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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책망 7:51~53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의 순교 7:54~8:1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1 사울은 그가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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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조상처럼 의인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인다 하자, 사람들은 귀를 막고 그를 돌로 칩니다. 스데반은 주님께 자기 영혼을 맡기고 그들의 죄 용서를 구하며 잠듭니다. 그날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성도들이 흩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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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책망 7:51~53
강한 자 앞에서 그의 죄를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담대히 공회 앞에서 유대인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는 청중을 향해 호의적으로 ‘우리’라고 했으나 이제 ‘너희’(51절)라고 하며 그들과 거리를 둡니다. 유대인을 향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으며,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고 비판합니다. 조상들이 의인(메시아)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자들을 죽였는데, 지금 유대인은 그 의인(메시아)을 살인한 자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유대인은 정작 율법을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스데반은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음에도, 유대인이 저지른 죄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 더 깊은 묵상
스데반은 유대인의 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지적했나요?
내가 신앙적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상대방을 책망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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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순교 7:54~8:1
스데반의 설교가 끝났습니다. 무리가 더는 설교를 하지 못하게 막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증오심을 품고 이를 갑니다. 그때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고백합니다. 지금까지는 그가 귀로 들었던 예수님을 전했다면, 이제는 눈으로 본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러자 무리는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 스데반은 주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눅 23:34). 스데반의 순교 후 신자들은 박해를 받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집니다. 담대한 복음 전파, 용서, 순교는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돌에 맞아 순교하는 스데반의 마지막 외침은 무엇이었나요?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에 대해 나는 어떤 기도를 드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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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따르는 삶
영적인 삶은 점점 더 남에게 이끌려 험지로 가는 삶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남이 데려가는 자리로 가는 삶이다. 예수님께 그곳은 십자가였다. 베드로에게도 십자가였다. 바울과 모든 제자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었다. 이는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는 자학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 안에 머무는 삶이다. 사랑 안에 있으면 원하지 않는 곳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사랑 안에 머물면 사랑 밖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랑 안에 있으면 우리의 눈길은 자기 상처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대상에게 머문다. 사람들은 아픈 자녀를 지키는 부모를 보고 큰 고통 속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녀 곁에 남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희생과 용서가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저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예수님을 따를 뿐이에요.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저 역시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발 한 발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함을 받아 왔을 뿐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길 / 헨리 나우웬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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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 59~50절
복음을 증언하던 스데반이, 복음을 싫어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순교를 당합니다.
순교 직전 스데반이 남긴 마지막 복음은 '용서'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의탁하고,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에 '용서와 화해'를 담아낼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성도입니다.
이기주의와 보복 행위가 팽배한 이 시대에 요구되는 하나님 나라 방식의 삶은
내게 죄지은 사람을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라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참고 견디며, 십자가 너머 즐거움을 바라보며 죽을 것이다. - A. W. 토저
오늘의 기도
하나님, 마음과 귀를 닫고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는 스데반 집사의 질책을 제 삶에 던져 봅니다. 말씀이 죄악을 드러낼 때 속히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며 어떤 어려움도 기쁘게 감내하도록 성령 충만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50 내 평생소원 이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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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설교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통해서 그의 인생 전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 끝자리에 사울이 서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사울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의 씨를 뿌려 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심겨진 그 복음의 씨는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열매 맺는 모습을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능력을 믿고 효율성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겐 스데반의 죽음이 실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실망과 당혹스러운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스데반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증명하고자 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확장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현재의 모습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돌아 볼 때 의미 있는 사건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기쁨이 넘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우리의 인생은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드러날 것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동참하시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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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진리 선포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양심을 속이고 불같은 정죄를 일삼는 유대인들은 스스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의 초청은 스데반을 하나님 나라로 따스하게 받아주셨습니다. 이 첫 순교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맹렬한 핍박이 일어났지만 그 한가운데 모든 일을 주도하는 사울이라는 청년의 눈에는 스데반의 죽음 가운데 부르짖는 용서의 기도와 천사와 같은 얼굴이 꺼지지 않는 복음의 불씨로 남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두려움을 이기는 증인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역으로 기름 부으시며 핍박을 통해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게 하는 반전의 역사를 주도하십니다.
