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20 문화의 날, 간의 날, 세계 골다공증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4 - 2014 ITU 전권회의 개회....한국, 가입 62년만에 개최국으로 2014 ITU 전권회의 개회식이 20일 11시 부산 벡스코에서 개최됐다. 서정근기자 antilaw@dt.co.kr /디지털타임스 2014-10-20 11:44 http://www.dt.co.kr/contents.html?article_no=2014102002109931749001
- Libya, 1 Dinar (Banknote)
2011 - 리비아의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Qaddafi, Muammar al-) 피살 카다피 [Qaddafi, Muammar al-, 1942.6.7~2011.10.20] "카다피, 머리에 총 맞아서 사망"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가 자신의 고향 시르테에서 교전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생포된 뒤 숨졌다. 리비아 과도 정부인 NTC 대변인 압델 하페즈 고가는 20일(현지 시각) 트리폴리에서 “카다피가 혁명군에 체포된 후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고가는 “이는 역사적 순간이요, 폭정과 독재의 종말”이라며 “카다피는 파멸했다”고 말했다. 그의 시신은 인근 미스라타로 옮겨졌다. 앞서 과도 정부는 카다피군과 수 주 동안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이날 카다피의 거점인 시르테를 장악했다고 발표했었다. 과도 정부의 카다피 사망 공식 확인 2시간여 전부터 알자지라·CNN 등 주요 외신들은 현지 고위 관리 등을 인용, "카다피가 교전 중 중상을 입고 붙잡혔으며, 간신히 살아있다"는 등의 소식을 숨 가쁘게 전달했었다. 알자지라는 “카다피가 생포됐으며, 두 다리를 심하게 다쳐 구급차로 후송 중”이라는 NTC 관계자의 발언을 먼저 전했었다. 이어 카다피가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는 보도가 나왔고, 곧이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카다피의 시신을 촬영한 사진<아래 사진>도 유포됐으며, NTC 관계자는 이 사진이 카다피임을 확인했다. 잠시 뒤에는 미스라타로 옮겨진 그의 시신을 촬영한 동영상도 공개됐다. 직접 카다피를 잡았다고 주장하는 NTC 측의 한 군인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중상을 입은 카다피가 붙잡히는 순간 "쏘지 마!"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카다피는 카키색 복장에 머리에 터번을 두른 모습으로 구덩이에 혼자 숨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과도 정부는 카다피의 5남 무타심과 아부 바크르 유니스 전 국방장관도 교전 과정에서 숨졌다고 덧붙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카다피 사망 보도에 대해 "상황을 체크하고 있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국무부 역시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카다피는 42년간의 집권 끝에 지난 8월 권좌에서 축출됐으며,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카다피를 살인·성폭행 등 각종 반(反)인륜범죄 혐의로 수배한 상태다. BBC는 “카다피 사망이 확실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서는 보도를 접한 시민들이 자동차와 배의 경적을 울리고 총기를 허공에 발포하면서 카다피의 사망을 축하하고 있다”고 전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20/2011102002470.html?Dep0=twitter
2010 - 국산 ‘줄기세포 분화법’ 세계표준으로 김동욱 연세대 교수팀 개발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배아줄기세포의 신경세포 분화 기술’이 국제 표준 기술로 채택됐다. 21세기 프런티어 세포응용연구사업단 단장인 김동욱(사진) 연세대 의대 교수 연구팀은 20일 “인간의 여러 장기나 기관으로 분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배아줄기세포나 역분화 줄기세포가 효과적으로 신경세포로 전환하도록 하는 방법을 개발했다”며 “지난달 국제기구에서 이 방법이 ‘줄기세포에서 신경세포를 분화해내는 표준 기술’(프로토콜)로 채택됐다”고 밝혔다. 인간의 수정란을 배양해 만드는 배아줄기세포나 성숙세포를 거꾸로 되돌려 만드는 역분화 줄기세포는 어떤 장기나 기관으로도 분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러나 세포주에 따라 신경세포나 근육세포, 췌장세포 등 특정 세포로 잘 분화하려는 경향성을 갖고 있어 과학자들은 이들 세포를 마음대로 조절해가며 원하는 종류의 세포를 얻을 수 있는 효율적인 분화방법을 찾아왔다. 김 교수 연구팀은 세포에 존재하는 특정 신호전달체계를 차단하면 줄기세포가 신경세포로 잘 분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과학저널 <스템셀 리뷰·리포트> 등에 발표해왔다. 이 연구 방법이 지난달 14~17일 영국에서 열린 국제줄기세포포럼(ISCF)에서 신경계통 분야 줄기세포 분화의 공식 기술(프로토콜) 표준안으로 채택됐다. 김동욱 교수는 “우리나라의 줄기세포 수립 기술은 세계적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으나 분화 기술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돼왔다”며 “이번 성과를 통해 이 분야에서의 국제 경쟁력도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근영 선임기자 kylee@hani.co.kr /한겨레 2010-10-20 오후 07:45:34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skill/444732.html
`새 천년의 번영과 안보협력`을 주제로 한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의장국인 우리나라를 비롯해 26개국의 정상 또는 정상급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2000년 10월 20일 서울 COEX 컨벤션센터에서 개막됐다. 이틀 일정으로 열린 이번 회의에서 정상들은 두 대륙간 정치-안보-경제-정보통신 분야의 협력 강화방안을 모색했다. 회의는 `한반도 평화에 관한 서울선언`을 비롯, `2000 아시아-유럽 협력체제(AECF 2000)` `의장 성명서` 등 3개 문건을 채택했다. 아셈 기간동안 사회, 시민단체, 학생과 `아셈 민간포럼` 참가자 1만5000여명은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번 회의는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국제적 제어장치`를 한층 더 강화했다는 점과 유라시아 초고속 통신망 사업을 비롯해 모두 23개 사업을 채택하는 등 구체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한편,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내실이 미흡해 각국 정상들간의 `고급 사료장`이라는 지적과 북한의 인권과 대량 살상무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는 점 등이 문제점으로 제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이번 회의가 한국정부 수립 후 최초의 다자간 정상회의였고, 최대 규모의 외교행사였다는 점에서 한국 외교역량이 한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조선
2000 - 대한간학회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지정 부산은 한국 간연구 요람 - 장기려 박사 신기원 열어 출처 국제신문 /이혜영 2003-10-14 /메드시티 https://www.medcity.com/zboard/zboard.php?id=kanjang&page=3&sn1=&divpage= 1&category=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830
- 한국풀브라이트프로그램 50주년 (2000.10.20. 발행)
2000 - 풀브라이트프로그램 한국 시행 50주년 [폴브라이트 장학금 50주년 학술대회]"인재 양성 밑거름" 유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주는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의 한국 시행 50년을 맞아 20일 오후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기념식과 함께 ‘세계평화와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주제로 기념학술대회가 열렸다.
