소리로 듣는 사람이에요. 이게 지금 들어요. 다 들려요. 그것으로 끝나요? 지나가는 소리처럼 돌밭은 뭐예요? 설교로 듣는 사람 설교로 듣는 사람. 그래서 그 시의 기쁨을 느껴요. 여러분 지금 기쁘시죠. 이렇게 편안한 안식을 취하시니까 예 기쁨이 있어요.
그다음에 가시 덤불밭은 말씀을 듣는 사람이에요. 말씀을 듣는데 자기가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능력으로 세상 염려와 돈 욕심과 싸우는 데 이길 수가 없죠. 내 義(의)로 돈 욕심 절대 못 이깁니다. 26:31
좋은 땅은 뭐예요? 그냥 품는 땅이에요. 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이게 나한테 이해가 돼서가 아니에요. 내가 보니까 정말 그럴듯해서가 아니고 내가 결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마리아, 주의 계집종 의원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 길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내게 이루어지리라.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자가 되었죠. 임재를 누린다는 것은 말씀을 품는 것이죠. 27:26
임재 누림 | 말씀 품음 | not 맘대로, 알아서 |
에고는 불가능 | 성령 훼방 | 종교생활 |
하나님이 뭐로 임재해요. 말씀으로 임재해요. 예 말씀을 품는다는 말은 마음대로 내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죠. 에고는 임재가 불가능해요. 이런 뭐가 성령 훼방 죄예요. 이걸 막 종교로 생각해서 희한 억적지근하게들 풀어대는 사람도 많은데 성령 훼방 죄는 종교 생활이에요. 종교 생활은 내 마음대로 하잖아요. 내가 알아서 결정하잖아요. 내가 주권이니 하나님의 주권은 받을 수가 없지요. 그게 성령 해방이에요.
그러므로, 임재와 성령의 반대는 종교예요. 종교는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절대 부르심이 없습니다. 내가 예배해 드리는 거죠. 내가 섬겨주는 거죠. 내가 한 것에서 어떻게 내가 초월 되겠습니까? 28:25
네 번째 신탁 사37:35절 대저 내가 나를 위한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시온의 보존을 얘기합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임재성이라는 걸 표현할 때 시온이란 말을 쓰는 거예요. 보존은 보호하고 구원이에요. 이게 인제 나단 신탁이요.
삼하7:16 가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시는데 “네 집과 네 나라를 내가 영원하게 한다. 이렇게 해요. 그런데 네 집과 네 나라를 영원하게 하는데 그 이유는 뭐냐 그러면 너와 나는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 집과 네 나라가 영원하다는 거예요. 29:08
예 그러므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시온을 보존해 주시는 것은 그 시간과 공간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자녀, 자녀가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영원하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온의 약속은 제국 시대에 생겨난 거예요. 남북이 분열되면서 분열 왕국이 되던 때가 제국 시대가 열릴 때예요. 앗수르 제국 시대가 그때로부터 300년 이게 인제 성경으로 치면 12세대예요. 성경은 25년을 1세대로 치거든요. 그러니까 제국 시대가 일어났는데 그 유다 예루살렘, 이 쪼끄마한 게 어떻게 견디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 시온은 영원한 시온이다. 그러니까 그 예루살렘 산꼭대기에 있는 쪼끄마한 걸 영원히 지켜주신다는 이런 얘기로 종교는 이해하는 거예요. 30:07
지금 너와 아버지와 자녀 관계가 되었고 너와 함께하는 이 언약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하는 건데 이걸 제일 잘 풀어주는 게 스테반이에요. 스테반. 그래서 스테반이 그러잖아요.
행7: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이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야곱의 집이에요. 야곱이 누구예요? 12 아들의 아버지죠 12지파의 조상이 그러니까 야곱의 집은 12지파가 한 가족이 되는 거예요. 다윗의 생애는 이것을 위해서 보낸 것이에요. 그런데 솔로몬이 그 종교로 싹 바꿔서
행7:47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다. 이 집은 빌딩이에요. 30:49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 선지자가 말한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의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 일을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도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항상 자기가 이해해서 자기식으로 딱 해석한 다음에 자기에 맞게 그냥 자기에게 유리하게 사는 거예요. 종교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31:31
히스기야는 임재 고백과 삶을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했고 그 임재를 살았죠. 예 성을 보수하고 전쟁 준비를 하고 백성을 부스럽히고 바로 그 히스기야가 그 시대에 다윗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에요.
