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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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가정부흥회 (2/2)
가정을 위한 가장 좋은 길
고전 12:31; 13:4-7
“성인 아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본래 성인 아이라는 용어는 부모가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가정에서 자라 성인이 된 사람을 뜻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용어는 신체적으로는 성장하였지만, 정서적으로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상처나 학대를 받거나 가정불화를 겪음으로써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아이와 같은 미성숙한 내면을 가진 사람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강압적 혹은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공포스러웠던 어린 시절의 아픔으로 인해서 부모와 같은 어른을 만나면 어릴 때 받지 못한 부족한 사랑을 채우기 위해 어른들에게 잘 보이려는 말과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인 아이는 정서적으로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습니다.
우울증을 자주 경험하며 강한 분노와 함께 수치심을 느낍니다. 부족한 가정 문제를 극복하고자 완벽주의자 성향을 갖거나 반대로 미루는 습관을 가진 게으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사회적인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또한 사람에게 많이 의존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 성인 아이라는 개념, 바로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를 꿰뚫는 핵심 개념 중 하나임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성인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갖고 오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가정부흥회 두 번째 주일, 우리가 경청해야 할 본문은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바로 당시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인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교회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 가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제는 우리가 가정에서 겪는 문제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도시란?
고린도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성도덕이 아주 문란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에 온 사람들은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왔습니다. 바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원하는 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성공 지향적이면서 경쟁이 치열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 약 주 후 50/51년경에 도착합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자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온 집안 식구들이 주님을 믿게 됩니다.
(행 18:8) 회당장인 그리스보는 그의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주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린도 사람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이 바울의 말을 듣고서, 믿고 세례를 받았다.
한 사람을 통해, 온 집안 식구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은혜이지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이 두려워 말고,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10-11절에,
(행 18:10-11)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11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 도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다. 지금은 세속에 찌들어 살지만, 구원받게 될 나의 백성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야 하고 말씀을 들어야 구원받으므로 멈추지 말고 전하라는 겁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린도는 지중해에 있던 도시들 중에서 부유하고 문란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6장에 보면, 음행, 우상숭배, 동성애, 도둑질, 탐욕, 약탈, 이것이 고린도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실제로, 복음은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6장 11절을 보세요.
(고전 6:11)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겨지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죄인들 중에서도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모인 도시에서, 그들은 복음으로 인해, 예수님과 성령으로 인해 씻기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어떤 사람이든지,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롬 1:16).
또한, 이 복음의 능력은 가정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대표적인 특징 2가지: 강력한 성령의 은사와 분열
사도 바울의 1년 반의 목회를 통해 나타난 열매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대표적인 특징은 각양각색의 성령의 은사들이 강하게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12장에 보면, 지혜, 지식, 믿음, 기적, 병 고치는 은사, 방언의 은사가 부어졌습니다.
성령의 거의 모든 은사가 충만하게 나타난 곳이 고린도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완벽한 교회이겠지요? 부족할 것이 없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교회의 또 다른 특징은 가장 많은 분열과 질투와 싸움이 있는 교회였다는 점입니다.
3장 3절 보세요.
(고전 3:3)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장 많은 사역을 하고, 가장 많은 은사가 부어졌으며, 기적과 치유와 예언과 지식과 지혜가 충만한 공동체에 어떻게 가장 시기 질투가 많고 분열과 싸움이 난무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네, 성경은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충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마 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귀신 쫓아내는 것과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과 구원은 별개라는 겁니다.
설령 주의 이름으로 그런 기적을 행한다고 해도 주님은 그 사람을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세상 끝날이 다가올수록, 거짓 선지자들은 강력한 은사와 치유와 능력행함을 통해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4:4).
영적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든든하게 하며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그러나 영적 은사는 마치 목걸이나 귀걸이와 같은 장신구와 비슷합니다.
사람의 몸을 꾸며줄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본성과 내면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 은사의 한계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거의 모든 은사를 다 가지고 있었지만,
공동체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은사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그것이 1-3절 말씀입니다. 2절 보세요.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 구절을 가정에게 적용해 보십시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가정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여러분들의 가정이 더 나아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언하는 능력? 모든 지식? 산을 옮길 만한 믿음?