[오늘의 IT소사]10월 20일 정부는 1999년 초저가PC로 PC 보급을 확대한다는 이른바 ‘인터넷PC 보급정책’을 마련했다. 1999년 8월 인터넷PC 보급사업 제안서를 제출받아 9월 12개 PC제조업체와 4개 인터넷서비스업체를 인터넷PC 보급업체로 선정했다. 이어 같은해 10월 20일부터 인터넷PC 판매가 시작됐다. 인터넷PC는 출시 초기 한때 가정용 PC시장의 30%까지 점유하며 성공하는 듯 했지만 대기업의 가격 인하 전략으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판매가 격감, 2002년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전자신문 2003-10-20 10:30 /네이버 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30&aid=0000047082
정보통신 20세기사-초고속인터넷 확산 PC 보급 확산 체신부는 정보사회를 조기에 정착시키기 위해 국민의 정보활용 능력을 높이고 싼 비용으로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1989년 개인용 PC 보급 정책을 수립했다. 1989년 체신부는 2000년까지 컴퓨터 단말기 천만 대를 보급한다는 세부 실천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학교에 교육용 컴퓨터 약 15만 대를 공급하고 교육용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공급했다. 국내 PC 보급정책의 백미는 1999년 인터넷PC 보급이었다. 정부에서는 1999년 8월 인터넷PC 보급사업 제안서를 개최하여 제안서를 제출한 50여 개 PC제조업체 및 4개 인터넷서비스업체 가운데서 제품 사양 및 가격조건을 만족시키는 12개 PC제조업체와 4개 인터넷서비스업체를 선정했다. 그리고 정보화의 척도가 국민 개개인의 정보활용 능력에 기초한다는 인식 아래 1999년 10월 20일부터 이 사업을 시작했다. 인터넷PC 보급사업은 일반국민에 대한 정보단말기 보급이라는 본래의 목적과 인터넷 이용 촉진 및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유통 문제 해결 등 최종 사용자의 정보 이용기반 구축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정부는 인터넷PC를 효과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분리하여 하드웨어 가격을 낮추도록 했으며, 인터넷PC 구매자에게는 인터넷 이용료를 싸게 매김으로써 단말기 공급과 인터넷 활용을 동시에 촉진시켰다. 이와 더불어 우체국을 지역 소프트웨어 유통센터로 활용하여 고객맞춤형 온라인·오프라인 소프트웨어 판매를 수행함으로써 일반국민에게는 싼 가격으로 PC·소프트웨어 및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게 했다. http://20c.itfind.or.kr/20/5_1_7_3.html
-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1998 - 일본 대중문화 1차 개방 발표 일본 영화가 국내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은 광복 이후 53년 만이었다. 1차 개방에서 영화와 관련된 내용은 세계 4대 영화제(칸느ㆍ베니스ㆍ베를린ㆍ아카데미)에서 수상한 적이 있는 일본영화 및 한일 공동제작영화 상영 허용, 일본 배우의 한국영화 출연 허용 등이었다. 이에따라 1998년에는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하나비`가 최초로 상영됐으며, 이어 칸느 그랑프리를 수상한 `카케무샤`가 개봉됐다. 1999년에는 역시 칸느 그랑프리 수상작인 `우나기`가 개봉되었으나 이렇다 할 흥행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999년 9월 2차 개방으로 개방 폭이 확대되면서 개봉된 `러브레터`는 전국에서 120만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비디오 개방은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에 한했으며 만화개방은 일본어로 된 만화책과 만화잡지였다. /조선
[어제의 오늘]1998년 일본 대중문화 1차 개방 발표 ㆍ우려속 빗장 풀어보니 ‘찻잔속 태풍’ 김대중 정부는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일본문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로 하고, 98년 10월20일 1차 개방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50년간 다양한 방식으로 국내에 스며든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해 더이상 ‘빗장’을 걸어봐야 실익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김대중 정부 들어 조성된 한·일 간의 화해협력 무드의 영향도 있었다. 신낙균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일본문화를 즉시 개방부문과 즉시 개방 이후 부문으로 나눠 우선 영화 및 비디오, 만화부문을 개방한다”고 밝혔다. 서의동기자 phil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10-19 17:53:5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191753595
[AIDS 관련 사건] 1985-12-00 해외근로자가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인됨. 1992-04-16 수혈로 에이즈에 감염된 이모씨(21) 첫 비관자살. 이씨는 내장혈관파열증을 앓아 86년 12월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받을 때 에이즈 감염자가 헌혈한 피를 수혈받았던 것인데 이씨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끝내 목을 매 숨졌다. 1992-07-00 60대부부 에이즈 자살극 사건. 91년 6월 심장판막증 수술을 받은 정모씨(61)는 수혈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돼 부인 이모씨(57)와 함께 동맥을 끊고 세숫대야에서 담근채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쳤다. 이 과정에서 부인이 감염됐으며 에이즈에 대한 정신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7월에 자살. 남편도 93년 3월 입원치료중이던 병원에서 투신자살했다. 1994-07-00 87년에 에이즈 보균자로 판명받은 정모씨(32·여)가 그후에도 7년여간 광주와 군산 등지에서 술집접대부로 일해온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1994-09-10 에이즈 감염됐다고 오인한 사람들이 잇달아 자살. 유흥업소에서 접대부로 일했던 조모씨(44·여)는 『몸무게가 갑자기 줄어드는 등 에이즈 증세가 나타났다』며 에이즈 공포증에 시달리다 목을 매 자살. 1994-10-20 회사원 최모씨(30) 역시 몸에 열이나고 식은땀이 나자 에이즈에 걸린 것으로 오인, 고민 끝에 목을 맸다. 1995-03-15 고교생 에이즈 감염자 4명 발견. 이중 1명은 동성연애로, 3명은 이성접촉으로 감염. 1995-04-13 에이즈로 오인, 딸을 살해한 뒤 동반자살 기도. 전직 중학교 체육교사 화모씨(36)가 자신과 딸의 몸에 생긴 반점을 에이즈 증세로 오인, 딸(4)의 입을 틀어막아 살해한 뒤 암매장. 자신은 수면제를 먹고 동반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당국의 검진결과 감염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1995-09-00 에이즈에 감염된 여성이 아이를 낳을 때 신생아에게 감염되는 [수직감염]이 국내에서 첫 발생. 어머니(34)는 93년말 제왕절개 분만 수술시 수혈에 의해 감염됐고 아이(2)는 95년 7월 에이즈 감염사실이 확인됐으며 장출혈로 사망했다. 특집: AIDS /메드시티
