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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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주일
자녀들은 주님의 유산이요 상급이다
시 127:1-5
오늘은 다음세대주일로 지킵니다.
본래 오늘은 1층 주차장을 선목랜드로 꾸며서 아이들이 교회에서 즐겁게 뛰놀 수 있게 하려 했는데,
애석하게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관계로 모든 활동을 실내로 전환했습니다.
오늘 열지 못한 선목랜드는 곧 다가오는 여름캠프 때 더 멋진 모습으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세대 주일이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다음세대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시대의 존립 자체를 고민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작년 12월 2일, 뉴욕타임스에서 충격적인 기사를 내었지요.
“한국은 소멸하고 있는가? Is South Korea Disappearing?”
역대 최저로 감소한 한국의 출산율 때문입니다.
기사 당시 작년 3/4분기 합계 출산율은 0.7명, 그리고 4/4분기는 0.6명이었습니다.
이 수치는 한 세대를 구성하는 200명이 다음 세대에 70명으로, 그 다음은 35명으로 줄어드는 수치입니다. 이는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에 몰고 온 인구감소를 능가하는 것입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장교훈련학교인 상무대를 다녀왔는데 매년 장교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인구 감소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출산에 따른 특이한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작년 한국의 온라인몰 통계에 의하면 반려동물용 유모차, 속칭 ‘개모차’가 유아용 유모차보다
더 많이 팔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유모차에 반려견이 타고 있는 경우가 꽤 많아졌습니다.
한국의 새로운 변화요 문화입니다.
저출산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왜 젊은 세대는 출산을 고려하지 않거나 낳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한국은 이제 핵가족이 아니라 핵개인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1인 가구의 비율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2022년 기준 35%정도가 1인 가구입니다.
세 집 중 한 집이 1인 가구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가정을 이루지 않는 독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결혼하지 않은 이들은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쓸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직 주님만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도 싱글이셨고 바울도, 많은 제자들도 그랬지요.
그러므로 독신의 삶도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성경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존중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독신일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인한 결혼을 말씀합니다.
따라서 결혼도 사명이고, 싱글도 사명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1인 가구 증가는 이것과는 좀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핵개인의 가장 큰 특징은 자립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변화입니다.
둘째는 경제적인 부담 때문입니다.
한반도 미래인구연구원에서 작년 7월에 2030 미혼남녀에게 물었습니다.
“왜 출산을 고려하지 않으시나요?”
남성들은 ‘자녀교육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서’(43.6%)
자녀를 돌보고 양육할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41.5%)로 경제적 이유가 85% 정도 됩니다.
청년들이 집을 사려면 6억 기준으로,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최저시급으로는 23년을 모아야 합니다.
여성들은 ‘육아에 드는 개인적 시간, 노력을 감당하기 어려워서’가 거의 절반(49.7%)입니다.
또한 ‘자녀를 바르게 양육할 자신이 없어서’가 35.1%순이었습니다. 시간과 노력의 부담이 원인입니다.
반면, 한 대형교회에서 전체 기혼자를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저출산의 원인은 바로
‘자녀 돌봄의 어려움’이라고 답한 비율이 61.2%였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높은 교육비(40.8%),
경제적 여건(34.3%), 경력 단절(17%)순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미디어의 영향입니다.
미디어가 출산과 육아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부각한 것도 저출산의 한 원인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한 TV 프로에서는 문제를 겪는 아이들을 보여주고 어떻게 이 아이를 변화시키는지 보여줍니다. 너무나 유익하고 필요한 프로인데, 한편으로는 아이를 키우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라는 불안감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특수한 사례들을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기에, 아이가 잘못될까봐 부모는 걱정하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면 어떤 예능의 경우 좋은 아파트에 값비싼 유치원을 보내는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이런 것들이 아이를 키우려면 이 정도 갖추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이 저출산의 원인들로 꼽힙니다.
그중에서 경제적인 부담과 육아에 대한 두려움을 보십시다.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헛수고 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젊은 세대에게 바로 이러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오늘 시편 127편은 헛수고와 헛됨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될 것인가?
시편 127편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쓴 시편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1절에는 집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집은 하나의 비유로서 한 사람의 가정과 인생을 상징하지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집이라는 인생을 지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인생을 집 짓는 인생이라고 하셨지요.
