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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종일 찾아 헤맨 어름새꽃
허 열 웅
봄은 아름다운 비밀이다. 또 한 봄날은 부활의 상징이다. 세상은 시샘과 갈등으로 시끄럽고 삶이 아무리 무겁고 힘들어도 계절은 변함없이 찾아온다. 나는 우아하고 황홀한 목련보다. 짙은 향기에 숨이 막힐 것 같은 라일락보다, 조선의 선비 모습인 난이나 국화보다는 혹한 속에 피는 꽃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 산수유나 개나리보다도 먼저 피는 꽃 복수초福壽草가 필 무렵이면 마음부터 설렌다. 조용히 눈을 감고 대지도 잠들고 있을 때 알 속의 병아리가 부리로 껍질을 쪼듯 살얼음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복수초와 줄탁동시脺啄同時를 한 은빛 햇살조차 주춤거리는 겨울의 끝자락에 빙하의 밑바닥에서 속살거리며 올라오는 그 황금빛 꽃이 봄의 전령사로 라고 보기엔 너무 애처롭고 대견스럽다. 복수초는 복을 받고 오래 살라는 의미 외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차가운 얼음 사이에서 핀다하여 어름새꽃, 눈 속에 의연히 핀다하여 설련화雪蓮花, 설날 아침에 핀다하여 원일초元日草꽃 등 다양하다. 일본에서는 정초에 복을 받고 오래 살라는 뜻으로 이 꽃을 많이 선물한다고 한다.
귀耳를 원하는 겨울의 시는 음악의 옆자리에 있고 관념의 문턱에 있으나, 꽃을 볼 수 있는 봄의 시는 회화繪畫의 이웃에 있으며 감성의 방석위에 있다고 했다. 나는 샛노란 복수초가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간이역에서 피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강물이 다 풀리기도 전에 홍릉수목원을 찾아갔다. 현재는 국립산림과학원으로 불리는 이 수목원은 원래 1897년 정치적 혼란기에 일본의 자객에 의해 살해된 민비(명성왕후)의 능이었다.
그 후 고종의 붕어로 인해 두 사람을 합장하기 위해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임업시험장이 설립되고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산림연구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곳에선 산림의 다양한 기능, 유지, 산림생산기술개발, 증식, 개량,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수목원에는 2,035 종의 식물과 69종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어 산림연구의 현장이 되고 있다.
얼음과 얼음 사이에서 꽃을 피우다보면 자체에서 나오는 열기로 주변의 눈을 녹이며 봄을 재촉하는 어름새 꽃, 그 꽃을 찾기 위해 수목원 능선을 오르기도 하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기도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한 시간이 훨씬 넘도록 이름패가 붙여 있는 나무와 꽃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한 바퀴를 돌았으나 복수초를 찾지 못했다. 몸도 마음도 피곤하여 쉼터의 의자에 앉아 숲을 바라본다.
하늘의 깊이라도 재려는 듯 까마득히 솟아오르는 전나무, 메타세퀘이야, 등 침엽수와 모감주나무, 소사나무 등 활엽수가 높낮이로 서서 햇볕을 골고루 받고 있다. 또 한 계절에 따라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산벚나무, 자귀나무, 조팝나무의 가지엔 참새 부리만한 새순들이 꿈틀대고 있다. 낮은 언덕엔 멀리 날아갈 것처럼 깃을 세우고 있는 화살나무가, 그 옆에는 나름대로의 빛깔을 뽐내는 자작나무, 백송 등이 묵묵히 서있다.
봄은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다. 그리하여 봄은 한 폭의 추상화이다. 봄빛은 아주 신비롭고 비밀스럽게 돌 지난 아기의 아장걸음으로 까치발 딛고 살금살금 다가온다, 그 첫발걸음에 마치 유리그릇 속에서라도 피어나듯 얼음을 톡톡 깨며 피는 복수초가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그러나 꽃을 찾지 못한 채 터벅터벅 내려와 아쉬운 마음으로 정문을 향해 걸어 나오는 데 울타리 옆에 사진기를 든 대 여섯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 걸음에 달려가 보니 아! 그곳에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복수초가 피어있게 아닌가?
서너 평의 땅에 100여 송이의 샛노란 복수초가 잠들어 있는 한 폭의 대지위에 노란 생명의 비단 무늬를 놓고 있었다. 꽃 주변을 맴돌고 있는 꿀벌들은 초대장을 받을 틈도 없이 달려온 듯 바쁘게 윙윙거리며 봄 향기에 빠져 꽃술에 꿀 대롱을 깊이 꽂고 있었다. 나 역시 정신없이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옛 시인의 한 편의 시가 떠오른다.
온 종일 봄을 찾아도 봄을 얻지 못하고/ 짚신 발로 산꼭대기 구름까지 두루 밟았네/ 돌아와 문득 매화나무 밑을 지나니/ 봄은 벌써 나뭇가지 끝에 와 있더라.
청춘도 흘러가고 중년도 지난 지금, 그 동안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찾고자 했던가? 내가 이루고자했던 작은 꿈들조차 미완성으로 남아 나를 아쉽게 한다. 이제 한 생애를 차분하게 정리하면서 살아가야 할 시간 내가 살아온 과거를 뒤돌아본다. 첩첩 산골에서 도시로 나간 촌뜨기가 따라잡기 힘들었던 학창시절, 공무원으로 출발했던 청춘의 삶은 치열하기보다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고, 불같이 뜨거운 사랑보다는 덤덤했던 연애시절, 일을 찾아 밤을 새워 노력하기도 하고, 손을 비비며 아첨하여 남 보다 앞서는 승진보다는 순리에 따르는 자세로 살아온 소시민적인 내 삶이 얼음 박힌 찬바람을 맞으며 의연하게 피는 꽃 앞에 너무 부끄럽다.
소시민의 봄은 희망이고, 시인의 봄은 아련한 바람이다. 또 한 봄날은 미치고 싶은 날 이기도 하다. 무엇이 진리이고 삶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 있는지를 늦은 나이에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목말라 이곳저곳 멀리까지 찾아 헤매던 꿈이나 잠언箴言은 내 주변,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좀 알게 되었다. “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 갈 때 못 본 /그 꽃” 고은 시인의 표현처럼 지난 날 살아오면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많은 아쉬움들이 백발의 머릿결아래 어른거리고 있다.
복수초,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피는 꽃에 福과 壽라는 미덕을 부여한 것은 아마도 춥고 배고픈 곤궁 속에서만 福과 壽가 태어난다는 우리 민족의 체험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지도 모른다. 나는 잔디밭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남쪽 하늘을 바라본다. 남도의 봄이 세월의 강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 낭창거리는 발걸음으로 북녘을 향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땅 밑에서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뒤척이는 진동도 느껴 오고, 마른 풀숲에 솟아나는 쑥 잎도 뾰족 보인다. 이른 봄날을 헤맨 나른함에 나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뉘엿뉘엿 하루가 저무는 황혼까지 복수초 앞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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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허열웅(시인, 수필가)
“온종일 찾아 헤맨 얼음새꽃”
향기 나는 꽃을 본 듯이
오래 들여다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