1994 - 미국의 영화배우 버트 랭커스터(Lancaster, Burt) 사망 랭커스터 [Lancaster, Burton Stephen "Burt", 1913.11.2~1994.10.20] 본명은 Burton Stephen Lancaster. 미국의 영화배우. 다부진 체격과 섬세한 감정묘사로 유명하다. 1930년대 중반, 뉴욕주립대학교를 잠깐 다니다 곡예단에 들어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순회공연을 다녔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영화에서 위험한 장면들을 직접 연기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이탈리아에서 복무했고, 한 연극연출가에게 발탁되어 1945년 잠시 상연되고 막을 내린 〈The Sound of Hunting〉이라는 연극에 출연했다. 그뒤 한 신인발굴가를 통해 할리우드로 진출, 〈살인자들 The Killers〉(1946)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진홍의 도적 The Crimson Pirate〉(1952) 등 모험 영화에서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돌아오라 작은 셰바 Come Back, Little Sheba〉(1952)·〈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1953)·〈장미문신 The Rose Tattoo〉(1955)·〈세퍼레이트 테이블 Separate Tables〉(1958) 등에서 진솔하고 섬세한 연기도 보여주었다. 1960년 〈엘머 갠트리 Elmer Gantry〉로 아카데미상을 받았으며, 1962년에는 〈알카트라즈의 새인간[鳥人] The Birdman of Alcatraz〉으로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통일 시기의 늙은 귀족을 그린 지우세페 데 랑페두사의 소설을 루치노 비스콘티가 각색한 이탈리아 영화 〈표범 Il Gattopardo〉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뒤 출연작품으로는 〈수영선수 The Swimmer〉(1968)·〈카산드라 크로싱 The Cassandra Crossing〉(1977)·〈애틀랜틱시티 Atlantic City〉(1981)·〈로칼 히어로 Local Hero〉(1983)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 공중전화 (공중전화카드)
1986 - 카드식 공중전화기 첫 설치 카드공중전화는 정액권 카드를 사용하여 통화하는 것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부터 시험운용되어 1995년 현재 전국에 7만 여 대가 보급되었다.
[공중전화 서비스의 변천 과정]
1984 -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폴 디랙(Dirac, Paul) 사망 디랙 [Dirac, Paul, 1902.8.8~1984.10.20]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브리스틀 출생. 브리스틀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1925년 케임브리지대학교로 옮겨 R.H.파울러에게 통계역학을 배우고, 1926년에는 코펜하겐으로 가서 N.H.D.보어의 지도로 양자론(量子論)을 연구하여 1932년 케임브리지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주요업적은 양자역학과 전자스핀 연구이다. 1925년 W.K.하이젠베르크가 내놓은 양자역학의 기초 논문을 보고, 비가환(非可換)대수학을 기초로 하여 별도의 양자역학 이론체계를 건설했다. 이 사이 보어의 지도 아래 대륙파(大陸派) 연구자와 접촉, 복사장(輻射場)의 양자론을 발표(1926), E.P.요르단과 함께 ‘변환이론(變換理論)’을 제출,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의 통일에 공헌하였다. 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대성이론과 양자론과의 통합 문제에 따라, 전자론(電子論)(1928)과 구멍이론[空孔理論](1930)을 잇달아 발표, 디랙방정식이라는 상대론적 파동방정식을 세워 상대론적 양자역학을 개척하였다. 디랙이 존재를 예상한 양전자(陽電子)는 C.D.앤더슨에 의해 발견되었고(1932), 또 브래킷 및 G.오키알리니에 의해 양음전자쌍(陽陰電子雙)의 생성 및 소멸도 관측되어(1933), 그 예측의 정확성이 실증되었다. 그 후에는 전자기장의 양자론 완성에 힘써, 다시간이론(多時間理論)으로 장(場)의 이론 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밖에 통계역학에서도 중요한 연구가 있고, F.페르미와는 별도로 제시한 페르미디랙통계 등이 있다. 또한 단자극(單磁極)의 제창 등도 하였다. 양자역학 연구의 업적으로 1933년 E.슈뢰딩거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네이버
- Carl Cori and Gerty Cori
1984 - 체코 출생의 미국 생리학자, 생화학자 칼 코리(Cori, Carl) 사망 코리[Cori, Carl Ferdinand, 1896.12.15~1984.10.20] 체코 출생의 미국 생리학자·생화학자. 1896년 12월 15일 체코 프라하에서 출생하였다. 1914년에 프라하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부인인 G.T.코리(Cori, Gerty Theresa, 1896∼1957)도 프라하에서 태어나, 1914년에 프라하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면역학을 협동연구하고, 1920년에 같이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예나대학교 등에서 의학과 약물학 조수로, 그의 아내는 소아과 병원에 각각 근무하다가, 1922년에 미국에 건너가 함께 뉴욕시의 버펄로대학교 등에서 악성종양을 연구하였다. 1931년에 함께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대학으로 옮겨, 그는 약물학 교수를 거쳐 주임교수가 되었고, 1942년에는 생화학 교수가 되었다. 한편, 그의 아내는 1931∼1943년 약학과 연구원으로 있다가, 1947년에 생화학 교수가 되었다. 그들은 워싱턴대학교에서 악성종양의 탄수화물대사의 연구에서 인체에서의 당(糖) 대사로 연구를 진행시켜서, 1936년 근육조직에서 글루코스-1-인산염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코리에스테르이며, 1939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학회에서 코리 부처는 이 물질의 존재하에서의 글리코겐의 시험관 내 생성에 관해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업적으로 코리 부부는 아르헨티나의 B.A.우사이와 함께 194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김정일이 조선노동당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지도하고 1975년에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을 발기하는 등 새로운 대중운동을 주도하면서 당내의 기반을 넓히는 한편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73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 비서로 선임되었으며, 이듬해인 1974년 2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조선노동당의 실권자로서 북한사회 전반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후계자로서의 김정일의 위상이 공적으로 확인된 것은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당내 서열은 4위였지만 김일성을 빼고는 유일하게 당내 3대 권력기구라 할 수 있는 정치국(상무위원회 상무위원)·비서국(비서)·군사위원회(군사위원)에 모두 참여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2인자의 자리를 굳혔다.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가 끝난 직후 북한의 언론·출판물들에 의해서 '영광스러운 당중앙'이라는 익명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곧 북한의 언론·출판물들이 그를 '친애하는 지도자'로 호칭함으로써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공식화되었다. /브리태니커
1979 - 마산 창원에 위수령 선포 부마사태 1979. 10. 20 http://phototeq.com/phototeq2001/photo_minjo.html
- 태안 꽃지해수욕장 (공중전화카드)
1978 - 태안해안 국립공원 지정 태안해안 국립공원: 1978년10월 20일 지정 (국립공원) /위키백과
- 문화의 달 기념
