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수) 07:00.
안양문화유산해설사회 선생님 18명과 강혜영 학예사님과 함께
[2024년 문화유산해설사 양성교육 및 문화유적 탐구 서산 역사문화 답사]길을 올랐습니다.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가운데 07:00에 안양문화원을 출발하여 두 시간이 걸려서 09:00에 서산 개심사에 도착하였습니다.
개심사(開心寺)
상왕산(象王山)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고려 충정왕 때 처능대사(處能大師)가 중창하고 조선 성종 15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다.
코끼리의 왕이라는 뜻의 상왕산(象王山)은 부처님을 상징하며 '무아경(無我經)'을 설한 인도의 산 이름이기도 하다.
개심사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오랫동안 수행자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대웅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영산회상도, 달마대사관심론 목판, 모자리혹론 목판 등의 보물 14종과 도지정문화재 명부전, 심검당 등이 있다.
1960~70년대에는 비구니스님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강원(講院)으로 이름이 났었고 구부러진 소나무 기둥이 아름다운 개심사 범종각도 이때 건립되었다.
특히 이 범종은 일제때 사찰의 쇠붙이를 약탈해간 것을 참회하기 위해 일본인이 설판시주하여 그 뜻이 깊다.
개심사의 암자로는 영구암(靈龜庵), 백련암(白蓮庵), 동전(東殿), 부도전(浮屠殿), 양수암(兩水庵), 남전(南殿), 중암(中庵), 은선대(隱仙臺), 묘련암(妙蓮庵) 등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영구암터만을 참선수행하는 '보현선원'으로 복원하여 해마다 수행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봄이면 기와집을 배경으로 청벚꽃, 왕벚꽃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여름에는 백일홍, 가을에는 화려한 단풍이 방문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떠나 불국토(佛國土)에 들어서서 계곡길을 오르면 내포문화숲길 안내판이 있습니다.
충청도 서해안에는 리아스식 해안의 깊숙한 포구(浦口) 주변의 내포10촌을 형성하였습니다.
개심사(開心寺) 입구는 마음을 열고(開心), 마음을 씻는 세심동(洗心洞)입니다.
봄비가 내리는 계단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계단길을 오르면 양쪽의 계곡물이 합수되는 돌다리를 건너갑니다.
부처님오신날이 얼마 남지않아 계단길 옆에는 연등(燃燈)이 달려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마음을 씻고 계단길을 올라 개심사 경내에 들어서면 마음을 비추어서 불심을 알아보는 경지(鏡池)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연못은 아미타부처님이 상주하시는 극락세계에 아홉가지 등급으로 태어나는 구품연지(九品蓮池)입니다.
지극(極)한 즐거움(樂)이 있는 극락(極樂) 세계를 나타내는 연지(蓮池) 위에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마음을 비추어 보는 경지(鏡池)를 건너는 다리 위에서 파란 우산 깜장 우산 찢어진 우산을 쓰고 나란히 서서 마음을 비추어 봅니다.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현판이 걸린 안양루(安養樓)로 올라갑니다.
안양루 옆에 활짝 핀 왕벚꽃 앞에서 포즈를 취해봅니다.
象王山開心寺 현판 아래 열린 바라지 창문(窓門)안으로 대웅보전(大雄寶殿)이 보입니다.
안양루 동쪽에 설치된 해탈문(解脫門)으로 들어갑니다.
이곳처럼 누마루 아래로 들어가는 누하진입(樓下進入)이 아닌 옆쪽으로 돌아서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각진입(隅角進入)이라고 합니다.
안양루의 동쪽에 있는 해탈문으로 들어오면 안쪽에 안양루(安養樓)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안양루 앞에서 대웅전 영역을 해설하는 박석환 회장님.
대웅보전
대웅보전의 용마루 중앙부분에 청기와 한 장이 올려져 있습니다.
이 청기와는 영조 임금이 개심사 아미타불후불탱화 불사에 참여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실 관련 사찰을 의미하여, 불교가 멸시를 받던 조선시대에 유생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찰이었습니다.
대웅보전의 서쪽에는 스님들이 참선공간인 심검당(尋剱堂)이 있습니다.
심검당에 지붕을 낮게 덧대어 지은 건물의 기둥은 원목을 껍질만 벗긴 자연목의 모양을 그대로 살린 도랑주와 상인방(두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부재)을 사용하여 멋스러움을 더해줍니다.
