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만나면 헤어지게 되어 있나보다.
내가 군생활을 통해서 가장존경하고 충성를 바치려했던 대대장님께서
광주포병학교로 전출을 가시게됐다.
지휘관 임기2년을 마쳤으니 떠날수밖에!...
나를 아껴주시고 믿어 주셨던 대대장님과 어떻게 하다보니
사진 한장이 없어 아쉽다!!.
그분에게서받은 표창장만 대여섯장 남아있어 표창장을 보며 이글을 쓴다.
대대장님이 떠나시기 직전 숙소로 불러 저녁을 같이하며
"나도 오도관 2단 무도인" 이라며
"무도인은 비겁한 사람이 없어"
"너를 처음부터 믿었는데 한번도 나를 실망 시키지않아 너무고맙다" 고 하시며
"군인은 다시 만나게 되있다고 울지말라"고 하셨는데
그이후 한번도 다시 뵙지를 못했다
지금 살아계시면 90가까이 되셨을거다 .
뵙고싶은데 찾을길이 없으니 안타갑기 만하다.
여기서 태권도 이야기를 잠깐 하고 가야겠다
행방이후 우리나라의 태권도 라고 정식명칭을 붙여 보급한 사람이
지금은 나라를 배반하고 평양 혁명열사묘에 잠들어있는 전육군소장 최홍희씨다
일본중앙대 유학시절 가라대를 수련하고 붓글씨를수련하며
가라대와 우리나라의 격술인 택견을 접목시켜
기본동작
연속동작
(형)과 약속대련 등을 연구발전 시켜
군에 태권도 오도관을 설립했다
이때 수제자로는 대위 남태희 (대한태권도협 고문이며 원로다)와
중사 한차교(전역후 대전관장으로 이단옆차기의달인)사범이다
최홍희씨가 54년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태권도부대인 29사단을 창설
부대마크가 주먹(정권)인 초대사단장으로 태권도를 보급하다 50년대 말에 해체 됐다
김규석 대대장님도 29사단 출신이라고 했음 .
오도관의 영향으로
기본동작과 형이같은 태권도 청도관을 엄운규 관장이설립 보급하여 나도 청도관 출신이다
일본가라데 동작과 형을 많이 모방한
황 기씨가 설립한 무덕관 과,
일제시대 YMC에서 가라데를 수련하다 설립된 창무관
그외에도 지도관등이 설립되어
일반인들에게는
18기 가라데,
택견,
당수등으로 불리워지고 있다가
대한태권도 협회가 창설되면서
기본 동작과 형이 통일 되면서 태권도 라고 정식 명칭도 통일 되었다.
각도장마다 총본관이 있었으며
지방도시에 지관이 설치되어
3단이상 고단자 승단 심사는 총관에서 실시하다가
대한태권도 협회가 대한체육회 산하단체로 가입되면서
기본동작 형 약속대련 끼지도 통일되어
태권도가 武道(一擊必殺)에서 스포츠화 되면서
대련시 점수 위주로바뀌어
발레나 무용형태가되어 위력이 떨어져 武道 로서의 가치를 상실 하게되었다.
우리나라 태권도가 결정적으로 보급된 계기는
64년도 태권도 교관단의 월남파병을 시작으로
전 군에 태권도를 보급하게되어
각 사단에서 장기 하사이상 3단이상을 교관요원으로 차출하여
여군 훈련소에서 최초로
"태극1장"
"평안1단" 등의 형을
신형인 "천지 단군 율곡 화랑"등으로 교육 배출하여
각사단에 복귀하여
대대급 제대 에서 2명씩자대 교관요원을 차출 3개월간교육 하여 배출시키고
사병들에게는
태권도를 못하면 외출 외박은물론 휴가 진급 까지도 제한하는
엄격한 심사 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5사단에서는 권태석중사와 내가 차출되어 여군훈련소에서 교육을 받고왔다 .
지금기억으로는
26사단에서 김 삼사범이
6군단에서 김석태 사범이
5군단에서 이성구사범
공수특전단에서 김태여 사범등이 같이 교육받은 기억이 나며
이성구사범은 하사관학교 후배이며
군단하교대에서 같이근무 하다 나중에수경사 태권도사법으로있다는이야기를들었다
26사단출신 김삼사범과 5사단 권태석사범은 자대복귀 후
파월 교관단에 지원하여
파월되어 월남에서 현지전역하였으며
특전단 김태여사범은 얼마 후 조문환 장군님이 사단장으로 부임시
경호등 필수요원으로 따라와서
사단태권도 시범단 운영등에 많은 도움을 주웠으며
김사범의 특기는 4x4각목 에다 이마로 대못을박는 것이 특기였다
나의 특기는 두사람을 무등태워서 들고있는 기와장을 이단 앞차기로 격파하는 고축이다
988대대근무중
태권도 교관 파견외에도
국군의 날에 실시하는 사단대항 체육대회 를 대비하여
육상 배구 축구 권투 씨름.선수들을
봄부터 중대대항 대대대항 연대대항 을 실시하여
사단 선수를 선발하여
국군의날까지 포사와 각 연대가 한종목씩 맡아 합숙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나는 도대표 400M육상선수 출신이기에
기록차가 많게 1등을하여 사단 육상코치를 겸하게 되어
주로 27연대에서 합숙을 하였다
그때의 나의육상기록이 100M 11.6초
400M53초 로
군입대후 선착순에서 항상 1등을 하여 많은 덕을봤다
우리집안의 DNA가 운동에소질이있는 집안인지
어려서 부터 형님을 따라다니며 유도를하여
어린나이에 검은띠를따고
장 조카도 국가대표 농구선수출신으로
2000년부산 아시안게임에서 20년만에 중국에이겨금메달을딴 감독으로
현재도 프로농구 감독을 하고있다.
