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전〔南慈賢〕 -조소앙(趙素昻)
옛날을 생각해 보건대 왜추(倭酋)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도적질을 할 때에 여걸들이 나와 역사를 밝게 비추었으니, 금섬(金蟾)과 애향(愛香)은 과감히 순절하였으며, 계월향(桂月香)은 연광정(鍊光亭)에서 강개한 마음으로 적장을 죽였고, 논개(論介)는 촉석루(矗石樓)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물로 뛰어들었다. 이들은 모두 위대한 업적을 세웠으며 대의를 펼치고 밝혔으니, 연약한 몸으로 뜻을 굳게 지키며 용감히 떨쳐 일어나 옥이 부서지고 꽃잎이 날리듯 슬프고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대가 흘러 청 태조(淸太祖)가 강도(江都)를 침범했을 때에 순절한 여성이 70여 명이었는데 사관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그 아름다움을 전하였다. 또 시대가 흘러 경술년(1910) 나라가 폐망한 뒤로 금섬, 애향, 계월향, 논개와 같은 인물을 다시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는데 근래에 한 명의 여협(女俠)을 얻게 되었다. 하룻저녁 신혼의 지아비와 정을 끊고 만번 패하여 분명 죽게 될 때에 용기를 북돋아 이역만리를 떠돌아 싸우며 천백번 꺾여도 굽히지 않고, 손가락을 자르고 칼을 품고서 총칼이 숲을 이룬 가운데서 적의 괴수를 처단하였다.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은 충심을 지녀 중원의 문단에서는 혁명의 어머니라 칭송하였고, 적국의 신문 평론에서는 두려운 노파라고 제목을 달았으니, 근대의 여협 남자현이 바로 그 사람이다.
선생의 성은 남(南)이고, 이름은 자현(慈賢)이다. 한국 경상북도 사람으로 고향에 있을 때는 부자로 일컬어졌다. 18세에 같은 마을의 김영주(金永周) 혼인을 하였고 겨우 1년이 지나 적의 세력이 창궐하여 조국이 몰락하였으니, 이른바 합방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때 선생의 나이 겨우 19세였는데, 개연한 마음으로 달빛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게 말하였다.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집만 온전히 보존할 수는 없는 것이니, 불타고 있는 집에서 즐거워하며 편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미 죽음으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결심하였으니 저세상에서 서로 만납시다.”
한마디 말로 작별을 하고 앞장서 문을 나섰고 준걸들을 불러 모아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때 한국과 일본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피가 비처럼 흥건하게 흘렀고 의인과 열사가 연이어 나왔다. 그의 남편도 따라 참전하여 적군과 수십 차례 교전을 벌였는데, 결국은 적군의 공격에 죽게 되었다. 선생은 크게 부르짖으며 말하였다.
“공적으로는 적이고 사적으로는 원수이니, 절대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을 것을 맹세하노라.”
마침내 의병대장을 자임하고 적군과 맞서 여러 차례 승전을 알리니, 당시 적들이 ‘한국의 여비장(女飛將)’이라 일컬었다. 선생이 5, 6년간 여러 번 전투를 치렀으나 적들의 기세가 더욱 거세져 압록강 북쪽으로 근거를 옮겨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지역을 종횡으로 누볐다. 그리고 큰 뜻을 품고 망명한 한국의 지사들과 은밀히 마음을 맞춰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다.
기미년(1919) 3월 독립을 선포할 때에 전국적으로 떨쳐 일어나 내외에서 호응하였으며, 나라를 건립하고 연호를 새로 쓰기 시작하는 등 위세를 크게 떨쳤는데, 선생이 그 소식을 듣고는 기뻐하며 “이때다. 기회를 이용할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건장한 부하를 몰래 파견하여 국내로 들어가 선동하여 각 지역에서 격렬히 혈전(血戰)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몇 년 후에는 요녕성(遼寧省) 통화현(通化縣)으로 옮겨 와서 여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추대되어 여성 의병 인재를 양성하였다. 아울러 한국 임시정부에 협조하여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여겼다. 임시정부에 대해 “많은 용이 있는 가운데에 머리가 없으니 어떻게 적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각각 마음과 힘을 모아야지 따로따로 다른 길을 가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주위 사람들이 그 지혜에 감복하였다.
1928년 4월에 암살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추대되자 단원 4명을 데리고 직접 폭탄과 권총 등의 무기를 가지고 서울로 들어가 적국 총독 사이토(齋藤)를 폭탄으로 처단하려고 모의하였다. 그해 4월 6일 따르던 동지 4명이 적에게 붙잡히고 무기도 빼앗기게 되자 선생은 몰래 서울을 빠져나가 다시 중국으로 갔다. 간도(間島) 용정촌(龍井村)의 깊은 산에서는 비바람을 맞으며 맹수와 독사가 있는 곳에서 먹고 자며 지냈는데, 공격하기도 하고 방어하기도 하고 임기응변술을 쓰기도 하고 정공법을 쓰기도 하는 등 신출귀몰하게 군사를 운용하였다. 오랜 뒤에 적군이 상황을 탐지하고서 여러 차례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공격해 왔지만 선생이 몰래 한국인 남녀 600여 명을 모아 의군(義軍)을 조직해 더욱 격렬히 항전하였다. 이후 화전현(樺甸縣)으로 와서 한국독립당의 요직을 맡아 실질적인 힘을 배양하였다. 일전에 독립당의 대회 석상에서 단상에 올라 연설한 적이 있는데 격앙된 마음에 비분강개하여 소매에서 날카로운 칼을 꺼내 자신의 식지(食指)를 베어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한다는 의미의 ‘서사구국(誓死救國)’ 4자를 크게 피로 썼다. 그러자 대중들이 흥분하여 자신도 모르게 모두 일어나 만세를 외쳤다.
