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괴성모순례지
□ 개 요
한국 천주교의 순례지 중 한 곳으로,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하면 많은 분들은 웬 듣보잡 ! 하면서 선듯 갈 마음을 먹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청미천을 흐르는 장호원교만 건너면 바로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이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에는 장호원성당이라 불리기도 했단다. 에 위치했으며 본당은 청주교구 감곡성당.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와 더불어 성모성지로 이름이 높다. 다만 이곳은 엄밀히 말해 공식적으로는 아직 순례지이며 한 등급 위인 성지는 아니다. 하지만 인지도 자체는 성지 급.
매괴(玫瑰)는 로사리오의 중국식 표현이다.
□ 유 래
감곡본당은 1896년 설립되어 100년이 넘는 의외로 꽤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초대 본당 주임 신부는 프랑스 출신의 임 가밀로 신부로, 초기 한국 천주교와 관련이 깊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1893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바로 입국하여 그 다음해인 1894년 첫 본당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 신학당이 있었던 여주 부엉골에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성당이 사목지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산지 부락이어서 본당 이전을 생각하던 중, 사목 방문차 여주를 지나 장호원에 이르러 산 밑에 대궐 같은 집을 보게 되었다. 임 가밀로 신부는 이곳이 성당을 세우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임 가밀로 신부는
"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였으며, 부엉골로 돌아가서 매괴 성모님께 끊임없이 청하였다.
문제는 그 대궐 같은 집은 명성황후 민씨의 육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었다는 것.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신 왔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1896년 5월 성모성월에 그 모든 집터와 산을 매입, 묵주기도 성월인 10월 7일 본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 임 가밀로 신부
초대 본당 주임이었으며 51년 동안 한국 땅에서 생활하며 어머니가 선종했을 때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열정적으로 사목했던 임 가밀로 신부는, 루르드에서 조금 떨어진 타브르 교구 출신의 신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를 자주 방문하며 독실한 성모신심으로 신앙을 키웠다.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다음 해에 바로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발령이 나기 전 오지로 가는 자신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가르멜 봉쇄 수녀원으로 가서 기도했는데, 그 때 소화(小花) 데레사 수녀와 만나 영적 남매 결연을 맺었다고 한다. 이는 꾸준히 이어져, 소화 데레사 수녀가 24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하고 성녀로 시성된 후, 소화 데레사 성녀의 성상을 감곡 성당 내에 모시기도 했으며 그 성상은 지금도 감곡성당 내에 있다.
부임하고 신자들에게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라는 명언을 했다.
먼 이국 땅으로 가는 아들을 위해, 임 가밀로 신부의 어머니는 선물로 기적의 패를 한 보따리 안겨주며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임 가밀로 신부는 프랑스에서 직접 제작한 루르드의 성모상과 기적의 패를 한 보따리 들고 조선으로 입국했다.
전술한 것처럼 여주 부엉골에 부임한 임 가밀로 신부는 민응식의 집을 보고 성당을 세울 결심을 하지만, 당시 권력과 부를 손아귀에 쥔 민응식은 상상도 못할 가격을 불렀다. 이에 돈이 없는(…) 임 가밀로 신부는 "저 땅에 성당을 세우게 해서 당신께 봉헌하게 해 주십시오!!"라며 성모님에게 청하면서 밤에 몰래 민응식의 집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었다고 한다(…). -결국 여러 사건이 일어나며 민응식은 임 가밀로 신부에게 땅을 팔게 되었고, 이것은 거래문서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땅을 얻어 신이 난(…) 임 가밀로 신부는 즉시 성당을 지었다. 짓기 시작할 때는 강북에는 명동성당, 강남에는 감곡성당을 모토로 명동성당과 똑같이 지으려고 했으나, 짓는 도중 일제가 자재를 공출해 가면서 훨씬 작은 모습이 되었다. 마치 명동성당의 자식 같은 느낌으로, 외양은 똑같지만 크기는 아담하다.
임 가밀로 신부의 독문무공이자 절세신공(…)인 기적의 패 땅에 심기는 이후 일제가 성당 뒷동산에 강제로 신사를 세우려고 하던 때에도 발휘되는데, 일제의 만행을 본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자 임 가밀로 신부는 "당신께서 주셔서 성당을 지어 봉헌한 거룩한 땅이니, 당신께서 지켜 주십시오!!"라고 하며 또 밤에 몰래 신사 주변에 기적의 패를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후 신사 공사만 하려 하면 야생동물들이 떼거지로 나타나 방해하거나, 억수같은 비가 내리거나, 인부의 팔ㆍ다리ㆍ손가락(…) 등이 부러지는 안전사고들까지 겹쳐 공사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신사 공사는 철회된다.