우리의 걸음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강이 드러나고 그 선하심을 맛본 고백이 넘쳐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고린도전서 1: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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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담대히 진리의 말씀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에 찔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분노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스데반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의 증언이 듣기 싫어 귀를 막고 괴성을 지르며 일제히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자기 조상들이 늘 하던대로 의인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스데반의 죽음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8:1)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16:2~3)
그러나 스데반은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을 빼앗는 그들을 저주하거나 원망하기는커녕 도리어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참으로 우리도 그렇게 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들은 당연히 예수님 닮은 열매가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항상 주와 함께 살아 주를 닮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를 위해 살기 원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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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에 생사가 달려있다.
1.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첫 집사들 중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의 기적 행함과 복음전도는 공회원들의 마음을 뒤집어 놓기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전과 율법 모독죄를 뒤집어씌워 그를 체포했습니다(6:13). 대제사장이 공회 앞에 그를 세우고 “혐의가 사실이냐”고 심문을 시작하자(1),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는 긴 설교를 하였습니다(2~53). 초대교회의 집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2. 이 초대교회의 명 설교에서 스데반이 지적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보내신 자들을 거절하고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설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 언약을 통하여 언약 백성이 된 열 두 지파의 조상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조상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요셉을 시기하여 요셉을 애굽에 팔았지만,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를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애굽에서 번성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시기 위해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도 거절하였습니다. 광야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복종치 않았고 그 마음을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이야기는 다윗과 솔로몬에게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받아 솔로몬이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49).
3. 설교의 절정에서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공회원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51~53).”
4. 스데반의 설교는 공회원들의 마음을 톱으로 써는 것 같은 효과를 가져왔습니다(54). 그들은 이를 갈았으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께서 보좌 옆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공회원들은 거의 미쳐서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신성모독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표시로),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 초대 교회 첫 순교의 자리에 선 증인이자, 이 피 흘림의 주도자는 사도행전 전체에서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괄목할 영향을 미치게 될 인물 사울(바울)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마치 예수님의 운명하시는 순간을 떠올리게 하듯이, 부르짖고 운명하였습니다.
5. 순교는 초대교회가 성장하면서 치러야 하는 대가였습니다. 교부 터툴리안의 말대로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어 자라났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찔러 회개하게 하였다면, 스데반의 설교는 공회원들의 마음을 찔러 분노하게 하였고, 마침내는 그를 죽게 하였습니다. 똑같은 설교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축복과 구원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저주와 유기의 도구가 되니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 ‘주님, 이 말씀이 바로 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라고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받는 신자들에게 주시는 은혜는 얼마나 큰지! 당신은 그런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말씀이 교회의 강단을 통해서 증거되고 선포될 때, 아멘으로 받을 수 있는 순종의 마음을 주옵소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도 주옵소서. 주님께서 뿌리는 말씀의 씨앗이 저희의 심령 안에서 자라나 열매를 맺도록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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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흩어졌고, 흩어진 사방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복음의 전파로 인해 큰 기쁨이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이유가 있다. 박해가 없었다면 성도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서로 떡을 떼며 교제하고, 기도하고 예배하였을 것이다.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박해를 허락하시고 성도들을 흩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하셨다.
나에게 박해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한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시고, 하나님을 더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것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한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된다.
박해가 임할 때 감사하자. 이것은 하나님의 인정이다. 내가 이러한 고난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인정이기에 감사하며 불평하지 않고, 이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듣기를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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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그들은 항상 성령을 거역해왔고, 심지어는 옛날 선지자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했던 그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죄악을 저지르기까지 했습니다(51~52절). 또한 율법을 지킨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정작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53절)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스데반은 책망하고 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 즉 모양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 자신이 아닌지 심히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알고 있음에도 내 안에는 여전히 교만함과 영적 무지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을 심하게 책망하고 있는 설교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내 마음의 성전의 상태는 지금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사람들 vs 세상속의 사람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갈며 격분합니다. 반대로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쳤습니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고, 스데반은 자신에게 돌을 던진 자들에 대해 용서와 중보기도를 마치고 잠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고, 믿는 사람들은 흩어집니다.
세상속의 사람들은 땅에서 해결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늘에서 해결 방법을 찾습니다(54~56절).
스데반의 고발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격분하면서 이를 갈고 있습니다(54절). 자신들의 죄의 문제를 지적할 때, 회개할 기회를 삼기보다는 오히려 스데반을 향하여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바라봅니다(55절). 그리고 말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절) 예수님은 스데반의 변호자로서 변호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서 계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인 나의 죄를 친히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의 죄에 대해 변호해 주심으로 죄 없음을 판결 받게 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이 겪는 이 어려움과 더 나아가 죽음까지도 헛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없는 것도 있게 해서 자신의 욕망과 가치를 들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손익계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로 방법을 구합니다. 그 결과 세상속의 사람들은 회개할 기회마저 놓쳐 버리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보며 긍휼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이를 갈며, 격분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나의 잘못과 죄를 지적받을 때, 내가 보이는 반응과 행동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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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의 사람들은 자기감정에 복 받쳐 행동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늘의 지혜를 따라 절제하는 행동을 보입니다(57~60절).