1973 - 문화의 날 선포 문화의 날은 문화발전의 기운을 드높이고 국민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를 높이며, 방송·영화·연극·잡지 등 대중매체가 지닌 사회적 가치를 재인식하고 문화예술진흥에 관련된 각종 행사를 거행하는 기념일로 매년 10월 셋째주 토요일이다. 1972년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된 후 1973년 방송의 날, 영화의 날, 잡지의 날을 흡수, 통합하였다. 이날은 문화발전에 기여한 공로자들에게 포상을 하며, 연극·무용 등 기념 공연과 강연회 등을 개최하기도 한다. /위키백과
1973 -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개관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1973년 오늘 문을 열었다. 단순히 건물만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도 매년 20만명이 넘는다. /YTN
[역사속의 오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개관 호주의 시드니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바로 오페라하우스. 푸른 바다 위로 우뚝 솟아있는 이 거대한 건축물은 1973년 10월 20일 개관했다. 커다란 조가비를 엮어놓은 듯한 형상으로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시드니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건물. 이 건물이 실은 주먹구구식으로 지어졌다고 하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시드니항에 건설할 종합공연장 설계 공모가 있을 때 출품된 작품 수는 223점. 그 중에서 당선된 설계도는 덴마크의 건축가 '이외른 우트존'이 맨손으로 그린 스케치였다. 기상천외한 모습이 마치 범선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문제는 공학적인 요소를 거의 고려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너무 비현실적인 설계로 건축 자체가 너무나 어려웠다는 것이다. 1973년 완공 때야 건축·공학 분야에서 '신기원을 이룩한 건축물'로 칭송받았지만, 개관은 원래 예정보다 9년이나 늦었다. 건설비는 계획했던 것의 14배나 들어갔다. 건물의 모양을 지키려 숱한 공학적 결정 과정이 임시변통으로 이루어졌다. 건물의 유지 관리를 어떻게 할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결과는 10년간 7천500만 달러를 투입한 복원공사였다. 최고의 건축물 뒤에 숨겨진 얘기가 참 어이가 없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5년 10월 19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9215&yy=2005
그녀의 시신은 전 남편 케네디 곁에 안장됐다. /YTN
[역사속의 오늘] 재클린, 오나시스와 재혼 1968년 10월 20일,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가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그리스 스콜피오섬에서 열렸다. 1963년 11월 남편이 암살당한 지 거의 5년 만의 재혼이다. 오나시스는 스콜피오섬을 통째로 재클린에게 결혼선물로 줬다. 또 재클린과 결혼하기 위해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와의 관계도 정리했다. 이때 재클린의 나이는 34세, 오나시스는 62세. 재클린은 케네디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후 늘 아이들의 안전 문제를 걱정했고 “미국에선 살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훗날 “아이들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 결혼식은 그리스 정교회 의식에 따라 올렸으며, 이날 날씨가 좋지 않아 초호화 요트인 ‘크리스티나’호를 타고 바다를 여행하려던 계획이 하루 연기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정략적인 면이 다분했던 만큼 순탄한 결혼생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혼을 준비 중이던 1975년 3월 오나시스가 사망하자 재클린은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후 재클린은 출판사업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삶을 살다 1994년 5월 19일 64세를 일기로 사망, 전 남편 케네디 곁에 안장됐다. 정보관리부 /매일신문 2007년 10월 2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5971&yy=2007
1964 -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Hoover, Herbert) 사망 후버 [Hoover, Herbert Clark, 1874.8.10~1964.10.20] 오늘 (10월20일: 허버트 후버) 1964년 10월20일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재임 1929~1933)을 지낸 허버트 클라크 후버가 90세로 작고했다. 대공황의 시작과 함께 대통령이 된 후버는재임 중 경제 불황의 타계를 정책 1순위에 놓았지만 그리 인상적인 업적을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재임 중의 후버 모라토리움과 퇴임뒤의 후버위원회에 새겨져 역사에 남았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3-10-19 18:3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203573
1960 - 제주지역 한해 야간통금 해제 Review 60 濟州 - 제주의 역사와 함께한 60년 /제주일보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3503
[야간통행금지 연표] 1982.01.05 - 야간통행금지 해제 1964.01.18 - 제주도일원에 첫 통금해제(내무부 고시 제627호) 1960.10.20 - 제주지역 한해 야간통금 해제(제주도경찰국 자체 시범실시)
1951 - 도쿄서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 개최 [책갈피 속의 오늘]1951년 한일회담 예비회담 시작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1945년 광복 직후 유행했던 ‘귀국선’이라는 대중가요의 한 구절이다. 광복과 함께 일본 만주 중국 미국 동남아 등지에서 귀국하는 동포들이 늘어났다. 군대 공장 광산 등에 끌려갔거나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망명했던 동포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동포들이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기 위해 귀국선을 탄 것이다. 귀국선을 맞이하는 부산항 등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광복 당시 일본엔 약 200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 일본은 한국인의 귀국에 협조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갖고 들어갈 수 있는 재산에 제한을 두었다. 그래서 약 140만 명만 귀국하고 약 6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에 남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광복은 되었지만 재일 한국인은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 문제가 한일 양국의 중요 현안으로 부각된 것은 1951년 한일회담이 시작되면서. 한일회담은 미국의 주선으로 시작됐다. 6·25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선 한국의 배후기지가 되는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중재로 1951년 10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제1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이 열렸다. 이 예비회담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일 한국인이었다. 우리 정부는 재일교포의 영주권 문제, 강제퇴거 문제, 생활보호 문제 등에 있어 차별 금지와 정당한 대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 및 정신적 물질적 피해보상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인들이 한국에 남겨놓고 온 재산 반환 문제를 거론했다. 예비회담은 별다른 성과 없이 12월 4일 끝났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1년 2월 15일 이승만 정부와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 사이에 제1차 한일회담 본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4월 21일 중단됐다.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 박정희 정부를 거치며 1965년까지 7차례에 걸쳐 진행된 한일회담은 이처럼 처음부터 난항을 겪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동아닷컴 2008-10-20 02:56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81020/8646014/1
