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1950년 6ㆍ25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었다. 팔에 총상을 입었으나 전쟁이 끝나도 복무해야했던 부친은 5년을 채우고서야 제대할 수 있었다. 전후(戰後) 가난했던 나라에서 부친은 모친과 결혼하여 울진에서 오징어잡이 배를 타며 가족들을 부양했다. 그 일이 여의치 않았던 부친은 경북 청송에서 가내수공업 수준의 숯 공장을 운영하다 떠밀려오듯 울산으로 이주해왔다.
5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처용암 넘어가는 부곡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릴 때 만수 밭에서 자랐고,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알려진 신화마을을 지나서 여천 초등학교를 다녔다. 부두노조의 근로자였던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 저녁나절 퇴근할 무렵 아버지는 삶의 무게를 짓누르는 가난과 하루치의 피곤을 물리치고자 술에 의지해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나타나기 일쑤였다. 내가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아버지의 발을 씻을 때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겨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지나 반 백년을 살아보니 그 술 냄새가 고단한 아버지의 삶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다. 또 하나 아버지의 `친구`는 주말마다 텔레비전 앞에서 추첨하던 주택복권 추첨이었다. 매주 아버지는 어김없이 주택복권을 구매해 맞추어봤는데 당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당시의 주택복권은 지금 상품권보다 더 화려한 색감이었다는 기억만 어슴푸레 남아있다. 그 당시 한국비료를 오가던 화물을 실은 기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지나가곤했다.
부지런한 어머니는 술빵을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맞벌이를 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진양화학, 동양나이론 같은 회사에서도 근무했다. 어릴 때 집에서 토끼를 길렀는데 형과 함께 부두까지 걸어가서 토끼풀을 뜯어와 먹이곤 했다. 백구를 길렀던 기억도 난다. 어느 날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가축시장에 백구를 팔고 왔다. 형과 누나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어린 나도 덩달아 따라 울었다.
아버지는 환갑을 채우지 못하고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장생포 초입에 있던 `추억사진관`에서 찍었던 가족사진 속에서만은 젊은 가장으로 늠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버지가 주택복권에 당첨됐다면 어떤 계획이 있었고 이루어졌을까? 가족들과 세계 일주를 다녀왔을지도, 근사한 집을 한 채 지었을지 모를 일이다. 비록 아버지가 복권에 당첨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꿈꾸었던 어지간한 일들은 우리나라의 발전과 울산의 공업도시로 탈바꿈으로 인해 제법 많이 성취됐다고 생각한다.
환갑 고개가 멀지 않으니 이제 술주정뱅이의 모습으로 퇴근하시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해 기꺼이 자녀들의 앞길에 밑거름이 되겠다는 어머니의 다짐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울산지구 산업공단이 조성될 무렵 들어섰던 건물들이 이제 낡고 헤져 울산 중구와 남구 곳곳에서 재개발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옷은 낡아 해지고, 사람은 늙고 병들어 죽어도 도시는 새로운 탈바꿈으로 다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한다. 물처럼 인생의 시간도 흘러간다. 낡은 앨범 속 가족사진의 미취학아동은 50년이 더해져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가족사진 한 장이 오늘 참 많은 말을 걸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