다 좋은 것들이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다 갖추고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영적 은사를 다 갖추고도, 사랑이 없으면 시기하며 싸우는 교회,
부부 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자녀와 자녀 간에 갈라진 가정이 된다는 겁니다.
왜 사랑이 없나요?
그럼 왜 가정 안에 우리 안에 사랑이 없을까요?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성인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몸은 컸는데,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13장을 가만히 읽어보시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다가
11절에 이르면 갑자기 어린아이 이야기를 꺼냅니다.
[고전 13:11]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이죠? 자기중심성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며 이타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이기적이며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이유는 바로 영적으로 어리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과 가정을 향하여 어린아이라고 부릅니다.
[고전 3:1, 3]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3 ...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육에 속한 사람,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사람, 바로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는 말은 거듭나긴 했지만, 몸만 컸지, 영적으로는 아기요, 어린이라는 뜻이죠.
심지어 아무리 지식이 많고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기도를 많이 해도 영적 어린아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세상에서 유능하고 영향력이 있어도, 나이가 많을지라도,
거듭나는 순간 영적인 아기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10년, 20년, 30년을 했어도, 시기와 싸움이 있고,
이기적이고 무례하다면, 영적으로 미숙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13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영적 아기들은 오래 참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영적 아기들은 타인에 대해 무례히 행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성내며, 다투며,
참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며 타인의 잘못을 고자질합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영적 어린아이들입니다.”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유치하다는 겁니다.
왜 우리는 13장 4-7절의 말씀대로 오래 참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믿어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더 열심히 노오~~력하지 못해서 일까요? 의지가 약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위해 내 의지로 힘쓰고 애쓰는 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불가능합니다.
유일한 해결책은 주 안에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11절 다시 보세요.
[고전 13:11]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부부가 싸움을 할 때 가만히 지켜보면 어린아이 같을 때가 있지요.
거의 대부분 ‘나의 문제는 없고 오롯이 상대방의 문제’라는 이분법적으로만 사고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고, 아내는 남편의 머리됨을 인정하고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부부들이 무엇 가지고 싸우냐면, 상대방이 먼저 인정해주면 사랑하겠다 혹은,
사랑하면 인정해주겠다는 겁니다. 만일, 내가 먼저 인정해주고 순종해주고 사랑해주었다가 그쪽에서 안하면 어떡하느냐는 겁니다. 나만 손해 보는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부부가 싸우는 것이 꼭 초등학교, 중학교 애들 싸우는 것과 비슷해요.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강원도 삼척에서 행복플러스 가정세미나가 있었습니다.
총 19가정이 참여하셨는데, 지난 행복플러스 22, 23기의 위기 가정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어려운 가정들이 한꺼번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첫날부터 위기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한 가정의 남편이 사라지셨어요. 한 가정이 도착하자마자 부부 싸움을 한 겁니다.
남편 입장에서는 내 문제가 아니라 아내가 문제다.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이 문제다.
그러다가 첫 식사 시간 이후부터 아내와 말다툼에 남편이 자리를 떴습니다.
남편이 성남으로 돌아가려고 삼척 시내로 걸어가신 겁니다. 한참을 가는데, 맞은편에서 호텔 세미나실에 계셔야 할 가정사역위원장이신 장로님이 걸어오시더랍니다. 그 장로님은 갑자기 차가 고장 나서 카센터에 맡기고 걸어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길에서 만난 겁니다.
그래서 그 남편이 잡혀 오셨다는 거 아닙니까. 기가 막히죠. 아니, 무슨 다시스로 가다가 잡힌 요나처럼,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 같은 장로님을 보내셨어요. 나중에 그 남편 고백이
“여기에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시구나.” 고백이 되더랍니다.
결국 남편은 강의를 듣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내에 대해 자신이 잘못한 것들에 대해 깨달아지는데, 눈물이 그렇게 나더랍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하는데 주체 없는 눈물이 흐르더래요.
