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봄의 소식(消息)
신동엽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毒)하다커니
눈이 휘둥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이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
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 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레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
몸단장(丹裝)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22.불바다
신동엽
줄줄이 살뼈는 흘러내려 강을 이루고
산과 바다는 마음밭을 이랑 이뤄 들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젓는 하늘 속으로
신주알 향기 푸른 치마폭 찬란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울창한 원생림(原生林)
전쟁이 불지르고 간 황토배기 벌판에
한가닥 바람길이 열려 가느른 꽃뱀처럼
노래가 기어오고 있었다.
오월의 숲속과 뻐꾸기 목메인 보리꺼럭 전설밭으로
황진이 마당 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땅 놋거울 속에
아침 저녁 비쳐들었을 아름다운 신라 가인(佳人)들.
지금도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늘로 가는 길가에
고개마다 나날이 봇짐 도시로 쏟아져 간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아우성을 들어 보아라.
해가 가고 새봄이 와도 허기진 평야
나무뿌리 와 닿은 조상들의 주막 가에
줄줄이 태고적 투가리들이 쏟아져 오고
바다 밑에서 다시 용트림하여 휘올라
어제 우리들의 이랑밭에 들꽃 피운 망울들은
일제히 돌창을 세워 하늘을 반란(反亂)한다.
23.빛나는 눈동자
신동엽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魂)을
갈가리 찢어
꽃풀무 치어 오고
파도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으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봄(視)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孤孤)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주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하는
수천 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안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 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 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의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속서 스며나오듯한
말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 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 버린
오, 인간정신 미(美)의
지고(至高)한 빛.
24.사랑
신동엽
진하게
진하게
모란처럼 소북함 가득 담고 오너라
참새처럼 깡똥한, 날매
가슴차게 안겨 오너라
경(憬)이여
장미처럼 매선 향기
가시로 쏘아라
화염(華艶)한 눈웃음은
다음 장(章)으로
25.사랑의 고정
신동엽
사랑의 고정(苦情)을 이해하기가
그리 쉽답니까?
말슴 마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도
겉으로 웃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이해되는 거랍니다.
천지신명이 대자연에 밝으니
나는 아무델 가나
알머리처럼 따가워라.
너의 방에선 너의 보금자리 남새가 난다.
자신(自信)이 흔들리는 지라
자꾸
역확인(逆確認)을 얻으려고
<자신 있느니라고>
강조해 보는 것이리라.
석(石)을 두고의 순수한 상모(想慕)가 아니다.
어느 누구의 것과 비교하기 위한
빌미로써의 석(石).
또는 그것에 반동적으로 대립하기 위한
방패로써의 석(石).
26.산에 언덕에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27.살덩이
신동엽
우리들의 이야기는
걸레
살아있는 것은
마음뿐이다.
마음은
누더기
살아있는 것은
뼈뿐이다.
오, 비본질적인 것들의
괴로움이여
뼈는
겉치레
살아 있는 것은
바람과
산뿐이다.
그렇게 많은
비단을 감았지만
너를 움직이는 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고깃덩어리 알몸
물건 없는 산
소나무 곁을
혼자서 너는 걸어가고 있고야
오, 작별한 냄새여
살덩이가
지금 저 산을
내려가고 있고야
28.삼월
신동엽
오늘은 바람이 부는데
하늘을 넘어가는 바람
더러움 역겨움 건들이고
내게로 불어만 오는데
음악실 문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양주 쓰레기통 속
구두통 멘 채
콜탈칠이 걸어온다
배는 고파서 연인(戀人) 없는 봄
문 닫은 사무실 앞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면
그래도 콧등은 간지러운
코리아
제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갯벌로 갈거나, 가서
복쟁이 알이나
주워먹어 볼거나
바람은 부는데
꽃피던 역사(歷史)의 살은
흘러갔는데
폐촌(廢村)을 남기고 기름을
빨아가는 고층(高層)은 높아만 가는데
말없는 내 형제(兄弟)들은
광화문(光化門) 창밑,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公園) 벤취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바다를 넘어
오만은 점점 거칠어만 오는데
그 밑구멍에서 쏟아지는
찌꺼기로 코리아는 더러워만 가는데
나만이 아닌데
쭉지 잽히고
아사(餓死)의 깊은 대사관(大使館) 앞
걸어가는 행렬(行列)은
나만이 아닌데
이젠
안심하고 디딜 한 평의 땅도
없는데
지붕마다
전략(戰略)은 번식해만 가는데
버스 정류장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늘메미 울음 같은
아사녀의 봄은
말없이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동학(東學)이여, 동학(東學)이여
금강(錦江)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 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
소백(小白)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야산(野山)으로 갈거나
그날이 오기 전, 가서
꽃창(槍)이나 깎아보며 살거나
29.새로 열리는 땅
신동엽
하루 해
너의 손목 싸쥐면
고드름은 운하 못 미쳐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건지다 보면
밑둥 긴 폭포처럼
역사는 철 철 흘러가 버린다.
피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영넘으면
정전지구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 거니노라면
초연 걷힌 밭 두덕 가
새벽 열려라.
30.새해 새 아침은
신동엽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하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 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와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짓는다.
첫댓글 잘 읽고 감상 잘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갑니다...^^*...
봄의 소식이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정도를 벗어나서 비틀거리더라도, 몰래 봄이 나의 뜰에 찾아오듯이 -- 그렇게 소리없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문학도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가 나도 몰래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