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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44,18-21.23ㄴ-29; 45,1-5
그 무렵
18 유다가 요셉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나리께서는 파라오와 같으신 분이시니, 이 종에게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19 나리께서 이 종들에게 ‘아버지나 아우가 있느냐?’ 물으시기에,
20 저희가 나리께 대답하였습니다.
‘저희에게 늙은 아버지가 있고, 그가 늘그막에 얻은 막내가 있습니다.
그 애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 아들로는 그 애밖에 남지 않아, 아버지가 그 애를 사랑합니다.’
21 그러자 나리께서는 ‘그 아이를 나에게 데리고 내려오너라. 내 눈으로 그를 보아야겠다.
23 너희 막내아우가 함께 내려오지 않으면, 너희는 다시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하고 이 종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 그래서 저희가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에게 올라갔을 때, 나리의 말씀을 아버지에게 전하였습니다.
25 그 뒤에 저희 아버지가 ‘다시 가서 양식을 좀 사 오너라.’ 하였지만,
26 저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희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막내아우가 함께 가야 저희가 내려갈 수 있습니다.
막내아우가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저희는 그 어른의 얼굴을 뵐 수 없습니다.’
27 그랬더니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가 저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내가 나에게 아들 둘을 낳아 주었다는 것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28 그런데 한 아이는 나를 떠났다.
나는 그 애가 찢겨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였고,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아이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29 그런데 너희가 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데려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백발이 성성한 나를, 비통해하며 저승으로 내려가게 하고야 말 것이다.’”
45,1 요셉은 자기 곁에 서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모두들 물러가게 하여라.” 하고 외쳤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힐 때,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2 요셉이 목 놓아 울자, 그 소리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
3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너무나 놀라, 그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나에게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서는, 그들이 가까이 오자 다시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5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마지막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마태 10,7)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였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입니다.
그런데, 단지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만 하지도 않습니다.
그 징표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권능도 주셨는데, 그것을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어라.’ 하십니다.
“앓는 이를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여기에서는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사되고 베풀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그 선물을 받아들여야 그런 일들이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나 주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다른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것인 양’ 주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받은 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주신 분’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포해야 할 나라는 자기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받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9)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챙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입을 것, 먹을 것, 그 어떤 안전장치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제 자기의 신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발을 신고,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지고,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라 하십니다.
또한 “집에 들어가면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마태 10,12)고 하십니다.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며, 먼저 입으로 축복의 인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받아주든지 않든지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에게도 집착하지 않으며, 자유롭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마음으로 계산하지 말고, 군말 없이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형제에게 평화의 인사를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주님의 평화를 건네주는 평화의 사도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 가져가지 말라.”
(마태 10 9)
주님!
길을 떠나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음은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더 이상은 제 말로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제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제 무능과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나라 방식>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파견의 목적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인데, 그런데 하늘나라라 가까이 온 것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요 기쁜 소식일까요?
슬프게도 그 기쁜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희소식이 아니고, 오히려 슬픈 소식이거나 아주 듣기 싫은 소식입니다.
쉬운 예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죽을 날이 가까이 왔다, 하느님께 돌아갈 날이 가까이 왔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라면, 그 말을 듣고 바로 기꺼워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혹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꼭 종말론적인 의미가 아닐지라도 제 생각에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그런 의미일지라도, 그것은 지금까지 유효했던 이 세상 방식이나 가치들을 다 폐기해야 하는 것이기에 기꺼워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선 하늘나라 방식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오늘 주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방식대로 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께 거저 받은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받은 것을 거저 나누려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만일 거저 주지 못한다면 아직 이 믿음과 사랑이 없는 것이고, 여전히 이 세상 방식과 가치대로 살려는 것이겠지요.
두 번째 하늘나라 방식은 파견되어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도 믿음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파견 의식과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파견받아 떠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면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야훼이레 믿음이 있어야 하며, 내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주님의 일꾼이라는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하늘나라 방식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는데 환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머물고, 아무도 환영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털고 훌훌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서 평화롭게 현존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입니다.
복음 선포라는 것이 사실은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전하는 것인데 힘을 겨루고 싸우는 식이여서는 안 되겠지요.
프란치스코는 이슬람에 가는 형제들에게 바로 이 지혜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선교하라고 하였지요.
여건이 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환영하지 않으면 겸손하고 평화롭게 현존하라고 말입니다.
어느 날 길 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며 고래고래 소리쳤고, 이에 마주 오던 할아버지가 시끄럽다고 하니 그 할머니는 대뜸 “당신도 지옥” 이렇게 대꾸하는 거였습니다.
천당 얘기만 하면 되고 지옥 얘기는 할 필요 없습니다.
천당의 행복만 전해주고 지옥의 저주는 입 밖에 낼 필요도 없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근본에 충실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 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말 타면 종두고 싶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아홉을 가지면 열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자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때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활용하는 것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잠언 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것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19-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 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제발, 가진 것에 의지하지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미움 받아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함은 곧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과 같다고 하십니다.
기쁜 소식도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물론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복음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며 가난을 강조하십니다.
