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마지막 핏줄 덕혜옹주'
1962년 1월 26일 한 여인을 태운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도착하는 순간 고운 한복의 두 여인이 비행기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아지씨 아지씨... 아기씨라 불리는 여인,
그러나 36년만에 고국에 도착한 아기씨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흥분해있는 여인의 행동에 마중나간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덕수궁에서 아지씨를 딸처럼 돌보았던 유모 변복동여사다.
그는 1972년 세상을 뜰 때까지 옹주 곁을 지켰다.
덕혜옹주는 몇 년 전 한 베스트셀러 소설의 주인공으로 세간의 화제를 모으면서 우리에게 알려졌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정신이 돌 때 이런 글을 남긴 그녀는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체념했지만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대한민국 우리나라”를 잊지 못했다.
그림과, 음악, 특히 동화 짓기에 재능을 보였고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순종황제와 윤비 앞에서
불러 들여 손이 없는 두분에게 즐거움을 드렸다는 대한제국 마지막 옹주다.
조선황실의 가족
순종. 고종황제와 덕혜옹주 덕혜옹주 돌사진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조선황실의 직계가족
옹주의 오빠들(의친왕 이강, 순종황제, 영왕)
선왕 고종황제
세살 무렵의 덕혜옹주(고종과 순종황제)
난, 아바마마를 한시도 안보면 보고 싶다오, 어머님은 그렇지 않은데..
고종황제는 나이 60에 얻은 고명딸을 금지옥엽 거처인 함녕전으로 데려와 침전에서
키웠다. 고종에게 옹주는 쓸쓸한 말년에 찾아온 한줄기 빛이었다.
한시도 어린 딸을 자신의 곁에서 떼어 놓으려 하지 않았다.
1915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황실직계 가족사진
영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순종비), 덕혜옹주
덕수궁에서 덕혜옹주 (11세 무렵)
- 37년 만의 귀향
'조국은 날 잊지 않을 것이다'는 믿음이었을까?
1945년 해방 이후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덕혜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국의 궁궐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조선 왕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족의 부활을 견제한 이승만 정권은 왕족들이 귀국하면 자신의 권력유지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옹주의 귀국을 막았다.
거기다 왕실까지 폐지시켜 왕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무렵 서울신문의 김을한기자(덕혜와 정혼했던 김장환의 형)가 덕혜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그녀의 귀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1962년 당시 박정희최고의장에게 탄원서를 올려 마침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영왕 내외보다 1년 먼저 특별기편으로 귀국해 비행기 앞에서 어릴 적 유모 변복동의 큰절을 받았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해도 나는 조선의 옹주다
덕혜는 1962년 1월 26일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외로운 믿음에 기대 15년 이상이나 지속된 감금생활을 견디고 일본으로 끌려간 지 37년 만에
마침내 조국 땅을 밟았다
13세의 꽃다운 소녀가 어느덧 51세의 중년 여인이 되었다.
풍상에 찌든 얼굴에 초점 없는 눈매를 한 채 돌아온 것이다.
당시 일간지에서는 “구중궁궐의 금지옥엽이 낯선 외국으로 끌려가 왜인과 뜻하지 않은 강제결혼을 하게 되자
세상살이를 체념하고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그녀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다.
켜켜이 쌓인 절망과 슬픔과 그리움이 너무 컸던 탓일까,
이미 정신을 놓아버린 그녀는 자신을 붙잡고 애기씨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리는 유모를 보고서도 눈을 맞추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 자신에게 젖을 먹여준 유모 변복동은 덕혜가 일본의 볼모로가 37년 만에 귀국하자 큰절을 올리고
말년을 병수발했다.
1962년 1월 26일,
3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오른쪽이 유모 변복동여사 <출처: 동아일보>
1962년 2월5일자 동아일보는 덕혜옹주의 근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지난 달인 1월26일에야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지 37년만에 환국하신 덕혜옹주(50)는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다.
이제 환후가 차도가 있어 편지도 잘 쓴다.
일본에 있는 영왕 이은 오빠에게 문안편지를 쓰고 낙선재에 있는 윤비(68)에게도 ”알령하십니까?...“로 시작하는
편지도 썼다.
입원 중 덕혜옹주의 일과는 매일 아침 9시에 일어나고 밤9시에 취침한다.
식사도 손수하고 빈대떡과 사과를 가장 좋아한다고 담당 간호사는 말한다.
요즘 덕혜옹주의 일과는 책을 읽는 것인데 일본책은 던져 버리고 한글로 된 자유의 소리(공보부 발행)를
즐겨 읽는다.
2월2일 성신여고생들이 병문안을 왔다.
화분과 이불 등을 가져와 덕혜옹주를 위로하고 갔다."
덕혜는 귀국 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요양했지만 병세는 크게 회복되지 않았다.
옹주는 그 후 7년여를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퇴원했다.
그녀가 1967년 무렵부터 말년을 보낸 거처는 낙선재였다.
창덕궁 후원의 낙선재에서 영왕 이은의 아내였던 이방자 여사와 병약한 노후를 보냈다.
낙선재 본채는 윤대비, 수강재에는 덕혜옹주, 그리고 낙선재에는 이방자가 살았다.
바깥 사람들에게는 덕혜옹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망각된 채 28년을 낙선재에서 살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8일후 이방자도 갔다.
그녀가 사랑했던‘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그의 환국을 허락한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신군부의 즉세,
1897년의 민주화 등
우리 근대사의 질곡과 영광을 모두 보고 1989년 4월 21일 77세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덕혜옹주의 회갑연.
덕혜옹주의 회갑날. 왼쪽에서 유모 변복동여사 두 번째가 덕혜옹주,
조선의 마지막 상궁 성옥염씨
덕혜옹주(1912~1989)
덕혜옹주는 1912년 5월25일 고종과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환갑에 얻은 늦둥이 고명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했다.
고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조선왕실의 마지막 왕녀로,
고종뿐만 아니라 순종 등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나 일제강점이라는 시대적 상황속에서
누구보다도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1925년 4월 오라버니인 영왕에 이어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본에 볼모로 갔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對馬)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조선왕조의 대를 끊기 위해 영왕을 정략결혼 시킨 일본은 이번에는 조선의 번신이었던 쓰시마 도주의 후예와
덕혜옹주를 결혼시킴으로써 조선의 국격을 낮추려 했다.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병상생활을 계속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했다.
하나 있는 딸마저 결혼에 실패하고 설산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다.
1962년 1월26일 일본에서 귀국했으나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다.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21일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일본에 인질로 끌려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1912년 덕수궁에서 고종황제와 상궁 양씨사이에서 출생
1916년 유치원 입학
1919년 아버지 고종황제 승하
1923년 일출소학교 2년에 편입
1925년 일본에 볼모
1925년 학습원 입학
1929년 오빠 순종황제 승하
1930년 어머니 복녕당 양씨 별세
모친의 죽음을 계기로 조발성 치매증 조현병 진단
1931년 고 다케유키와 강제 정략결혼
1932년 딸 마사에 출생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1955년 다케유키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였다.
1956년 결혼에 실패한 딸 마사에 실종
1962년 1.26. 36년만에 귀국
1989년 낙선재에서 승하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의 독방에 입원하였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을 하였지만 실패하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