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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하여
마음에 품고 있는 것
옛날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다. 그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날아와서 어깨나 손위에 앉곤 했다. 그는 그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였다. 잡아올 마음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심이란 이렇게 겉으로는 아닌 체하면서 속으로 품고 있는 사심(邪心)이다.
예로부터 조류(鳥類)는 인간의 기심에 예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강남(江南)의 아파트촌인 압구정동(狎鷗亭洞)은 세조(世祖) 쿠데타의 공신(功臣)이요 벼슬 밭에서 영화를 누렸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의 정자 이름에서 비롯된 동명이다. 그는 벼슬에 욕심 없이 강촌(江村)에 은퇴해 산다는 허울을 위해 이 강변에다 갈매기와 친한다(狎鷗)는 뜻으로 압구정을 짓고 아호(雅乎)도 기심을 잃은 노인이라 하여 `망기노(忘機老)'라고 자칭하였다. 하지만 기심에 예민한 갈매기는 이 정자를 피해 날았던 것 같으며, 뜻있는 선비들은 친할 `압(狎)'이 아니라 짓눌러버릴 `압(押)'구정으로 불러 내렸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따라 우리나라에 온 굴씨(屈氏)라는 궁녀(宮女)가 있었다. 한국 땅에서 살다 죽은 이 굴씨는 휘파람으로 온갖 새를 불러들이고, 불러들인 새를 손가락 끝으로 마음대로 다루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이 별다른 비결이라도 있는 가고 물으면, 기심없는 천진(天眞)한 경지에 들면 새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고 대견스럽지 않게 대꾸하곤 했다.
한말, 헌종(憲宗)-철종(哲宗)-고종(高宗) 3대를 거쳐 어전에서 판소리를 읊었던 이날치(李捺致)라는 명창(名唱)이 있었다. 이 명창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다는 시인(詩人) 임규(林圭)는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다. `어릴 적 고향인 익산(益山) 근처 심곡사(深谷寺)에서 이날치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가 새 소리를 낼 때마다 뻐꾹새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산새들이 날아들어 그를 에워싼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다'고-.
신앙이나 예술이나 수양에서 기심을 잃은 신묘한 경지에 이르면 새와 사람 사이에 격의가 증발해 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새가 사람을 보고 피하는 것은 권욕(權慾)이며 이욕(利慾), 명욕(名慾), 음욕(淫慾)..., 위선, 시기, 모략, 음모...등 온갖 잡심이 범벅이 된 것을 꿰뚫어 본 때문일까. 그렇다면 도시에서 새가 사라지는 현상은 비단 공해만도 아닌 범람하는 기심 때문이었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자처하면서 당대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힘써 추진한 일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어리석은 중생들의 고혈을 착취하는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던 자들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돈을 긁어모으기 위하여 면죄부를 발매한 알브레히트 대주교로부터 면죄부 판매의 위임을 받은 도미니크파 신부 테첼은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낳은 성모마리아를 범해도 괜찮다“
“교황의 문장으로 장식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은 비중을 가지고 있다”라고 떠들고 다녔다.
이런 사람들이 한없이 무서워하는 게 있다. 사람들의 눈이다. 그들은 자기들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인 루터를 죽이고 싶었으나 루터를 지지하고 있는 독일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감히 그 일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사람 죽일 연구를 치밀하게 한 소위 하나님의 종들은 그 당시로부터 1,500년 전에도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의 의식구조 역시 마찬가지여서 하나님을 자기네 삶의 한 장식품으로 취급했고 진정으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사람들의 눈이었다.
이들은 가룟 유다를 매수하고 교묘하게 어리석은 군중들을 충동질하여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사람을 살리는 이도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과 보람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주기 위하여 자기의 전부를 희생한 사람이다. 이런 이들의 특성을 한번 생각해 보자 이들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무서워한다. 대신 만민이 무서워하는 세속적이 불이익이나 세인들의 눈은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헌신하며 보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사도가 그런 사람이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줄을 잇는다.
예수님 당시 화려함 옷을 입고 거룩하기 그지없는 언행을 일삼던 대 제사장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그 앞에 붙들려온 예수님은 물에 빠진 새앙주 꼴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자기네의 기분에 들지 않는 대상을 어떻게 죽여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사람이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을 살릴까하는 문제로 고심하던 분이시다.
십자가 사건이후 역사의 평가가 이들에게 각각 어떻게 내려 졌는가를 살펴볼 필요기 있을까?
우리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 살릴 생각을 하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보다 근본적인 유익을 줄 수 있을까를 연구하며 또 그 연구한 바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참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고하는 대로 사는 인생(생각이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
“인생의 대부분의 불행은 자신에 관계되는 사실에 대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에서 생긴다. 사건을 건전하게 판단하는 것은 행복에로의 커다란 일보가 된다.” 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연습량이 그다지 많지 않은 피아니스트가 대답 하였습니다. “나는 머릿속에서 연습하고 있다.”라고. 머릿속에서 연습하는 것은 아주 효과가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우리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농구공을 가지고 실제로 연습한 팀과 단지 머릿속에서 공을 던지는 것을 상상하는 훈련을 한 팀 사이의 향상의 정도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비참한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가 말한 그대로의 인간이 되어 가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상상력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커다란 손실입니다.
생각의 힘
한 청년이 알프스 산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준비해간 물이 떨어져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때 그는 알프스 계곡 사이에 있는 맑고 깨끗한 호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단숨에 물을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몹시 시원한 물이었습 니다.