대웅보전 영역
대웅전에서 명부전(冥府殿) 영역으로 이동합니다.
명부전에는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하겠다는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상(十王像)을 모셨습니다.
명부전 앞에는 개심사의 보물 청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청벚꽃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선생님들
4기 선생님들의 도도한 발걸음
아침까지 내린 비에 젖은 청벚꽃잎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쳐졌지만 만개한 초록의 꽃잎이 싱그럽습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청벚꽃을 보기위한 상춘객의 발걸음이 이어집니다.
담장 아래의 청벚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연분홍 고운 왕벚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명종대왕 태실>
개심사 인근의 드넓은 초지(草地) 사이에 있는 명종대왕 태실이 있는 태봉산(胎封山)으로 올라갑니다.
가파른 경사지를 오르면서도 행복한 웃음기가 넘쳐납니다.
언덕길을 오르면 정상부에 명종대왕태실(明宗大王胎室) 안내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비가 그치고 나니 명종태실(明宗胎室) 표석 뒤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이 싱그럽습니다.
명종대왕 태실 앞에는 세 개의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아기비(우)와 중수비(중), 가봉비(좌).
남쪽의 비는 명종이 태어난 4년 후인 1538년(중종 33)에 명종의 태(胎)를 깨끗히 씻어서 말린 후 태항아리에 담아 태실을 만들면서 세운 것으로 '대군춘령아지씨태실(大君椿齡阿只氏胎室)'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 아기비는 방부하엽(方趺荷葉-네모난 받침돌에 연잎 머리 장식)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북쪽의 대리석으로 만든 비는 명종이 즉위 후 국왕의 태실로 봉심하고 1546년(명종 1)에 세운 비로 '왕자전하태실(王子殿下胎室)'이라고 새겨져 있고, 방부이수비(方趺螭首碑-네모 받침돌에 용무늬 머릿돌)로 조성되었습니다.
가운데 중수비(重修碑)는 1711년(숙종 37)에 종전의 비석이 전부 손상된 까닭에 '왕자전하태실비(王子殿下胎室碑)'를 개각하여 세운 것으로 등이 4엽화문으로 장식된 귀부대좌 위에 용과 구름무늬로 새긴 이수(螭首)를 가졌습니다.
비신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귀부의 꼬리는 세 갈래로, 뒷다리는 굽어서 조각되어 있습니다.
명종태실은 현재 보수공사 중입니다.
보물 제1976호인 명종대왕 태실은 32개의 부채꼴 판석을 깔아 8각 지대(地臺)를 만들어 8각의 돌난간을 세우고 태실과 8각 옥개석을 놓았습니다.
조선시대 태실의 관리는 관할구역 관리의 업무에 포함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태실을 고의로 훼손하거나 벌목, 채석, 개간 등을 하였을 때에는 국법에 의하여 엄벌하고 있었으므로 명종 태실도 대체로 양호하게 관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8~29년 전국의 왕실 가족 태실을 서삼릉으로 모아서 태실군을 만들었습니다.
서삼릉으로 모여진 왕의 태실군은 둥근 콘크리트 구조물 안에 태를 봉안하고 네모난 콘크리트 두 개를 연결하여 일(日)자 형태로 덮어서 전체 모습을 일장기 구조로 만들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려 하였습니다.
태봉의 수리를 위해 해체되어 있는 석물들.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태실이 훼손되면서 석물들도 훼손 또는 유실 되었으나 명종대왕 태실의 석물들은 그나마 온전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사방석과 중동석, 개첨석(蓋簷石) 및 연엽주석, 연엽동자석, 횡죽석으로 난간을 둘렀던 석물들이 보수를 위해 해체되어 있습니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청명한 명종태실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내려갑니다.
사방으로 드넓게 펼쳐진 목장의 초지 가운데에 돌출되어 우뚝 솟아오른 태봉산(胎封山)은 돌혈(突穴)의 명당입니다.
<보원사지>
가야산 자락 보원사지(普願寺址)로 이동하여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선생님들이 준비해온 각종 나물과 반찬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맛있는 비빔밥을 준비하는 선생님들
서산 보원사지(瑞山 普願寺址).
서산 보원사지에 있었던 사찰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에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따르면, 화엄사, 해인사 등에 더불어 신라 10산 10사찰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지의 면적은 10만 2,886㎡이다.
