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경덕의 「놀란 흙」 감상 / 손진은, 임종명
놀란흙* / 마경덕 뒤집힐 때 흙도 놀란다 쟁기 삽 괭이 호미 쇠스랑 포클레인···누가 제일 먼저 괭잇날에 묻은 비명을 보았을까 낯빛이 창백한, 눈이 휘둥그런 가난한 곳은 흙의 정수리거나 잠든 미간이거나, 흙의 표정을 발견한 누군가의 첫 생각, 그때 국어사전에 놀란흙이라는 명사가 버젓이 올라갔다 흙의 살붙이, 지렁이 땅강아지 개미 두더지 그것들이 가랑이를 헤집어 집을 짓고 길을 내도 놀라지 않는다 나무뿌리, 바위 뿌리에도 덤덤한 흙이 사람만 보면 왜 그리 놀라는지, 흙의 나라 태초에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을 닮은 흙의 심장은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공사장 주변, 포클레인이 파헤친 땅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었다 싱싱하던 흙빛은 흑빛이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는 흙집으로 들어가 더는 놀라지 않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자주 놀란다. - 시집 『사물의 집』, 시와미학 시인선, 2016. *한 번 파서 손댄 흙 -------------------------
<작가 소개> 마경덕(馬慶德, 1954~ ) 전남 여수 출생.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신발論」이 당선돼 등단. 시집 『신발론』(2005) 『글러브 중독자』(2012) 『사물의 입』(2016) 『그녀의 외로움은 B형』(2020) 등을 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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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흙’은 “한 번 파서 손댄 흙”이라는 부정적인 함의를 가진다. 물론 그 행위자는 인간이다. 포크레인은 그렇다치더라도 “쟁기 삽 괭이 호미 쇠스랑”은 흙과 친밀한 위대한 생산의 도구였다. 그러나 시인이 판단하기에 인간의 손에 들린 도구가 후기산업사회의 일상을 거치면서 점차 흙의 생명을 앗아가는 잔인한 도구가 되어가는 현실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흙은 인간이 작동하는 도구에 의해 비명을 지르며 창백한 낯빛이 되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놀란 흙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흙의 정수리거나 잠든 미간”을 건드리고 손을 대는 것이다. 그래서 국어사전에 버젓이 올라간 ‘놀란흙’은 변질되고 죽어가는 흙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흙은 그가 기르는 미물인 “지렁이 땅강아지 개미”는 물론 두더지가 가랑이를 헤집어 집을 짓고 길을 내도 놀라지 않고 살붙이로 품어안는다. 심지어 “나무뿌리, 바위 뿌리에도” 관대하고 덤덤하다. 흙은 미생물과 식물, 동물, 심지어 무생물과 공존하며 순환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람만 보면 왜 그리 놀라는”가. “태초에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을 닮은 심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흙은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대지의 충만한 생명력과 사랑으로 깃들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역으로 흙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는 말도 진실이다. 그러나 세기말부터 인간이 문명과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저질러온 생명 파괴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왔기에 흙에게 인간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체 부위를 가지고 있는 흙은 인간이 그 상황에서 느끼는 모든 감수성으로 반응하다 결국 “포클레인이 파헤친 땅”에서 생명을 키워내기는커녕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간다. “흙빛은 흑빛이었다”에서 흙빛과 흑빛은 생명의 빛과 죽음의 빛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흙은 이제 대지적 기반을 상실한 것이다. 이 흙의 불모화 과정은 이 땅의 흙이 파헤쳐지고 온갖 오염물질로 앓고 있는 현상과 겹쳐져 읽힌다. 대지가 병들어 가는데 더 이상 시인은 인간과 흙의 아름다운 동거를 노래할 수는 없다. 끝의 두 연은 이 시에 다시 한번 반전의 미학을 더한다. 놀라는 것은 살아있기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는 흙집으로 들어가/더는 놀라지 않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자주 놀란다.”는 것이다. 놀람의 의미가 확장되는 것은 물론 시적 주체가 단순히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놀란흙’과 감정을 공유하고 있음으로써 생태 파괴의 현실을 온몸으로 감당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더 이상 흙을 놀라게 하고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시한다. 시인의 시는 결국 흙을 전 지구적 생태위기를 대변하는 요소로 보고 흙의 건강성 회복을 모색하기 위한 책략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_ [시와정신] 2024. 여름호
/ 손진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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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마경덕 시인으로부터 선물받은 시집에 수록돼 한 번 읽었던 시다. 최근 손으로 필사하면서 천천히 곱씹으며 읽으니 시의 얼개가 더 뚜렷이 드러났다. 사물인 흙도 생물처럼 놀란다. 그래서 '놀란흙'이라는 단어가 생겨 국어사전에 버젓이 올려졌다. 그런데 흙을 놀라게하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함께 사는 지렁이 땅강아지 두더지 등 동물이나 나무나 바위의 뿌리도 결코 흙을 놀라게 할 수 없다. 하지만 포클레인이 파헤쳐도 놀라지 않는 흙이 있다. 그건 바로 "공사장 주변" "매장된 산업폐기물을 껴안고 까맣게 죽어있"는 땅이다. 죽으면 놀랄 수가 없는 법. "소심하고 겁 많은 아버지"가 죽어서 "흙집으로 들어가/ 더는 놀라지 않"은 것처럼. 반대로 화자는 흙처럼 "자주 놀란다".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다. * 사족 : 3행 괭잇날은 그냥 날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괭잇날은 괭이의 날이라는 뜻인데 문맥상 여기서는 2행에 열거된 도구들의 날이기 때문이다.
/ 임종명 네이버 블로거, 숲속의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