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구 언양성당(下)
고산준령 곳곳에 신앙의 숨결 "생생"
영남지방 믿음의 고향인 언양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한 곳에 들러 잠깐 순례하고 돌아서는 성지순례를 예상했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울산광역시 면적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언양본당(주임 이장환 신부) 관할구역 구석구석에서 200년 신앙전통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시간을 넉넉히 잡고 산골짜기 공소까지 들어가보자. 삶은 고단하지만 신앙 열의만큼은 뜨겁기 이를 데 없는 교우촌의 정겨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한국판 카타콤바'라 불리는 죽림굴까지 가려면 1시간은 족히 발품 팔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주변 경치가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준다.
이 일대에 복음의 씨앗이 그토록 일찍(1801년 신유박해 이전) 뿌려진 연유만큼은 알고 떠나자. 그러면 13곳에 달하는 사적지와 유적지 중 어느 한군데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울 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명례방(지금의 명동) 집주인 김범우(토마스)는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에 연루돼 추조(형조)에 끌려가 매를 맞고 경남 밀양 단장으로 귀양을 간다. 그가 귀양지에서도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고 자기 말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를 가르쳤다"는 샤를 달레 기록으로 보건대 언양에 사는 누군가가 그로부터 천주교를 소개받았을 것이다. 밀양과 언양은 100리 남짓한 거리다.
기록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언양 천주교인은 1790년 서울로 올라가 세례를 받은 해주 오씨 문중의 오한우(베드로)와 사촌 처남간인 경주 김씨 문중 김교희(프란치스코)다. 신유박해 때 오한우는 순교하고, 김교희는 일가족을 이끌고 내간월산 불당골(간월공소)로 피신하는데 이곳에서 언양지방 첫 신앙공동체가 형성된다. 또 강이문이라는 신자는 유배지 탑곡(울주군 두서면 내와리)에서 신자촌을 형성하고, 그의 영향으로 신자가 된 예씨 청년은 상선필(예씨네골,두서면 인보리)에 신자촌을 만든다.
불당골·탑곡·상선필 신자들은 서로 왕래하면서 정해박해(1827년) 직전까지 평화롭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뿌리를 뻗어 내려갔다.
■ 죽림굴
간월공소에서 왕방재라는 고개를 넘어 왕래한 박해시대 피난처. 고개 넘어 간월 방향에서 포졸들이 나타나면 신자 100여명이 넓은 굴 속에 들어가 위기를 모면했다. 1986년 이 굴을 처음 발견한 박만선(프란치스코, 60) 언양성지 안내봉사자회 회장은 발견 당시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박해시대 때 포졸들이 들이닥치면 신자들이 1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굴로 피신했다는 구전(口傳)을 어릴 적에 들었어요. 계곡이 가깝고 앞에 소나무가 있다는 단서를 갖고 20년 가까이 헤맸는데 막상 찾고보니 두번이나 지나친 곳이었습니다. 낮은 입구가 대나무와 풀로 덮혀 있어 좀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지요."
박해시대 교우들은 죽림굴 주변에서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이었다. 이 굴은 최양업 신부가 4개월간 은신하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마지막 서한(1860년 9월3일자)을 쓴 곳이기도 하다. 본당 신자들은 굴을 발견한 11월9일이 돌아오면 이곳에서 기념미사를 봉헌한다.
■ 살티공소와 순교자 묘지
가지산(1230m) 중턱에 있는 살티에는 부산교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현존 공소와 순교자 김영제(베드로) 묘소가 있다. 지금은 관광지에 속해 있지만 박해시대에는 수목이 울창해 대낮에도 어두웠던 곳이다. 병인박해(1866년) 때 간월과 언양에 살던 신자들이 피난와서 형성한 공동체다.
그 무렵 김종륜(루가)·허인백(야고보) 등과 함께 체포된 김영제(베드로)는 울산과 서울에서 극심한 매질을 당하고 반주검이 되어 돌아와 장독(杖毒)으로 순교했다. 부산교구 김윤근 신부가 그의 5대손. 최재선 주교·김문옥 신부·이종창 신부 등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 못자리로도 유명하다.
■ 언양성당 주변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石造)성당 건물과 순교자유물전시관을 둘러본 후 뒷산으로 올라가면 병인박해 순교자 오상선(오한우의 증손자) 묘소가 나온다. 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산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아름다운 성모동굴이 나타난다.
영남의 첫 신자 김교희(프란치스코) 묘소, 교우촌의 정취와 활력이 살아있는 직동공소, 순교자 치명장소인 언양 옥터 등도 성당 가까이 있다.
이장환 주임신부는 "본당은 기존 신자들의 뿌리깊은 신앙심과 신흥 아파트 단지로 이주해오는 젊은 신자들의 활력이 조화를 이뤄 괜찮지만 점점 쇠락하는 공소가 큰 걱정"이라며 "이 일대의 신앙 전통을 보존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사진설명)
1. 성지순례를 온 마산교구 양덕동본당 신자들이 성모동굴에서 박해시대 언양 천주교회사를 듣고 있다.
2. 박만선 회장이 폐쇄된 삼정공소에서 떼어 온 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3. 200년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언양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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