일대의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기와조각 등이 넓게 산재해 있어, 많은 사찰 전각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남아있는 유물로는 석조(石槽), 당간지주(幢竿支柱), 5층석탑(五層石塔),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承塔),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承塔碑)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보이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고, 부근에 백제때의 마애불로 유명한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있어, 삼국통일 전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도 이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사적 316호로 지정되었다.
서산 아라메길 안내도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가야산(伽倻山) 자락의 서쪽 기슭 용현계곡을 사이에 두고 넓은 보원사지가 자리합니다.
5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104호)을 설명하는 김숙희 선생님
오층석탑의 해설을 경청하는 선생님들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대한민국의 보물 제104호입니다.
고려 초기의 탑파 양식을 보여주며, 높이가 9m나 되는 큰 탑입니다.
아랫 기단의 각 면에 사자 모양을 새기고 윗 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겨 신라 말기 석탑의 수법을 보여줍니다.
한편 얇고 길게 뻗은 처마가 백제의 전통을 따르고 있어 매우 특이합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 10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보물 제105호)을 해설하는 최정희 선생님
이 탑은 법인국사 탄문(坦文, 900~975)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습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습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0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 보물 제106호)를 해설하는 강호인
고려 시대의 승려 법인국사 탄문을 기리는 탑비입니다.
비 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이 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龍)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습니다.
등 위에는 받침을 두고 비를 얹었으며, 비 머리에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 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습니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0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03호)를 설명하는 박미숙 선생님
이 당간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Cm 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습니다.
안쪽 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습니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랫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습니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습니다.
양식과 조각 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0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새파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면서 답사를 즐기는 안양문화유산해설사회 선생님들은 보원사터에서 축복을 듬뿍 받았습니다.
용현천을 건너에 오층석탑과 법인국사부도와 부도비가 보입니다.
석조를 해설하는 노이희 선생님
통일신라시대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석조(石槽, 돌그릇)입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 시대의 일반적인 형식을 보입니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입니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0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보원사지를 둘러보고 백제의 미소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상을 보러 이동합니다.
마애여래삼존상은 김병호 선생님이 해설을 하였습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국보 제84호
장쾌하고 넉넉한 미소를 머금은 석가여래 입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간직한 제화갈라보살 입상, 천진난만한 소년의 미소를 품은 미륵반가사유상은 백제 특유의 자비로움과 여유를 느끼게 해준다.
이들 불상의 미소는 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를, 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볼 수 있다.
동동남 30도 동짓날 해뜨는 방향으로 서 있어 햇볕을 풍부하게 받아들이고, 마애불이 새겨진 돌이 80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아 미학적 우수함은 물론 과학적 치밀함도 감탄을 자아낸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발견 일화
보원사터로 조사 나온 국립부여박물관장 홍사준 선생은 발견 과정에서 지나가던 한 나뭇꾼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있는디유,
양 옆에 본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쥐고 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여래입상(如來立像)-높이 2.8미터
연꽃을 새긴 대좌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둥글고 풍만한 얼굴 모양에 반원형의 눈썹, 얇고 넓은 코, 살구씨 모양의 눈을 크게 뜨고 미소를 짓고 있어 유쾌하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법의의 양 어깨를 모두 걸친 통견의 모양으로 두껍게 표현하여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고 앞면의 U자형 주름이 다리 부근까지 내려온다.
머리 광배의 원 안쪽에는 연꽃을 새기고, 바깥쪽에는 불꽃무늬를 새겨 보주형(寶珠形)으로 조각했고,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시무외인(施無畏印-중생의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준다는 의미)과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내린 모양의 여원인(與願印-중생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준다는 의미)을 표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불상에는 이 두 손모양을 함께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통인(通印)이라고 하며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구부리는 특징을 보입니다.
자비로운 석가여래는 이마에 백호(白豪) 자국이 있고, 육계와 나발을 하고 있습니다.
법의를 양쪽 어깨에 모두 걸친 통견(通絹)으로 가슴에서 ? 모습의 옷매듭을 짓고 앞면의 U자형 주름을 이룬 전형적인 백제 불상의 모습입니다.
수인(手印)은 '중생의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주고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는' 시무외 여원인을 하고 있습니다.
