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33차 마애종 슬로우답사 날] 입니다.
지난 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답사에 이어서, 이번 달에는 절두산 성지 순례입니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서서 서강대역에서 서강 하늘다리를 건너 영춘화(迎春花)를 보고 모임 장소인 합정역으로 갑니다.
서강 하늘다리를 건너면 '봄을 맞이하는 꽃' 영춘화(迎春花)가 활짝 피었습니다.
꽃잎이 여섯 갈래로 갈리졌지만 꽃잎 전체가 하나로 붙어 있는 통꽃입니다.
영춘화의 뒷모습을 보면 꽃받침 윗쪽으로 긴 통처럼 이어지다가 꽃잎이 펼쳐지는 통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꽃잎이 하얗게 변하는 것은 할 일을 다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지난달에 걸었던 경의선 숲길 마포 레드 로드를 걸어서 합정역으로 갑니다.
홍대 페스티벌 스트리트를 지나서 오늘 만남 장소인 합정역 7번 출구로 갑니다.
약속 시간인 10시에 10명의 안양문화유산해설사회 선생님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오늘 답사길을 안내할 박석환 회장님이 대략적인 코스 소개를 합니다.
지하철 2호선 건설을 위해 노선이 외국인선교사묘역을 지나려고 하자 기독교에서 반대를 하면서 백주년 기념교회를 짓고 성역화 작업을 해서 지하철 노선이 합정역에서 구부러지게 되었습니다.
절두산순교성지 안내도 앞에서 순례길 코스를 설명합니다.
지난 달에 답사한 외국인선교사묘역은 개신교의 성지이고,
오늘 답사할 절두산 성지는 병인박해(1866) 후 카톨릭을 선교하던 외국인 신부 6명을 포함한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참수한 곳입니다.
그리하여 본래의 산 이름인 잠두봉(蠶頭峰)에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고,
병인박해 100주년인 1966년 이곳에 순교기념관과 순교기념성당을 건립하였고,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절두산 성지를 방문하여 기도를 하여서 전국의 신자들이 찾는 유명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여러 선생님들이 준비해온 간식을 나누어 주고 박금일 선생님이 준비한 호박죽도 한그릇 먹고 출발합니다.
지하철 2호선 옆에 조성된 계단을 따라 절두산 성지로 올라갑니다.
절두산 성지 안내도
팔마를 든 예수상
죽음으로써 믿음을 증언한 순교자들이 하느님 나락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팔마(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상.
팔마가지는 순교자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가지(聖枝, 성지)로 표현합니다.
비술나무(느릅나무과) 아래에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자르던 칼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상(像)
1910년 북마케도니어에서 태어나 1928년 로마 카톨릭 수녀가 된 데레사 수녀는 인도로 귀화하여 캘커타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사후 두 번의 기적심사를 통해 성인(聖人) 칭호를 받았습니다.
형구돌(刑具돌)
병인박해 때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고안된 잔혹한 형구
聖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둔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교황은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성인 시성식(諡聖式)을 시행하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문장.
가장 윗쪽의 3층으로 된 모자는 교황의 3대 권한인 (1)통치권(바티칸시국 통치권자), (2교도권(카톨릭 종정), (3)성품권(성직자 임명권)을 의미하고,
그 아래 두 개의 열쇠는 하늘의 열쇠와 지상의 열쇠를 의미합니다.
지상의 열쇠는 예수님이 1대 베드로 교황에게 부여한 지상 대리권을 의미합니다.
성 요한 남종삼 요한 像.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박석환 회장님의 해설에 심취하여 수십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박순집 베드로 묘지.
박순집의 부친인 훈련도감의 군인이었던 박 바오로는 기해박해(1839) 때에 새남터에서 순교된 앵베르, 모방, 샤스탕 등 신부의 시신을 찾아 노고산에 암매장하였다가, 안양 삼성산으로 이장하였고, 그 사실을 박순집에게 전하고 기억하도록 하였고, 박순집은 1901년 삼성산에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발굴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박 바오로는 병오박해(1846) 때 성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그 시신을 찾아와 암매장을 하였다가 안성 미리내 성당으로 이장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17세 였던 박순집도 새남터로 끌려가는 김대건 신부를 보았습니다.
