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막14:26-31절, 327.344.518장.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큰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하고, 성경은 한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고 처음과 나중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속 주이자 또한 심판주입니다.
성경은 단순히 어떤 교훈만을 주시려는 경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구속하시기 위한 웅장한 계획을 가지고 직접 역사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주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3:1-2절에 보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를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라고 했습니다. 씨 뿌리는 시기도 있고 추수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추수를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종말과 심판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3:30, 39). 또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세상에 오신 때부터 종말은 시작되었고 그 종말의 시기는 바로 추수의 계절이란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9:38-39)고 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고난을 불과 몇 시간(時間) 앞두고 발생한 사건(事件)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추수의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상태에서 어떤 죽음을 죽을 것인지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앞 단락에서는 예수님의 성만찬(聖晩餐)의 깊은 뜻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제자(弟子)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합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주면서 내 살이라 내 몸이라 했고, 잔을 나누면서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했을 때,
속마음으로 놀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밝히 알지 못했습니다. 성만찬에서 되어진 사건은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충격이었습니다. 더구나 가룟 유다가 배신하여 나가 버렸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건이 마음에 부담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막14:27)고 했습니다. 이는 구약 스가랴 13:7의 말씀을 예수님이 인용한 것입니다만 그 뜻은 목자가 죽으면 양들은 다 제 갈 길로 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 제자들은 각각 흩어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식 속에는 한 순간도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제자들은 마음에 불안과 초조가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알지 못하겠으나 예수님의 말씀의 전후, 좌우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곧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자기들의 직업을 버리고 3 년 동안이나 따라 다녔는데 겨우 죽음이 임박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망 정도를 넘어서 절망으로 다 달았습니다.
제자들의 속마음은 예수님이 드디어 정권을 잡고 이스라엘을 독립하고 좋은 나라를 만들고 자기 자신들도 모두 각료들이 되어서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예수님의 언행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해서 제자들보다 갈릴리 곧 제자들이 일했던 옛 터전에 먼저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 다 나를 버리리라(막14:27절)는 말씀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충성과 맹세를 보이고 싶었습니다. 제자들 중에 대표적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섭섭하기라도 한 듯 자기의 의지(意志)를 아주 단호하게 주장했습니다. 여기 있는 제자(弟子)들이 다 예수님을 배신(背信)해서 버린다고 해도 절대로 나만은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맹세를 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은근히 칭찬을 기대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뜻밖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고백(告白)과 맹세를 칭찬하기보다. 오늘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이 스승인 예수님께 인정받지 못했다는 허탈감 때문인지 더욱 힘주어서 자신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리했더니 다른 제자들도 꼭 같은 말로서 맹세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14:31)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는 비겁하게 멀찍이 예수를 따르다가 감히 예수님이 심문 당하는 것을 가까이 보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숨기고 불을 쬐다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자 자기를 극구 부인했습니다.
대제사장의 비자는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음을 보았다고 증거를 들이대자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부인했습니다. 그 말하는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거니와 깨닫지도 못한다고 둘러댔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그 비자의 눈을 피해서 앞들로 나가자 곁에 섰던 사람이 노골적으로 베드로에게 이 사람이 그 당이라고 했더니 베드로는 더욱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고 쏘아부쳤을 때,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그 말의 뜻을 이해 못한다고 했습니다(마14:66-72). 그때 닭이 두번째 울었고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살피면서 몇 가지 깊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으로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오셨다가 기록된 대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14:27절에도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은 구약의 약속 성취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구속주로 오셨는데 그는 장차 될 일을 훤히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무도 주님께서 가시는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중심은 언제라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주장과 역사의 굴곡과 관계없이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로서 차질 없이 사명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이라고 해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무지해서 인생을 걸어가는데 낙심도 하고 이런 저런 결정을 하는데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특히 이번 주간에 대학 수능 고사를 앞에 두고 학생들이나 학부형들이 심히 불안과 초조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역사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일거 수 일 투족을 살피시며 주관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한 순간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위한 위대한 계획과 섭리를 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을 통해서도 영광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실패를 통해서도 영광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믿습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병약한 것도 또는 가난한 것도 그리고 때때로 넘어지는 것도 우리가 소원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행까지도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한 재료로 삼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섭리가 어디 있는지 주님의 계획이, 어떤지를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깨달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언제라도 새 힘을 얻고 능력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생각해 볼 것은 인간 베드로의 연약성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는 자칭 열두 제자 중 대표적으로서 누구보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했으나 결국 그는 주님이 예언한 대로 세 번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결심도 잘했으나 실패도 빨랐고 그리고 회개도 즉각적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의지적인 사람이라기보다 감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쨌든 그의 행동 곧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예수의 제자이기 전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도 못한 비윤리적이요 비도덕적입니다.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고서 실제로는 죽음이 두려워서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습니다. 말하자면 3 년 동안 먹고, 자고, 입고, 배우고, 함께한 스승을 배신한 것은 배은망덕 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신학교 3년을 다 마치고 졸업의 사은회를 한 후 곧 바로 스승을 배신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충격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자였으나 그도 역시 인간인지라 자기 목숨과 가족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베드로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만을 탄핵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며 주님의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축복을 발로 밟고 주님께 대한 감사를 져버린 행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주신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배은망덕 하는 것입니다. 마치 문둥병을 고침 받은 사람 10명이 있었으나 실제로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아홉 명은 배은망덕하여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시 가운데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불어라. 불어라 겨울바람아 너는 인생의 감사하지 않는, 만큼은 무정하지 않다 얼어라. 얼어라 찬 하늘이여 너는 배은(背恩)하는 것처럼 사납지는 않다라고 했습니다.
추수의 계절, 감사의 계절, 오늘 우리도 베드로처럼 언약한 사람이지만 그의 전철을 밟기보다는 늘 주님의 은혜와 위로와 축복은 감사하면서 이렇게 암울하고 힘든 세상 가운데 감사하면서 주 안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박봉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