사도 바울도 우리는 모두 어떤 점에서 집 짓는 건축자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독신이든 가정을 이루든 모두가 다 자신의 인생을 짓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그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될 수 있다는 겁니다. 1-2절입니다.
[시 127:1-2a]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2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분명 시편 127편의 핵심 단어 중 하나는 ‘헛되다’입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바로 헛되다였습니다.
헛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헤벨 hebel은 ‘무의미하다’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직설적인 의미로는 ‘숨 breath’이나 ‘바람 breeze’입니다.
모든 것이 안개 사라지듯이 수포로 돌아가고, 지금까지 지었던 집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파수꾼이 깨어 있어도 헛될 수 있고,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는 것도 헛될 수 있으며,
먹고 살려고 야근하고 먹는 것, 입는 것 아껴도 모든 일이 헛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 다른 일을 하고 계십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 그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자녀를 키우는 것이 헛수고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혼하지 말고, 애 낳지 말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애가 있으면 헛수고, 없으면 헛수고가 아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이는, 집이라는 우리 인생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주지 아니하시면 모든 일이 헛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정이든, 사업이 무너졌다면 그것이 헛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너짐을 통해서 오늘부터라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이신 주님 위에 인생과 가정을 세우라는 뜻입니다.
시편 127편은 우리가 우리의 집을,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사업을, 우리의 자녀를
우리가 제대로 세울 수 있다고 과신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유사한 말씀이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좀 힘들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어렵겠지만 조금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nothing 할 수 없음이라!
아무리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같아도 주님이 없다면 헛수고입니다.
안 믿는 이들이 더 잘되고 더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을 봐야 합니다.
반면에 사업이 망하고 자녀가 방황하는 것 같아도 주 안에 있다면 결국에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녀는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상급이다
시편 127편은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3절부터 자식을 언급합니다.
3절입니다.
[시 127:3] 자식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태 안에 들어 있는 열매는, 주님이 주신 상급이다.
처음에 집과 성읍을 짓고 지키는 것을 말하다가 자식을 말하니 문맥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인생의 집에 있어서 자식의 위치와 역할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녀를 주시는가? 3절에 의하면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나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물’이라는 원어 나할라( נַחֲלָה)는 보통 유산, 기업으로 번역이 됩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대로 이어지는 기업이요 몫이요, 유산이라는 뜻이지요.
이 유산이라는 단어는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주겠다고 할 때 많이 쓰였지요.
그래서 자녀는 부모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야웨,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자녀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이것은 양도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할라라는 단어에는 “빼앗을 수 없는 inalienable, 양도될 수 없는”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를 부모에게 맡기신 것이 자녀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신명기 9장 29절에 이렇게 쓰였습니다.
[신 9:29] 이 백성은 주님께서 그 크신 힘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님의 소유요
주님의 백성입니다.
주님의 소유를 선물로 주신 것이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출산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재현하기를 원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녀를 통해 자신의 형상을 온 땅에 드러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출산을 향한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많은 이들이 얼마나 이 선물을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 거부하고 있습니까?
저출산으로 인해 이제는 축소사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몇 개월 전에 한 교회에서 한국교회를 위한 연합기도회가 열려서 참석했습니다.
1부는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다루었는데, 한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셨습니다.
한국이 아이를 안 낳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죽이고 있다는 겁니다.
한 해에만 120만 명의 낙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해요. 저출산이 아니라 사출산이라는 겁니다.
성남시가 95만 명이 안 됩니다. 위례가 10만 명이 넘으니,
그렇다면 한 해에 성남시와 위례를 합친 수보다 더 많은 인구가 사라지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생명을 거부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갖고 싶을 때 갖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자녀는 주님이 주신 상급이요 보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이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자녀를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 갖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내가 돈을 벌어야 하고, 지금은 내가 일을 해야 하니까 자녀는 미루자고 하다가 나중에 가지려고 하니 생기지 않는 경우들이 꽤 많습니다.
지금 먹고 살기에 바쁜데 어떻게 자녀를 낳느냐는 것이죠.
저희 교회에도 유아세례 간증자들을 보면 이런 경우가 꽤 많습니다.
