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대학교회 정혜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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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 능력의 통로
(레 15:25-31; 고후 12:6-10; 막 5:29-34)
이화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은 “약함, 능력의 통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목사님께서 읽어주신 세 번째 본문은 마가복음 본문으로, 잘 알려진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혈루증’이라고 많이들 부르지만, 흔히 하혈이라고 우리가 아는 질환을 예수님이 치유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의 기적이야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초능력자처럼 기적을 많이 일으키셨는데, 풍랑이 거세게 이는 바다를 향해 명령하시면 파도가 잠잠해 지기도 하고, 적은 양의 음식을 두고 기도하시면 떼어 주는 대로 불어나서 수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장애가 있는 이를 회복시키시거나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셨다는 치유기적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를 많이 했던 저에게 어머니가 자주 들려주시는 레파토리였습니다. 제가 체구도 건장하고 해서 교우님들이 상상을 잘 못하시겠지만, 제가 엄마 뱃속에 일곱달만 있다가 태어난 ‘칠삭동이’여서 부모님께 걱정을 많이 끼쳐드렸습니다. 육남매의 다섯재인데다 가난한 살림에 당시 하루에 삼만원 하는 인큐베이터 비용을 댈 수가 없어서 핏덩이인 채로 아기를 집에 그냥 데리고 오신 어머니는 매일 울면서 제가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아니 살아남기만을 바라고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제가 아플 때 어머니는 늘 머리맡에서 기도를 해주셨는데, 그 기도에 나오는 예수님은 아픈 사람의 간절한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아픈 몸을 손수 쓸어주시며 치유해 주시는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나중에 제가 커서 직접 복음서를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치유기적 이야기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만져주시면서 볼 수 있게 해주시거나(두 시각장애인, 마 20:34), 열병으로 누워있는 노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면서 낫게 해주시는(시몬의 장모, 막 1:29-31) 장면은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질 정도로 늘 저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오늘 같이 읽지 못했지만 마가복음 1장 40절부터 등장하는 나병 환자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요.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하며 무릎을 꿇은 한 나병 환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그를 만지시면서 고쳐주십시다(1:41,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의 소원대로 깨끗해지고 나서 그는 제사장한테 가서 예물을 바쳐 나은 것을 확인받아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치유를 받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된 이 사람이 걸렸던 나병,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의 여인이 고통받던 하혈, 이 두 질병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피부병이나 출혈이라는 신체적 질환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그 질환이 가진 사회적, 종교적 의미로 인해서 그 고통이 배가 된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질환 자체와, 그 질병에 따라오는 사회적 소외 같은 고통 구분하기도 합니다. 영어단어로 질환을 disease라고 한다면, 그에 따라오는 고통을 포함할 때는 illness라고 구분해서 표현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병 환자나 하혈하는 여인은 신체 질환에다 사회적 고통까지 겪고 있었으니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질환 자체가 신체적 고통이면서 사회적 소외의 원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율법에 있는 정결법 때문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읽었던 레위기 본문을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레위기 13장에서 15장까지 이어지는 율법에 따르면, 나병이나 여성의 생리/월경, 나아가 부정기적인 출혈인 하혈은 부정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당시에 이런 ‘부정함’은 질병에 걸린 당사자 뿐 아니라 그가 입었던 옷, 눕거나 머물던 장소, 그리고 그가 접촉하는 타인까지 오염시킬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의학적 상식에 비추어
보면 그 근거가 없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이 정결함과 부정함의 구분은 삶의 실제였습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리거나 하혈하는 환자는 최대한 멀리하고, 가능하면 공동체의 경계 바깥에 두어서 나와 공동체 전체의 안전을 먼저 지키려고 했습니다.
최근까지 우리가 겪은 코로나 팬데믹과 비교해 보면 서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하는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와 비슷해 보입니다.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접촉의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하고 확진자를 격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아시는 것처럼 코로나-19를 성서에 나오는 ‘나병’이나 ‘하혈’과 등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실제로 타인을 감염시킬 수 있는 전염병의 원인이지만, 예수 당시에 나병이나 하혈환자가 기피되었던 것은 의학적 전염성 때문이 아니라 ‘부정함’이라는 제의적, 종교적 관념 탓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천년 전 예수님이 사셨던 팔레스타인의 ‘정결 체계’와 현대의 질병예방 체계는 완전히 다른 범주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점도 보입니다. 가뜩이나 신체적 취약함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사회적 위험요소로 보고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천년 전으로 돌아가 환자들의 상황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면, 너무도 각박한 삶이었을 것 같습니다. 닿기만 해도 큰일 날 듯 피하고, 아예 그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그들을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이웃들을 견뎌야 하는 참 외로운 삶이었을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나병 환자를 고쳐주실 때 예수님이 그를 만지셨다는 것이 너무나 놀랍게 느껴집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피하시기는커녕 자신이 같이 오염되는 위험까지 무릅쓰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피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접촉’으로 인한 오염 따위는 개의치 않는 다는 듯 오히려 적극적인 스킨십을 행하셨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이렇게 과감할 수 있었을까요?