보살입상(菩薩立像)-높이 1.7m
머리에 다양한 무늬와 꽃으로 장식된 관(冠)을 쓰고 있는 보살입상은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양손으로 보주(寶珠)를 들고 머리에는 연꽃을 새긴 보주형 광배를 조각했습니다.
보주를 두 손으로 받쳐든 보살상을 봉보주보살(捧寶珠菩薩)이라 하며 백제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마애여래삼존상의 이례적 구성은 당시 백제에 [법화경(法華經)]의 유행과 관련하여 석가에게 성불하라는 수기(授記)를 준 연등불, 즉 제화갈라보살 표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중국 남조와 일본의 아스카시대[飛鳥時代] 봉보주보살을 토대로 관음보살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높이 1.66m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으며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전형적인 반가사유상의 모습입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으며 머리에는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뒤에는 연꽃이 새겨진 보주형 광배가 있습니다.
보통 이 상은 석가가 태어났을 때 출가하기 전 고뇌하는 모습으로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이라고도 하며, 이러한 번뇌하는 모습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으로 여겨집니다.
머리 광배(光背)의 원 안에는 연꽃을 새기고, 바깥쪽으로 불꽃무늬를 새겨 보주형(寶珠形)으로 조각하였습니다.
불꽃무늬 속에는 세 분의 화불(化佛-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여러 모습으로 변화하는 불신)을 새겼습니다.
마애삼존상 앞에서 한 컷
해가 뜨는 오전 시간에 햇볕의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다르게 보입니다.
<해미읍성>
해미읍성(海美邑城)으로 이동합니다.
서산 해미읍성은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에 있는 조선 전기의 돌로 쌓은 읍성이다.
세종 때 병영으로 축성된 성으로, 임진왜란 이후 효종 때 현치를 이곳으로 옮기며 일반적인 읍성이 된 특이한 성이다.
그렇지만 병영을 옮김과 동시에 호서좌영을 이곳에 설치함으로써 군사적으로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지속하였다.
성 외곽으로는 해자를 설치하고 성 내부는 T자형 도로를 중심으로 배산(背山) 형식의 구릉 아래 동헌과 객사를 배치하고 나머지 공간에 민가를 배치하여 전형적인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반원형의 홍예문(虹霓門)입니다.
성 밖은 해자(垓子)를 둘렀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하였고 현재 남쪽 해자를 복원공사 중입니다.
진남문의 안쪽 인방석(引防石)에는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을 통하여 성의 일부를 고치고 성벽을 높이는 등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T자형의 중심 도로로 들어갑니다.
제2처 십자 형틀 지신 주님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
충청도사투리 : 호야나무
1790년~1880년대에 이곳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뻩어 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들이 지금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폭풍우로 부러져 외과 수술을 시행하였으나 재차 부패되어 2004년 4월에 외과수술 및 토양개량 등을 거쳐 보호 관리되고 있음.
옥사(獄舍)로 들어갑니다.
조선시대의 형벌(刑罰)인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의 오형(五刑)에 대한 해설을 하는 박석환 회장님
옥사의 모습
옥사에 갖혀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재현 모습
옥사 밖에는 방문(榜文)이 붙어 있습니다.
안쪽으로 동헌(東軒)과 객사(客舍)가 보입니다.
동헌 뒷쪽 언덕 위에는 1491년(성종 22) 충청병마절도사가 지은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활을 쏘며 무예를 익혔고, 문객들이 시를 짓고 글을 남겼던 청허정(淸虛亭)이 있습니다.
해미읍성의 모습
해미읍성 바깥길을 따라 걸으면 북쪽으로 가야산이 보입니다.
<해미국제성지순례길>
해미와 천주교는,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읍성과 해미성지를 방문한 사실을 기념하고 그 의미를 기억하고자 조선시대 내포지역의 순교자들이 해미읍성까지 압송되던 경로를 복원하고 정비하여 조성된 된 순례길입니다.
100년 가까운 천주교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구덩이와 웅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조선 후기에 이곳 해미현감은 호서좌영장과 토포사를 겸하고 있었고, 그 관할구역이 내포지역 12개 군현-해미, 대흥, 온양, 면천, 태안, 결성, 예산, 평택, 아산, 신창, 덕산, 당진에 이르렀다.