젊은 시절에 신혼생활을 즐기자, 놀자, 우리가 마음먹을 때 아이를 가질 수 있어...
그런데 아이가 안 생기는 겁니다. 1년, 2년, 3년, 시간이 지나도 잉태되지 않는 고통을 당하는 겁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회개케 하시더랍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아 이것이 나의 교만이었구나.” 난임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것을 회개시키더랍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라고 머리로는 알고 입술로는 고백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내가 생명의 주인인 것처럼 살았음을 회개하게 하시더랍니다.
여러분, 주님이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들이 헛수고입니다.
자신이 주인 되었던 삶을 철저히 회개한 이후에서야, 생명을 주셨다는 간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끄럽지만, 저에게도 좀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미국에 가서 지낸 지 2년이 조금 넘은 2012년 말, 아직 유학생이라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고,
이미 어린 아이 두 명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아이를 하나 더 갖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버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셨지만,
아무리 그래도 셋은 지금은 어렵다. 좀 더 여유 있을 때 주시면 가져야겠다...
그런데 갑자기 셋째가 생긴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상급을 주셨구나...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의 믿음이 그 정도였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렇게 아내에게 기뻐해주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며 학교 식당에서 접시도 닦고 부엌 청소를 하며 힘들게 지냈기에,
죄송하지만, 그때에는 셋째가 하나님의 선물이요 기업이요 보상이요 상급이라는 믿음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내도 그때의 가정과 재정 상황을 알고 있었으니 염려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아직 담임을 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어 미국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성경 본문이 이것이었습니다.
[눅 1:30-31]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Don’t be afraid.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무서워하지 말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랍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답니다.
아들을 낳을 텐데 이름을 예수라고 하랍니다. 하나님께서 아기 이름까지 지어주셨습니다. 김예수.
첫째 이름이 김예솔이니, 셋째 이름 김예수도 나쁘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김예수라고 하면 아빠가 이단이라는 말을 들을까봐 이건 아니다 싶어서 예수님의 구약 이름, 여호수아, 즉 영어로 Joshua로 지었습니다. Joshua Minsol Kim.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다위야, 자녀 낳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증거다.”
예배 중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의 믿음 없음 때문에. 그럼에도 은혜를 입었다고 하시기에.
아내에게도 사과를 했어요. 여보, 미안해. 축하해주지 못해서.
지금은 지난 11년간 제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셋째 낳은 일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가 낳은 것이 아니라 아내가 낳았지요. 자녀는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자녀 셋을 키우면서 느낍니다. 부담도 되고 속 썩일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자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지? 느낄 때가 많습니다.
부모의 은혜도 있지만, 자녀가 주는 은혜도 있더군요.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가 누리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녀가 부모에게 더 갚을 것도 없습니다. 이미 키우면서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게 해주어서 고마워.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어서 고마워..”
반면에 그토록 자녀를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부부들도 꽤 많습니다.
한국의 난임 비율이 약 18% 정도라고 합니다. 다섯 쌍 중에 한 쌍 정도이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가정에 다 자녀를 주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이 하나님 나라 위해 영적인 자녀들을 키우게 하시는 가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난임의 과정을 거쳐서 진정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 그런 과정을 겪게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몇 달 전에 간증하신 집사님(신보라)이 계십니다. 난소에 문제가 있어서 자연적으로 임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인공수정을 시도하면서 중보기도의 힘을 많이 경험하셨다고 해요. 참 어려운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어요. 첫째가 건강히 자라다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다가 동생이 있는 것이 부러웠던지 자기도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랍니다. 둘째 생각이 없던 엄마는 “엄마는 너 하나로 충분해... 필요하면 네가 하나님께 기도해봐.”
어차피 난소의 문제로 안 될 걸 알고 아이에게 그렇게 말한 거죠. 근데 그 날 이후로 이 아이(하음)가 식사기도 하면서 무릎 꿇고 동생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더랍니다.
잠자기 전에도 하나님, 동생을 주소서... 기도한지 한 달 뒤에 둘째가 찾아온 겁니다.
본래 난소의 문제로 임신이 어렵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자연임신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부부가 회개하게 되었다고 해요. 왜일까요?
