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음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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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세계에 개방되어 있는 존재, 인간!
〈어둠〉이란 김춘수의 짧은 시는 우리를 후설의 제자로도 유명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라는 철학자에게로 이끌어 줍니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도 ‘존재 망각’을 안타깝게 경고했던 인물이기 때문이지요.
난해한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인간에 대한 그의 특이한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다자인(Dasein), 즉 현존재(現存在)라고 정의합니다. 다자인이란 말은 ‘거기(there)’나 ‘여기(here)’를 뜻하는 ‘다(Da)’라는 말과 ‘존재한다(is)’를 뜻하는 ‘자인(sein)’이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다자인은 영어로는 ‘there-is’로 표현될 수 있겠지요. 이처럼 그에게 인간은 ‘there is A’라는 구조를 가진 존재로 사유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 앞에 책상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경우 나는 “책상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내 앞에’라는 중요한 의미가 빠지게 됩니다. 이 점에서 “책상이 있다”라는 말에 대한 영어 표현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There is a table.” 이 영어 표현에서는 ‘내 앞에’의 뉘앙스가 살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There is’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현존재, 즉 하이데거가 말한 다자인의 간략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새로 만들어낸 철학 개념인 ‘다자인’이란 표현을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책상과 같은 다양한 사물들을 생각하거나 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온갖 사물들에 대해 개방되어 있다는 점을 말해 줍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몇몇 학자들은 하이데거의 다자인이라는 용어를 ‘터-있음’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이제 직접 하이데거의 난해한 설명 가운데 한 대목을 살펴보도록 할까요?
분명히 인간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이런 존재자로서 그는 돌, 나무, 독수리와 마찬가지로 존재의 전체 안에 속해 있다. (……) 그러나 인간의 탁월성은, 인간이 사유하는 본질존재로서 존재에게 개방된 채 존재 앞에 세워지고, 그리하여 존재와 관련된 채 머무르면서 존재에 응답한다는 점에 고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본래 이러한 응답의 연관으로 존재하며, 그는 오직 이러한 연관일 따름이다.
―《동일성과 차이(identitӓt und Differenz》
김춘수의 시를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하이데거의 이야기에서 지적인 자괴감을 느끼기에 충분할 겁니다. 어쩌면 철학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미 의미와 무의미와 관련된 김춘수의 시를 한 번 살펴보았기에 우리는 하이데거의 표현에 별다른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어느 분은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뭐야! 김춘수처럼 이야기하면 충분한데, 왜 이렇게 난해하고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거지?”
그럼 차근차근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한번 따라가 볼까요? 겉으로 보면 돌, 나무, 독수리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돌, 나무, 독수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돌, 나무, 독수리,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심지어 이 모든 것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사실도 다시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 하이데거의 가장 난해한 표현, 즉 “인간의 탁월성은, 인간이 사유하는 본질 존재로서 존재에게 개방된 채 존재 앞에 세워지고, 그리하여 존재와 관련된 채 머무르면서 존재에 응답한다는 점에 고이 깃들어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어느 정도 드러나는지요? 바로 이 점과 관련해 인간을 ‘existence’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 관례적으로 ‘existence’는 ‘실존’이라고 번역되었지요. 실존주의가 ‘existentialism’의 번역어로 채택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실존’이나 ‘실존주의’는 하이데거의 위와 같은 생각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려운 번역어입니다. 정화열(1932~ )이 《몸의 정치》라는 책에서 ‘existence’의 어원이 기본적으로 ‘탈중심’에 있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실 ‘existence’라는 단어에서 ‘ex’는 ‘바깥’을, 그리고 ‘istence’ 부분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existence’라는 말은 ‘바깥에 대하여 존재한다’, 그러니까 ‘바깥에 대해 열려 있는 채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열려 있는 것으로 이해한 점도 오히려 이런 의미로 보아야 이해하기 쉽겠지요. 이 점에서 보면 기존에 실존으로 번역된 ‘existence’라는 용어도 이제 ‘탈존(脫存)’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탈출’이나 ‘탈주’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탈’이란 표현이 ‘바깥으로 벗어난다’는 의미를 드러내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강신주, 도서출판 동녘, 2019.)’에서 옮겨 적음. (2024. 7. 5. 화룡이) >
첫댓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실존'과 '탈존'의 의미 상관을
되짚어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