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말캉 역사 알고 가시더/창태95, 204) 청기면(靑杞面)이 궁금니껴?
※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쌔밴는, 근바, 게락, 또갈래(따개), 바까, 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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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때의 청기면(靑杞面)은
당리가 중심지 마실이었꼬.
청둥오리가 쌔밴는 지역이라꼬 케서
청부(靑鳧)라꼬 켔니더.
고려시대 초(初)에 와 가꼬는
영해신씨(寧海辛氏)의 한 선비가
지금의 소재지(청기1리)에 정착한 뒤에
근바에, 푸른 구기자인 청기(靑杞)가
게락나 지명을 청기(靑杞)라꼬 카기도 했꼬
석문(石門)선생 문집에 보면
대청부곡캉 소청부곡의 "청(靑)"짜캉
버드나무가 쌔배따꼬
버드나무 "기(杞)"짜를 쓰가
청기(靑杞)라꼬 켔다 카기도 하니더.
그후, 청기면(靑杞面)는
대청부곡(大靑部曲 / 지금의 당리 중심)캉
소청부곡(小靑部曲 / 지금의 상청리 중심)으로
또갈래(따개) 지게 됬니더
이때, 대청부곡(大靑部曲)의
중심지(소재지)는 당동(당리)였꼬
당리, 행화, 기포, 사리, 토구,
정족, 청기1리 등을 관할 했니더.
글코, 소청부곡(小靑部曲)의
중심지(소재지)는 상청이었꼬
관할 지역은 상청, 구매, 저리, 토곡,
장평(청기2리)등 이었니더.
그뒤, 고려시대 충렬왕때 와가꼬는
상청(상청은 영양현에 속함) 근바를
뺀 청기면(靑杞面) 전첼보고
청기현(靑杞縣) 혹은 청계(靑溪)라 카게 된니더.
조선시대(숙종 1675년) 와가꼬는
대청부곡(大靑部曲)이
지금의 당리 중심인 서초면(西初面)캉
지금의 정족2리 중심인 서이면(西二面)으로
또갈래 지게 된니더.
이때 솥발이(지금의 정족2리)가
서이면(西二面) 중심지가 된니더.
그 뒤 고종 1895년에
서초는 청초(靑初), 서이는 청이(靑二)로
이름을 바까 부르게 됬따가
1914년에 와가꼬 청초와 청이,
그리고 상청 근바(저리, 상청, 구매 등)를
엄체가 오늘날의 청기면(靑杞面)이
맹글어 지게 된니더.
이 때(1914년) 청기면(靑杞面) 중심지가
청기1리 현재 소재지로 옮가지게 됬니더.
글코, 상청은 신라때 부터 고려때까지
영양현(英陽縣)에 속한
소청부곡(小靑部曲) 중심지였니더.
소청(小靑)은 신라때부터
소청현(小靑縣)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고
고려 충열왕 이후부턴 청초면(靑初面)
관할에 들어가게 된니더.
1914년 행정구역 바낄때는
소청, 소상, 장평(청기2리) 일부를 엄치고
소상(지금의 상청2리 신당)캉
소청(지금의 상청1리)의 이름을 따가꼬,
상청이라 카면서 청기면에 속하게 됬니더.
그리고 소청(小靑)은
지금의 상청(上靑)캉 그 아랫마실(저리)을
엄체서 부르는 지역 이름이시더.
그케가 현재의 청기면(靑杞面)은
법정리 13개, 행정리 18개로
맹글어져 있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