慈愛로운 얼굴
미국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허드슨강 입구의 리버티섬(Liberty lsland)에 세워진 미국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의 정식 명칭은 '세계를
비추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지만 통상 '자유의 여신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銅)으로 만든 여신상의 무게는 225t이며 횃불까지의 높이는 46m, 받침대 높이는 47.5m이지만 지면(地面)에서 횃불까지의 높이는 93.5m에 이르고 집게손가락 하나가 2.44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발밑에는 노예해방을 뜻하는 부서진 족쇄가 놓여 있고 치켜든 오른손에는 '세계를 비추는 자유의 빛'을 상징하는 횃불을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진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1886년에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선물로 1875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884년에 완성해 1885년 배를 통해 미국으로 이송(350개의 조각으로 각각 나누어 214개의 나무상자에 포장) 되어 1886년 미국에서 築造(축조)한 받침대 위 현재의 위치에 세위 졌습니다.
'자유의 여신상' 얼굴 모델(model)의 선정選定(선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프랑스는 自國(자국)의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에게 자유의 여신상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시작할 때 걱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여신상의 얼굴을 누구를 모델로 삼아 조각할지가 문제였습니다.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아름다운 여배우, 유명 정치가, 엄청난 재벌 등 사회적으로 굉장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모습이 추천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르톨디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생각하고 수호하는 자애로운 여신의 얼굴을 조각하고 싶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얼굴은 무엇인가?' 결국 바르톨디는 많은 고심 끝에 자신을 낳아 기르고 사랑해주신 어머니를 모델로 삼기로 했습니다. 바르톨디에게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얼굴은 바로 어머니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제작 과정에서 연로하신 어머니가 오래도록 같은 포즈를 취하는 데 힘들어하자 어머니를 닮은 여자를 모델로 해서 작업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모든 작업이 끝난 후 브르톨디는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부모님들은 세월과 상황에 상관없이 내면에 빚어지는 자애로움이 항상 존재합니다.
우리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참다우며, 참다운 것은 아름답습니다. 眞.善.美(진.선.미.)를 모두를 갖춘 어머니의 母像(모상)을 미국의 自由(자유)의 女神像(여신상)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정말 보고 싶습니다." 살아생전에 잘해 드렸어야 했는데...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에이지즘
에이지즘(ageism)은 늙은 사람을 더럽고 둔하고 어리석게 느껴 혐오하는 현상이다. 노인은 무식하고, 고지식하고, 불친절하고 이기적이고, 비생산적이고, 의존적이고, 보수적이고, 슬프다는 젊은 층들의 노인에 대한 선입관을 말한다.
고위직 법관을 지낸 선배 한 분이 계셨다. 법정에서 재판장인 그 분의 모습을 볼 때마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카리스마가 있는 분이었다. 부드럽고 관대하지만 그 너머에는 총명과 지혜가 넘쳐흘렀었다.
소박한 그 분은 노년이 되어서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옷을 입고 다녔다. 어느 날, 그 분을 만났더니 웃으면서 이런 얘기를 하셨다.
“동네 과일 가게 앞에 가서 과일을 내려다보고 있었어. 그랬더니 잠시 후에 가게 주인이 나보고 ‘아저씨 박스 없으니까 다음에 오세요’ 라고 하는 거야.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린가 했지.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 가게에서 버리는 박스를 얻으려고 온 불쌍한 노인으로 생각했던 거야.”
늙으면 그렇게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배는 원래 부잣집 아들로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늙으면 누구나 초라하게 보여지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나서 점심 먹은 게 체했는지 속이 불편했다. 길가에 약국이 보였다. 유리문에는 최고 명문대학의 배지가 코팅 되어 있었는데 '나는 다른 약사와 달리 일등품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약국 안에는 가운을 입지 않은 약사로 보이는 40대 초반의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눈길이 부리부리한 게 불만이 가득찬 느낌이었다.
“활명수 한 병만 주세요.”
내가 공손하게 말했다. 늙을수록 젊은 사람들을 대할 때 조심하면서 예의를 차리자는 마음이었다. 그 약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활명수 한 병을 꺼내 던지듯 앞에 내놓았다. 내가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줄 때였다.
“이 안에서는 약 못 먹어요. 나가세요!!”
안내나 설명을 하는 게 아니라 내쫓듯 하는 태도같이 느껴졌다. 구걸하러 온 거지라도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약국 유리문을 밀고 나와 거리에서 활명수를 마셨다. 그런데 당장 그 병을 버릴 데가 없어 다시 약국 문을 들어가 그 남자에게 물었다.
“병은 약국 안 쓰레기통에 버려도 됩니까?”
“그러세요.”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속에서 슬며서 불쾌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싸구려 약 한 병을 팔더라도 고객에게 그렇게 불친절하면 안될 것 같았다. <늙어가는 법>이라는 책을 쓴 한 여성 노인의 글이 떠올랐다.
늙어서는 젊은 사람이 불손하다고 화를 내거나 항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굼뜨고 둔하고 추해진 늙음을 받아 들여야지, 항의하는 것 자체가 그 자신이 모자라는 걸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젊은 사람이 불쾌한 태도를 취하거나 말을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모자라는 인격이기 때문에 구태여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참고 약국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도 뭔가 찜찜해서 그냥 떠날 수가 없어 다시 약국으로 들어가 물었다.