종교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린 것이 극에 달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듭니다(57절). 성령 충만하여 말하는 스데반의 행동에 대해 더 이상 인내하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율법적 지식으로 더 이상 스데반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자 자기감정에 복 받쳐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성 밖으로 스데반을 내치고 돌로 칩니다(58절a).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51절)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58절b).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59~60절). 다소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판결임에도 스데반은 끝까지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지혜를 힘입어 순종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끝까지 자신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스데반의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60절b).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평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하는 죽음이기에 결코 두려움의 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속의 사람들은 제일 큰 두려움의 순간일 것입니다. 죽음도 이길 수 있기에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희생하는 삶의 자리를 기꺼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들과 그 돌을 맞으면서까지 중보 하는 스데반의 행동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용서하지 못할 만큼 밉고, 보기 싫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다가갈 용기는 없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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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의 사람들은 현실의 삶에 묶여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미래의 삶을 보며 자유합니다(8:1~3절).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한 사울은 그의 죽임 당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합니다(3절). 아무튼 그날 이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본격적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등으로 흩어집니다(1절).
교회 공동체는 모이기를 힘써야 하지만 아울러 복음을 들고 각각의 삶의 자리로 흩어져야 합니다. 장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소망하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바라기는 ‘죽으며 죽으리라’는 그러한 순교자적 신앙을 갖고 좀 더 적극적으로 복음 전도자의 삶이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 발목이 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날마다 내 자신을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변화는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지금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를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삶에 우선순위를 두며 살아갈 수 있기를(행 7:54~8:3절)....
주님,
다급한 상황에서도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법을 찾기보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방법을 찾게 하옵소서.
내 감정에 의해 판단하고 행동하기보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지혜를 얻게 하옵소서.
내 생활에 내 발목을 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얻은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삶이 예배가 되게 하므로
복음의 증인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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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은 예수님의 모습을 하고 죽었습니다. 59절과 6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죽으실 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 고 하시고 하시고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데반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데반을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은 베드로와 같이 설교를 해서 하루에 몇 천 명씩 돌아오는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스데반이 실패한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스데반의 모습이 예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또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의 모습이 가장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행1장 8절에 성령이 임하시며 능력을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증인이란 입술만 아니라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증인이란 순교자입니다.
그러니까 입술만 아니라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죽는 자가 증인입니다.
그러니까 이 스데반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가장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스데반이 이렇게 죽었지만 죽음으로 끝이 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왜 본문에서 스데반을 죽이는데, 사울이 앞 장 선 사람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스데반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나중에 바울을 탄생시키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절대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스데반과 같이 죽더라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스데반의 순교로 율법사인 가말리엘이 돌아왔다는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에 있는 스데반의 순교교회에는 스데반의 순교로 예수님에게로 돌아온 율법사 가말리엘의 그림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는 이후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순교를 할 때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 순교자가 죽으면서 했던 기도가 있습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더욱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 낼 것입니다.
나를 때리십시오.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죽어야합니까?
오 주님 내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합니다.
오 주님 그러하오니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그래서 마지막 죽는 순간 오직 가장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주님께 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국 이런 모습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합니다.
또 오직 성령 충만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나는 없고 오직 예수님으로만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데, 하나님 때문에 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절망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어려움도 주시기만, 그 모든 어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행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교회에 큰 박해가 있으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역사는 끝이 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초대교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보면 큰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 사람들이 어디로 흩어졌습니까?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이것은 결국 어떤 말씀을 성취한 것입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성취한 것입니다.
행1장 8절에 “행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만일 초대교회에 큰 박해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절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큰 박해로 인해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사마리아로 모든 땅으로 흩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가운데서 큰 박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어떤 큰 어려움이 있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그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끝이 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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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순교로 따르는 십자가의 길” 김소리 목사
스데반 집사는 하나님과 모세의 율법을 거슬리지도 않았고 모독하지도 않았다고 변론을 계속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끌고 와서 공회에 세운 유대 지도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성전을 우상화하고 있다고 책망합니다.
