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3. 4. 2(주일) - 사순절 여섯째 주일, 종려주일 - (2023년 13주)
제목; “여호와의 종의 사명”
성경; 사 50:4-9a (p.1029) (시 118:6-7, 453<506>, 461<519>, 5)
<예배의 부름>(시 118:6-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2월 22일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혹은 ‘성회 수요일’로부터 시작된 2023년도 사순절이 오늘 종려주일부터 시작된 고난주간을 끝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경건과 절제 훈련의 계절”이라고 불리는 사순절(Lent)마지막 고난주간,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는 절정의 주간을 맞이하면서,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노력했는가 점검해 보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사순절 남은 한 주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보혈의 능력을 덧입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귀한 은혜의 시간들이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유인물 보며)
사순절 기간 동안 계속 말씀드렸는데, 종려주일(Palm Sunday)에 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면, 원래 종려주일은 초대교회에서는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 혹은 「세례 지원자 주일」(Dominica Competentium)이라고 불렀습니다. ‘호산나 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마 21:9) 하고 외친 것에 기초해서 불렀으며, ‘세례 자원 주일’이란 명칭은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 위하여 행하는 지원자들의 준비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지원자들은 이 주일에 처음으로 ‘기독교 신조’와 ‘주님의 기도(주기도문)’를 배웠고 그것을 비밀로써 간직했습니다. 이와같이 종려주일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을 공적으로 알려주는 절기로써 그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호산나 주일’과 ‘세례 자원 주일’이 현대적 의미의 「종려주일」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28년 이후 영국 국교(Anglican Church) 의식에서 나왔습니다. ‘팔마룸’(Palmarum)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뜻은 ‘종려의’란 뜻이며, 종려가지에 대한 축사와 그 다음에 오는 행진 의식을 말합니다. 가능한 곳에서는 종려가지에 대한 축도가 있은 후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분배해준 다음에 성직자와 성도들이 두 줄로 행진을 하였습니다. 이 행진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을 모방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승리의 입성을 축하하는 주일(마 21:1-11, 막 11:1-10, 눅 19:28-40, 요 12:12-19)이며, 고난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며, 또한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일주일을 시작해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마지막 주간,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온전히 닮아가는 귀한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사 50:4-9)은‘고난의 종의 노래’ 혹은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제2이사야(40-55장)에는 네 개의 ‘고난의 종의 노래’(42:1-4, 49:1-6, 50:4-9, 52:13-53:12) 중의 세 번째 노래입니다.
소위 제2이사야에 의해서 기록되어진 이사야 40-55장은 바벨론 포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주전 6세기 바벨론이 페르시아(바사)에 의해 멸망하게 될 즈음 유대인의 귀향에 대한 희망이 고조되었던 시대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고있는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희망이란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과 고국으로의 귀향을 의미합니다. 상당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으로의 귀환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국으로의 귀환은 일명 제2의 출애굽(Exodus)이라고 부를 만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제2이사야 선지자는 40-55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믿었던 바벨론 포로들에게 이들을 위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과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런 버림받아 멸망 당해 바벨론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여호와의 종의 충성’에 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 오늘 본문 말씀의 구성 :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전반부(4-6) : 여호와의 종의 고백
4절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을 고백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을 “주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전기 예언서(여호수아서 1회, 사사기 2회, 사무엘하 6회, 열왕기상 2회)나 시편(7회)에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사야서(22회)와 예레미야서(12회)에서 자주, 그리고 특별히 아모스서(20회)와 에스겔서(216회)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용례를 보여주는 칭호입니다. 화자 자신은 낮추면서 여호와의 주 되심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주셔서 곤고한 자를 도와줄 줄 알게 하셨으며, 아침마다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셨다고 말합니다(4). 그리고 이렇게 학자의 혀를 갖고 귀가 열린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을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5). 그는 자신을 치는 자들에게 등을 내어주며, 자신의 머리털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고, 모욕과 침 뱉음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참아냅니다(6). 이렇게 ‘여호와의 종의 노래’ 가운데 처음으로 여호와 종의 고난과 고통이 소개되지만, 그가 보여준 태도는 너무나 당당합니다. 이러한 당당함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과 깨우심에 근거하고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2. 후반부(7-9) : 여호와의 종의 확신
후반부는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전반부와 달리 여호와의 종이 확신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소개됩니다. 여호와의 종은 주 여호와께서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은 자신을 모욕당하지 않게 하시며, 자신의 얼굴을 부싯돌같이 만들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7). 자신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있으므로, 어떤 대적이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며(8), 하나님께서 자신을 돕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을 정죄할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9).
