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송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건이 손해배상이다. 손해배상 사건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계약관계가 있는 사람의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과 아무런 계약관계가 없는 사람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이다.
전자의 경우 어떤 계약을 했는데, 상대방이 그 계약을 지키지 않았고, 그로 인해 손해를 입으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어떤 사람의 고의나 과실로 인한 위법한 행위로 손해를 입으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손해배상 사건은 가장 흔할 뿐만 아니라 가장 어렵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 잘못이 있는지부터 시작하여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있는지, 손해가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것인지, 하나하나가 쟁점이 되기 때문이다. 돈을 빌려주었는데 갚지 않았다거나, 아파트를 매수했는데 소유권이전등기를 안 해주는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어려움이 확연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손해배상 사건 중에서는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것보다 불법행위로 인한 것이 더 어렵다. 계약관계에서의 채무불이행은 계약내용이 보통 문언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살펴보면 된다. - 물론 계약내용이 애매하면 그것을 해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 하지만 불법행위는 무엇이 불법인지부터 문제된다. 피고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소송을 제기하는 거야?"
불법행위에는 특수한 분야가 여럿 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 공작물의 설치나 보존상의 하자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이다.
원고는 수제양복점을 운영하는 30대 남자다. 원고는 상가건물 1층의 120호를 임차하여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양복점 바닥으로 하수가 흘러 들어왔다. 양복점 벽부분이 물에 젖어 훼손되었고, 집기류와 수제 구두, 여벌의 가죽이 손상되었다.
당황한 원고는 연어처럼 흐르는 하수를 거꾸러 올라가 보았다. - 원고는 연어와 달리 그만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 밖으로 나간 원고는 피자 가게였던 119호에서 하수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왜 피자 가게'였던'일까. 역시나 30대 여성인 피고는 그곳에서 이틀 전까지 피자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임대차 기간이 끝나 가게 문을 닫게 되었다. - 2019년이었으므로, 코로나로 인한 5인 이상 집합금지와는 무관하다. - 피고는 피자 가게를 원래 있던 그래도 원상복구 한 뒤 임대인에게 반환했다.
그러면 하수는 왜 역류한 것일까? 피자 가게 내부에는 하수구가 있었다. 하수구는 배관을 타고 싱크대까지 이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피고는 원상복구를 하면서 싱크대를 제거했다. 그와 함께 싱크대 안에 있던 배관도 제거되었고, 결국 바닥에 하수구 구멍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하수도가 막힌 곳은 피자 가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즉, 피고가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대충 상가의 중앙홀에 있는 작은 화단 아래쪽의 하수관이 막혔다고 하자. 그곳이 막히게 되자, 하수가 연어처럼 배관을 타고 거꾸러 올라왔다. 역류한 하수가 피자 가게의 하수구 구멍으로 흘러 나온 것이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하필 이면 피고가 운영하던 피자 가게의 하수구 구멍으로 흘러 나온 것일까? 피고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 하수가 역류해서 여기로 나온 거야? 내가 뭘 잘못한거지?"
문제는 피고가 원상복귀 과정에서 싱크대를 제거한 데에 있었다. 싱크대와 함께 배관도 제거하면서 하수구 구멍의 레벨이 낮아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여전히 싱크대가 있는 다른 가게의 경우 사람 허리 높이까지 역류해야만 하수가 흘러나올 것이다.
원고는 주장한다. 원상복구를 할 때 헝겊이나 시멘트로 하수구를 막아야 했다, 아니면 배관을 높은 위치에 있게 하여 하수가 역류할 가능성에 대비했어야 했다, 그런 것을 안 했기 때문에 피고의 잘못이다. 내가 입은 손해 1500만원을 배상해라.
피고는 억울하다. 하수도관이 막힌 것은 내가 책임지는 부분이 아니라 공용부분에서 일어났다, 하수도관이 막혀 있으면 구조상 어느 가게에서든지 역류할 수 있는데, 단지 그날 마침 원상복구를 했다는 우연한 사정으로 내 가게에서 하수가 역류한 것일 뿐이다, 나는 책임 못 지겠다.
이 사건의 특이한 점은 하수구 같은 공작물의 경우 '설치 또는 보존의 하자'로 인한 손해에 대해 점유자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특이한지 아직 잘 모를 것이다. 이렇게 얘기해보자. 일반적인 불법행위의 경우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고의 또는 과실로 그러한 행동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공작물의 하자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은 무과실책임이다. 다시 말해, 행위자가 과실로 그러한 상태를 만들었는지를 묻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피고에게 매우 불리하다. 행동의 이유는 묻지 않고, 그 상태 자체만을 따져보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점이 남는다. 그 문제는 과연 '하자'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하자의 법적 개념을 설명하지는 않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길 바란다. 피자 가게 주인인 피고가 원상복구를 하면서, 하수구를 앞에서 말한 것처럼 둔 것이 '하자 있는 상태'에 해당할까. 해당 한다면 피고는 손해를 전부 배상해야 할까. 아니면 일부만 책임질까.