여러분, 끝까지 나는 잘못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입니다.
그런데, 먼저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손 내밀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성숙한 자요 어른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당신 탓, 남 탓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자신이 성인 아이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되면, 유치하게 싸우고 다투던 어린 아이의 일을 저절로 버리게 됩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누리라
그렇다면 질문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나요?”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13장에서 사랑이라고 할 때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당시 고린도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였던 단어인
‘에로스’를 쓰지 않았습니다. 에로스 사랑은 어떤 “가치로의 끌림”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습니다.
즉, 어떤 가치를 가진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행위가 에로스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여인의 외모를 사랑하는 것, 키 크고 멋진 남자를 사랑하는 것,
그 남자의 직위와 영향력과 권력을 사랑하는 것, 이런 것들이 어떤 가치에 이끌리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에로스입니다. 이 에로스 사랑은 필요하지만,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조건 때문에 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에로스 사랑의 한계가 있어요. 그 좋아하던 조건이 사라지면, 사랑이 식습니다.
외모가 변하고, 권력과 영향력이 사라지고, 연애할 때 그렇게 친절하던 그 친절함이 없어진다면?
내가 상대방의 조건과 가치를 보고 사랑했다면, 그것은 에로스 사랑입니다.
왜 가정에서 싸움이 나지요? 배우자가 내가 기대한 모습과 다르다는 겁니다. 조건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러나 13장에서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입니다. 이 아가페는 당시 그리스 문헌에는 드물게 나오는 개념이었고 별로 특색이 없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당시 공용어였던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에 쓰였습니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왜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습니까?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거나 강해서가 아닙니다.
어떤 가치에 이끌려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민족 중에 수가 가장 적은 민족이었습니다. 매력적이고 이끌릴만한 조건은 없었습니다. 그저 은혜로 택한 것이고, 존재 자체로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8절에 나옵니다.
[신 7:8]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당신들을 사랑(αγαπαν)하시기 때문에, 당신들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 사랑할 만한 조건이 없어도의 사랑, 이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가정에 가장 필요한 것, 가정을 위한 가정 좋은 길이 바로 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아내가 셋째를 가졌을 때, 얼마 뒤에 꿈을 꾸었습니다. 세 아기를 보여주시는데,
첫째 둘째 아기 모두 아픈 아기였습니다. 세 번째 아이만 아프지 않은 아기였어요.
그런데 주님은 저에게 첫째 아픈 아이를 보여주시면서 이 아이를 키울 수 있겠느냐? 물으셨어요.
실제로, 꿈에서 깨고 그 다음 주에 태아 검사를 받으러 갔더니 장애를 가질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검사를 계속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면 지금은 초기니까 낙태할 수 있답니다. 선택하라는 겁니다.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더 검사할 것도 없었습니다. 아픈 아이면 안 낳고 안 기를 겁니까?
하나님도 교만한 죄인인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셨는데, 제가 어찌 포기합니까?
검사도 거절하고, 낙태도 거절했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자녀를 향한 사랑입니다.
저희 교회 장애인들을 위한 사랑부에는 장애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왜 부모님들이 그 자녀들을 사랑하지요? 더 사랑할 조건들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낳은 세상에 둘도 없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것이 신명기 7장의 의미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내 자녀이기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그런 사랑 받은 적이 없어서 그런 사랑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네, 그런 점에서 성경이 진리입니다.
[사 49:15]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 경우도,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버지라 할지라도 그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학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자녀를 잊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하는 법이 없고,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사랑하셨습니까? 왜 독생자를 내어주면서까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나요?
우리가 예쁜 짓을 했기 때문인가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대단한 공로를 세웠기 때문인가요?
우리 안에 사랑할만한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반역한 죄인입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낳으신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13장의 4절-7절의 사랑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랑을 의인화하고 있습니다. 그냥 시가 아닙니다. 4절의 사랑에 예수님을 넣어보세요.
[고전 13:4-8] 4 예수님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예수님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예수님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6 예수님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예수님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8 예수님은 없어지지 않습니다.(Love never ends.)
