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회 이름이 녹색 친구들이다. 녹색연합 시민 모임인 녹색친구들 산악회다. 고문으로 계시는 김두석 선생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애들 아빠가 녹색 친구들 산악회 대장으로 환경 탐사대에 나갔다가 산이 되었다. 무즈타크아타 빙산을 탐사하다가 눈보라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같이간 일행도 손과 발이 다 동상이 걸리고 귀가 얼고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였다.
하지만 일행들은 대장인 남편이 죽엄으로 돌아오자 병원에 입원하는것 조차 면목이 없고 죄책감에 사흘 밤 낮을 장례식장을 지켜주었다.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지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였다.
삶과 죽음이 선 하나를 넘느냐 마느냐 하는 간절한 순간에 남편은 결국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실 난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늘 다리가 부러지거나 한게 한 두번이 아니였기에 어디 다쳐서 오더라도 올 거라고 믿었다. 살악산 적벽에서 한 후배의 자일이 풀리면서 남편이 추락을 했다.
살악산 비선대 앞에 우뚝 솟은 붉은색 바위 가 적벽이라는것도 남편과 연애할때 알았다. 하리가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했어도 남편은 신념이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곧 완쾌되어 또 인수봉을 내 집 드나들 듯이 올랐다.
적벽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장군봉을 오르는 건 남편 한테는 일도 아니였다. 후배들 등반을 가르치는 암벽 선수였다. 그런 남편이 우리 세 여자를 남겨 두고 영영 산이 되어 버렸다.
김두석 고문님은 지금도 우리 한테는 죄인 아닌 죄인이라시며 내 앞에 고개를 들지 못 하셨다. 두 애들이 졸지에 아빠를 잃자 녹친에서는 등록금도 지원해 주셨다. 우리 애들이 고등학교 다닐때는 등록금이 있었다. 급식비도 내야 점심을 먹었다.
정말이지 살아갈 날이 캄캄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니 산 사람은 산다는 어른들 말이 맞았다. 큰 딸이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 졸업식 장에도 녹색 친구들은 꽃다발을 들고 면목이 없이 날 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 아이들은 녹친 회원들을 삼촌이라 불렀다. 녹친에서는 수시로 내 두 아이들을 챙겨주었다. 겨울이면 스키장으로 데리고 가 주고 동해 바닷가에서 펄쩍펄쩍 뛰는 고등어 낚시도 해서 먹이고 대게 철이면 포항에 가서 대게 를 쪄서 먹이기도 했다. 늘 항상 아빠 없는 빈 자리를 채워주었다. 난 그래도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애들 아빠 기일은 지금껏 단 한번도 빼 먹은 적이 없다. 난 근무가 들어 돈 벌 욕심에 간혹 빼먹기도 했다. 김두석 고문님은 내 두 아이들을 데리고 꼭 기일에 참여해 애들 아빠 무덤에 소주를 부어주시곤 했다.
두 딸이 결혼을 할때도 다 오셔서 자리를 메워 주셨다. 주말에 등산을 갈때면 내 두 애들과 함께 했다. 이젠 사위들까지 대동하고 등산을 한다. 지 지난 주엔 도봉산을 다녀왔고 관악산도 아차산도 서울 근교 산행을 갈때면 내 애들 과 함께 했다.
년말이면 한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해를 잘 붙잡으라며 꼭 송년회를 열었다. 경북대 교수로 계시는 정 교수님 역시 남편 과 함께 환경 탐사길에 올랐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내 앞에 고개를 떨구셨다.
둘째 결혼식에는 대학 학회 연구로 인해 참석을 못 하셔서 2주 전에 일부러 상경 하셨다. 종로 한 식당에서 김두석 고문님과 내 큰딸 이 함께 동석했다. 축의금으로 거금을 놓고 가셨다. 큰 아이땐 대구에서 올라 오셨다.
넘치는 사랑을 내 두 딸들에게 쏟으셨다. 녹친은 내 아이들의 아빠나 다름없이 끝까지 지켜주었다. 김두석 고문님은 제주도가 고향이시라 제주도 고등어를 보내 주시고 녹친 삼촌들은 추석이면 밥 맛이 좋은 고양 가와지 쌀을 택배로 보내 주셨다.
녹색 연합 녹색 친구들 등산학교 교장이신 김두석 고문님께 이제서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참으로 무심했던것 같다. 피곤 하다고 힘들다고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살았다.
탐사 발대식때 입었던 남편의 티셔츠는 아직도 옷장 서랍에 있다. 내가 가끔 동네 산에 오를때 입곤 한다. 북한산 중턱에 위치한 무당골에는 산악인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애들 아빠 이름도 올라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