주님이 주인 되시는 가정의 자녀 계획을 그분께 맡겨드려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난소에 문제가 있으니까 안 돼. 생명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 이후로 셋째도 주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과 축복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고 계십니다.
자녀는 용사의 화살과 같다
여러분, 자녀는 주님이 주신 선물이요 상급입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자녀를 키울 수 없습니다.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주목하고,
그분께 묻고 의논하며 선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시면 걷고, 멈추면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녀를 양육할 때, 그들은 용사의 손에 쥐어진 화살과 같은 이들이 됩니다. 4, 5절 보세요.
[시 127:4-5] 4 젊어서 낳은 자식은 용사의 손에 쥐어 있는 화살과도 같으니,
5 그런 화살이 화살통에 가득한 용사에게는 복이 있다. 그들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고대에 자녀들이 많은 것은 자산이요 노동력이요 군사력이었습니다.
자녀들은 연세든 부모를 지켜주는 든든한 화살과 같은 힘이요 복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요셉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정말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편애가 문제이긴 했지만, 요셉을 마음 다해 사랑해주었지요.
그러나 자녀는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가 요셉이라는 자녀를 수고하여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잃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험한 세월을 보낸 이후, 하나님은 그를 낮추고 낮추셨습니다.
그 이후 야곱은 결국 요셉을 만납니다. 그 요셉은 야곱과 그의 형제들 전부를 책임집니다.
형제들 간의 깨어졌던 관계들도 다 회복합니다.
아무리 원수가 야곱과 그의 가족을 무너뜨리려 했을지라도,
야곱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얍복강에서 깨지고, 요셉을 잃은 후 한 차례 더 무너진 이후,
야곱의 집을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의지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야곱에게 요셉은 용사의 손에 쥐어진 화살과 같았습니다.
이 아버지 야곱의 경험이, 많은 부모님들의 경험 아닙니까?
더 나아가 자녀가 상급이요 자녀는 복이라는 말의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됩니다. 부모에게 복이 된 자녀 요셉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다
자녀는 선물이요 보상이면서 용사의 화살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족의 범위를 혈연과 육체에만 한정짓지 않습니다.
우리가 짓고 있는 집은 지상의 집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영적 성전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나의 자녀, 너의 자녀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기업인 자녀들을 공동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말씀과 기도로 그 자녀들을 함께 양육할 때,
그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의 용감한 군사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성문에서 마귀와 원수들과 담판할 때 담대하게 싸워 이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다음 세대를 함께 양육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다음 세대를 기르는 사명을 각 가정뿐만 아니라 바로 교회에도 주셨습니다.
부모와 교회가 함께 다음 세대를 하나님의 군사로 양육해야 합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시청에 가면 19세기와 20세기 초를 살았던 존 워너메이커의 동상이 있다고 합니다.
필라델피아는 예전 미국의 수도였지요. 그는 미국 백화점의 창시자이자 체신부 장관이었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 YMCA 건물을 지어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다른 일보다 그가 일생동안 가장 귀중히 여겼던 일은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27명의 아이들, 그리고 3명의 교사로 시작한 주일학교가 그의 사역 말년에는6,000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큰 기업의 회장이요 장관으로서 바쁘겠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주일학교가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입니다.”
그는 20대 청년 시절부터 교사로 헌신했는데, 80대 노인이 되어서도 주일학교 아이들의 어려운 가정을 심방하며 아이들을 위로하고 도왔습니다. 그가 60세 생일을 맞이한 날,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모였습니다.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다정히 이름을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하자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가 어떻게 이름을 다 아느냐고 감탄합니다.워너메이커가 대답합니다.
”내가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네. 아이들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네."
우리 교회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기업인 다음 세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양육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고 하나님의 군사들이 양성되어져 갑니다. 주를 의지할 때, 어떠한 자녀도 헛된 자녀가 없습니다. 헛된 수고란 없습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보상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녀는 용사의 화살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입니다.
이 교회가 새로운 생명을 축복하고 존귀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양육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다음 세대 주일을 맞이하여 성찬을 받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가정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사람의 모든 수고가 헛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세우시고 지켜주신다면, 어떠한 풍파가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음을 믿습니다.
주 안에 결코 헛된 수고란 없습니다. 성찬을 통해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주목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