이렇게 ‘여호와의 고난의 종의 충성’을 노래하는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한 구원과 연결해서 해석되고 자주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 부활절을 일주일 앞둔 이 주일에 읽는 오늘 본문 이사야 50:4-9의 ‘고난의 종의 노래’는 고난 주일의 의미를 한층 깊이 있게 전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학자인 여호와의 종의 사명은 무엇이며, 오늘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1. 여호와의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1) 여호와의 종은 “학자”라는 사실입니다(4).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의 충성된 종으로 표현된 “나”는, 자신을 “학자들의 혀”(4)를 받은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학자”란 히브리어 ‘림무드’(למוד)는 구약성경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낱말로, 원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자’란 뜻으로, ‘제자’(disciple)또는 ‘배우는 사람’, ‘훈련받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나”는 “학자(림무드)의 혀”를 갖게 되었습니다. 즉 여호와의 종, “나”는 학자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훈련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종은 날마다 여호와로부터 배우고 깨우칩니다. 그래야 그는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듣고 배움 없이는 좋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4-5절에서 여호와의 종인 학자가 어떻게 교육받는지 보여줍니다.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이 두 말을 요약하면 “여호와께서 아침마다 종, 즉 제자의 귀를 열어 깨닫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자기의 말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받아서 전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아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의 종인 학자를 ‘아침마다 귀를 깨우쳐’ 교육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아침마다”(보케르, בקר)는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로써 ‘매일 아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상태를 뜻하는 시간 개념으로 ‘매 순간순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매 순간순간 학자의 혀를 주시고, 귀를 열어주셨으므로 여호와의 종은 거침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거역하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순종했습니다(5). 그리고 나를 때리는 사람들에게 등을 맡길 수도 있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는 뺨을 맡길 수도 있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해도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6).
그리고 이런 여호와의 종의 모습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 순간마다 성부이신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교통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순종하실 것임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 시절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택하셔서 “학자”의 “혀”를 주셔서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을 선포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매일 아침마다 “귀”를 열어 깨우쳐 주시며 종의 사명을 깨닫고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역시 한 말씀도 자기 생각대로, 의지대로 하신 것 없이 성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주의 종으로 충성을 다 해야 합니다.
또 고난의 종이 제자로서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우리 기독교인들 역시 듣고 배우는 일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매일아침마다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시고, 미처 알지 못한 것들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순절 마지막 남은 고난주간, 이 한 주간만이라도 매일 아침 새벽을 깨우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합시다. 또 나의 편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하며 참회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그리스도의 섬김의 도를 배우고,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2)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4-9).
여호와의 종은 매 순간순간 학자들의 혀를 주시고 귀를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근거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여호와의 종의 삶의 자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와주신다”(7)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도우시므로”(야아자르, יעזר)의 원형 ‘아자르’(עזר)는 4절에서 여호와의 종이 사람들을 참 지식으로 도와주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여호와로부터 받은 자신의 올바른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하며 여호와를 통해 고난의 때에 도움을 받습니다. 더욱이 여기서 “도우시므로”(야아자르)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여호와께서 종의 사역 전반을 지지하며 계속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종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도움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것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8)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의’가 있어야 여호와의 종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여호와의 종의 노래’를 인용하여, 그 누구도 여호와께서 의롭다고 칭해 주신 택하신 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롬 8:31-35).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3-35)
2. 여호와의 종의 사명 : 여호와의 종은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1) 여호와의 종은 곤고한 자를 돕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4).
여호와의 종은 그가 배우고 깨닫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바를 곤고한 자를 돕는데 사용합니다. 곤고한 자들의 위로자와 돕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곤고한 자들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존재합니다.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이 주신 깨달음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함으로써 일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을 의롭다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증언함으로써 곤고한 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4a)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종은 “학자의 혀”를 지닌 교사로서, “곤고한 자를 말로써 도와주어야 합니다.”(4)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은 “곤고한 자”입니다. 여기서“곤고한 자”, 즉 히브리어로 ‘야에프’(ףעי)는 문자적으로 말하면 ‘피곤하고 지친 사람’으로, ‘나약한 자’, ‘피곤한 자’등으로 번역됩니다(사 40:28,30,31).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피곤해 기진맥진한 사람으로, 어렵고 힘든 환경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오늘 본문이 선포된 시대에 적용한다면, 이들은 먼저 유다의 멸망 때문에 절망하는 유대인들, 특히 바벨론에서 포로로 사는 유대인들, 혹은 유대 땅에 남아서 민족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는 본토의 유대인들을 가리키며, 확대하면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희망할 수 없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일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게 견뎌야 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종교적으로 정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고통이 이들의 죄 때문에 일어난 징벌이라는 종교적 가르침이 이들을 더욱 짓눌렀을 것입니다.