1946 -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소설가 엘프리데 옐리네크(Jelinek, Elfriede) 출생 옐리네크 [Jelinek, Elfriede, 1946.10.20~ ] 오스트리아의 시인, 소설가. 200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음악과 같은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히 녹아 있는 작품들을 주로 썼으며, 때로 도발적인 성 묘사가 들어가기도 하는 소설들로 격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한 권력관계를 폭로했다는 이유로 여성으로서는 10번째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옐리네크는 체코ㆍ유대계 과학자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는 기악과 작곡을 공부했다. 1964년 알베르트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비엔나 대학에서 연극과 예술사를 공부했다. 1967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후 소설과 드라마, 희곡, 시나리오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였다. 옐리네크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가장 유명한 작품은 2001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 남ㆍ녀주연상을 수상한 〈피아니스트〉의 원작인 〈피아노 치는 여자〉이다. '관계'와 '권력'이라는 어휘로 집약되는 옐리네크의 작품 세계는 억업과 굴레, 파멸의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예리한 문체로 구성되어 있다. 옐리네크는 1974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1991년에 탈당하는 등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주로 독일에서 문학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1986년 하인리히 뵐 상, 1994년 페터 바이스 문학상, 2002년 베를린 연극상, 2004년 레싱상 등을 수상했다. /브리태니커
1944 - 레이테섬 상륙작전
[오늘의 小史] 돌아온 맥아더 - 1944년 10월 20일 1944년 10월 20일 맥아더 미군 사령관은 650척의 전함과 4개 사단의 병력을 이끌고 필리핀의 레이테섬에 상륙했다. 1942년 3월 17일 “나는 돌아온다”면서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한지 2년 반 만이었다. 맥아더의 레이테섬 상륙은 일본 본토 상륙을 향한 첫 단추였다. /월간조선 2006-10-20 (09:20) http://trynet.kr/cs_board/view.asp?C_IDX=195&C_CC=D&tbKey=
장제스가 2년간에 걸친 4차례의 포위섬멸작전으로 1931년에 마오쩌둥이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에 세운 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를 뿌리 뽑으려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33년 10월, 장제스는 70만명의 대군을 동원해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펼치며 5번째 공격에 나섰다. 결국 홍군은 수적으로 월등한 장제스군에 대패하고 생필품과 의약품까지 동나자 탈출을 결심한다. 1934년 10월 15일, 부녀자·병자를 포함한 2만8000명을 남겨둔 채 홍군 9만명의 대탈주극이 시작됐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대장정(大長征)’이었다. 홍군은 집요한 장제스군의 추격과 지역 군벌의 방해를 피해 24개의 강을 건넜고 18개의 산맥을 넘었으며 11개의 성을 지났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가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다. 이동 중 무려 2억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며 중국 대륙을 붉게 물들여 나갔다. 출발 당시 불안했던 마오쩌둥의 위치도 어느덧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본격적인 마오(毛) 시대를 열었다. 밤낮으로 1만2500km를 행군하기를 1년여. 1935년 10월 20일, 마침내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에 도착함으로써 대장정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병력은 출발 때에 비해 10분의 1로 줄어있었지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승리였다. /조선
[오늘의 경제소사/10월20일] 대장정(大長征) 산술적으로 본다면 장정은 공산군 군대인 홍군의 명백한 패배.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70만 병력을 동원한 포위섬멸전에 압도당해 중국 남부의 근거지인 장시성 루이진(瑞金)에서 대탈출을 시작할 때 병력 8만6,000명이 12분의1도 안될 만큼 줄었기 때문이다. 국민당도 승리를 자축하며 공산군을 박멸했다고 여겼지만 커다란 착각이었다. 368일 동안 국민당군과 지방 군벌과 싸우면서 11개 성을 통과하고 18개 산맥과 17개 강을 건너 2만5,000리를 뚫고 나온 병사들은 최정예부대이자 핵심당원으로 거듭났다. 더 큰 소득은 씨앗을 뿌렸다는 점. 장정을 통해 2억여명의 농민을 만난 홍군은 약탈 등 민폐를 일삼았던 국민당군이나 군벌과 달리 농민을 보호하고 계몽하려고 애쓴 결과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냈다. 불과 한줌밖에 살아 남지 못했던 홍군이 결국 중국 대륙을 차지한 것도 장정에서 파종한 씨앗 덕분이다. 장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개혁과 개방이 가속되면 될수록 중국 지도부는 장정의 정신을 되살리려 애쓴다. 과거의 회상을 넘어 미래를 열어나갈 불굴의 의지를 상징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홍군이 추위와 질병ㆍ기아 속에서 걸었던 장정의 행군로에는 요즘 서부대개발이 한창이다. 우주선과 통신위성을 발사하는 중국제 로켓 시리즈의 이름도 한결같이 ‘장정’이다. 세계시장은 물론 우주까지 장정으로 넘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다. 대장정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오싹해진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7/10/19 17:06
- 'Ellery Queen'
1905 - 미국의 추리 소설가 프레데릭 대니(Dannay, Frederic) 출생 대니 [Dannay, Frederic, 1905.10.20~1982.9.3] 엘러리 퀸 [Ellery Queen] 요약 프레데릭 대니와 맨프레드 리의 공동 필명으로 미국 추리 작가. 뉴욕 영화회사에 근무하던 리와 광고대행사에 근무하던 대니는 공동작품에 착안하였다. 1929년 처녀장편 《로마 모자의 수수께끼》 이후 수수께끼 풀이식의 범인 맞추기를 주제로 하는 본격파 작가로서 활동을 하였다.