다시 말해서 행13:36 보면 ”다윗은 그 시대의 하나님의 뜻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혔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32:06
히스기야가 히스기야 시대 다윗의 언약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는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과 부모 자식의 관계 언약 속에 들어있는 그러한 자리고 하나님 이 백성은 그 언약의 백성이오니 하나님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면서 이 성을 지켜주시옵소서 하는 다윗의 언약을 그 시대에 누렸다. 그런 얘기예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잖아요. for my saka 포마이즈 설먼 데이비스 세이크 그러니까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언약을 받는 사람은 이학권이가 그 다윗의 언약을 받으면 나를 위하여 이학권이를 위하여 이렇게 되는 거죠. 우리 성도님들이 다윗의 언약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3:04
행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다윗과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언약을 했어요. 내 마음에 맞는 내 종이에요. 내 종이란 말은 이게 부르심이에요. 종은 어느 날 자기가 딱 나갔어. 내 종 해드릴게 이건 종이 아니오. 예 종은 주인이 부를 때 종이에요. 종놈은 불러주셔야 돼.
이 하나님이 불러주셨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종인 걸 모르고 자기가 주인 노릇 해. 내가 알아서 하나님 섬겨줘 내가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겨줘 큰 모욕이에요. 인격에게는 내가 알아서 잘해주는 거 큰 모욕이에요. 그것을 아셔야 돼요. 그런데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요. 34:03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뭐예요? 마20:25-27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러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어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중에 종이 돼야 하니라.
이거 윤리 가르치는 거 아니에요. 이게 생명이에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천거하신 것은 생명을 천거하신 거예요.
그래서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그랬어요. 자 생명은, 생명은 무한해요. 생명은 죽음은 생명이 아니죠. 그게 끝나버린 거죠.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밖에 없어요. 35:03
하나님의 생명이 없으면 이 세계에 이 우주에 어떤 생명도 있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든 안 믿든 생명은 무한하고 영원해요. 그런데 이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든지 나누고 희생하죠.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이니까.
더 나누고 싶죠. 말이 이상해요? 옛날 어머니들은 그랬어요. 요즘 어머니는 안 그런 사람도 많지만, 자식을 그리는데 세상에 사로잡히니까 자식은 안 보이고 출세하고 성공만 보여. 그럼 자식은 그 엄마의 자랑과 기쁨이 얼마나 되고 싶은지를 아세요. 아버지의 자랑과 보람이 되고 싶은 줄 얼마나 아세요. 36:03
성공하지 않아도 돼 그러면서 내 아들이 어떻게 성공 안 할 수가 있어. 크고 보니까 엄청난 압력을 줬더라고요. 안 보이니까. 뭐가 생명이 생명은 무한하고 영원해요. 나누고 희생하면 커지는 거예요. 성공하고 잘 돼야 커지지 않아요. 나누고 희생하면 커져요.
그런데 이 세상 마귀에서 와서 그걸 거꾸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것은 생명은 이렇게 나누고 희생할 때 더 커지고 영광스러워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예요. 36:54
요한복음은 성경 66권 중에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 책이에요. 아마 쓰신 것은 AD 2세기에서 3세기일 거예요. 요한이 말한 걸 요한의 제자들이 그 당시는 구전 문화예요. 선생님이 말한 건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다시 반복해요.