예언자가 활동한 당시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대부분 ‘곤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곤고한 자들을 위로하는 위로자로서의 사명이 종의 사명입니다. 지금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는 “학자의 혀”가 필요했습니다.
오늘날도 곤고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곤고한 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킵니까? 오늘 피곤하고 지친 곤고한 현대인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먹을 것이 적었던 것이 과거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서 문제가 될 만큼 우리는 경제적으로 많이 부유해졌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인의 활약과 한국 상품의 광고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재난과 아픔이 있는 곳에 한국인의 봉사와 헌신이 빛나는 성숙미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자부심도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인은 세계인의 눈으로 볼 때 잘 사는 국민이 되었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느끼는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합니까? 온갖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전통적 가치들 이를테면 ‘충, 효, 가족, 공동체, 의리, 명예, 심지어 신앙’마저 경제와 생존경쟁 앞에서 무력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경제적인 성장은 어느 정도 이루었을지 모르지만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우리 모두 치유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단적인 예를 사회 현상에서 찾아보기로 하면,
세계보건기구(WHO)는 ‘우울증’을 21세기에 인류를 괴롭히는 10대 질병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우리나라 전 국민의 8%인 약 320만 명이 항상 우울증에 시달리고, 가끔 우울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53.60%나 된다고 합니다. 국민 전체의 반이 우울한 기분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한국의 자살 통계가 반증해 줍니다. 지난해(2022년) 발표된 WHO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인구 10만 명 당 26.9명이 자살했는데(2019년)이 숫자는 전 세계에서 3위이며, 소위 선진국이라고 말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30개국 중 1위에 해당되는데, OECD 평균(11.3명)보다 2.3배나 많으며,지난 2003년 이후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발생한 한국 최고의 영재들이 들어간다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의 학생들과 교수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영재’라고 불리는, 최고의 두뇌를 가진 학생들과 교수의 자살은, 우리가 얼마나 큰 좌절과 정신적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극심한 입시 경쟁과 그 후에 이어지는 취업 전쟁으로 10-20대의 젊은이들은 스팩을 쌓기 위해 온갖 종류의 학원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의 손에 들려진 책들은 주로 성공 위주의 서적이나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 관련 수험서나 영어 관련 서적들입니다. 무엇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삶에 원대한 비전과 희망을 품을 시간도 경험할 기회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공부만 잘하면 되고, 성인들은 반듯한 직장이나 돈만 있으면 성공과 행복의 조건을 갖춘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명퇴와 조기 은퇴 등으로 늘 불안하고 쫓기며 살아가는 중년들의 모습이 쉽게 발견됩니다.
이것이 최근 평범한 한국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모두 외적으로 세련되고 건강해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슬프고 상처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피곤하고 지쳐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사야 본문이 선포될 때의 그 “곤고한 자”는 먼저 유다의 멸망 때문에 절망하는 유대인들 특히 바벨론의 유대 포로인들, 나아가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희망할 수 없다고 느끼는 유대의 모든 사람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고, 주의 종, 학자를 보내어 해방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곤고한 자의 아픔과 고난을 알고 그의 종을 보내셨듯이 지금 지치고 피곤한 한국과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종을 보내려고 계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곤고한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 우리의 나약하고 곤핍한 모든 것들을 맡깁시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곤고함을 해결해 주시고 소원의 항구로 이끌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2) 여호와의 종은 고난을 극복하고 나가는 사람입니다(5-6).
