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로마 15:3. 여호와께서는 피조물들에게 가장 유익하도록 결정을 내리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삶을 즐기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생명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또한 그 누구도 그분께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도록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기꺼이 그러한 희생을 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예를 들어, 그분은 많은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쉴 시간을 포기하셨습니다. (마가 6:31-34) 좋은 가장은 자신이 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가족을 위해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며, 그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되는 대로 결정을 내리거나 기분 내키는 대로 결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가르침에 따라 결정을 내립니다. (잠언 2:6, 7) 그렇게 하여 그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합니다. (빌립보 2:4) 남편이 여호와와 예수의 본을 따르기 위해 노력한다면 좋은 가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파21.02」 7면 19-21항 |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Christ pleased not himself Barnes' Notes on the Bible For even Christ - The apostle proceeds, in his usual manner, to illustrate what he had said by the example of the Saviour. To a Christian, the example of the Lord Jesus will furnish the most ready, certain, and happy illustration of the nature and extent of his duty. Pleased not himself - This is not to be understood as if the Lord Jesus did not voluntarily and cheerfully engage in his great work. He was not "compelled" to come and suffer. Nor is it to be understood as if he did not "approve" the work, or see its propriety and fitness. If he had not, he would never have engaged in its sacrifices and self-denials. But the meaning may be expressed in the following particulars: (1) He came to do the will or desire of God in "undertaking" the work of salvation. It was the will of God; it was agreeable to the divine purposes, and the Mediator did not consult his own happiness and honor in heaven, but cheerfully came to "do the will" of God; Psalm 40:7-8; compare Hebrews 10:4-10; Philippians 2:6; John 17:5. (2) Christ when on earth, made it his great object to do the will of God, to finish the work which God had given him to do, and not to seek his own comfort and enjoyment. This he expressly affirms; John 6:38; John 5:30. (3) he was willing for this to endure whatever trials and pains the will of God might demand, not seeking to avoid them or to shrink from them. See particularly his prayer in the garden; Luke 22:42. (4) in his life, he did not seek personal comfort, wealth, or friends, or honors. He denied himself to promote the welfare of others; he was poor that they might be rich; he was in lonely places that he might seek out the needy and provide for them. Nay, he did not seek to preserve his own life when the appointed time came to die, but gave himself up for all. (5) there may be another idea which the apostle had here. He bore with patience the ignorance, blindness, erroneous views, and ambitious projects of his disciples. He evinced kindness to them when in error; and was not harsh, censorious, or unkind, when they were filled with vain projects of ambition, or perverted his words, or were dull of apprehension. So says the apostle, "we" ought to do in relation to our brethren. 반스의 성경 주석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는 - 사도들은 그가 구세주의 본보기로 말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평소의 방식으로 진행한다. 기독교인에게 주 예수의 예는 그의 의무의 본질과 범위에 대한 가장 준비되어 있고 확실하며 행복한 예시를 제공할 것이다. 스스로를 기뻐게 하지 아니하셨다. - 이것은 주 예수께서 자기의 위대한 일에 자진해서 기꺼이 임하지 않으신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와서 고통받는 것을 강요받지 않았다. 또한 그가 그 일을 "승인"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거나, 그 일의 적절성과 적합성을 보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그러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것을 위한 희생과 자기부정에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세부 사항으로 표현될 수 있다. (1) 그는 구원의 일을 "맡는" 하나님의 뜻이나 소망을 행하게 되었습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것은 신성한 목적에 합당했고, 중재자는 하늘에서 자신의 행복과 명예를 상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었다; 시편 40:7-8; 히브리서 10:4-10; 필리핀서 2:6; 요한복음 17:5. (2)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의 위로와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이 주신 일을 완성하시는 것을 큰 목표로 삼으셨다. 요한복음 6장 38절,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그렇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3) 그는 하나님의 뜻이 요구하는 어떤 시련과 고통도 기꺼이 감수하고, 그것들을 피하거나 물러서 움추리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동산에서 그의 기도를 보라; 누가복음 22장 42절. (4) 그의 삶에서, 그는 개인적인 위안, 부, 친구, 또는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복지를 도모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가난해서 그들이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부양할 수 있는 쓸쓸한 곳에 있었다. 아니, 그는 약속된 시간이 죽을 때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애쓰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5) 여기서 의도했던 사도의 또 다른 생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제자들의 무지, 맹목, 그릇된 견해, 그리고 야심찬 계획들을 참을성 있게 참았다. 그는 실수할 때 그들에게 친절함을 보여주었고, 그들이 헛된 야망으로 가득 차 있거나, 그의 말을 왜곡하거나, 이해력이 둔할 때 가혹하거나, 비난하거나, 불친절하지 않았다. 사도 역시 "우리"는 우리 형제들과 관련하여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오늘날과 달리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나름대로 신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그들 나름의 관념을 가지고 신에게 봉사했다. 그래서 바울은 하늘에나 땅에 비록 신이라 칭하는 자가 많다고 하였으며,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한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을 드러내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따라 해석하여 믿는 하나님이 아니며, 마지막 예언자라 주장하는 마호멧의 코란을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닌 오직 예수의 행하심과 그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라 여기는 무리들이 부패함에 따라 다시 율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예가 워치타워 종교이다.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율법이 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지 않다고 하면서 율법이 유효하지 않다는 진정한 의미를 뭉개버리고, 그리스도인의 지침이라는 이름으로 변형 율법을 도입시켰다. 그들의 율법은 실로 그 규모가 크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로운 율법체계로 정비한 것을 '신권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내세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조직을 예수가 이끈다고 주장하면서 율법의 구속에서 자유를 주신 예수를 부인하고 새로운 율법으로 그 성원들을 구속시키는 셈이다.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은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말은 양심에 새겨지는 성령의 법으로 살아감을 뜻하며, 책에 기록되는 법의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內住)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은 자신이 정하는 것이고 책에 기록된 법은 워치타워라는 회사가 만든 책에 기록된 내규이다. 그러므로 이 자유에 의한 법은 생명을 주는 것이며, 책에 기록되는 워치타워의 내규는 사람을 죽이는 법이다. 그 법은 오로지 워치타워 회사의 이익을 도모하는 법일 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옹호하는 법이 아니라 그 이름을 빙자하는 워치타워 법인의 이익을 옹호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