그러다가 이게 인제 기록 문화가 점점 이제 일반화가 되니까. 요한복음을 기록했을 때는 아마 2세기 3세기 사이였을 텐데 가장 늦게 쓰신 요한복음 그러니까 그때 이미 사도 공동체는 종교화가 되고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떡과 잔을 빼버렸어요. 예수님 안의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뭐예요? 떡과 잔이야. 왜요 그 떡과 잔을 왜 해요.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찢는 나의 몸이다. 37:48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 너희를 위하여 나누고 희생하는 내 생명이다. 그랬잖아. 그런데 그 떡과 잔을 성찬 뭐가 그렇게 거룩해서 성찬 거기에서 부르는 노래는 성가 하나도 거룩한 것 없으면서 말만 성자를 다 붙여서 성학권으로 바꿀 거야. 나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떡과 잔을 빼버리고 그곳에 뭐를 넣었어요. 세족식을 넣었어요. 발을 씻는 예수님을 넣었어요. 38:33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히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히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생명을 모르니까 현상밖에 모르니까 이기적이고 조금도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고 나누는 것이 손해인 줄 알고 그러한 교회를 향해서 너희의 본성이 너희의 본질이 무엇이냐? 이것을 요한복음은 다시 한번 강조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은 뭘로 끝나요? 종의 노래로 끝나요? 4개의 종의 노래가 나오잖아요. 이 종의 노래는 뭐예요? 4가지가 다 그거예요. 생명은 무한 영원하기 때문에 이 생명을 기쁨으로 나누어서 이 죽어가는 백성을 살리는 생명을 얘기하는 거죠.
이걸 어디서 얘기하고 있어요. 포로지에서 선지자는 다윗의 언약을 선포하면서 말하는 게 뭐야? 너희가 멸망한 것은 임재가 없기 때문이야. 임재가 없기 때문에 임재가 없으니까. 본질은 다 상실된 거짓 현상뿐이죠. 39:34
사람 앞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온 관심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전혀 없어요. 임재가 있을 때 그 당연한 결과를 우리는 36절에서 38절로 만나게 됩니다.
36-38 당연한 결말
21-36-38 like( )
시작할 때 말씀드렸지만 이 부분은 36장 1절에서 산혜립의 침입 결과에 대한 결말일 수도 있고 또 작게 보면 37장에 들어와서 21절에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결말도 되는 것이죠. 이렇게 괄호처럼
36절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18만 5천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40:29
놀랍지 않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18만 오천이 포위하고 있는데, 그 끝난 것을 무슨 뭐 간결한 일상에 그냥 담담한 얘기 하나 적는 거 같아요. 마치 일기에 오늘은 날씨가 맑았다. 그렇잖아요. 18만 5천을 물리쳤으면 그 용맹 영웅스러움, 빛남이 얼마나 찬란하겠어요.
성격은 간단해요. 여호와의 사자가 쳤으므로 시체뿐이더라. 임재 앞에는요 그냥 소멸되는 것이에요. 그게 무슨 싸움이 있고 갈등이 있고 그런 게 없죠. 그래서 이 여호와의 사자와 산해립의 사자는 이사야 선지자가 극적으로 대조를 시켜줘요. 한쪽은 소리뿐이에요. 41:25
사자: 37:9-14 산혜립의 사자와 대조.
창19:1-24, 출14:19 왕상19:5-74
삿6:11-16 삼하24:16 시35:5-7, 78:49
한쪽은 소리뿐 한쪽은 임하면 하나님의 뜻을 현현시켜요. 그래서 성경의 모든 하나님의 사자는 대개 천사로 불러요. 천사는 단어예요.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실제 상황으로 현현시키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악수로 진중해서예요. 성에 접근할 수가 없었어요. 새네르 기록이 남아있어요. 대영지구 박물관에 가면 육각통이 지금 그대로 남아있어요.
예루살렘을 공격한 총군대가 20만 150명이었어요. 그런데 이 후방에 떨어져 있던 본부 지원 병참 부대인 15,150명은 안 죽었어요.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있었던 18만 5천 명이 죽었어요. 왜 임재니까요? 18만 5천 명을 쳐서 시체뿐이었다. 묘사가 없어요. 42:19
출애굽기에 열 번째 재앙에서 하나님의 신이 운행 역사니까 말씀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처음 난 것과 장자는 모두가 죽듯이 그냥 호흡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죠. 이 임재 이 임재가 느껴져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못 믿으면서 종교 생활로 자꾸 믿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합니다. 그럴 이유가 일도 없어요. 종교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된 부르심이에요. 43:13
왜요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으니까 하나님 제일 원하시는 게 뭐겠어요. 하나님 내 아빠라며요. 나 아빠인 거 좀 느껴봅시다. 느껴 보고 싶어요. 나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나 이렇게 믿고 싶지 않아요. 아빠 구하고 찾고 두드리시면 3번 반복한 것은 그것이 중심의 진실일 때 그것이 정말 간절할 때 하나님의 임재는 거짓말처럼 가슴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37:37 이에 아수르의 산혜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저는 소설 한번 써봤으면 좋겠다. 인제 그런 소원도 있는데요. 만약 소설을 쓰면 이 귀절도 제가 써보고 싶은 귀절 중의 하나예요. 44:13
701년에 후퇴해서 681년에 산혜립이 죽었으니까 20년을 니느웨로 돌아가서 20년을 거주했어요. 그 당시 제국의 왕은, 왕은 군사를 훈련해서 방방곡곡을 점령하는 게 왕이에요.