박순집 또한 군인이 되어 병인박해(1866) 때 베르네 주교 등이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그들의 시신을 서울역 근처 외고개에 암매장 하였습니다.
그의 집안 15명이 모두 순교 하였으나 박순집 혼자만 살아남아 , 시복 수속이 시작되자 프랑스 신부들의 행적을 증언하였습니다.
1890년에 제물포로 이주하여 전교에 힘쓰다가 1911년 82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聖 남종삼 요한 像
유명조선국 현록대부 은언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휘 인 지묘
상산군부인 진천송씨 부우.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正祖)의 이복 동생으로 노론 세력의 견제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신유박해(1801) 때 그의 정실 상산군부인 송씨와 함께 사사(賜死) 되었습니다.
그후 그의 손자인 원범(元範)이 순조와 순원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철종(哲宗)으로 즉위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철종은 은언군과 그 일가들에 대한 일성록 등의 기록을 세초하였고 복권시켜서 이 비석을 세웠습니다.
절두산 십자가의 길, 14처를 해설하는 박석환 회장님
십자가의 길.
다른 곳은 14처로 되어있으나 이곳 십자가의 길은 제15처 예수님이 부활하시다 가 추가되었습니다.
김대건(金大建) 신부 像.
聖 김대건 안드레이 신부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의 수호자이며 103위 성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강변 쪽에도 성 김대건 신부의 청동 좌상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 동상의 손은 수많은 신자들이 만지고 기도를 드려서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오성 바위(五聖石)
다섯 성인이 잠깐 쉬어갔다고 전해지는 바위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5명의 신부들이 처형 장소인 갈매못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이 넓적한 바위에 앉아서 신앙을 다짐했다고 한다.
'복자 바위' 라고 불리다가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 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습니다.
성모동굴
성모 마리아가 발현(發顯)한 루루드 성모동굴(프)을 표현한 것입니다.
<천주교 성지(聖地)가 되는 조건>
1. 주임 신부가 있는 성당이 있을 것
2. 예수님 일생을 나타낸 14처(處)가 있을것
3. 성모동굴이 있을것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이름없는 순교자를 표현한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목없는 순교자 상
김대건 신부상 앞에서 기념 촬영
한국순교성인시성기념 교육관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여습니다.
점심 식사 후 비술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잠시 동안 휴식 후 꾸르실료 회관 앞으로 이동하여서 답사를 이어갑니다.
사도 바오로 (바울)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를 잡아 가두는 등 교회를 박해를 하는데 앞장섰다.
그리스도교 신자를 잡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바오로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회심하여 그때부터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다.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칼'을 의미하는 심벌 마크로 바오로가 순교할 때 사용되었던 칼을 지물(持物)로 잡고 있습니다.
강변의 성모 像
제44차 세계 성체대회(1989년 10월, 여의도 광장) 장엄 미사시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착좌하시어 미사 집전하였던 의자
(진품은 끄르실료 회관 내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지하철 2호선 철교 아래 계단을 따라 한강변으로 내려갑니다.
한강변에서 절두산 성지를 올려다 보면 가파른 절벽 위에 성지가 있습니다.
병인박해 당시 잠두봉 위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자르면 머리는 절벽 아래 한강으로 떨어지고 흐르는 피가 한강을 물들였습니다.
성당 건물의 십자가 뒤 둥근 원은 신자들이 옥에서 목에 찼던 칼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강 둔치를 걷다보면 한강양안분류하수관로 맨홀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다양한 종류의 맨홀을 수집하고 탁본까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맨홀 뚜껑의 서울시 마크에 발자욱을 모아봅니다.
당인리 발전소가 있는 곳은 흥선대원군의 별서(別墅)가 있었던 자리입니다.
당인리(唐人里)의 지명은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였던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밤섬이 보이는 곳에서 람사르 습지에 등재된 밤섬에 대한 해설을 합니다.
1968년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밤섬은 당시 김현옥 시장이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윤중로 제방공사에 필요한 돌과 흙을 마련하기 위하여 폭파하여 사라졌다가 퇴적물이 쌓이면서 다시 생겨났습니다.
상류쪽의 윗밤섬은 영등포구에 속하고, 아랫밤섬은 마포구에 속해있습니다.