사랑은 실패하지 않고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바로 아가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안에 이미 그 사랑이 와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우리 역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어떻게 해야 거하는 거죠?
[요 15:8-9]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ἀγάπη) 안에 머물러 있어라.
예수님이 나를 얼마나 참으셨는지, 얼마나 믿어주셨고 기다려주셨는지, 그 사랑 안에 거하라.
그러면 너도 사랑의 열매를 맺어 너의 남편을, 너의 아내를, 부모를, 너의 자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고전 12:31] ...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가장 좋은 길이 무엇입니까? 아가페, 사랑입니다.
남편이, 아내가, 부모가 가정에서 성인 아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그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 이것이 가정을 위한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러면 그 한 사람의 사랑 때문에 온 가정이 살아납니다. 그 사랑은 곧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은 살리는 생명이요, 죽어도 영원히 사는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플러스에 참여한 가정 중에 허락을 받고 간증을 나누고자 합니다.
한 가정이 결혼 이후 10년간 치열하게 다투셨습니다. 10년간 다투는 것도 지쳐서 우울한 마음이 극에 달할 때에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셨어요. 부모가 싸우니 자녀들도 마음에 상처를 입고 치료받아야 할 정도로 아프게 되었습니다. 시댁과의 관계도 멀어졌고, 결국에는 이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모든 관계가 다 깨졌습니다. 우울증이 더 심해져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려고 여러 방법도 찾아보셨다고 해요. 얼마나 힘들면 그랬을까요?
그러나 속장님의 권유로 두 분 모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참여하신 겁니다.
아내가 보기에 문제는 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이 저지른 죄는 의지가 약해서 짓는 죄라고 여기고 죄로 인해 나에게 상처를 준 남편을 정죄했다고 해요. 그러나 첫날이 지나고 둘째 날이 지나면서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부부를 짝지어주셨구나. 내 마음대로 끊을 수 없구나. 의지가 약한 사람은 정작 나구나.” 자신이 죽음을 택하려 했던 것,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의 마음은 사탄이 주는 마음임을 깨닫게 되셨어요. 그러면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남편이 왜 연약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된 겁니다. 자신이 남편이 싫어서 밀어내다보니 남편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고, 사탄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벼랑 끝으로 내몰렸는데, 그렇게 내몬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려워진 재정 형편을 이기고자 남편은 밤낮 없이 일을 해야 했고,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은 더욱더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화를 통해 남편이 자라온 환경을 보게 하셨습니다. 남편은 외동아들로 자라면서 맞벌이하는 부모님 밑에 혼자 자랐습니다.
하나님은 아내에게 그렇게 자라난 남편의 외로운 내면과 마음과 상황을 바라보게 하신 겁니다.
주님은 그러한 남편을 긍휼히, 불쌍히 여기라는 마음을 주시더랍니다.
여러분, 배우자가 불쌍해지면 상황 끝난 겁니다. 남편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부어지더랍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남편을 저주하던 마음이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가 되자라는 마음으로 바뀌게 되었고 아이들의 상처와 아픔도, 이제는 부부가 한 몸 되어 믿음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부모가 먼저 회복되어 견고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들을 치료하는 길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가정을 위해,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양육하겠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아온 이런 악한 악습이 자녀들의 뼛속까지 새겨지지 않도록 우리가 끊어내자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모든 것 주님이 하셨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남편에게도 내가 문제구나. 내가 주님 안에 거하지 못했고,
내가 성숙하지 못했구나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가정을 위한 가장 좋은 길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가장 좋은 길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떤 가치를 보고 조건을 보고 사랑하시지 않았습니다.
에로스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 사랑, 존재 자체로 사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머물 때, 성인 아이의 모습을 버리고 진정 영적 아비와 어미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가페 사랑으로 성장하면, 그 사랑이 부부 간에, 자녀에게, 심지어 양가 부모님에게도 흘러가게 됩니다. 사랑은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가정을 위한 가장 좋은 길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더욱 충만히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찬양: 주 사랑이 나를 숨 쉬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