그런데 20년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이게 절대를 만난 자의 무력이에요. 아니 절대를 직접 만났으면 죽었겠지. 절대를 만난 이야기를 산혜립은 받았죠. 그 순간에 온몸과 삶의 힘이 빠져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동안 제국의 도모가 너무 허무한 거예요. 그 자기 아버지 죽자, 아버지 죽으니까, 반란이 일어나니까 막 군대 훈련시키고 모아서, 막 그거 진압시키러 다녔는데 이 산혜립은 참 불행한 사람이에요. 45:12
제일 첫 번째 반란 진압하는 데가 어디예요. 바벨론이잖아요. 무로닥바라닥 가장 센 반란지를 왕이 되자마자 진압해야 되는 거예요. 다행히 어떻게 진압은 했어요.
그런데 진이 다 빠져버렸지. 그래서 가난으로 치고 내려왔을 때는 라기스 립나 예루살렘 이런 성은 뭐 그냥 쓸고 지나가는 성인데 거기와 전쟁을 하고 있었잖아요. 유다에 무너진 46개 성읍은 앗수르가 무너뜨린 게 아니에요. 이미 그때 상태로 다 무너져 있었어요. 이사야서 앞에 나와있어요. 제가 생각할 때 산혜립은 참 불쌍한 왕이에요. 46:04
왕이 된 지 3년 막 군대 만들어 가지고 남 죽이고 자기 편 죽이고 하는 건 멸망과 파괴뿐이고 그러다가 절대를 만났을 때 잠이 번쩍 깼죠. 도대체 내가 무슨 짓하고 있는 거지 더 이상 다른 나라 쳐들어가서 사람 죽이는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그 20년을 왕이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 20년 동안 뭐 했을까? 저는 짐작 가는 게 있어요. 다음 줄을 보세요. 사37:38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
제일 첫 번째 자기 수호신이 자기 무덤 되는 거예요. 이 현상에 살면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가 전부면 내 수호신은 돈이죠. 돈이 지켜주고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그러나 동시에 돈이 무덤 돼요. 돈이 내 인생을 완전히 허무하게 만드는 것도 보셔야 돼요. 47:14
여기에서 에살핫돈이 이제 막내였어요. 산혜립이 첫째, 둘째, 빼고 이 셋째, 아들에게 세자 책봉을 한 거예요.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죠. 그러니까 자기 신에서 신묘에서 경배하고 있는데,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인 거예요. 죽였는데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실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왜냐 그러면 역사를 보면 도망갔다고 되어 있지만 셋째, 아들 에살핫돈이 여기 있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도망가면 잡진 않겠다. 그래서 사실 도망간 거예요. 그다음 왕 이게 앗스루의 마지막 왕이에요. 48:01
앗수르 바네팔이 이 두 삼촌을 찾아서, 할아버지의 복수를 해줘요. 그러니까 제 생각에 20년 동안에 손자하고 재미있게 논 것 같아.
삶이 자식하고 재밌게 놀고 재밌게 사세요. 뭐 안 된다고 뭐 상관있어? 꼭 뭐가 돼야 돼요. 그런 거 없어요. 부모 자식 간에 재미있게 사세요. 또 손자손녀 생기면 재밌고 즐겁게 사세요. 재미있고 즐겁게 사는 사람이 봄도 열리고 마음도 열리고 꿈도 열려요. 이거 강박적으로 뭐 만들어야 된다. 돼야 된다. 가져야 된다.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보여요. 솔직히 말해 돈밖에 안 보여. 48:58
Ⅱ어떻게 살 것인가? 사랑하는 성도님들 복은 일상에서 임재를 누리는 것이에요. 하나님 임재 안에서 누가 욕심을 부려요. 하나님 임재 안에서 must가 어디에 있어요. 꼭 이래야 돼. 저래야 돼가 어디 있어요. 일상에서 임재를 누리는 것이에요.