그래서 내포에 살던 천주교 신자들은 이곳 해미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해미는 순교자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박해 당시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 한티고개, 해미읍성, 호야나무, 자리개돌, 진둠벙, 유해 등-
해미순교자국제성지 입구
해미순교성지는 1797년(정사박해)부터 1872년까지 박해가 있었던 곳으로서,
1. 조선시대의 순교자 약 1만 명 가운데 충청남도 서북부(내포) 지역의 교우 1천여 명 이상이 순교한 곳이다.
3. 그리고 이 곳은 처형방법이 사약, 몰매, 교수, 참수, 동사와 함께 사람을 살아 있는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과 물에 빠트려 처형하는 수장형장(진둠벙)이었다.
4. 1935년 프랑스 범(Barraux) 신부님에 의해 순교자유해를 찾게 되었고, 뼈와 치아, 머리카락을 모신 기념관에는 순례자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이곳은 순교자들이 죽음의 행렬 중에 바쳤던 "예수 마리아" 기도소리가 구경을 하던 외인들에게는 "여수머리"로 들렸기에 저들은 이곳을 "여숫골"이라 하여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그리고 해미지역에는 또한 신앙선조들이 압송되었던 "한티고개성지"와 투옥, 고문, 처형이 있었던 "해미읍성성지(옥터, 호야나무)", 그리고 자리개질 처형이 자행된 "서문밖 성지"가 있는 곳으로서 연간 10만 여명의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읍성과 해미성지를 방문하고 로마교황청에서 인정한 순교자국제성지 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전 세계 30곳의 순교자국제성지 중 두 곳이 있습니다.
로마교황청에서 인정 받은 카톨릭 서울순례길과 해미국제순교성지 두 곳입니다.
시복기념비(諡福記念碑)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복하신 해미순교복자 세 분의 기념비 입니다.
복자 김진후 비오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입니다.
순교 자리개 돌
해미읍성 서문 밖 수구위에 놓여 있던 돌다리로서 병인박해(1866) 때 천주교 신자들을 자리개질로 처형했던 사형도구입니다.
여숫골
순교성지가 조성되어 있는 이곳은 '여숫골'이라고 불립니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사람들이 "여수(여우의 충청도 방언) 머리"로 알아들으면서 생긴 이름입니다.
이곳에는 1935년에 서산성당 범 베드로 신부의 노력으로 발굴한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순교기념관'과 무덤, 순교돌인 '자리개돌', 수장터인 '진둠벙', 순교자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 등이 있어 순교 당시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진둠벙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인원이 많아지자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미 진영의 서녘 슬판에 십 수 명씩 끌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산 사람들을 밀어넣어 흙과 자갈로 묻어버렸습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지정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농사짓던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 버려진 뼈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 때 캐어낸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생매장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서 수장을 시켰습니다.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였는데,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 둠벙'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수습된 돌들
순교자들의 무덤과 조형물
내포교회는 언제나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서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했으며, 1868년(고종 5) 무진박해 따까지 박해가 있을 때마다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습니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집안도 이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이 지역의 신자들이 전라도 북부, 경기도, 충청도 북부,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복음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와 해미순교탑
2014녀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복하신 해미순교자 3위 복자 상
오늘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함께한 서산 역사문화 답사의 마무리 인사말씀을 하고있는 박석환 회장님
오늘 하루 알차고 뜻깊은 시간을 함께 하신 회장님과 안양문화유산해설사회 선생님들과 강혜영 학예사님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재치 만점 문애심 선생님과 회장님이 준비한 답사의 내용들을 회상하는 퀴즈타임입니다.
<참고자료>
[2024 문화유산해설사 양성교육 및 문화유적 탐구, 서산 역사문화 답사 자료집-안양문화원]
[해설-박석환 회장님]
첫댓글 점심먹고 나른한데 풍부한 기억꺼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의 행복한 답사 재빠르게 한번더 다녀왔네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별도로 차를 몰고 참석해 주신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마애삼존상의 해설도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빠름 빠름 강호인샘 감사합니다
다시 복습되어 김병호샘 말씀 처럼
어제로 순간이동된듯 합니다
애쓰신 회장님 임원진
덕분에
즐겁고 행복한 답사 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편안한 웃음을 보여주시는 고문님이 함께하여서 행복한 답사였습니다.
다음 모임에서 뵙겠습니다.
강호인해설사님
정성가득한 개심사-해미순교성지길 정리 감사합니다. 코스마다 핵심을 잘 잡아주셨습니다.
회장님의 명품 해설을 어설프게 듣고,
정리를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교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모임 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