1904 - 캐나다의 정치가 토미 더글러스(Douglas, Tommy) 출생 더글러스 [Douglas, Thomas Clement "Tommy", 1904.10.20~1986.2.24] 토미 클레멘트 더글러스(Thomas Clement Douglas, 1904년 10월 20일 ~ 1986년 2월 24일)는 캐나다의 정치인이다. 그는 캐나다에 포괄적 공중 의료체제를 도입한 인물이다. 2004년에는 CBS(캐나디언 방송 회사)에서 전국적으로 공모한 가장 위대한 캐나다인으로 선정되었다. 사회주의 정치인으로서 서스캐처원 주의 수상으로 1944년부터 1961년까지 재임하였다. 1961년부터는 신민주당의 당수로서 1971년까지 활동하였다. 초기 활동 /위키백과 1900 -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이범석(李範奭) 출생 이범석 [李範奭, 1900.10.20~1972.5.11] [역사 속의 인물] 청산리대첩 이끌고 국군 창설에 공헌한 이범석 “조국!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고, 또 생각없이 불리며 일컬어지는 단어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이 두 글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제각기 강력한 작용과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믿는 것이 옳은 내 견해이고, 내 체험의 소산인 것이다.”(이범석, ‘우등불’에서) 1900년 오늘 4대 독자로 태어난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어릴 때부터 근대적인 사고와 새로운 학문 분위기 속에 자랐다. 1915년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만나 망명을 결심, 그해 11월 중국으로 가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1916년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군관학교에서 장교수업을 받고 기병장교가 됐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장교직을 그만두고 상해 임시정부와 논의, 만주 독립군 양성과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그해 10월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취임했다. 당시 만주에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독립군이 항일 무장투쟁 중이었고, 김좌진 사령관의 북로군정서가 강력한 부대로 등장했다. 그는 북로군정서 군사교관으로 부임, 장교 육성과 부대 전투력 강화에 나섰고, 일제의 2만 만주독립군 토벌병력에 맞서 김좌진과 함께 1920년 오늘 부대를 집결, 청산리 일대 전투에서 대승리(청산리대첩)를 거뒀다. 일본군 1천200여 명 전사, 2천100여 명 부상에 독립군은 130여 명 전사, 220여 명 부상이었다. 1946년 귀국, 정부수립 직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으로 국군 창설에 공헌했다. 1972년 삶을 마쳤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정인열 서울지사장 /매일신문 2014.10.20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 52762&yy=2014#axzz3GfRDKvoA
1891 -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채드윅(Chadwick, James) 출생 채드윅 [Chadwick, James, 1891.10.20~1974.7.24] 영국의 물리학자. 중성자 발견으로 193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맨체스터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공부했고, 베를린공과대학의 H. 가이거에게서 배웠다. 1923년부터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E. 러더퍼드와 함께 일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원소들을 알파 입자로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원소들의 변환에 대해 연구했으며 원자핵의 본질에 관해 조사하여 수소 원자의 핵인 양성자가 다른 원자핵의 구성요소임을 밝혔다. 1932년 알파 입자로 충돌시킨 베릴륨이 다양한 물질들의 핵으로부터 양성자들을 차례로 내보내는, 알려지지 않은 복사를 방출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이 복사가 양성자와 거의 같은 질량을 가졌지만 전하를 띠지 않는 입자들, 즉 중성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발견으로 원자의 붕괴를 유도하는 새로운 장치가 생겼는데, 이는 전하를 띠지 않는 중성자들은 경로가 휘어지지 않으면서 원자핵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45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1890 - 미국의 재즈 작곡가, 피아니스트 젤리 롤 모턴(Morton, Jelly Roll) 출생 모턴 [Morton, Jelly Roll, 1890.10.20~1941.7.10] 미국의 재즈작곡가, 피아노 연주자. 본명은 퍼디넌드 조지프 라 망트(Ferdinand Joseph La Menthe)이다. 재즈밴드 연주에 미리 편곡된 음악을 사용하여 오케스트라와 같은 효과를 내는 방법을 도입한 인물이다.