밤섬과 한강의 모습
서강 나루터를 지나갑니다.
한강둔치는 지금 한국지역난방공사에서 열수송관 공사가 한창 진행중입니다.
난지 생명길 밤 섬
한강은 서울 사람들의 일상과 추억이 담긴 장소로 많은 영화를 촬영한 곳이기도 합니다.
현석 나들목에서 간식을 먹으면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상류쪽으로 올라갑니다.
토정 나들목을 지나갑니다.
난지 생명길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1517~1578)
유통의 중심, 마포와 마포 황포 돗배 조형물
황포돗배
마포대교를 지나갑니다.
이야기 정거장, 구 용산 수위관측소
일제는 한강에 세 군데의 수위관측소를 설치하였습니다.
팔당댐 아래에 하나, 이곳 용산에 하나, 행주산성 아래 창릉천 근처에 하나를 설치하였는데 현재 용산 관측소 한 곳만 남아있습니다.
원효대교를 지나갑니다.
여의도 63빌딩 앞으로 원효대교가 지나가고 한강 수면에 윤슬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높은 나무 위에 새 둥지가 보입니다.
저 새는 늘 한강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겠지요.
한강철교까지 올라오니 마지막 답사지인 새남터 순교성지로 가는 안내문이 보입니다.
계단길을 올라가면 한강철교가 조망됩니다.
한강 철교 위로 KTX가 건너옵니다.
진동으로 인하여 서행으로 지나갑니다.
한강 북쪽을 따라 이어지는 자유로에 차량들이 질주합니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성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기해박해(1839, 헌종 5)는 우의정 이지연이 순원왕후의 재가를 받은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으로 시작한 조선시대 4대 박해 중 두 번째 박해입니다.
이때 희생된 순교자 중에서 70위가 103위 한국순교 성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주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던 안동김씨 세력에 대응하여 새롭게 등장한 우의정 이지연이 풍양조씨와 손을 잡고 안동김씨의 세력을 빼앗으려고 천주교 박해를 계획하였습니다.
집권층의 천주교에 대한 무지로 묘당회의에서 좌포장 남헌교의 사교금압주장을 이지연이 지지하여 순원왕후 김대비의 허락을 받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그 뒤 사제를 잃고 이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6년간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의하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사나 장사 또는 병사한 신자수가 6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곳 새남터에서는 신부급 지도자들 11명이 순교하였고, 일반 신도들은 당고개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 상
순교자들의 모후
지하에 마련된 새남터 성지 기념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새남터 14인 순교자 상.
° 주문모 야고보(1801 순교), 군문 효수
° 앵베르(1839 순교), 군문 효수
° 모방(1839 순교), 군문 효수
° 샤스탕(1839 순교), 군문 효수
° 김대건(1846 피체), 군문 효수
듬의 순교자 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의 창설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
신유박해는 1801년(순조 1) 1월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禁敎令)으로 시작된 박해이다.
신유박해로 인해 조선에 첫 선교사제로 입국한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신부와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순교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이제 조선교화는 박해가 없어도 망할 수 밖에 없다"라고 한탄했을 만큼 초대교회가 받은 타격이 컸다.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
기해박해는 1839년(헌종 5) 3월에 시작되어 1년여간 지속된 박해이다.
기해박해로 인해 순교하였던 70위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안에 포함되어 있다.
30년 동안 이어온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와 새로 등장한 풍양조씨의 정쟁(政爭)과 더불어 지방 관리들의 탐욕에 의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제2대 조선교구장 엥베르 부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순교하였다.
달레의 한국천주교사에서는 참수된 신자가 70명이 넘는다고 기록되어 있고, 기해일기(己亥日記)에는 참수된 순교자는 54명이고, 옥사나 장사한 순교자는 6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병오박해(丙午迫害, 1846)
병오박해는 1846년(헌종 12) 6월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피체를 계기로 시작된 박해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봄 새로운 해로 개척을 위해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해로도(海路圖)를 전하려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6월 5일 체포되었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외국 선박의 출몰과 국경 침범을 문제 삼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 박해로 인해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 가롤로는 군문효수로 순교하였고, 임치백, 남경문, 한이영,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김철염이 매를 맞아 죽는 장사로 순교하였다고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었다.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페레올 주교에 의해 조사되어 1846년 11월 3일자 사한인 병오일기에 기록 되었으며, 페레올 주교가 기록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은 시복 및 시성에 소중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 3)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된 가장 참혹하고 희생이 많았던 박해이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천주교 신자 약 2만 3천 명 중 약 1만 명이 순교할 정도로 참혹하였다.