이 장면에서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깊이 ‘공감하셨다’고 강조합니다. 1장 41절에서 ‘불쌍히 여기시고’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인데요. 이 단어는 ‘내장’ 또는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σπλάγχνον)’이라는 명사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말에도 ‘애가 탄다’, ‘애가 끊어진다’라는 유사한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애’가 내장, 창자(腸)를 뜻하지요. 이 표현은 자식이 고통받는 걸 보는 부모님의 심정을 묘사할 때 자주 쓰입니다. 자식이 부모님이 편찮으신 걸 보면서 애가 끊어진다고 하는 경우는 제가 잘 못 들어봤는데요. 그만큼 ‘내가 아픈 게 낫지 내 자식 아픈 거는 차마 못 보겠다’는 마음일 때만 쓸 수 있는 말 것 같습니다. 우리말 번역에 ‘불쌍히 여기시고’는 이처럼 깊은 일체감에서 나오는 사랑과 절절함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는 나병에 걸린 남자에게 거리를 두고 그의 부정에 나도 전염될지 모른다고 경계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겪는 신체적 아픔, 사회적 소외에 깊이 공감하고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손을 뻗어 그의 몸에 손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깊은 일체감과 공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이 자신을 만져주셨기 때문에 그동안 주변으로부터 겪었던 소외감이 씻은 듯 없어지는 경험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치유받고 나서 제사장에게 확인받고 일상으로 회복되는 것보다 사람들
에게 자신이 경험한 해방을 전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도 그가 얼마나 자유로움을 누렸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제 마가복음 5장 본문에 나오는 하혈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함께 보겠습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치유기적 이야기에 비해 특별히 환자의 상황을 길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그마치 ‘열두 해 동안’이나 질환에 시달렸고, “여러 의사를 만나면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재산까지 다 탕진할 정도로 애를 썼지만 어떤 효험도 보지 못하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고 하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어려웠으니 치유를 바라는 간절함은 또 얼마나 더 컸을까요.
그녀는 큰 무리에 둘러싸여 제자들과 길을 가는 예수를 찾아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다가가 몰래 그와 접촉하는 데 성공합니다. 놀랍게도 예수의 몸을 감싼 옷에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곧’ 여인의 몸은 치유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더 이상 출혈이 없다는 것을 여인은 느낍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 자신도 자신의 몸에서 뭔가가 흘러 나갔다는 것을 알아채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변화를 만든 이가 누구인지 찾으시며 뒤를 돌아보십니다. 32절 본문은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예수님이 둘러보셨다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만진 사람의 성별이 여자라는 것도 아신것 같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 눈에 띄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시도한 쪽이 예수님이 아니라 질병의 당사자인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치유를 받을 것이 너무도 간절해서 감행한 일이었지만, 이 여인이라고 해서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여인은 두려워 떨면서 예수님께 사실을 고합니다. 여인은 당시 정결 체계에서 자신이 감행한 일이 어떤 비난을 받을지 짐작한 것 같습니다. 나병에서 치유받은 남자처럼 직접 간청드리고 허락받는 것보다 몰래 접촉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도 이 비난을 의식해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만지는 것도 큰일이지만 예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 접촉해야 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도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예수가 하신 말씀은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반전’ 그 자체입니다. 마가복음 5장 34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기서 ‘딸아’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오늘 처음 만난 여자에게 ‘아버지’를 자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딸아’라는 부름은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이라는 보다 큰 틀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된 백성들이라는 공동체 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정결관련 율법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사장들은, 사제들은 정결한 사람들과 부정한 사람들을 구분하고 부정한 사람들로부터 성소의 거룩함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혈하는 여인처럼 ‘부정하다’고 간주되는 이들은 그들에 의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역 밖에 머물러야 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혈하던 여인을 ‘딸아’라고 부르며 이스라엘 공동체 바깥으로 내밀렸던 여인을 다시 안으로 복귀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다시 받아들여진 이 여인은 예수가 꿈꾸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넓고 포용적인지를 보여줍니다. 반면 정결법이 지향하는 세상은 어떤가요?
‘거룩함’을 지킨다는 명분이 있기는 했지만 행여 성소에 들어갈 자신들이 부정해질까봐 경계를 두르고 자기들을 지키기 바빴습니다. 그러니 그 경계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처지와 고통에 관심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겠지만 그 병이 치유되기까지는 우리도 어쩔 수 없어요. 일단 치료가 되고 나면, 제물 바치고 제사 드려서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도록 도울 테니, 치료부터 하고 오세요.”라고 말하는 냉냉한 세계입니다.