그런데 임재 누리는 것은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랬죠. 예 임재는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지. 그럼 이것이 어디서 시작돼요. 말씀을 가슴에 받음으로 시작돼요. 머리로 이해하는 사람은 100년이 지나도 안 되는 일이에요.
창조 | 마귀-혼돈(선악) | 내 일상=내것 |
혼돈 | 예수 그리스도 기적 은혜 | 신비와 초월 |
창조가 우리한테는 혼돈이잖아요. 하나님의 창조 첫째, 무한하시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다 이해 안 되지 그다음에 하나님이 창조는 현재 미완성이잖아요. 49:53
그러니까 우리한테는 혼돈으로 보인다고. 그러니까 마귀가 고걸 속여서 이 혼돈이 얼마나 불안한 거예요. 그러니까 너 중심으로 선악과를 만들어서 네가 중심이 되어서 네가 컨트롤 해야 돼 그것 때문에 종교 생활하잖아요. 내가 컨트롤 안 하면 불안해져서 하나님의 선하심 그걸 믿으려면 임재가 느껴져야 믿어지지 안 그러면 내 컨트롤이에요.
평생 종신토록 땀 흘려 수고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거두는 거예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뭐를 보여주신 거예요. 우리의 일상이 기적이에요. 오늘 우리 이렇게 예배하고 있잖아요. 응 기적이에요. 기적 잘하면 오늘 1시간 전에 끝날 수 있어 기적이 되니까. 50:54
웃지도 않고 신경질만 부리는 거야. 우리가 지금 이 예배 한번 드리기 위해서 이 지구의 생태계가 다 있기 때문에 지금 예배드릴 수 있어요.
지구의 대기권이 없어졌다 우리 예배 못 드리죠. 태양계가 균형을 이루려면 은하계가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돼요. 이 은하계가 그런 균형 속에서 우주 전체가 조화 속에 있어야 돼요. 한순간 순간이 기적의 삶이에요.
뭐 만들고 어쩌고 하기 전에 얼마나 감사한가 얼마나 좋은가?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바람이 불고 나아가면 숲이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현상을 넘어선 실제 신비와 초월을 만나기 시작하고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생명이 피어나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누리는 것이에요. 51:51
일상 | 만들기 | 통제 | 돈이 절대 | 조화 |
누리기 | 품음 | 임재 사모 | 생화 |
인조화가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해도 생화와 비교가 안 된다. 에고의 성취는 아무리 훌륭해도 존재에서 피어나는 생명 열매와 비교할 수는 없다. 존재는 우리가 개발하거나 향상시킬 수 없다. 임재 안에서 피어날 뿐이다. 임재를 잃어버린 시대의 헛된 겉 성취만 어지럽다.
성도님들 일용할 양식으로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 삶이에요. 그러나 일용할 양식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아요.
일용할 양식 | 행복 | 하면 | 행복 누리는 삶 |
안 하면 | never 행복 욕심의 종 |
일용할 양식 플러스 뭐가 돼야 돼. 뭐가 있어야 돼. 이래야 돼. 저래야 돼. 조건이 이래야 돼. 상황이 이렇게 돼야 돼. 그 사람은 그런 상황되면 또 다른 상황이 필요하니까 절대로 행복하지 않아요. 끝없는 욕심의 종이 될 뿐이죠.
자 하나님의 임재는 모든 곳에 계시잖아요. 무소부재하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의 임재를 못 누리죠. 간단합니다.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관심과 돈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사모할 수가 없어요. 돈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는 것은 정말로 비극이고 어리석은 짓이에요. 돈에 속지 마십시오. 돈은 귀중한 것이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 생애를 바칠 만큼 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아요.
53:41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염보를 못 하시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으로 삶은 아름다워지지 않으며 복되어지지 않으며 가족조차도 욕심의 가족은 결코 하나 되지 않습니다.
임재 복이 회복되는 영혼과 삶과 가정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십시요^^
손동숙
감사합니다 ~목사님 석준기
아멘~^^ 목사님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셔요. 늘 주님 안에서 강건하셔요. 샬롬 샬롬 ~^^
문정수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