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제1독서
<나는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3,9-15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제2독서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4,13─5,1
형제 여러분,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18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5,1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복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0-3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미사 때마다 성령을 모독할 수 없게 하는 예방주사 같은 한 마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령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성령을 모독할까요? 성령에 자신 안에서 행하려고 하는 일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방은 100% 가능하지만, 일단 걸리면 100% 죽는 병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광견병입니다. 광견병 바이러스는 특이하게도 우리 몸의 면역세포를 다 피해 다닙니다. 뇌까지 도달하기 전까지는 세포도, 신경도 훼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뇌에 도달하면 100% 사망입니다. 아직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았지만, 광견병은 예방주사만 맞으면 100% 예방됩니다. 그런데도 한 해에 지구상에서 6만 명 정도가 광견병으로 사망한다고 합니다. 자기 몸 안에 광견병 예방주사가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에 광견병 바이러스는 무엇이겠고 또 그 광견병을 무력화시키는 예방주사는 무엇일까요? 광견병은 ‘공수병’이라고도 하는데, 물을 무서워해서 목이 말라서도 죽습니다. 사실 물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을 거부하게 만드는 바이러스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성령은 마치 성모 마리아께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십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긍정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잉태시키지 못합니다. 사람 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무라이가 된 천민 아이는 기둥에 들어가 죽은 어머니의 피로 도망치고 싶은 이기적인 자아가 죽었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의 자아, 곧 뱀을 죽이러 오시는데 그것을 긍정하고 있다면 성령님을 모독하는 게 됩니다.
2002년 4월 29일, 독일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총기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에르푸르트라는 도시의 구텐베르크 김나지움(10~19세 학생들이 다니는 인문계 학교)에서 퇴학당해 앙심을 품은 한 학생이 교사 열두 명과 여학생 두 명 등 총 열여섯 명을 죽인 사건입니다.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떨어진 로베르트(19세)는 기말시험을 치르지 않기 위해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발각되어 퇴학 처리되었고, 복수심에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한 교사가 나섰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총은 난사하는 그 앞에 60세의 라이너 하이제 교사는 복면을 쓴 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복면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가르친 학생 로베르트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이제 교사는 자기 가슴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총을 쏘고 싶으면 쏴라. 내 눈을 보고 방아쇠를 당겨보란 말이다.”
로베르트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오늘은 실컷 쐈습니다. 이제 재미가 없네요.”
로베르트는 순순히 총을 내려놓았고 하이제 교사는 그를 빈 교실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습니다. 잠시 후 로베르트는 교실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출처: 『어떻게 살 것인가』, 이충호, 하늘 아래]
하이제 교사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그 사람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임을 인정할 때 영향을 줍니다. 사실 퇴학 당한 것은 로베르트 자기 탓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 때마다 하는 “내 탓이요!”는 성령을 모독할 수 없게 만들고 말씀과 성체로 오는 성령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기도입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원수 같은 인간 때문에 내가 힘들고 암에 걸려 죽어가는데 그것이 어떻게 나의 탓입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원수 같은 인가도 용서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고정원 씨 같은 경우입니다. 그는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탓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매일 밤새워 기도했고 성령께서 용서할 힘을 주셔서 그를 양자로 삼게 하셨습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면 모든 것이 나의 탓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분 앞에서 부족한 게 다른 사람 탓이라고 하면 그 선물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생로병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이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하지요. 인간이라면 이 네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뜻밖의 사건으로 ‘늙음’을 겪지 않는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모두를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생(生)’에 대해서는 기쁘게 받아들이지만(물론 이 역시 자기의 기쁨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기쁨입니다), ‘로병사(老病死)’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하려는 우리입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그 순간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 본당에서 봉성체하며 만났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봉성체 갈 때마다 이 할머니는 자기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너무 아파서 못 참겠는데 자녀들이 병원에도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자녀들이 수시로 병원에 모시고 갔지만, 그때마다 의사는 아무런 병이 없다는 대답만 하셨습니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자기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 가족이 미웠던 것입니다. 그 미움이 커져서 더 아프고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고통, 나 혼자 이를 이겨내야 하니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혼자면 더 아픕니다. 나눠야 그래도 그럭저럭 버틸만합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자기 스스로 외톨이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프다고 가족들을 계속 욕하는데 과연 사랑으로 계속 받아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를 낮춰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낮춰야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겸손하라 명령하신 것은 우리 고통을 조금이나마 낮춰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또 율법학자들은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그들 모두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거부하려는 마음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모독한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과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을 모독한 죄는 모두 하느님께 대항하는 행위이기에 무거운 죄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독한 죄는 왜 용서받지 못할까요?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즉, 성령을 모독한 죄는 회개하지 않는 죄, 주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함께하려고도 하지 않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함께하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탐욕은 모든 것을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게 한다(몽테뉴).
사진설명: 사탄은 끝장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