복지부동의 표본을 보여주던 일제강점기의 천주교에서도 임 가밀로 신부는 핍박받는 조선인들을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썼고, 이에 서대문형무소에도 3번이나 수감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명목상 프랑스와 일본이 동맹이었기에 그 이상의 처분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더 이상 프랑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임 가밀로 신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임 가밀로 신부는 마지막으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드리고 죽게 해 주시오."고 말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임 가밀로 신부는 칼을 찬 일본 순사들과 함께 감곡 성당으로 돌아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다. 미사가 끝나고 엉엉 우는 신자들 앞에서 일본 순사들이 칼을 빼들었는데… 돌연 성당 문이 벌컥 열리며 동네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신부님!! 사셨습니다!! 조선이 해방되었어요!!!
성모승천대축일이 포인트. 임 가밀로 신부가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게 해 달라고 한 날이 바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이자 성모승천대축일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영화가 따로 없다. 그런데 미사 끝나고 성당 문 열고 들어왔다던 청년들아, 너희들은 미사 참례 안 하고 어디 갔었냐(…) 교중미사였나 보지
목숨을 건진 임 가밀로 신부는 그 뒤 2년간 더 사목하다가 1947년 10월 25일, "성모님, 저를 구하소서!!"라는 유언과 함께 선종했다. 유해는 성당 인근 야외에 모셔졌다가 83년에 성당 내 벽제대 아래에 모셔왔다.
□ 칠고의 성모상
8.15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일어나고, 터가 좋은(…) 감곡성당의 위치는 남하한 북한군의 진지가 되었다. 이 때 성당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북한군에게 여러가지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도깨비불 같은 것이 나타나 날아다니거나, 잘 서있던 성수대가 갑자기 굉음을 내며 쓰러지는 등등. 두려움에 떨던 북한군은, 성당 안 제대 위에 위치한 성모상이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성가대석에 올라가 성모상을 향해 총을 쏘았으나, 분명히 석고로 되었기에 총알 한 방 맞으면 산산조각 나야 할 성모상이 금강불괴를 시전했는지(…) 멀쩡히 서 있었다고 한다. 물론 가슴에 총알 구멍은 난 상태. 이에 북한군은 6발을 더 쐈고 성모상은 몸에 총 7군데의 총상이 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래도 부서지지 않자 더 북한군은 성모상을 직접 부수기 위해서 사다리를 놓고 망치를 들고 올라갔는데,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며 엄청나게 환한 빛을 비추어서 북한군이 놀라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공격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이에 질려버린 북한군은 "성당 내에 우는 여자(…)가 있어서 못 살겠다!!"며 성당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후퇴할 때 감곡의 사람들을 납북하려 했던 북한군이었으나, 그 이전에 동네 사람들은 죄다 성당으로 피신했다. 성당 내 우는 여자(…)에게 겁을 먹은 북한군은, 성당 안으로 들어와 주민들을 끌고 가지 못하고 그냥 후퇴했다고 한다.
이후 이 성모상은 수난받은 성모상, 성모 칠고(七苦)를 상징하는 성모상 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 부흥기
사실 이런 것은 가톨릭 내에서도 꽤나 신심이 열정적인 사람들이나 알던 사실이었으나, 2000년대 중반 무렵, 감곡성당이 30억이 넘는 엄청난 빚을 지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감곡 성당은 납골당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지역의 어떤 곳과 트러블이 일어났다. 결국 그것을 해결하지 못해서 무리한 사업추진과 더불어 30억이 넘는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다. 이런 초유의 사태에 천주교 청주교구는 교구 내의 유명한 엑소시스트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를 그곳으로 급히 부임시켰고, 김웅렬 신부는 갑작스럽게 진천 성당에서 감곡성당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하게 된다. 김웅렬 신부에게 1년에 발생하는 이자만 좀 막아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부임하는 날부터 사채업자들이 들들 달달 볶아대고 사무장을 폭행, 또 납골당 문제로 신자들도 분열된 상태에 엄청난 빚을 해결할 방도도 보이지 않고, 지인들은 김웅렬 신부가 돈 달라고 할까봐 전화도 받지 않는(…) 난감한 상황에서, 체중이 1달 사이에 10kg가 빠져버린(강제 다이어트) 김웅렬 신부는 모종의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야밤에 보따리 싸고 튀자!!"
…비범한 결단을 내렸으나 일과 기도를 하던 중에 "너마저 나를 버릴 셈이냐! 이 망할 자식아"라는 말씀을 듣고는, 마음을 돌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열정적으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평소성모신심이 깊었던 김웅렬 신부는 감곡성당의 유래와 그 신심, 루르드와의 관련 등을 연구하고 공부, 또 본인이 활발하게 강연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감곡성당과 수난 받으신 성모님의 이야기, 임 가밀로 신부의 영화같은 이야기들을 전국을 돌면서 사람들에게 알렸고 이에 눈물 콧물을 질질 짠(…) 신자들의 엄청난 방문이 이어지게 되며 삼삼오오 모은 그 신자들의 코묻은 헌금으로 30억이 넘는 빚을 1년 반만에 모조리 갚았다고 한다.
그리고 빚 다 갚았다는 증서를 자랑스럽게 교구청에 보내자, 빚 갚을 방도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교구장 주교님은 어리둥절하며 이게 뭐냐고 김웅렬 신부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 김웅렬 신부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울먹이며 "볼 것도 없이 그곳은 성모님이 계신 곳"이라며 이례적으로 빠르게 성모 순례지로 선포했다.
