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그러니까 제가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봤던 큐브는 감동 그 자체였죠. 정말 좋은 영화였습니다. 당시 활동했던 영화 커뮤니티에 제가 올렸던 큐브에 대한 평을 올립니다... 후속작 큐브2에 구미가 당기시는 분들, 같이 영화 보시려면 리플 남겨주세요>_<
-바스크 18 나이트 슈펜다르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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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의 축소판, 큐브
몇 년 전 ‘화이트’라는 그룹이 “네모의 꿈“이라는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했었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걸
(중략)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 뿐 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네모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정육면체(cube)로 이루어진 세상.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 <큐브>의 배경은 이 큐브들의 집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노래 “네모의 꿈”에서 나오는 것처럼 각진 우리 사회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풍자한다. 관객은 빨간색이나 파란색 같은 원색 계통의 빛이 들어오는 이 기분 나쁜 상자들 안에서 2시간 넘게 6명의 사람들이 출구를 찾아 방황하는 모습만 바라본다. 이것이 캐나다 출신의 감독 빈센조 나탈리의 데뷔작 <큐브>의 줄거리다.
<큐브>는 필자가 보기에 올 들어 <매트릭스 (Matrix)>와 함께 관람객의 평이 가장 극단으로 양분되는 영화이다. 어떤 관람객들은 과감히 “올해 최고의 영화였다”고 극찬을 하는데 반해 어떤 관람객들은 <큐브>를 다 보고도 “도대체 말하고 싶은 게 뭐냐?”고 어리둥절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잠시 후 “뭐 이렇게 싱거워? 재미도 더럽게 없네”로 바뀐다. 이것은 당연하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긴박감과 속도감을 너무나 많이 접해본, 그리고 관객에게 생각할 틈도 필요성도 제공해주지 않는 그 특유의 단순성에 익숙해져있는 많은 관객들에게는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이 영화가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큐브>를 보면서 가장 당혹스러운 점은 언뜻 눈에 보이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잔인한 사이보그도 <쥬라기공원>에 나오는 흉폭한 괴물도 없다. 그렇다고 거대한 힘을 가진 사악한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적이 없으니 당연히 영웅도 없다. 주동 인물(protagonist)과 반동 인물(antagonist)이 등장하는 전통적인 대결 구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주는 부분이다. 그저 적이라고 할만한 것은 정육면체의 작은 큐브들이 17,576개나 연결되어있는 커다란 큐브뿐이다. 각각의 큐브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이고 이것들은 그냥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면서 스스로 배열을 바꿔간다. 큐브들이 조합을 바꾸어 나가다가 어느 순간 밖으로 나가는 통로와 연결된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큐브에서 나가지 못한다. 게다가 살인 함정이 있는 방들은 피해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큐브 속에 갇힌 여섯 명의 사람들에게 닥친 운명이다. 그렇다면 큐브는 무엇을 상징하며 그 속에 갇힌 사람들은 또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리고 큐브와 사람들을 가지고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거대한 큐브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영화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원래 있는 존재’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큐브는 분명히 자연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방마다 방의 고유번호가 적혀 있고, 그 번호에 얽힌 법칙에 따라 방의 배열이 바뀐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을 상징하는 이 ‘숫자’ 외에도 영화에서 전반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네모꼴’ 또한 문명을 상징한다. 반듯한 네모가 위, 아래, 옆으로 여섯 개나 맞대어져서 만들어진 정육면체의 방, 이것은 인간의 창조물이며 인간의 사회이다. 인간과 사회는 전후 관계가 뚜렷하지 않다. 분명히 인간이 모여서 형성한 것이 사회이기는 하지만 사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사회는 태어나기 전부터 ‘원래 있는 존재’이고, 현재 귀속되어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삶을 영위해나갈 곳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여섯 사람들은 이 인간이 만들어낸 복잡한 법칙 덩어리의 괴물 같은 사회 안에 갇혀 계속 같은 곳에서 맴돌다가 인간의 겉을 포장하던 이성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비문명적인 속성을 드러내게 된다.
큐브 속에 갇힌 여섯 사람들은 경찰관, 전문탈옥수, 학생, 건축가, 의사, 그리고 자폐증 환자이다. 법을 수호하는 자와 법을 피해 가는 자, 병을 고치는 자와 고침을 받는 자, 공부하는 자와 이미 교육을 받은 자 등 이 여섯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들 중 자폐증 환자를 제외한 다섯 사람들은 충분히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을 잃어간다. 원색 계통의 빛은 사람들의 피부를 점점 짓눌러서 마치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 대왕 (The Lord of the Flies)」에 나오는 소년들이 얼굴에 칠을 한 것을 연상시킨다. 결국 이 여섯 중 큐브에서 살아서 나가는 사람은 자폐증 환자뿐이다. 전문탈옥수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다가 살인 함정에 빠져서 죽고 의사와 건축가와 학생은 경찰관에게 살해당하며 경찰관은 자신의 말에 거역하는 다른 사람들을 죽여가면서 마지막까지 발버둥치지만 마지막에 큐브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누구의 손을 빌려서 어떤 형태로 죽었든 간에 궁극적으로 가장 무서운 적은 인간 자신이었다.
인간 자신의 오만, 의심, 극단적 이기주의와 방관주의는 인간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 사람들은 우리들과 같이 일장일단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의 단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자신들의 파멸을 부른다. 마지막에 큐브를 살아서 나가게 되는 유일한 사람 자폐증 환자는 어두운 큐브에서 밝은 빛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 빛은 구원의 빛이라기보다는 그를 삼켜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건축가가 출구를 눈앞에 두고도 나가면 맞이하게 될 탐욕의 세상이 싫어서 나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작은 큐브들이 커다란 큐브를 형성하듯이 큐브에서 나가면 더 큰 큐브로 귀환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암시를 던져준다. 어느 큐브에 가건 어리석은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가까스로 이 큐브에서 탈출하는 자폐증 환자의 뒷모습은 승리의 모습이 아닌 비참한 굴레를 마지못해 계속 따라가는 모습이다. 자기만 아는 인간들이 모인 사회로 그가 귀환한 수에 멸시와 무시를 받게될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 더욱 그렇다.
큐브 속에 갇힌 인간은 너무나 약하고 어리석다. 거대한 큐브 속에서 인간의 능력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다. 큐브를 파괴할 완력도 갖지 못하고, 살인적인 함정들에 대항할 수 없는 나약한 육체를 가졌으며 인간이 자부하는 지능도 계속 실수를 범한다. 협력과 협동은 갈수록 약해져서 각자의 능력을 한군데로 모으지 못한다. 이 사회에서 인간들이 하는 행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비록 군데군데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고 ‘희망’이라는 어쩔 수 없는 요소의 위치가 다소 애매하기는 하지만 영화 자체가 가져다주는 심오한 메시지는 이러한 흠들을 가려주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진다. 스피디한 맛은 없지만 말초적인 공포감과 심오한 메시지를 잘 섞어놓은 이 영화는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감히 평가하고싶다. 프랑스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상업성까지도 인정받을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새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이 영화의 흥행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관객들이 생각보다 피상적이고 허무맹랑한 할리우드 영화에 많이 젖어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든다. 여하튼 새삼스럽게 온 세상이 ‘네모꼴’로 이루어졌다는 어느 노래 가사가 생각나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는 것. 이것이 <큐브>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선물일 것이다.
<큐브 (C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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