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오늘 이사 갑니다’ 위층 원장님이셨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새벽부터 이삿짐 사다리차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긴 했다. 누군가 이사를 가는구나 짐작만 했지 그 주인공이 15년을 위층 아래층으로 잘 지내오던 이웃이라는 사실에 먹먹해졌다. 그 먹먹함으로 인해 잘 가시라 항상 건강하시라는 흔한 작별의 인사도 전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했던 이웃사촌의 이사 소식은 잰걸음 출근을 재촉하던 나에게 적잖은 아쉬움을 주었다.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그리움과 뒤섞인 애잔함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 처음 이사와 얼마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퇴근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스낵 봉지에 든 과자를 너무나도 맛있게 드시는 여느 어르신과는 다른 모습에 신선함을 느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이 시간쯤엔 꼭 간식을 먹어야 한다며 나에게도 여분의 과자 한 봉지를 주셨다. 집에 들어와 먹어보니 정말로 그날 하루의 피로가 풀릴 정도의 달콤한 맛이었다. 그렇게 불쑥 친절과 호의를 베풀 줄 아시는 호탕하신 이웃과의 첫 만남이었다.
어느 날은 직접 쓴 책이라며 책 선물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셨다. 모태신앙부터 오랜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꼭 책을 쓰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 꿈을 이뤘다는 말도 함께. 책 내용은 초보자에게는 읽기 어려워 보이는 성경에 나오는 욥기를 재해석한 것이었다. 구역예배 날 저녁에는 남자분들의 찬송가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질 정도로 교회에 헌신하시는 분이다.
또 한 번은 우리 집 천장이 물에 젖어 얼룩이 지고 벽지가 축 쳐졌다. 하루 더 지나니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칫 거실 조명등까지 누수 범위가 넓어져 전기안전사고 위험에 노출되기 직전이었다. 위층 어르신 내외가 오셔서 물 떨어지는 우리 집 거실 현장을 보시고는 원인을 빨리 알아보겠다 하셨다. 위층 보일러 고장이 원인으로 판명되었고 거실 천장 전체 도배와 조명등 일체를 보상해 주셨다. 자칫 얼굴 붉힐 수도 있는 예민한 누수문제였음에도 우리 집이 불편하지 않게 최대한 빠르게 공사 일정을 잡아 주셔서 고마웠다.
이웃으로 함께 사는 동안 여러 번의 교류가 있었고 그때마다 항상 아래층에 사는 우리를 먼저 배려해 주셨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정겹게 안부 인사 나누던 분을 다른 곳의 이웃으로 보내드려야 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란 쉽지 않았다. 칠순을 넘기셨지만 전문직으로 열정 넘치게 일하시는 모습에 배울 점이 많으신 분이다. 층간소음으로 시비가 잦다는 요즘 세상에 좋은 이웃을 만난다는 건 참으로 행운에 가깝다. 좋은 이웃 덕분에 내 마음이 흐뭇했고 든든했다. 이웃의 정을 나누어주신 원장님 부부가 어디에 계시든 건강하고 행복하셨으면 한다.
가정의 달 오월에 훈훈한 소식이 전해진다. 부산공고 졸업생들이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모교의 전교생 후배 620명에게 장학금 백만 원씩 총 6억2천만 원을 쾌척했다는 소식이다. 재단법인 부산공고 장학재단은 졸업생 4만여 명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벌였다. 적게는 10만 원부터 많게는 1억 원까지 도와준 많은 선배들 덕분에 20억 원 규모의 장학금이 모였다. 예전에 비해 특성화고등학교가 침체되고 있어 든든하게 밀어주는 선배가 많은 명문고라는 자긍심을 후배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동문들이 마음을 모았다고 한다.
‘위하라 이겨레, 일하라 지성껏, 앞서라 기술로’ 라는 교훈아래 공부했던 선배들이 통 큰 기부를 한 모교사랑이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선한 영향력이 대물림되어 선배가 끌어주고 후배가 밀어주는 든든한 전통이 이어졌으면 한다.
300만 송이 장미가 어우러진 울산대공원 장미축제가 지난주 막을 내렸다. 다양한 콘서트와 퍼레이드, 로즈마켓, 로즈랜드, 로즈카페, 장미꽃 한 송이 원데이 클래스, 키즈테마파크와 같은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 5일간의 장미향기를 오래도록 담아 두고 간직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 주말에 잠시 들른 대학생 아들에게 같이 가보자고 권했다. 울산에서 예쁜 거 많이 보고 예쁜 꽃 향기 많이 맡으며 좋은 생각과 좋은 마음으로 가득 채워가야 힘든 서울살이 버틸 수 있다고 하니 주저 없이 ‘난 엄마만 보면 돼’ 아들이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감동을 주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말에 모든 함축적 의미가 담겨있음을 엄마는 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서 외로움을 견뎌내려 애쓰고 있음을 그 지친 몸을 편안한 홈그라운드에서 푹 쉬며 충전하고 싶음을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어린아이처럼 엄마 옆에 있으면서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싶음을.
우리는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을 쉼 없이 달려왔다. 가정의 달 오월이 다 가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진심을 담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용기를 내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