1890 - 영국의 탐험가, 외교관 버턴(Burton, Richard) 사망 버턴 [Burton, Richard (Francis), 1821.3.19~1890.10.20] 19세기 영국의 탐험가·외교관·동양학자. 인도, 이집트·아라비아, 메카, 아프리카 북동 소말리아를 탐험했다. 아프리카에서 탕가니카호를 발견했다.《아라비안나이트》를 영역하였다. 옥스퍼드대학을 중퇴하고 동인도회사에 입사, 1842년 봄베이에 부임하여 7년간 하층민과 같이 생활하였다. 인도를 비롯하여 이집트 ·아라비아 각지의 비경(秘境)을 탐사하였으며, 1853년 메카, 이듬해 아프리카 북동 소말리아를 탐험하고, 그 뒤 다르다넬스해협 전투에 종군하였다. 1856년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 1858년 탕가니카호(湖)를 발견하고, 1861년 황금해안(가나) ·다호메이(베냉) ·베닌(나이지리아)을 탐험 여행하는 등 모험과 연구에 정력을 쏟았다. 이어 외교관으로 1865년 브라질의 산토스, 1869년 다마스커스, 1871~1890년 트리에스테의 영사로 있었다. 《아라비안나이트》(16권, 1885∼1888)를 영역하였다. /naver
1882 - 루마니아 태생의 미국 영화배우 벨라 루고시(Lugosi, Bela) 출생 루고시 [Lugosi, Bela, 1882.10.20~1956.8.16] [역사 속의 인물] 드라큘라의 원조 배우 '벨라 루고시' "피는 생명이라오!" "나는 마시지 않소. 와인은```." 영화 '드라큘라(1931년)'에 나오는 명대사다. 지금까지 수많은 흡혈귀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그만큼 공포와 괴기, 짜릿함을 주는 공포영화는 없을 것이다. 헝가리 출신의 성격파 배우 벨라 루고시(1884~1956)가 주연을 맡았기에 영화사에 길이 남게 됐는지 모른다. 영화에 출연할 때 배우로서는 환갑 진갑이 다 지난 49세의 나이였다. 1884년 오늘, 헝가리에서 태어나 배우생활을 하다 좌우 대립에 휘말려 망명자 신분으로 독일을 거쳐 뉴욕에 정착, 연극을 하며 살던 무명이었다. 그만큼 적합한 배우도 없었다. 드라큘라 백작의 분위기에 어울리게 거친 동구권 액센트의 영어를 썼고, 강렬한 눈빛과 차가운 인상을 갖고 있었다. 미녀들의 목에서 피를 빨때 드러내는 긴 송곳니를 제외하고는 분장도 크게 필요없었다고 한다. 여러 편의 영화에서 흡혈귀 역할을 맡았으나 만년에는 저예산영화에 출연하다 가난에 쪼들려 마약 중독자가 돼 죽었다. 그래도 팬들에게 '드라큘라'로 영원히 기억되길 원했다. 죽을 때 유언에 따라 '드라큘라'에서 썼던 검은색 긴 망토를 입은채 묻혔다. 박병선 사회1부장 /매일신문 2010년 10월 2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2460&yy=2010
듀이 [Dewey, John Dewey, 1859.10.20~1952.6.1] 듀이는 20세기의 주요 노작교육 사상가이자 진보적 교육운동의 대표자로 꼽히는 미국의 교육자이며 철학자이다. 그의 사상은 논리학·인식론·심리학·교육학·사회철학·미술·종교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버몬트대학교를 거쳐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미시간대학교·시카고대학교·컬럼비아대학교 등에서 철학·심리학·교육학 등 다방면에 걸쳐 연구하고 강의했다. 실용주의 이론 내부의 여러 이론적 모순을 교정하고 새롭게 정식화해 도구주의를 성립시켰다. 1925년 발간된 대표적 저서 <경험과 자연 Experience and Nature>에는 그의 철학의 중요한 측면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뉴 리퍼블릭 The New Republic>과 같은 자유주의 경향의 잡지들에 정기적으로 기고함으로써 시사문제에 대한 해설과 사회비평을 했다. 몸이 쇠약해진 말년에도 <경험과 자연>의 재판 출간 등 일찍이 계획해 두었던 일들을 계속 진행하다가, 1952년 폐렴으로 죽었다. /브리태니커
"인간은 논리적이지 않다. 인간 지식의 역사란 정신적 유보와 절충의 기록이다. 자기 논리의 토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조차 인간은 나름대로의 낡은 신념의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바를 붙들고 늘어진다."
- 존 듀이
1854 - 프랑스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Rimbaud, Arthur) 출생 랭보 [Rimbaud, Jean-Nicolas-Arthur, 1854.10.20~1891.11.10] [오늘속으로(10월20일)] 랭보 1854년 10월20일 프랑스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샤를빌에서 태어났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105245
1842 - 영국의 영웅적인 등대지기 그레이스 달링(Darling, Grace) 사망 달링 [Darling, Grace Horsley, 1815.11.24~1842.10.20] [역사 속의 인물] 외로운 여자 등대지기 그레이스 달링 1838년 9월 초, 영국 북동부 해안 뱀브러 지역의 등대를 지키던 그레이스 달링은 깜짝 놀랐다. 배가 난파돼 가라앉는 중이었고 승객들이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등대지기 아버지 윌리엄 달링과 함께 즉각 구조에 나섰다. 인근 시하우스 지역의 구명선을 부르기에는 파도가 너무 거칠다고 판단한 달링 부녀는 노젓는 보트를 띄워 난파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한 그들은 남자 4명과 여자 1명을 보트에 태워 구해낸 뒤 수 차례 되돌아가 모두 13명의 목숨을 건져냈다. 달링 부녀는 자신의 안전도 보장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용감하게 위험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레이스 달링의 나이 23살 때였다. 아버지와 함께 그녀의 영웅적 행동이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유명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는 '그레이스 달링'이라는 시를 발표, 그녀를 기렸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등대에서 생활한 경험이 난파선 승객들을 살리게 했다. 그러나 이 천사 같은 아가씨는 불행하게도 선행 4년 뒤인 1842년 오늘,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까지 영국인들은 노래와 책 등을 통해 그녀를 되살리고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10월 2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9782&yy=2011
1805 - 조선후기의 실학자, 소설가 박지원(朴趾源) 사망 박지원 [朴趾源, 1737~1805] [책갈피 속의 오늘]1805년 연암 박지원 사망 " 중국을 다녀온 양반들이 중국의 장관은 어디 어디라고 꼽지만 내겐 어느 곳보다 깨진 기와 조각의 이용과 똥거름이 장관이었다.”(‘열하일기’의 ‘일신수필’ 중) 외양간부터 거름더미까지 법도 있게 정돈된 청나라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그는 조선 선비들 사이에 유행하던 청나라 배척 풍토, 소중화(小中華) 의식, 북벌론 등의 허구성을 꼬집고 실질 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할 것을 주창했다 청나라에서 길을 가던 농부와도 필담을 나누며 농사 방법을 배울 정도로 세밀하게 중국을 관찰한 그는 조선에 와서도 벼농사, 누에치기, 나무 가꾸기 등의 사업을 벌이고 연구했다. 또 지방 수령을 하며 얻은 경험으로 기후와 땅의 성질에 따라 농사짓는 방법을 적은 ‘과농소초’ 등 실용서적들을 쓰는 한편 명분만 앞세우는 사대부들의 허위를 꼬집은 ‘양반전’ ‘호질’ 등의 풍자소설도 썼다.
