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문신인 이정영(李正英)[1616~1686]의 묘역이다. 호는 서곡(西谷)이고 시호는 효간공(孝簡公)이다. 전주 이씨로 호조판서, 도승지, 강화유수를 역임한 이경직(李景稷)[1577~1640]의 아들이다.
1657년(효종 8) 종부시정·사인·사간을 거쳐 1659년 병조참의·좌승지를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에 부총관·병조참판·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64년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666년에 내직으로 돌아와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도승지를 거쳐 판윤이 되었다. 1669년에 우윤으로 보전문서사관(寶篆文書寫官)이 되었다. 1671년 개성유수를 거쳐 다음해에 한성부판윤에 재임 중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674년 산릉도감 당상을 맡아 국장에 참여하였다. 이후 이조판서가 되고, 1677년(숙종 3) 형조판서를 지냈다. 1680년(숙종 6)에 판돈녕부사를 역임하고, 1685년(숙종 11) 판의금부사를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다음해에 7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명칭 유래] 벌명당은 동작구 사당동 동래 정씨 문중 묘가 있는 지역이다. 벌명당은 뒷산의 우뚝 솟은 봉우리가 벌통 위를 덮는 뚜껑 모양이면서 주변 형세가 꽃의 이미지를 띤 것에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벌명당은 이곳에 묏자리를 쓰면 벌떼처럼 자손이 번창하고 재물과 명예가 쌓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묏자리를 정할 때는 지관(地官)을 통해 전국의 땅을 살피고 명당을 찾도록 하였는데 이때 지관이 찾은 명당이 지금의 벌명당이다. 지관은 이곳을 명당으로 알고 임금에게 고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정씨 성을 가진 영의정이 이곳이 명당임을 알고 다른 곳을 찾도록 부탁하였고, 이에 지관은 다시 다른 명당을 찾으러 갔다. 당시 지관은 영의정에게 자기가 동재기나루를 다 건널 무렵 그곳을 파보라고 하였고 영의정은 지관이 시킨 대로 그 땅을 파보니 큰 벌들이 수없이 나왔다고 한다. 이 벌들이 지관에게 날아가 지관을 쏘려 하자 이를 피하려고 지관이 독을 뒤집어썼는데, 벌들이 지관이 뒤집어쓴 독에다가 침을 놓자 독이 깨졌고 벌들은 죽었다고 한다. 이후 정씨 성을 가진 영의정은 그 자리에 묘를 썼다고 하며 그 가문에 9대째 정승이 나왔다고 한다. [자연환경] 벌명당의 서쪽으로는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와 수목으로 이루어진 까치산근린공원이 있다. 남쪽으로는 100m 남짓의 낮은 산지가 길게 뻗어있는데, 현재는 둘레길이 완성이 되어 관악산까지 연결되어 있다. [현황] 벌명당에는 조선 시대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1515~1588], 수죽(水竹) 정창연(鄭昌衍)[1552~1636], 제곡(濟谷) 정광성(鄭廣成)[1576~1654] 등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 및 신도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1호]가 있다. 지하철 7호선관련항목 보기 남성역 2번 출구에서 가까워 도보로 갈수잇
첫댓글 나혼자걷는다면 쓸쓸한길도~~
멋져요 한손올린모습 화이팅~^^
해솔님에게서 배운
폼 입니다 ㅋ
어제가고 오늘또갓는대 가서볼수록 이산의 묘미가 특출햇답니다,
멋진 폼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