그렇게 파견생활 때문에 포대를 많이 비웠는데도
대대장님께서는 나를 아껴 주셔서
나는 보답을위해 주어진임무에 최선을 다한결과
포사령부
예하 4개 포병대대의 전하사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병기본교육 교관요원 집체교육에서
260여명의 중상사 하사관중에 1등을하여 대대장을 기쁘게 하였으며
또한 사단 최우수 모범 내무반에 선정되어 대대장님의 은혜를 조금 이나마
갚을수가 있었는데
개인으로도 66년10.월1일 육군참모총장 공로표창장을 받게되어
다음달 11월1일부로 군입대 38개월만에 중사진급을 하였다.
그당시 우리대대에는 중사 진급 대상하사가 13명이 였으며
중사진급 첫 대상자 하사 3호봉은 나혼자 였다
대부분 하사 5~7호봉으로
심지어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부형 9호봉 하사도 있어
전군적으로 진급이 적체되어 있어
우리포대 부관도 중위5호봉 으로 육사출신이 아니면
정상진급을 할수가 없는 시기였는데
중사진급 2명중에 포함되어 사단장님께 진급 신고를 한 후부터 문제가 발생 하였다
다음8회 에서 뵙겠습니다.
5사단 육상부 코치 시절 승리를 기약 하며
첫댓글 왜 끝그들이 날아가는지 모르겠네? 내일 8호에서 뵙겠습니다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육군제1하사관출신에 선배님같은 분이 계시다는건 우리후배들의 최고의 영광이라 생각됨니다미 진진 다음호를 기대 합니다 충성
어떻게 모든분들의 이름을 그렇게 다 외우고 계시나요 점점더
잘 읽고 갑니다 또 어서 빨리 다음호가 기다려집니다
대왕고님 늘 건강하십시오.
ㅎㅎ
지가 대전고 앞 청도관 출신입니다
그당시 한영교.한차교 두분형제 께서 계셧던 기억이납니다
자랑스런 고회장님 칭찬 듣고나니 부끄럽습니다 정봉 후배님 전화받고 기뻣습니다.인욱후배님 의격려 말씀에용기 백배입니다 정연님께서는 무도인으로서 가장존경하는 한차교 사범님의 제자였다니 반갑고 또한 동문으로서 기쁨니다.
그당시 태권도는 무도였습니다 고단자가되면 정권단련으로 정원에 밤톨만한궅은살이박히고 격파등 파격적인시범을 많이하였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5학년부터 태권도를배웠는데 고수까지는못하고 하사관학교에서 조교로남으라는 권고는받아봤습니다 ㅎㅎ
감사하게 뵙고 갑니다.
충성~!
제 고향 면소재지에 친구형이 입대 전에도 태권도를 했고 군에서도 태권도 조교를 하다 제대하고 청도관이란 이름으로
동내 초,중,고생들에게 태권도 수련을 가르쳤는데 저는 충주에서 학교를 다니기에 68년도 고1때부터 토,일요일과 방학때만
지도를 받아 진도는 느리지만 고3때 (70년)까지 배우다가 졸업하고 서울로 이사와서 2년 조금넘게 다니다 말고, 공백이
있다가 군입대해서 하사관학교의 초기에는 그때 배운것이 기본이 되있던 터라 수련은 어렵지 않았는데 기합으로 시작되고
기합으로 끝나는게 힘이들었어도 다시 한다는게 좋았고 그러한 방법의 교육이 체력단련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기도..
저는 군입대 전과 전역 후의 태권도 경력이 전부입니다.
학교 선배이고 친구의 형인 관장님은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미국으로 건너가 태권도 사범을 하셨는데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시민권자가 되어 눌러 살고있다고 합니다. 작고한 저의 작은형님(73세)과 친구인데 그러고 보니 선배님과 비슷한 연배시네요.
나필섭후배님 감사합니다 그당시 태권도를 좀했던 분들은 미국이나 서독 카나다 등으로 많이 갔습니다 저도 군생활 하지 않았다면 그방면 으로 진출을 했을겁니다 친구들이 많이 가있으니까요 후배님 열심히 사시는모습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