와타나베 가잔 [渡邊華山, 1793.10.20~1841.11.23] 일본의 학자·화가. 본명은 사다야스[定靜]. 인물의 성격을 잘 나타낸 초상화를 많이 그렸으며 일본 미술에 서양화 원근법을 도입하는 선구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유명하다. 하급 영주의 가난한 가신의 아들로 태어나 생계를 위해 미술을 공부했다. 학구적이고 문학적인 주제를 강조하는 문인화로, 중국 남부에서 시작된 남화(南畵)의 한 화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미카와[三河]의 영주 다와라를 섬기던 중인 1832년 에도로 가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며 해안방어를 담당했다. 그는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엄격한 쇄국정책에 반대했다가 큰 수난을 겪었으며 오랫동안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뒤에 그의 제자들이 에도에서 그를 위한 자선전시회를 계획하자, 그는 자신의 집안과 영주에게 누를 끼치게 될까 우려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화가로서 와타나베는 아주 독창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재능 뒤에는 꾸준한 스케치에 바탕을 둔 탄탄한 기교가 숨어 있었다. 상충되는 효과를 내지 않고 서구의 원근법을 동양의 전통기법에 부가하려고 애썼다. 그는 특히 초상화에 뛰어났는데, 인물의 성격을 깊이 있게 통찰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이같은 특징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는 학자 다카미 센세키[鷹見泉石]와 서예가 이치카와 베이안[市河米庵]의 초상이 있다. 그가 요절함으로써 전통 일본화와 근대 서구 미술의 융합이 늦어졌다. /브리태니커
1740 -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 사망, 마리아 테레지아 왕위 계승 1740년 10월 20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6세(Karl VI, 1685~1740)가 사망했다. 카를 6세에겐 아들이 없었으므로 1713년 4월 19일에 공포된 국사 조칙에 의해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이를 기회로 삼아 1740년 12월 16일 합스부르크 영토 가운데 가장 부유한 지역인 슐레지엔을 침공함으로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연합하고 있었다. 반면 영국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경우 영국의 식민지 상업 제국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다툼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프랑스는 다시 바이에른과 연합해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를 침공했으나 패배했다. 1745년 1월 바이에른의 카를 7세가 사망하고 프란츠 슈테판이 황제로 선출되자 오스트리아의 세력이 갈수록 확대되어갔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1744년 제2차 슐레지엔 전쟁에 돌입했고 1745년 12월 드레스덴 조약으로 슐레지엔을 차지하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스타니수아프 1세 [Stanisław I, 1677.10.20~1766.2.23] 본명은 Stanislaw Leszczynski. 폴란드의 왕(1704~09, 1733 재위). 국가 위기에 왕위에 올라 폴란드를 지배하려는 외국 열강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폴란드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나 서유럽에서도 교육을 받았다. 북유럽 열강들 사이에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중에 1702년 스웨덴 왕 카를 12세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당시 카를은 폴란드 귀족들이 국왕 아우구스트 2세(작센 왕가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를 퇴위시키도록 강요하고 스타니수아프를 왕위에 앉혔다(1704). 무력하고 분열된 폴란드는 외국 군대들이 멋대로 약탈하고 활개치는 무대가 되었다. 1709년에 카를이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에 패하고 스웨덴으로 물러나자 스타니수아프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아우구스트 2세가 다시 폴란드 왕위를 차지했고, 스타니수아프는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 알자스 지방에 정착했다. 1725년에 그의 딸 마리가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결혼했다. 1733년 아우구스트가 죽자,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폴란드 왕위를 되찾기 위해 그는 변장을 하고 바르샤바로 들어간 뒤 폴란드 의회에서 압도적인 다수표를 얻어 국왕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처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그가 스웨덴-프랑스 동맹에 가담할 것을 우려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를 침공해 국왕선출을 무효로 만들었다. 그는 또다시 왕위를 잃었고, 러시아의 압력 아래 의회의 소수파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3세로 선출했다. 스타니수아프는 그다인스크(단치히)로 후퇴하여 프랑스의 도움을 기다렸으나, 프랑스는 끝내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그다인스크가 러시아의 포위 공격에 함락당하기 직전에 그곳을 탈출해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로 가서, 새로운 왕과 왕을 지지하는 러시아인들에 대항해 유격전을 벌였다. 1738년에 맺어진 빈 평화조약은 아우구스트 3세를 폴란드 왕으로 인정했지만, 스타니수아프에게도 왕의 칭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로렌과 바르 지방을 주었다. 그는 로렌에서 훌륭한 행정가의 자질을 보여주었고, 경제 발전을 촉진시켰다. 뤼네빌에 있는 그의 궁전은 문화 중심지로 유명해졌으며, 그는 낭시에 과학 아카데미와 군사학교를 설립했다. 1749년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자유로운 목소리 Free Voice to Make Freedom Safe〉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 자신이 제안한 폴란드 헌법 개정안의 윤곽을 설명했다. 딸 마리에게 보낸 편지(1901)와 프로이센 왕 및 베르사유 주재 대사인 자크 윌랭에게 보낸 편지(1920)가 각각 책으로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620 - 네덜란드의 화가 알베르트 코이프(Cuyp, Aelbert) 출생 코이프 [Cuyp, Aelbert, 1620.10.20~1691.11.15] 도르드레히트 출생. 아버지 J.게르리츠도 화가이며, 아버지의 이복동생 벤자민도 H.R.렘브란트풍의 명암법으로 종교화와 풍속화를 제작하였다. 처음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고, J.고이옌과 S.로이스달의 영향을 받았다. 평생을 고향에서 지냈으며, 주로 자연에 충실한 네덜란드 동부의 풍경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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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