이처럼 냉냉한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고도 효험을 보지 못한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모험을 합니다. 외간 남자의 옷가에 손을 대서라도 그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 누리고 싶었던 여인의 간절함! 그 간절함에서 우러나온 적극적인 시도를 보시며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흔히 무엇을 믿는가, 그 내용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구원자,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 고백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가복음에서는 사람들의 영혼을 억누르는 귀신과 사탄도 예수님을 압니다. 귀신도, 사탄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며 소리를 지릅니다. 마가복음에서 믿음은 어떤 신앙 고백의 내용이 아니라 간절함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신뢰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예수에게 사실을 고하며 두려워 떨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신뢰’했다고 해서
불안이나 두려움 하나 없이 무결점의 확신을 했다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가는 예수에게 접근하면서 그녀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이 소망을 이렇게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하혈하는 내 몸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세상은 내 병이 부정을 옮긴다고까지 하는구나.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예수라면 부정을 오염시키는 통로인 이 몸조차 하나님의 능력이 지나가는 통로가 되도록 바꾸실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그녀의 믿음은 세상이 정해놓은 경계가 있음에도 그것 너머까지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한 ‘겨자씨만한’ 작디 작은 희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이 꿈꾼 하나님 나라는 자기처럼 사회에서 배제당한 사람도 모른 체하지 않고 품어주는 곳이었을 것입니다. 어쩌 하혈하는 여인이 치유받은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옷깃만 닿아도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진 능력과 그 안에 깃든 신성에만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신비한 능력들을 뽐내며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슈퍼히어로 같은 존재로 예수님을 상상하는 유아적 차원에 머물게 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하혈하는 여인의 간절한 믿음과 희망이 예수에게 가닿았을 때 비로소 열린 새로운 세상, 그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온전한 회복과 함께 하나님의 딸로 받아들여지는 공간은 행여 나에게 부정함이 미칠까 겁이 나서 거리두기에 바쁜, 불안과 공포에 압도당한 곳이 아닙니다. 그들의 부정함이 우리에게 전해져 우리 역시 부정해 진다면 우리 모두 똑같이 약하디 약한 존재임을 깨닫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 똑같이 취약한 존재라는, 공통의 감각이 깊이 뿌리내린 이 곳에서 우리의 약함은 서
로를 비난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은 우리 모두가 처한 삶의 보편적 조건이기에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는 사실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똑같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할 때,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에서 새롭게 봐야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이 하혈하는 여인의 몸과 예수님의 몸을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게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인가 싶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흘리는 여인의 몸과 남자인 예수의 몸, 나아가 나약한 인간의 몸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을 어떻게 똑같은 선상에 놓는가 싶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하혈하는 여인은 원하지 않는데도 몸 밖으로 계속 피를 흘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부정함을 타인들에게 흘리는 존재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도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자신에게 닿았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으신 분입니다. 바로 이처럼 하혈하는 여인과 예수님 둘 다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이 무언가를 타인과 세상에 흘려보내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 점에 주목했던 한 여성 신학자는 “우리는 모두 ‘구멍난(porous)’ 존재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구멍난’ 존재, 취약한 존재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숭숭 구멍이 뚫린 우리라는 존재가,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이 지나가는 기적의 통로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질병이 누군가에게 전해질 수 있는 의학적 전염의 경로가, 나의 부정함이 누군가를 더럽힐 수도 있다는 오염의 경로가 그 자체로 인간적 공감과 함께 신의 사랑이 전달되는 길입니다. 누군가를 더럽힐 수도 있는 바로 그 길로 한 여인은 예수 안에 깃들어 있던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여 온전한 회복과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만일 이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어 치유받고 마치 완전범죄에 성공한 것처럼 들키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어땠을까요? 치유받은 여인의 몸이 예수님의 초능력 같은 기적으로 낫기는 했겠지만 그것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 외에는 세상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여인이 낫고 나서 제사장을 찾아가 제사 드린 후 일상으로 복귀했다면 그 정결 시스템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결 시스템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생각도 한 톨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와 예수 단 둘이서만 경험한 그 놀라운 기적을 예수가 공개적으로 드러내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요? 거룩함을 지킨다는 명분을 가진 사제들이 정해놓은 경계의 허구성이 드러났습니다. 그 경계를 넘어서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한 그녀의 믿음도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아울러 예수님 역시 전혀 통제할 수 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흘려보내는 존재라는 그 점도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 안에 깃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가 가진 연약함 속으로 스며듭니다. 우리 모두는 약하지만 그 약함 속에서, 그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리 모두의 약함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깃든다는 원리는 자기를 지키기에 바쁜 정결법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꿈꾸는 교회 공동체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약한 부분이 사라지는 기적이 일어나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약함 그 자체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라면 우리는 하혈하는 여인처럼 치유받지 않더라고, 건강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나의 육체의 가시, 이 아픔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하다!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해서 약함이 사라진 결과로 자만해 진다면, 약함은 없어졌지만 교만해질 뿐이라면, 아픔 안에서, 연약함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며 사는 것이 충분한 은혜, 아니 넘치는 은혜가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내가 강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함입니다. 내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약한 내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를 통해 일하고 계심을 알아가는 실존적인 체험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