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7/25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요한 사도의 형이다. 형제는 베드로와 함께 갈릴래아 호반 도시 ‘벳사이다’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 기원후 42년 이스라엘 왕이었던 ‘헤롯 아그리파’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사도로서는 첫 번째 순교였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스페인에서 선교하였고 이 인연으로 스페인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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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4,18.21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대영광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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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복된 야고보 사도에게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게 하셨으니, 그의 영광스러운 증거로 주님의 교회를 튼튼하게 하시며, 주님의 보호로 교회를 지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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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에게는 엄청난 힘이 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이다. 그러기에 어떤 환난을 당해도 꺾이지 않는다.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쓰러지지 않는다. 믿음이 깊으면 정신도 강해진다. 주님께서 생명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질그릇 같은 몸이지만 보물이 된다(제1독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스승님의 물음에 마실 수 있다고 답한다. 잔은 죽음이다. 예수님을 위한 죽음이다. 그러려면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부활을 겪은 뒤에야 제자들은 가르침을 깨닫는다(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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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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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6(125),1-2ㄴ.2ㄷ-3.4-5.6(◎ 5) ◎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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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5,1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 알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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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0-28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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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복된 야고보 사도가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성자께서 마신 수난의 잔을 마시게 하셨으니, 저희가 그를 기억하며 바치는 이 제사를 받아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세례로 저희를 깨끗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도 감사송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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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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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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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복된 야고보 사도 축일에 천상 양식을 기쁘게 받아 모신 저희를 지켜 주시고, 마침내 주님 나라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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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스승님의 질문입니다. 스승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는 청원에 이렇게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 잔이 무엇인지요? 그 잔을 마시면 자연스레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되는 것인지요? ‘그 잔’은 고통의 잔입니다. 아픔의 잔이요 절제의 잔입니다. 자신을 포기하게 하는 잔입니다. 두 제자의 청원을 알게 되자 다른 제자들은 언짢아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나누지 않고 독식하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두 사도가 일부러 그러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순수하게 스승님 곁에 있고 싶다는 발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섭섭하게 할 수 있는 처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타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통 없이는 섬길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지 않고 어떻게 다른 이를 받들 수 있을는지요?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모시기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자신보다 못한 이를 공경하고 섬기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보다 악한 사람인데도 낮추고 받들어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 때문에’ 섬기고 낮추고 받들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고통은 ‘살아 있는 기도’입니다. |
◆ 갑자기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광고 문구가 생각난다. 1등이 아니면 도무지 살기 힘든 이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나도 1등만을 요구하는 세상이 숨 막혀 이렇게 시골로 들어와 농사를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등, 3등… 꼴등도 어우러져 살고 싶은 바람으로. 하지만 시골 또한 보기 좋은 것으로 상품가치(돈)가 여겨지니 풀 약도 치고, 화학비료도 사용하여 그로 인해 땅을 죽이고, 물이 죽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각 없이 그냥 행하고 있다.
예수님께 와서 아들들의 장래를 청하는 어머니를 보니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의 여느 어머니와 다를 것이 없음을 본다. 이 땅의 많은 어머니가 사랑이라 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지금 아이로 살지 못하고 공부를 잘하기위한 존재로 있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의 장래는 하느님께 있다. 아이들의 장래는 아이들의 몫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갈 때 힘이 생기고,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로 있으면 된다. 아이들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자리에 굳건히 서서 아이들을 믿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며 최고의 선물이다. 높아지려 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 많은 사물을 밟고 죽여야 하지만, 섬기는 것은 많은 사람을, 많은 사물을 사랑하고 살리는 것이다.
주님, 제 안에 첫째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제 안에 있는 욕구의 근원을 헤아려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소서. 목숨까지 바쳐 섬기러 오신 당신을 기억하며 모두를 섬기게 하소서. 아멘.
박후임 목사(농부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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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토요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마태오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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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공동체 쇄신과 성장의 비결>
오늘 복음은 그 누군가와 함께 부대끼며,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위안을 주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고 이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제자공동체 역시 완벽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았음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공동체 역시 너무나도 부족했고, 구성원 상호간에 마음이 맞지 않아 서로들 괴로워했었고, 때로 심각한 균열이 있었음이 확연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숱한 공동체 가운데, 그나마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로 여겨지는 제자공동체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구성원들의 정화되지 않은 신앙,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세속주의로 인해 자주 티격태격했습니다.
서로간의 이권, 알력, 시기심, 질투심이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서로간의 경쟁심, 권력욕으로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야고보 사도 같은 경우도 보십시오.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강요합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서거든 ‘물 좋은’ 자리 하나를 미리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너무도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어서 제 얼굴까지 다 후끈거립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들이 또 가만있지 못하고 따집니다.
우리가 그리도 염원하고 꿈꾸는 완벽한 공동체는 이 세상 어디 가도 없습니다. 완벽한 상호일치, 완벽한 평화, 완벽한 친교, 완벽한 나눔과 섬김이 이루어지는 성화된 공동체는 ‘꿈’, 혹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본성상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 부족한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리도 부족했던 제자 공동체였지만, 머지않아 철저하게도 쇄신됩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날로 거듭납니다. 끝도 없이 성장합니다.
그 배경이 무엇일까요?