그러고는 어떤 집에 들어가든지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그 평화가 복음입니다.
받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주는 사랑대로 돌려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더라도 예수님처럼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님께서 다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 됩니다.
복음을 누리는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는 것으로 채워집니다.
어떤 호수에서 똥물이 나오면 그 호수는 똥물로 가득 찹니다.
어떤 호수에서 맑은 물이 나오면 그 호수는 맑은 물로 가득 차 있음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마음이 나오면 나도 그 행복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원리입니다.
주는 대로 돌려받게 되어 있습니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Pay It Forward: 2000)는 로스앤젤레스의 기자 크리스가 낯선 사람으로부터 재규어 자동차를 선물로 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Pay it forward”, 곧 다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해줍니다.
기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찾아 여행을 시작하여 라스베이거스까지 다다릅니다.
이 일이 있기 넉 달 전 라스베이거스에서 주인공 트레버는 중학교에 입학해 사회 과목 교사인 유진을 만납니다.
유진은 반 학생들에게 이 세상을 바꿀 방법을 하나씩 생각해오라고 숙제를 내줍니다.
트레버는 내가 받은 선행에 대해 보답하는 대신 다른 세 사람을 위해 선행을 하는 “pay it forward” 시스템을 개발합니다.
트레버는 제리라는 노숙자를 시작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개념을 시도합니다.
트레버는 노숙자 제리를 마약으로부터 구해 주려 했지만, 그는 그것을 끊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패한 줄 압니다.
하지만 그는 다리에서 자살하려는 여성에게 자신이 끊지 못하는 마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며 그 여자도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게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살립니다.
트레버는 유진 선생님을 어머니와 연결해주고 어머니는 유진의 과거를 통해 또 자신의 어머니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한 도둑을 도왔는데, 그 도둑이 한 유명한 변호사의 딸을 살리고 그 변호사가 자신의 차를 크리스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크리스는 드디어 그 운동이 시작된 트레버를 만나 인터뷰를 합니다.
트레버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다고 여겼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힘을 얻고 자신에게 좌절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트레버는 전에 돕지 못했던 친구를 돕다가 칼에 찔려 사망합니다.
영화는 ‘pay it forward’ 운동의 창시자인 트레버를 기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촛불을 들고 트레버의 집에 꽃을 봉헌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의 작은 아이디어와 실천이 진정 세상을 바꾸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나에게 되돌아옵니다.
이것은 대부분이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남을 행복하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예수님처럼 나에게 죽음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도 평화를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것을 명령하신 분이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어머니와 전화를 끊을 때 항상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질 때도 그런 말을 꼭 하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사람들이 당신이 좀 바뀌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연스럽지 않은 그런 말에 다른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그대로 해주지 않더라도 어머니는 보상받습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더 감사하고 더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억지로라도 저 때문에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장 큰 행복이 자신의 사랑이 거부 당하고 박해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그것을 하라고 명하신 주님의 안타까운 사랑을 더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내가 주는 사랑이 사람들로부터 보답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랑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우리 교회의 모습>
돈이라는 것, 참 묘한 존재입니다.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야, 한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품위를 지킬 수 있고, 동료들과의 친교도 나눌 수 있고, 친척들이나 가족들에게 인간도리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복음 선포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청소년 사목을 활성화시키고자 한다면 재정적 안정성은 필수입니다.
아이들에게 가는데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가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만 한다면, 아무런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맛있는 간식도 챙겨가야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지며 관심을 표명할 것입니다.
신나게 찬양할 수 있는 찬양 사도단도 구성하려면 악기나 음향 시스템도 마련해야 할 것이고, 끝나면 식사라도 제공해야 힘이 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실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 활동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수중에 땡전 한 푼 지니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 10,9-10)
예수님의 지나친 강조는 아마도 나약한 우리 인간의 실상을 잘 파악하고 계셨기 때문이리라 여겨집니다.
어영부영하다 보면 순식간에 가장 본질적인 사명인 복음 선포가 뒷전이 됩니다.
통장 잔고가 많다 보면 자연스레 어디 뭐 좋은 거 없나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교우들의 희사나 후원을 마다하고 스스로 천막 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적 청빈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몇몇 수녀회 수녀님들을 바라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닙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생활을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매년 연말이 되면 무조건 공동체 통장 잔고를 제로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남은 돈을 흥청망청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부로도 보내고, 더 어려운 곳으로도 보내는 것입니다.
저희 공동체도 그분들 따라 매년 6월 말, 12월 말이면 잔고를 제로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목 활동 지역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거주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부촌으로 탈바꿈하면 아무 미련없이 또 다른 가난한 지역으로 떠나갑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복음 선포>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선포’는 말로만 하는 선포가 아니라 ‘삶으로’ 하는 증언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이 되고, 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표징이 됩니다.