1932년 국제연맹의 대표 리튼 등이 합부(哈埠)에 왔는데, 선생이 주위에 말하였다.
“내가 직접 가서 만나 왜적이 위조한 만주국(滿洲國)의 흑막을 폭로하겠다.”
마침내 혼자의 몸으로 합부에 가서 직접 리튼을 만나 한편으로 눈물짓고 한편으로 호소하였으니, 이리저리 설명하며 한국과 중국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음을 밝히고 왜적의 교활한 술책을 폭로하였다. 말을 다 끝내고는 왼손 식지를 잘라 죽기를 각오하고 일본에 대항할 뜻을 드러내 보였다. 이른바 위만국(僞滿國)이 만들어진 뒤 선생이 더욱 깊이 일본을 원수로 여겼다.
1932년 3월 1일 홀로 폭탄 3개와 권총 1자루를 휴대하고서 몰래 위만국의 수도로 들어가 무토(武藤)를 죽이려 하였는데, 적국 경찰의 경비가 삼엄하여 폭탄을 던지지 못해 또 실패하였다. 이후 흑룡강성(黑龍江省)으로 가서 한중 연합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중국, 러시아, 한국의 접경지대에 출몰하며 왜군을 크게 섬멸하였다. 1933년 3월 1일 또 혼자의 몸으로 대량의 폭탄을 가지고서 위만국의 수도에 들어가려고 합부를 지나다가 갑자기 적군에게 붙잡혀 길림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선생은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마지막 유언과 마지막 사진을 남기고 마침내 감옥에서 자살하였다. 나이 44세였다.
남자현전(南慈賢傳) :
1934년 잡지 《진광(震光)》 제1호에 발표된 내용으로, 제목은 〈여협남자현선생전(女俠南慈賢先生傳)〉으로 되어 있으며, 제목 아래에 ‘유방집 속고(遺芳集續稿)’라는 부기(附記)가 있다. 즉 원래 《유방집》에는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이다. 남자현은 1872년에 출생하여 62세인 1933년에 사망하였으나, 본 열전에는 사망한 1933년에 44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남자현은 1891년 20세에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하였고 을미의병에 참여한 남편 김영주는 1896년에 전사하였는데, 본 열전에서는 18세에 결혼하였고 그 이듬해인 19세에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 의병 전쟁에서 함께 참여한 남편이 죽었다고 하였다. 본 열전에 의거하더라도 1910년에 19세라면 1933년에는 42세여야 하는데 44세로 서술하는 등 연대에 많은 착오가 있으나, 번역은 우선 원문의 내용을 따르고 일일이 교감하지 않았다.
공훈록/대통령장/ 남자현(南慈賢) (1872)~1933. 8. 22
경북 영양(英陽)사람이다.
19세에 영양군 석보면(石保面) 김영주(金永周)에게 출가하였다 출가한지 6년후인 1895년에 부군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니 그녀는 삼대독자인 유복자를 기르며 시부모를 봉양(奉養)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동년 3월 9일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가하여 활약하는 한편 각 독립운동 단체와 군사기관 및 농촌등을 순회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동만(東滿) 일대 12곳에 예배당을 세우고 10여곳에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를 설립하여 여성계몽과 해방운동에 성심을 다하였다. 또한 남만(南滿)각지를 순회하면서 동지들간의 불화를 화해시키는데 적극적으로 노력하였고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도 힘을 다하였다. 1925년에는 채찬(蔡燦:白雲)・이청산(李靑山)등과 함께 일제총독 제등(薺藤)을 암살하기로 결의하고 서울 혜화동 28번지 고(高)씨댁에 근거를 두고 거사를 계획하다가 미수에 그치자 삼엄한 경계망을 돌파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주민회장(吉林住民會長) 이규동(李圭東),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열(片康烈), 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그녀는 이에 적극 참가하여 통합에 큰 공헌을 하였다. 1928년에는 길림성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외 47인이 중국경찰에 잡히게 되자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를 하였으며 그 석방에 노력하였다. 1931년 10월에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체포되자 김동삼의 친척을 가장하고 일본영사관에서 여러동지들에게 중요한 연락을 취하고 김동삼이 국내로 호송될 때 탈환을 계획하였으나 시일이 촉박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 조사단 「릿톤」경이 「하얼빈」에 조사를 왔을 때 왼손 무영지 두마디를 잘라서 흰수건에「韓國獨立」이란 혈서를 써서 자른 손가락을 싸가지고 조사단에게 보내어 우리의 독립정신을 국제연맹에 호소하였다. 1933년에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일본대사관 무등신의(武藤信義)를 격살(擊殺)할 것을 계획하고 만주 건국일인 3월 1일을 기다렸다. 그녀는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차 「하얼빈」에 가서 2월 27일 중국걸인 노파로 변장하고 무기와 폭탄을 운반하다가 「하얼빈」교외 정양가(正陽街)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일본영사관에 구금되어 여섯달동안 혹형을 받아오다가 그해 8월부터 단식항쟁을 시작하였다. 그 후 15일만에 사경에 이르자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 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순국하여 「하얼빈」 남강(南崗)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