물을 실컷 마시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그는 "포이즌(poison)"이라고 쓴 경고판을 보았습니다. 이 물 속에 독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 청년의 몸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했고, 그는 심한 구토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몸이 떨리고 얼굴은 창백해졌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게시판을 잘못 보았군요. 그것은 '포이즌(poison)'이라고 쓴 것이 아니고 '포이존(poissun): 낚시금지)'이라 고 쓴 것입니다. 이 청년은 '포이존'을 '포이즌'으로 잘못보고 야단법석을 떤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듣자마자 청년은 열이 내리고 구토도 멈추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생각의 힘입니다.
생각은?
생각은 그 사람을 건축해 내는 설계도이다. 왜냐하면 생각 여하에 따라 그 사람의 행위가 선하게 혹은 악하게 표면화되기 때문이다.
슬픔을 이길 수 있는 마음
즐거운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즐거움뿐이다. 그러나 한 송이의 낙화를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을 슬프게 보는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슬픔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봄바람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가을바람은 오히려 쓸쓸하기 짝이 없다.
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인생의 귀추에 있어서 이치가 나타나고, 꽃을 피우는 봄바람에 자연의 이치가 나타난다. 이것들이야 말로 우리 인생을 위한 지도인 것이다.
누가 달을 보며 슬퍼하며, 바람을 향하여 탄식하는가?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슬프게도 혹은 즐겁게도 가슴에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人間)과 컴퓨터
컴퓨터는 아주 복잡한 계산들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인간보다 더 훨씬 빨리 할 수 있다. 컴퓨터는 또한 일정한 형태의 기억장치와 일정한 형태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컴퓨터는 새로운 생각을 고안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그 안에 입력된 것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독창적(獨創的)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다. 아니 그 이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일들을 할 수가 있다. 즉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음으로서 자신의 외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의식이 있으며 자기비판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우주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적이다. 어떤 과학자가 다른 과학자에게 천문학(天文學)적으로 말해서 인간은 극도로 미미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동료 과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지요, 그렇지만 천문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천문학자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의식(意識)속의 질병
백만장자의 아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다급한 부자는 마지막으로 신의로 소문난 의사를 수천 리 밖에서 모셔다가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사정을 했다. 의사는 소년을 진맥한 다음 한 첩의 약을 지어놓고 이것이 효험이 없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로서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노라고 선언하고는 가버렸다.
주인집 도령이 깊은 산골에 들어가 옹달샘에서 물을 마시다가 실지렁이를 함께 들이키고 자기 뱃속에는 엄청난 수의 실지렁이가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끝에 이 같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정을 짐작한 그 집의 늙은 머슴이 의사가 지어놓은 약을 자기가 다리겠노라고 자청을 했다.
자기 아들을 무던히도 사랑했던 머슴인지라 그 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머슴은 의사가 지어준 약을 땅에 쏟아버리고 대신 자기의 삼베 끈을 잘라서 약탕관에 넣고 푹푹 삶은 다음 그것을 도령에게 가지고 갔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이 이 약을 먹을 때는 반드시 눈을 감고 먹으라고 했다면서 도령의 눈을 감긴 채 자기의 삼베 탕을 먹였다.
다음날이었다. 도령은 길게 죽어있는 무수히 많은 실지렁이를 배설해 냈다.
도령은 의사가 지어준 약을 먹고 실지렁이가 모두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면서 병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말았다.
뱃속에서도 녹지 않는 긴 삼베가닥을 실지렁이로 보고 병에서 고침 받은 것이었다.
잘못된 해석
한 과학자가 벼룩의 특성을 살피기 위하여 귀납적인 방법으로 벼룩을 관찰하고 있었다. 벼룩의 한 다리를 끊어 내면서 "뛰어!"하고 명령을 했다. 그 벼룩은 즉시 펄쩍하고 뛰었다. 한 다리를 더 끊어 내며 다시 "뛰어!"하고 명령을 했다. 벼룩은 또 뛰었다. 이 과학자는 이 같은 명령을 계속하며 여섯 번째인 마지막 다리만 남겨 놓기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벼룩이 뛰기가 좀 힘들어졌다. 하지만 뛰어보려고 애를 쓴다. 과학자는 드디어 마지막 다리까지 잘라버리고 또 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벼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과학자는 목소리를 높이며 명령을 했다. "뛰어!" 여전히 벼룩은 반응이 없었다. 세 번째로 과학자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명령했다. "뛰어!" 그러나 불쌍한 벼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과학자는 다음과 같이 연구의 결론을 내렸다. "벼룩의 다리를 모두 제거 해버리면 벼룩은 청각을 상실해 버리게 된다."
해석이 중요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이 하나 서있다. 그 동상이 서있는 동안은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자고 합의를 하고 동상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닉하게도 이 동상으로 말미암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뻔 했다. 그 동상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칠레의 한 사람이 지적하기를 그 동상의 예수님은 칠레에다 등을 돌리고 계시다고 했다. 즉 동상의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뒤는 칠레 쪽을 향하게 된 것이었다.
이 일은 칠레 사람들의 마음을 대단히 상하게 하고 자극시켰다. 이렇게 동상을 세우는 일은 칠레를 무시한 처사라고 했다. 칠레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지고 그것은 곧 폭발할 것만 같았다. 바로 이때 한 기자가 신문에 실은 글 때문에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그 신문의 글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고 서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예수님의 감시, 감독을 더 필요로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신문의 글은 전체 칠레 사람들의 감정을 즉시 무마시키고 무서운 마찰을 피하게 했던 것이다.
이 멋있는 해석! 무슨 일에 있어서나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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