스데반은 유대지도자들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고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며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처럼 보이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스데반의 책망과 충고를 그들은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회개할 것이 있는지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죄와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변론과 교훈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마음이 찔리고 불편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거부하고 이를 갈며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생명의 은혜가 가득하게 되고 생명의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우리도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일어나 우리를 돌보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스데반 집사는 그들에 의해 순교를 당합니다.
그들이 일제히 달려와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치자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부르짖으며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말을 마친 스데반 집사가 죽지 않고 잠을 잡니다.
그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가 맡아주시고 예수님께서 다시 강림하실 때 그의 육체는 부활에 참여하는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주목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님은 나의 생명 나의 영혼을 책임져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주목하며 살아갈 때 나의 도움이 주님께로부터 시작될 줄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이 능력이 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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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그 조상 때부터 줄곧 성령을 거역해왔음을 고발하며, 이제 그 후손들이 예고된 의인(예수)까지 죽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44~50절 이 땅에서 사람이 지은 것은 무엇이든,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어디든 계시고 언제든 자신의 뜻대로 자유롭게 활동하십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 놓고 성전 자체를 숭배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주의 임재를 갈망하는 성도들입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평가하는 세상에서, 우리도 건물 중심의 공간의 종교에 만족한 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로 온전해져가는 일에는 소홀하지 않습니까?
55~58절 종교당국자들이 분노하는 상황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를 봅니다. 예수께서 하늘 법정 증인으로서 최초의 의로운 순교자 스데반을 변호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스데반은 땅의 법정에서는 정죄를 받아 순교하지만 하늘의 법정에서는 의의 변호를 받아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승리의 부활로 바꾸셨던 하나님께서 스데반의 죽음도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바울의 회심’은 물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으로 전파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7~39절 모세는 언약의 중재자이자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와 율법을 거역하며 욕보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말씀을 등한시하고 애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내 가치관과 어긋나더라도 내 가치관을 포기하고 그분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인생의 ‘방황’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보여줍니다.
39~43절 이스라엘은 모세가 없는 사이에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애굽을 동경하고, 출애굽의 구원(자)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보다 배부름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우상숭배는 언약의 땅에서도, 결핍의 땅(광야)에서도, 풍요의 땅(가나안)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중재가 아니었다면 다 멸절당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갖가지 우상을 만들어 내 안전과 미래를 보장하려 했던 우리도 예수님의 중보가 아니었다면 죽어 마땅했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나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51~53절 설교를 마무리하며,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과거 조상 때부터 지금까지 완악한 마음으로 성령을 거역해 왔음을 지적합니다. 무서운 ‘악의 연대기’입니다. 마음과 귀에 진정한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할례’ 없이 몸만 예배당을 오가는 신앙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분개한 종교당국자들은 결국 그를 신성모독 죄로 몰아 처형합니다.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며 승인했던 사울은 교회를 진멸하는 데 앞장섭니다.
54절 베드로의 설교에 분노하며 사도들을 없애려 했던(5장 33절) 당국자들이, 이번에는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이를 갈며’ 극도의 적개심을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자들이 보이는 분노의 표시이기도 합니다(누가복음 13장 28절). 진실을 직면한다는 것은 때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분노케 합니다. 내 과오를 드러내는 조언이나 말씀 앞에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59,60절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드린 기도(누가복음 23장 34,46절)를 생각나게 합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죽음이지만, 그는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용서’할 뿐만 아니라 ‘변호’까지 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기에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기를 끝까지 소망한 것입니다. 이 기도는 훗날 박해자 사울의 회심에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22장 20절).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밉고 억울합니까? 내가 이렇게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 수 있게 하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8장 1b~3절 예루살렘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고, 많은 성도들이 온 땅으로 흩어집니다. 본격적인 선교가 극심한 박해와 더불어 시작된 것은 놀라운 역설입니다. 하나님이 이방 교회를 위해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신 것입니다(9장 31절). 하지만 그 흩어짐은 패배가 아니라 또 하나의 열매를 위한 ‘밀알’(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불평이 아닌 소명의 자리가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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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이 하나님의 얼굴을 주목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스데반을 향하여 드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눈을 열어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로마시대 서머나교회(계 2:9) 감독 폴리캅이 순교할 때도 그랬습니다.
폴리캅이 체포되어 원형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하늘로부터 그에게 소리가 있었다. "폴리캅아, 담대하라, 남자다워라". 총독이 그에게 배교할 것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대의 나이를 생각해보시오. 맹세하시오. 그러면 내가 그대를 놓아주리다. 그
리스도를 모독하시오"라고 말하였을 때 폴리캅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기고 있소. 그런데 그분은 한 번도 나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았소.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한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소?"