오늘여호와의 종인 “학자”는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그것을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 그는 혹독한 반대와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5b-6)
그가 이런 고초를 겪게 된 것은 바벨론 당국이나 그를 반대하는 유대의 다른 계층 때문이었습니다.하나님의 종, “학자”는 그들로부터 온갖 공격과 억압과 수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저항하지도 않고 움츠려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현재 일어나는 모든 좌절과 고초를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오는 비난과 매 맞음과 수치를 하나님의 소명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고 계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이 겪는 핍박과 부당한 대우 때문에 불평하는 경우를 자주 발견합니다. 시편의 많은 탄원시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셨나이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시 143:3-4)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의 종, “학자”는 그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마저 기꺼이 돌려주고 그의 뺨까지 내어줍니다. 침을 뱉어도 얼굴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여호와의 종, “학자”가 당하는 고통을 또 다른 “고난의 종의 노래” 이사야 53장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7-8)
신약성경은 이 본문의 종을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예수님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은 이사야 53:7-8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이 이전에 예언되었다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 고난의 종인 “학자”는 아무런 방어 없이 고난을 감수하자(6) 당시 사람들은 이를 그가 자신의 불의를 인정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대적자들에게 비폭력적이요 무저항적으로 대응하고 일방적으로 수난을 당하지만, 결국 승리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모든 고난을 감당하고 이길 수 있었던 능력의 근원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7절과 9절에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자기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므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도우심과 확신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7).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는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로 번역되었고, 표준새번역에는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고 번역했습니다.
또 8-9절에서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나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하고 당당하게 외칩니다. 이 종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인정하고, 함께 계시기 때문에 자기는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그 누구도 두렵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누구든 나오라”고 호령합니다.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종 자신은 그를 억압하고 모욕하는 악인들에게 저항하지 않으며 보복하지도 않지만, 그러나 정의의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갚아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여호와의 종은 등을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뺨을 때리고 침을 뱉고 모욕을 주는 대적자들에게 저항하지 않으며, 이러한 폭행을 피하기 위하여 뒤로 물러가지도 않았습니다(5b). 우리 구주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셔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이렇게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는 바로 예수님의 삶에서 완전한 일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되어 온 세계의 모든 곤고한 자들을 위하여 극도의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인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이 여호와의 종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2000년전 오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3. 이런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 번째 “여호와의 종의 노래”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크고 힘센 나라를 세워 자기들을 이끌 새로운 왕으로 모시려고 ‘호산나,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 지금 구원하소서!’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영광을 받는 왕으로서가 아니라,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시고,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나님 뜻을 그대로 따르셨습니다. 기꺼이 고난과 죽음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 고난과 죽음을 기꺼이 맞닥뜨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 믿음,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의 동행하심(눅 3:21-22와 평행 구절)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막 1:35,6:46,14:32, 눅 5:16,6:12,9:18,11:1,22:39 등)를 통해 지혜와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마 5:39, 요 10:17-18) 온갖 수욕을 참으시며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마 26:67, 27:28-44와 평행 구절)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와 완성자’로서 평가합니다(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호와의 종의 노래’가 흔히 오해하듯이 ‘메시아적 인물’만을 겨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여호와의 종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합니다.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명상하는 사순절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여호와의 종의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여호와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하나님께서 맡기신 일,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학자의 혀를 주십시오. 나의 귀를 열어 깨우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또 배워야 합니다. 여호와의 종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기까지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버림받고 따돌림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앞세워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며, 그들을 품어 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살아가고 자 할 때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과 시련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굳센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꿋꿋이 걸어갈 수 있는 참된 여호와의 종으로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I.
저녁에 하늘 쳐다보면 곳곳에서 교회를 알리는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십자가는 사형틀로써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십자가는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의 대상이요 능력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 태어나 이미 죽은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심으로 죗값을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면 ‘거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의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패배와 실패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넷째, 십자가는 치유의 상징입니다. 인간은 죄로 물들어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영원한 멸망으로 가는 절망적인 모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병든 영혼의 죄를 씻어주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소망의 상징입니다. 인간은 십자가의 구원을 통하여 천국의 소망을 갖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인류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는 사도 바울의 금언을 마음에 새기고, 심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을 바라봅시다. 우리 주님은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은혜의 해를 전파해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눅 4:18-19).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얼마나 힘들고 곤고합니까? 정치적으로 너무나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고, 멀리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남북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동서와 남북으로 찢진 지역 간의 갈등, 세대간, 신분간, 계층간의 갈등이 심화되어가는 곤고한 현실 속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참 자유와 해방,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확신하며,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며 이 곤고한 현실을 극복하고 승리하고, 우리 주변의 곤고한 자들을 도와주고 예수 십자가 복음을 전하므로 영생과 천국을 나눠주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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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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