한 가지 재밌는 점은, 키크고 등발 좋은 양복점 주인이 다짜고짜 어여쁘고 여리여리한 피자 가게 주인을 찾아가 따졌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하수도관을 막히게 만든 상가관리단의 책임이 더 큰 것이 아닐까. 그러면 양복점 주인은 상가관리단을 찾아가서 따져야 하는 게 맞을 것일다. 괜히 힘 없는 피고를 괴롭히지 말고. - 설령 그렇다고 해도 피고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첫댓글 진짜 어려운 문제네요. 흠.
피자 가게 주인이 원상복구 하고 임대차계약 만료로 나갔으면 그 후부터는 상가 주인이 관리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요?
아니면 상가 관리단의 책임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상가 관리단이 하수도 막힘을 주기적으로 관리해야 할 책임도 있을 것 같네요. 막힘을 뚫어주는 세제들도 잘 나와있고...
피자 가게 주인이 하수 역류를 어떻게 예상하고 조치를 할 수 있을까요? 저라도 억울하겠네요.
요즘에 노후화된 아파트에서 누수 현상으로 층간 분쟁이 많은데,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얼마전 추웠을 때 아파트 1층에서 베란다쪽 배수관이 얼어서 막혔다고 세탁기 돌리지 말라고 매일 방송을 하더군요.
1층 사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면, 어디에 대고 하소연 해야할지... 어느 층에서 세탁기 돌렸는지 알 수도 없고요.
그 부분이 좀 애매할 수 있겠군요. 확인해봐야겠지만, 원상복구는 했지만, 아직 임대인에게 인도는 안 한 상태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만약 임대인이 상가 점포를 인도받아 관리하고 있었다면, 원고가 임대인에게 소송을 제기했을 거 같아요.
상가관리단이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건 맞아요. 이 부분은 사실 법조인들도 간혹 오해하는 부분인데, 최종책임자와 소송 당사자 사이에서의 책임자와는 엄연히 구별해야 할 문제거든요. 다시 말해, 이 사건에서 피고가 지더라도, 피고는 상가관리단에게 다시 소송을 제기해서 돈을 받아낼 수 있어요. 아니면 아예 상가관리단을 이 소송에 참가하게 해서 같이 재판을 받도록 할 수도 있고요.
인접한 부동산의 점유자나 소유자들 사이에 분쟁이 엄청 많죠. 우리나라처럼 인구 밀집도가 높고, 아파트가 많은 나라면 더욱 그렇겠죠. ㅠㅠ 층간소음도 그렇고, 배수 관련 문제도 그렇고 불법행위의 가해자를 알기도 어렵고, 피해액을 산정하기도 어렵죠. 앞으로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분야인 것 같아요.
호오... 재밌습니다! 다음 글 기다릴게요!
앗, 이게 끝인데요. ㅎㅎㅎ 죄송합니다. ^^;; 혹시나 어떤 기대를 하셨는지 알려주시면 보충해보겠습니다!!
@즐겨찾기 아뇨 [법딱판재] 자체가 재밌어서요^^; 다음편 기다린다는 얘기였어요 ㅎㅎ
@황시연 네, 그렇군요. ㅎㅎ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
아마 피자가게에서 특이하게 처리한 게 아니라 흔한 관행대로 한 거겠죠? 하필 또 비어있을 때라 확인도 안됐고... 참 운이 없네요. 게다가 이렇게 합의를 못하고 소송까지 가게 돼 변호사비까지 부담했을 거 생각하면 양측의 금전적 손실이 넘 안타까워요.
마지막 문단 표현이 아재스럽게 느껴져서 웃었습니다. ㅋㅋ
양복점 주인 입장에서는 피자 가게 여주인이 만만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괜히 자꾸 찾아가서 항의하고 그다지 큰 금액도 아닌데 소송제기하고 그런 걸 보면 뭘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ㅋㅋㅋ 단지 손해배상만이 목적이 아닌 다른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하는 당사자들이었습니다. ^^ ㅎㅎ
저희도 요즘 비슷한 건이 있어서 굉장히 유심히 읽게 되는 글이군요.. ㅎㅎ
얼마 전에 고양 터미널 사고도 공작물 점유자 책임으로 대법원 판결 전부 다 졌는데, 소송대리인들이 격렬하게 법리 다툼을 벌인 반면 대법원 판례는 고작 7~8쪽이 대부분이라 꽤 아쉬운 판결이었습니다. 원님 재판 받은 느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