사람은 주목하는 대상을 닮아갑니다. 땅을 주목하는 사람은 땅을 닮아가고, 강아지를 주목하는 사람은 서로를 닮아갑니다. 지나친 비약인지 모르지만, 실제로 대부분 애완견을 키우는 사람의 얼굴과 애완견은 많이 닮아있습니다. 애완견을 키우는 것은 좋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반려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반려자는 사람이 되어야지 동물이 돼서야 되겠습니까? 더욱이 우리의 영적인 반려자는 오직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스데반은 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였고 그는 순교의 자리에서 참으로 예수를 많이 닮았습니다(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누구든 육체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은 죽지 않습니다. 죄로 인하여 영이 죽었다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영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잠을 잘 뿐입니다. 잠이 깬 후에 지옥에 가 있는 자가 있고,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있습니다(살전 4:16-18,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것보다 더한 어떠한 위로의 말씀을 듣기 원하십니까? 이 위로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진정 기쁨과 소망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왜 이제까지 성전 이야기를 계속해 오다가 갑자기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을 운운하면서 예수님을 죽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더구나 스데반 집사의 설교는 거의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전환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너희들이 내가 성전, 즉 이 거룩한 곳을 모독했다고 나를 잡아넣었는데 진짜 성전의 의미는 이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너희는 그 예수를 잡아 죽이고 도전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 이 부분을 좀 더 정리하기 위해서 요14: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보통 이 구절을 예수님이 우리가 있을 천국을 준비하기 위해서 지금 하늘 나라에 가계신데, 이제 처소를 다 예비하면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는 의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말씀은 우리가 살집을 지으러 가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거하실 수 있도록 만들러 가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십자가를 지러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가 “주여, 우리가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절)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처는, 하나님의 처소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에 지금까지 살핀대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있을 때에도, 광야에서도, 가나안이건,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건, 어디에 있건,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십니다.
이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앞에서 설명한 성막, 즉 증거의 장막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들의 죄 사이에 시은좌를 베푸시고 피가 죄를 덮도록 하신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주님이 처소를 예비하십니다. 어떤 처소입니까? 자기 백성들이 거할 처소입니다. 그런데 이 처소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해 주셔야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처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처소가 예비 되면, 너희를 데리러 오겠다는 말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임하실 수 있도록 내가 너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어야 하고, 다시 부활해서 하나님도 다시 너희에게 임재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버리는 것이 아니니까 슬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과 내가 지금까지 너희를 위해서 일해 왔는데,
왜 너희들을 그냥 버리겠느냐 틀림없이 하나님은 나는 너희 가운데 와서 거할 것이다.
그리고 그 표시로서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주어서 성령이 너희와 함께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너희 안에 있을 것이고, 너희는 내 안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너희에게 너희와 거처를 함께 할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결국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입니다.
예수는 그 처소를 준비하시기 위해서 가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라는 말씀은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서 못 박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해서 비로소 참 성전을 우리 성도들을 참 성전으로 만들어서 임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임시로 지어 놓았던 건물 성전은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해 주던 증거의 장막으로서의 성전 건물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건물 성전에 자꾸 갈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내게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2:6절에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성전을 중요시 여기고, 성전은 죄를 사하는 곳이고, 성전 안에서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괜찮다고 하고 있는데, 그 성전보다 더 큰 진짜 성전은 바로 나다. 내 안에 있으면 모든 죄가 다 없어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고전3: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는 목이 곧고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은 진짜 성전인 예수를 핍박하고, 모세도 핍박하고, 선지자들도 핍박했던 것입니다. 엉뚱하게 처소를 이해한 탓입니다. 증거의 장막을 장소로 만들고 하나님을 제한시킨 결과입니다.
증거의 장막이 증거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이해 하셨습니까?
증거의 장막이 증거 하는 것은 백성들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피로 죄를 덮기 때문에 증거의 장막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시는 참된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지금도 왜곡되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건물 성전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나와 함께 동행 하시고, 어디서든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보다 예배당에만 계시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약의 성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생활 속에서 어렵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즉 사람 성전이 된 사실을 바르게 알고 믿는 사람은 그의 삶 전반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성경에는 건물 성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증거의 장막이었습니다. 그것은 광야 교회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여기 당신의 백성들에게 임재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 속에 내주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네가 선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성전인 우리에게 동일한 요구를 하십니다. 거룩할 것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은 교회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청소, 교회에서 기도, 교회 모든 행사, 교회의 무슨..... 교회도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서 가정은 들어가면 발 디딜 틈이 없이 어질러져 있고, 아이들은 어떻게 밥을 먹는지 알 수 없고, 직장에는 태만하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물 성전으로 되돌아간 사람의 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말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삶의 모토로 삼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 성전은 성적인 왜곡, 윤리적 타락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게으르거나, 거짓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교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람 성전이기 때문에 매일 우리 삶의 영역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다소 길게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분명하게 정리하고 용어 사용도 고쳐야 합니다.