제자공동체는 비록 부족했지만, 그 중심에 늘 스승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셨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비록 형편없었지만, 매일 스승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불안하고 늘 흔들렸지만 그럴 때 마다 스승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스승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영웅적인 공동체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야고보 사도의 신앙 여정 역시 예수님과 줄곧 함께였기에 비약적인 도약과 상승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심사숙고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해서 다른 제자들에게 상처도 주었습니다.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보다 부유한 가문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다른 제자들에 대한 우월감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물 좋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도 야고보 사도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의 어머니는 이것저것 사들고 자주 예수님과 제자공동체를 찾았겠지요. 그런 과정에서 인사 청탁까지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제자공동체를 떠나지 않았기에, 늘 스승 예수님 가까이 머물렀기에, 그분 가르침에 자신의 전 생애를 맡겼기에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는 예수님 승천 이후 복음 선포를 위해 스페인까지 건너갔습니다. 백성들을 현혹시키던 헤르모게네스란 유명한 마술사와 용감하게도 정면 대결을 펼쳐서 승리하고 그를 회개시킵니다. 자신을 박해하던 요시아스란 율법학자를 개종시키기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AD 44년경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참수 당함으로써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뛰어난 지도력과 복음 선포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 깊은 신앙, 유다와 사마리아 전역에 널리 알려진 그의 이름에 위기감을 느낀 헤로데 아그리파는 야고보를 처형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야고보 사도 축일 - 영적 명예욕
사람의 욕망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권력욕이라고 합니다. 돈도 있을 만큼 있고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손을 뻗히는 곳이 정치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죄의 뿌리인 ‘교만’ 때문입니다.
사실 권력이나 명예, 인기 등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그것을 잃었을 때 선택하는 것이 자살임을 보면서 우리 안에 얼마나 높아지려는 욕망이 있는지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제배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대동하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다른 사도들도 화를 내는 것을 보면 그들도 어느 정도씩은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욕심이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수난하고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누가 서로 높으냐며 다투기까지 한 것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복음을 읽은 어떤 신자 분들은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성인이 되려고 하는데 그런 생각을 갖는 게 잘못 된 건가요?’
성인은 하늘나라에서 찬란히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성인이 되어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희망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방법을 지적해 주십니다. 높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 청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셔야 했던 고난의 잔을 마셔야하고 세상사람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모범으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음을 강조하십니다.
소화 데레사의 꿈은 성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성녀가 되기를 바랐는지 몰라도 성녀가 되려는 희망을 갖고 언니들이 들어가 있는 갈멜 봉쇄수녀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더 기다리라고 하자 그녀는 교황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교황님에게 특별 허락을 청하였습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 들어가서 2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그녀는 원했던 대로 성녀가 되었고 성녀 중에서도 큰 성녀가 되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빛나는 샛별처럼 빛나고 싶은 희망은 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의 방법과는 반대로 낮아지고 부서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만이 다른 것입니다.
한 보좌 신부가 사고를 당하여 죽었습니다. 하느님은 그가 올바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지옥에 도착하여 혹독한 고통을 당하면서 눈을 들어 앞을 보았더니 자신의 주임 신부님이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 신부님께서 어떻게 지옥에...”
주임 신부님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쉿, 조용히 해. 저기 주교님도 계셔!”
사도들은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하늘나라에서까지 그렇게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도 낮은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낮출 줄 알았던 사람이지 어떤 지위에 있었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높으신 분이신 이유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 가운데 가장 낮고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순종하여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만큼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꺾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방법을 통해 높아지기를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그의 희망을 접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잔을 마시기를 원하였고 사실 사도들 중 첫 번째로 순교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나라에서는 첫 째는 아닐지라도 아주 예수님과 가까운 곳에 앉아계십니다.
길을 가다가 만원을 주운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부터 땅만 바라보고 다녔습니다. 평생 주운 것은 2만여 개의 핀과 돈 몇 푼, 그리고 구부정한 어깨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잃은 것이 있다면 푸른 하늘, 아름다운 별빛, 만나는 사람들의 미소와 애정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앙인이라면 모두가 성인이 되려는 목표를 지녀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노력하셔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셨다면 우리도 그 모범을 따라 우리 자신을 최대한 완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길로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
진정한 힘은 내적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수록 샘솟는
내적 힘, 하느님의 힘에 저절로 뒤따르는 행복과 기쁨이요
영혼의 건강, 정신의 건강, 마음의 건강입니다.
1독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바로 믿는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질그릇 같이 허약한 우리 안에 있는 보물은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하느님 향한 믿음과 희망, 사랑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엄청난 힘이 바로 하느님의 힘이요,
결코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닙니다.
하여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백절불굴의 힘은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믿음의 힘, 희망의 힘, 사랑의 힘입니다.
이런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내적 힘이 있어야
섬김과 종의 영성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합니다.
평생을 수도원 안에 정주하면서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수도승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 역시 제자들 모두에게
위에서 군림하지 말고 아래로 내려와 서로 섬길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우리를 섬기러 오신 주님을 닮아 섬김과 종의 영성에 항구할 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받습니다.
이런 섬김과 종의 영성에 항구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힘인 믿음과 희망, 사랑의 힘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런 내적 힘 있어 섬김의 삶에 항구할 수 있고
섬김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하사되는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 시간은
직접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길 때
주님은 우리에게 풍부한 은총을 내려 주시어
형제들을 잘 섬길 수 있게 하십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우리들을
주님 역시 당신 생명의 말씀과 사랑의 성체로 우리를 섬기십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126,5).
믿음과 희망으로
섬김과 종의 삶에 항구했던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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