병자들 입장에서는 ‘치유의 기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삶으로’ 드러내라는 지시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라는 말씀은 ‘빈손’과 ‘빈 마음’으로 가라는 지시인데, 사도들이 ‘빈손’과 ‘빈 마음’이 되려고 노력하는 일도 하느님 나라를 삶으로 드러내고 증언하는 일이 됩니다.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 6,31-34)
만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이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돈 걱정’을 한다면, 그가 전하는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소식을 기뻐하면서 받아들일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이의 모습’은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만이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당신의 일꾼들을 먹이신다.” 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1티모 6,6-10)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자는 바오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하나도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체의 사랑’이 답입니다.
‘마땅한 사람’은 사도들을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고 천사의 도움이니까 거절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지시입니다.
주는 대로 먹으라는 뜻입니다.
“집에 들어가면”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입니다.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는 “주님을 믿고 회개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참 평화를 얻으라고 권고하여라.”입니다.
단순히 축복하는 말이나 인사가 아니라 ‘복음 선포’이고,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가자는 ‘초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복음을 전하는 이 자신이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평화를 이미 누리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기쁨도 없고 평화도 없으면서 남에게 그것을 전해 주는 일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될 뿐입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집’은 복음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집이고, ‘마땅하지 않은 집’은 복음과 신앙을 거부하는 집입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바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넷플렉스에서 ‘황우석의 몰락’이라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그 이름이 많이 잊혀졌지만 20년 전에 ‘황우석 박사’는 지금의 ‘BTS와 손흥민’을 능가할 만큼 대중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동물 복제’에 선구적인 업적을 쌓았습니다.
그는 ‘개, 소, 양’을 복제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논문을 통해서 ‘배아줄기세포’의 가능성을 발표하였습니다.
배아줄기세포는 인체의 ‘장기’를 배양할 수 있는 ‘만능세포’와 같았습니다.
마치 자동차의 부품과 같아서 손상된 인체의 한 부분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눈이 먼 사람은 눈을 뜰 수 있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걸을 수 있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각종 암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황우석 박사의 ‘논문’은 광명의 빛과 같았습니다.
정부에서도 황우석 박사를 전폭 지원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성공은 곧 대한민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고, 대한민국의 성공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황우석 박사는 대한민국 1호 과학자로 선정되었고, 매년 30억씩 연구비를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많은 기업과 독지가들이 지원을 하였고 그 규모는 1,000억이 넘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황우석 박사의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국익은 물론,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 획기적인 도약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황우석 박사의 업적과 연구에는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 그늘은 함께 연구하던 동료 직원의 제보가 있었고, 제보를 확인하면서 방송을 하기로 한 방송국의 결정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저는 당시에 캐나다에 있었는데 한국사회는 크게 술렁였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성공은 국익이라는 논리로 황우석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진실이 국익이라는 사람들이 대립하였습니다.
불치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가족들은 황우석 박사에게서 희망을 보았기에 황우석 박사를 지지했습니다.
그 논란의 중심에 가톨릭교회도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셨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배아줄기세포를 통한 연구를 반대한다고 천명하였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병원을 중심으로 윤리적인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를 통한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윤리적인 문제였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많은 난자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난자들이 불법적으로 제공되었습니다.
난자의 매매가 이루어졌습니다.
동물의 난자와 인간의 난자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논문’의 조작이었습니다.
어떤 과학도 윤리적인 기준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어떤 과학도 조작으로 성과를 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황우석 박사는 국민적인 영웅에서 과욕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진실을 왜곡한 사람으로 몰락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지금 아랍 에미리트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황우석 박사의 능력과 기술을 인정한 아랍 에미리트는 황우석 박사를 초청하였고 낙타의 복제를 부탁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죽은 지 11년이 된 낙타의 체세포를 이용해서 낙타를 복제하였습니다.
복제된 낙타들이 우리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죽은 개의 체세포를 이용해서 개를 복제하였습니다.
개의 주인은 복제된 개를 키우면서 황우석 박사에게 감사를 드렸고, 기뻐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러시아 시베리아의 한 얼음 동굴에서 죽은 매머드의 체세포를 채취하였습니다.
매머드 복제의 성공여부는 나오지 않았지만 황우석 박사의 동물 복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습니다.
2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황우석 박사는 자신의 과욕을 솔직하게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황우석 박사에 대한 다큐를 보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가신 희생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셨다며 형제들을 용서했던 요셉의 사랑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행복의 기원>을 쓴 서인국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음식을 먹는 것.”
너무 간단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행복임이 분명합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도 행복인데, 여기에 음식까지 같이 먹게 되는데 어떻게 행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행복이 아닌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행복을 다른 곳에서만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 안에서 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당연히 가져야 할 삶으로 생각하고, 특별한 상황으로 얻게 될 것만이 진짜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라는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올려집니다.
크기만을 생각하는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그마한 행복의 반복이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매 순간이 행복의 통로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체험하는 모든 것이 행복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을 누리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도 슬기롭게 이겨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행복을 주셨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을 돈 받고 판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물교환하듯이 우리의 마음을 받고 행복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공짜로 행복을 주셨습니다.
늘 함께 하시면서 행복의 삶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거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는 거저 주지 않습니다.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받을 것의 크기를 재면서 남에게 줄 행복을 줄여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면서,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할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일은 세상의 가치로 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담긴 사랑으로만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공짜로 받았으니, 공짜로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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