“정말 죄송한데요.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까요?”
“뭔데요?”
“이 약국에서 약을 샀는데 왜 안에서 약을 먹으면 안 되고 길거리에서 먹어야 합니까?”
“약을 먹으려면 마스크를 내려야 하잖아요? 그러면 병균이 쏟아지잖아요...”
그에게 늙은 나는 세균 덩어리로 보이는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의문이 있었다. 젊고 예쁜 여자가 오거나 비싼 약을 사가는 젊은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불친절하고 싫은 표정을 지었을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에이지즘(ageism: 노인 차별)'이라는 말이 있다. 늙은 사람을 더럽고 둔하고 어리석게 느껴 혐오하는 현상이다. 카페나 음식점에 가서 보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짓는 주위의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나는 젊어 봤다. 그리고 세월의 강을 흘러 늙음의 산언저리에 와 있다. 나는 노인을 혐오하는 일부 젊은이들의 단순하고 짧은 생각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의 젊음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유교의 경로사상을 감히 바라지는 못하지만 에이지즘(ageism)까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도 곧 늙을 거니까.
< 글 / 엄상익 변호사 >
*** 케네디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1941년 케네디는 하버드 법과 대학원 재학 중 육군 장교 후보생 시험, 해군장교 후보생 시험에서 잇따라 낙방을 하였다. 그는 억만장자 아버지에게 애절한 편지를 썼고, 아버지는 정계와 군(軍)의 인맥을 움직여 아들을 해군에 집어넣었다. 모두가 2차 대전에 참전하는데 이 국민 대열(隊列)에서 낙오하게 되면 장래 나라의 지도자는커녕 어떤 공직에도 갈 수 없는 것이 당시 미국의 도덕률이었다.
이렇게 해군에 들어가 훗날 남태평양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그는 평생 진통제와 각성제의 힘으로 살아나갔다. 트루먼은 안경이 없으면 장님과 마찬가지인 지독한 근시였다. 그런 그가 1차 세계대전에 포병 대위로 프랑스에서 싸웠다. 시력검사표를 달달 외워서 신체검사를 통과한 덕분이다. 케네디와 트루먼의 이야기는 어수룩하게 보이는 미국이 사실은 무서운 나라라는 것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1916년 6월 영국군은 프랑스 북부 솜강(江) 지역 전투에 25개 사단을 투입했다. 돌격 명령과 함께 영국 젊은 병사들은 40㎏ 가까운 군장(軍裝)을 짊어지고 독일군 기관총 총구(銃口)를 향해 온몸을 드러낸 채 진흙탕을 달려 나갔다. 소대와 분대의 앞장을 선 것은 귀족 또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젊은 소위들이었다.
전투 첫날 7만 여명의 영국군이 전사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50년대 차례로 영국 총리를 지낸 애트리·이든·맥밀런이 이런 지옥과 같은 전투의 생존자들이었다.
세 사람은 전쟁이 끝나고 대학에 복학(復學)했으나 함께 전쟁에 나갔던 학우(學友)의 3분의 1은 끝내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50세 이하 영국 귀족의 20%가 1차 대전에서 전사했다. 귀족과 명문대학 출신의 전사자 비율은 노동자 농민보다 높았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아들 제임스 루스벨트는 2차 대전 때 해병대 제 2 기습대대에서 복무 중 마킨 제도의 일본군 기지를 기습하는 매우 위험한 작전을 앞두고 이 작전에서 제외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유인즉 만약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거나 하면 일본군은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전쟁에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 니미츠 해군 제독까지 나서 설득했지만 실패하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이를 만류토록 건의 하였다. 대통령은 해군 참모총장 킹 제독에게 ''내 아들은 제 2 기습대대의 장교다. 내 아들이 위험한 특공작전에 가지 않는다면 누가 그 작전에 가겠는가?''라고 마킨 제독에게 그를 특공작전에 참가시킬 것을 지시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네 아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2차 대전에 참전 하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어찌 보면 자신들과는 크게 상관없었을 한국전쟁에서 모두 139명의 미군 장성들의 자제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그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한국전쟁 중 미군의 사망자는 3만 3,686명, 포로 및 실종 8,176명, 부상자는 9만 2,134명 이었다.
그들 중에는 52년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 육군 원수의 아들인 아이젠하워 소령과 제 3대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미 8군 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대장의 외아들 밴플리트 2세는 야간폭격기 조종사로 작전 수행 중 북한군의 대공포화에 의해 산화되었다. 워커장군은 아들과 함께 한국전에 참전했고 스스로는 목숨을 잃었다.
24 사단장 딘 소장은 부상당한 부하에게 물을 떠다 주려고 언덕 밑을 내려갔다가 적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86kg의 체중이 2개월 만에 58kg가 되었다 한다.
고풍어린 하버드 대학 교내 예배당 벽에는 한국전에 목숨을 바친 하바드 출신 병사들의 이름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하버드 대학 졸업생중 17명이 한국전선에서 전사 하였다. 미국의 한 도시에서 한사람이 나올까 말까 하는 ‘미국의 희망들을 한국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내보냈다. 이것이 미국이 가지고 있는 지식층과 가진자들의 솔선수범을 통한 리더쉽이자 도덕룰이며 ~ 노블레스 오브리제의 실천이 국가위기때에 발휘되는 기본적인 뿌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