병인박해로 인해 순교한 24위가 한국 순교 성인 103위에 포함되어 있다.
참혹한 병인박해로 인해 순교자를 현양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로써 한국천주교는 더욱 깊은 영성을 지니면서 현대의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시험 답안
최양업 신부의 친필 서한
성인 유해실
최양업 신부에 대한 설명을 하는 회장님
최양업(崔良業, 1821~1861)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사제로 세례명은 토마스 아명은 정구, 본관은 공주입니다.
새남터 성지를 나와서 경부선 철도 위 육교를 건너 용산역으로 향합니다.
용산역으로 가는 길에 땡땡거리를 지납니다.
고풍스러운 모습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습니다.
땡땡거리의 차단기가 내려오고 KTX가 지나가고 차단기가 해제됩니다.
KTX 선로와 일반 철도가 지나갑니다.
용산역에 도착하여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였습니다.
오늘 오전 10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천주교 성지 순례를 하면서 해설하신 회장님과 참여하신 선생님들 모두 수고하셨늡니다.
4월에는 신촌역에서 만나 사도세자의 사친(私親) 영빈이씨의 수경원과 봉원사에서 만납시다.
첫댓글 박석환 회장님의
해설을 듣고있으면 추위도 잊어버리고
그시대로 돌아가 타임슬립하는
과거와 현재로 오가며 환상의 여행을 합니다.
종교는 천주교가 아니지만
천주교의 역사와 박해사건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특히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순교지
새남터성지를 돌아보면서
한창필 꽃다운 젊은 나이에 얼마나 많은 고문을 당했을까~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이 같을 뿐이요, 때리고 죽여도 역시 이 같을 뿐이니 빨리 때려 죽여 달라.”는 25세의 청년의 문구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25살의 둘째아들이 오늘 생일인데
생일상 차리기전
둘째아들과 같은 나이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에게 먼저 하얀밥 한그릇
올려봅니다.
밥먹는 아들과 어제 답사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항상 감사함을 잊지말자고....
친구들과 한번 가보고 싶다고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아이~~
가방메고 학교가는 아이의 모습보며
왠지 가슴이 뭉클합니다.
박석환 회장님
강호인 선생님 고생하심 덕분에
귀와 눈이 호강하며 든든하고 정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정성가득 호박죽과
가방가득 간식 채워주신 선생님들과
행복한 시간 ~~
벌써 4월이 기다려집니다.
의미있는 커피타임시간도
행복했습니다^^
회장님과 함께하는 답사는 언제나 행복합니다.
천주교 용어들이 낮설어서 알아듣기가 어려울텐데도 너무 쉽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다음달에 또 만나요~
강호인해설사님 절두산-새남터 순교성지길 답사기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답사에 참여하시고 새벽3시까지 사진과 내용정리하시고 마애종에 올려주시니 그 정성과 일가견에 감사드립니다.
순교성지길에 참여해주신 해설사님들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40일 광야체험처럼 순례길은 힘들고 어려운 여정입니다.
다음달 안산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천주교 성지 순례길을 걸으면서 미묘한 감정이 교차합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크나큰 위협이었으니 박해는 당연하였겠지요.
날씨는 추웠지만 한강변을 걸으면서 답사길이 너무 좋았습니다.
좋은 답사길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사 진행해주시는 박석환 회장님. 답사기올려주시는 강호인샘덕분에 답사못간 아쉬움을 잊어가며 읽어내려갔네요. 어쩜 설명도 사진도~ 담에 혼자 찾아갈수 있을정도입니다.
함께 8시간을 답사하신 샘들의 열정에 또한 박수를 보냅니다.
열정샘들 모두 존경합니다.
다음답사때는 함께할수있길 기대해봅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되세요~
다음달 답사길은 아마도 꽃길을 걷지 않을까 싶습니다.
4월 답사때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