이에 신이 난(…) 김웅렬 신부는 평화방송에 장기출연하며 이런 사실들을 더 홍보했고, 더 많은 사람들, 게다가 개신교 신자들까지 오게 되었다. 그리고 적자 30억이었던 감곡성당은 김웅렬 신부가 배티로 발령이 나서 가게 되었을 때는 흑자 7억…… 대단하다.
로마 성모 대성전의 대사제 버나드 프랜시스로 추기경은 감곡 성모 순례지를 로마 대성전과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전과 성모 순례지로 인증, 지정했고 2009년에는 사도좌 내사원장 스탠포드 추기경이 전대사 특전을 부여했다.
아래 목록은 1안으로 영원히 유효한 전대사. 단체순례시, 혹은 신자 1명이 1년에 하루 날을 잡아 순례할 때, 아래의 조건들 하에서는 이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영원히 유효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알겠지만 이런 전대사 특전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8월 5일 성모 대성전 봉헌 기념일
10월 7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관련된 대축일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3월 25일 주님탄생 예고 대축일
8월 15일 성모승천 대축일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또한 7년간 유효한 전대사, 즉 2015년 6월 8일까지 추가로 유효한 전대사 조건은 이러하다. 전대사를 받기 위한 기본 조건을 만족시키고 아래와 결합할 경우 해당 신자에게는 전대사의 특전이 주어진다.
매괴 성모상 앞에서 전례에 참여했을 시
매월 첫 토요일 신심미사와 기도에 참여했을 때
2. 우 곡 성 지
□ 농은 홍유한 선생의 생애
홍유한 선생은 한국천주교 최초의 수덕자이다. 선생의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부친 홍창보(洪昌輔)와 모친 창녕 성씨(昌寧 成氏) 훤의 따님 사이에서 1726년(영조2년) 서울 아현동에서 출생하였다. 자(子)는 성문(聖文)이며 호(號)는 농은(隴隱 )이다.
1742년 16세에 부친의 권고로 당대의 대 유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으며 수학 중 특히 "천주실의" "칠극" 등 천주학(天主學 )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757년부터는 권철신(權哲身 ). 이기양(李基讓 ). 홍낙민(洪樂敏 ) 등과 더불어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들여와 신앙공동체를 만들기로 다짐하였고, 자신부터 먼저 신앙적 수계생활(守誡生活)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러 여건상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자, 1775년 선생은 홀로 소백산 자락 경상도 순흥 고을 단산면 구구리로 이주하여 복음의 깊은 뜻을 실천하며 살았고, 처음 뜻을 같이했던 다른 이들은 1779년 부터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講學 )을 시작하였다.
농은 선생은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강학회원들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이들과도 신앙적으로 깊은 친교를 나누면서 1785년 선종할 때까지 10년 동안 천주교 교리를 온몸으로 실천하였다 이러한 신앙적 열정은 1784년 이 땅에 천주교가 창립되는데 디딤돌이 되었다.
농은 홍유한 선생이 1785년 3월 10일 60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해 5월 27일(음 4월 19일)에 유택에서 50리쯤 떨어진 봉화군 봉성면 다덕 약수터가 있는 우곡리의 문수산 중턱에 묘 터를 잡아 안장을 했다. 전승에 따르면, 이 묘 터는 정조(正祖) 임금이 보낸 지관이 터를 잡았다. 1995년 3월 8일 천주교 안동교구는 선생의 후손인 홍관희 선생이 가토(加土)를 하기 위하여 묘지에 도리 석을 쌓으면서 봉분(封墳)의 흙을 파 헤쳤을 때 관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를 덮은 석회 위에 두텁게 진흙을 바르고 「山林處士 洪公之墓」라고 숯으로 쓴 명정(銘旌)이 발견되었다.
홍유한 선생 가계 가운데 그 분의 뜻을 이어 피를 흘리며 신앙을 증거안 순교자들은 13명이나 된다. 후손들이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기를 원했으나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선조 순교자들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던 중, 선조(先祖)인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13위(位) 순교자들의 가묘(假墓)라도 함께 모실 것을 안동교구에 청하였고, 교구는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받아들여 후손과 함께 교구 설정 40주년이 되는 2009년 5월 29일 13위(位) 순교 선조들이 순교한 각 순교터의 흙을 담아 가묘(假墓)를 조성하고 비를 세워 현양하게 되었다.
시기 | 인원 | 순교자 이름 |
신유박해 (1801년) | 5위 | 홍정호, 홍낙민 루카, 강완숙 골롬바 홍필주 필립보, 홍낙임 |
기해박해 (1839년) | 6위 | 홍재영 프로타시오, 심조이 바르바라, 홍(아기) 정소사, 성(聖) 홍병주 베드로, 성(聖) 홍영주 바오로 |
병인박해 (1866년) | 2위 | 홍봉주 토마스, 홍베드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