성전이니 제단이니 하는 말들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예배당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자, 오늘도 우리의 훈련의 광야에서 잘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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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바울의 눈에 스데반은 그저 율법에 의해 죽어도 마땅한 자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박해의 주동자였습니다(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율법에 정통하고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기에 당시 예수의 복음에 대한 그의 생각은 견고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경에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받은 자라고 하였기에 그의 율법적 지식으로는 도저희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신 21:33).
율법이 잘못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와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시 1:2)? 왜 바울은 예수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말했습니까(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주의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율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율법적인 사람이고 누가 율법주의자입니까? 그것은 이땅의 검사와 판사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누구보다도 법을 잘 알고 그 법으로 판결하는 자들입니다. 모두 다 사법고시를 패스한 사람들이지만 저들에게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즉 똑같은 법을 가지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판결하는 비 양심적이거나 어리석은 자들이 있고, 반면에 자신의 사법적 양심을 위하여 출세까지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아주 적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썩는 것을 방지하는데 많은 소금을 필요로 하지 않듯이, 3.5%의 염분이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세상이 의로워지는 데에는 많은 정직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정직한 자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검사와 판사만의 문제가 아니고 정치인을 비롯한 공무원, 사업가, 장사하는 사람, 교사 등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해당이 됩니다. 즉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법의 양심을 저버리며, 자신의 욕심에 따라서 판결을 굽게 하는 모든 자들이 바로 율법주의자입니다(삼상 8: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성경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하나님의 법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올바른 적용을 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수많은 판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헌법과 각종 시행령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율법의 정신, 즉 하나님의 법에 담긴 사랑을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니다. 신약을 대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좋은 머리를 가지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도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이단에 빠지고, 공산주의 이념에 빠지며,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율법의 지식을 머리로만 받아들이고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오감을 통해서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면 머리에서는 생각을 통하여 오만 잡생각을 다 합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의 치명적인 문제는 잘못된 기준에 의해서 정보를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생각 속에서 잠시 머물다가 흔적도 없이 그냥 흘려보내기도 하고 반대로 하찮은 생각에 붙잡혀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가슴에 무슨 생각을 새기느냐는 것입니다.
원망과 시기 질투 등 육의 생각으로 가슴에 가득 채우면, 가슴에 사랑과 기쁨을 새길 여유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슴에 새기기 전에 먼저 어떤 생각에 집중하느냐가 중요합니다(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생각은 우리의 오감(보고, 듣고, 읽고, 쓰고, 맡는)에 따라 정보를 수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지의 역할은 말씀이라는 소중한 정보에 우리의 오감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영의 생각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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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이 전한 말씀에 큰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의 선포에 찔림을 받고 분개한 이들이 있었는데,
결국 이 때문에 스데반은 순교하게 됩니다. 그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는 이들의 포악함 앞에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고, 자신을 돌로 치는 이들의 영혼까지 생각합니다.
이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눅 23:34).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잃어버린 영혼에게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복음을 듣고 성난 군중에게 끌려 나가는 스데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 적용 질문: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순교자와 같은 각오와 자세가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요?
믿음의 시련(8:1-3)
사람은 극적인 반전을 기대합니다. 불가능한 일도 지극한 헌신적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기적과 같은 결과로 변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그들은 주님의 위로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평안이 아니라 ‘큰 박해’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슬퍼하던 많은 성도가 삶의 터전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각지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교회를 지키던 이들도 핍박을 받아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에게 얼굴을 가리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 묵상 질문: 스데반의 순교 이후 큰 박해를 당해 흩어지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 적용 질문: 어려움이 끊이지 않거나 더 심해질 때,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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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목이 곧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의 그늘로 덮으셔서 날마다 새롭게 하시고
일으키시는 넘치는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주님의 자녀 되길 원합니다.
오직 성령의 권능에 의지하여
그 예비하신 영혼의 양식을 맛보며 흔들리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인생을 세우는 지혜와 힘을 부어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보이지 않는 열방의 구석구석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부터
고통받고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넘쳐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