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나는 ‘어머니’보다 ‘엄마’가 좋다 (꽃)
조광렬
며칠전, 서울에 계신 어머님과 페이스톡을 했다.
어머니 얼굴이 휴대폰 화면안으로 들어온다.
“어머니! 저예요.“ 그래도 어머니는 별 반응이 없으시다. ”어! 어? 누구? 하신다. “저 광렬이예요.” 해도 마찬가지다. 어머니 곁에서 아우가, “미국이예요. 형 , 큰형님” 하고 일깨워 드려도 기억을 끄집어 내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그때 내가, “엄마~ ! 나야! 광렬이!“ 하니 그제야 어! 우리 큰 아드을! ” 하시며 반기워 하신다.
그제서야 정상적으로 어머니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우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대화할 때는 멀쩡하신데 전화를 끊고 조금 지나면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신다고 했다. 그러함에도 일제(日帝) 강점기와 해방 직후 시집살이 하던 시절은 또렷이 기억하시며 “부잣집이라고 시집와서, 국회의원 며느리가 삯바느질에, 물지게진다고 흉보더라”는 말씀은 아직도 수시로 하신단다, ㅎㅎ
이번에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휴대폰앞에 계신 당신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니 못 알아들으신 듯한데, “엄마”라고 부르니까 반사작용처럼 금새 미소를 띄신다. 어머니 얼굴에 생기가 확 도는 걸 느꼈다. 내 어머니는 엄마라고 불리길 좋아하시는구나.
‘엄마’라는 말을 사용하는 기분을 뭐라할까. 나를 에워썬 모든 것이 갑자기 아늑해진 기분이 든다. 마음이 편안해 진다. 머리와 마음속에 쌓였던 찌꺼기들이 씻겨져 나가는 듯 하다. 그걸 알면서도 왜 난 여지껏 엄마라는 호칭을 쓰지않았었던가.
예의범절을 따지는 사람들은 철이 들면 부모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올바르다고 주장한다. 그 호칭 자체가 부모에 대한 공경심(恭敬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어머니가 엄마의 존댓말은 아니다. 두 단어는 유아어(幼兒語)와 성인어(成人語)의 차이일 뿐이다. 어머니의 존칭은 ‘어머님’이다. 국어사전도 ‘엄마’를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어머니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풀이한다.
엄마라고 부를 때는 왠지 ‘나는 당신의 영원한 새끼입니다’라는 말이 절로 따라붙는듯 느껴진다. 어머니의 눈에는 자식이 아무리 머리가 하얘져도 그저 내 새끼다. 엄마라는 호칭은 확실한 피붙이의 관계를 과시(誇示)한다. 거기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엄마’는 생물학적 존재, ‘어머니’는 가족의 위계질서(位階秩序)적 냄새가 난다. 왜 딸들은 평생을 한결같이 엄마라고만 부를까.
엄마라고 부를 때야 비로소 고향(故鄕)의 냄새가 난다. 엄마는 고향이다. 유년(幼年)의 젖이다. 한자 ‘어미 모(母’)는 여성의 가슴 모양에서 나왔다. 고향은 돌아갈 곳이다.
모국(母國) 내가 태어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더큰 의믜의 어머니다. 고향을 떠난 우리 동포들은 다 엄마 품을 그리워 하는 자식들 아닐까 싶다. 두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하며 살아온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이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두 어머니, 어머니와 모국은 나이가 들어도 기대고 싶은 “생명의 언덕이요 뿌리”다. 나는 어머니 연세가 여든이되면서 부터는 혹 어찌되시지나 않을까하는 공연한 걱정과 함께 효행(孝行)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편치 못했으나 어머니는 다행이고 고맙게도 이 나이에도 내가 ‘엄마’를 부를 수 있게해주고 계신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마찬가지로, 오늘도 내 조국의 안위(安危)를 걱정하고 있지만 내 어머니가 잘 버텨오셨듯이 우리의 모국도 내적 갈등과 분열의 아픔을 잘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리라 굳게 믿는다.
칠남매중 막내인 나의 아내에게는 부를 엄마가 없다. 두분 모두 여든해를 좀더 사시고 가셨다. 어느날 나는, 나의 아내가 엄마사진을 붙들고 울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본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오빠와 형제들을 떠나보내고 남은 언니 두분과 통화할 때면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나누는 아내의 대화는 눈물이 반(半)이었다. 그때 나는 죄인(罪人)이 된다. 아내가 지금 가장 보고싶은 사람은 엄마가 아닐까?
나의 어머니는 이달 중순이면 만 103세가 되신다. 당신의 남편보다 2곱절하고도 8년을 더 살고 계시는 것이다. 기억력이 많이 저하되신것 외에는 아직은 크게 불편하신 곳은 없이 건강하신 편이다. 큰 축복이요,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나이에도 엄마를 부를 수 있는 나같이 행복한 자식이 있는 반면에, 나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태어나서 한번도 ‘엄마’를 불러보지 못한 분도 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엄마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제목으로 책을 낸 아동문학가 정채봉작가가 그런분이었다.
<스무살 어머니>라는 수필로 널리 알려진, 이제는 고인이 된 동화작가 정채봉의 시집 <<너룶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를 읽었다. 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할머니를 어머니로 생각하면서 커 왔다는 정채봉 시인, 자라면서 한 번도 ‘엄마’라고 부르지 못했던 그의 수필집과 시집 속에는 유독 엄마 이야기가 많다. 특히 이 시집속의 화자(話者)는 목숨의 끝자락을 저 앞에 두고 있는 암투병 환자인 시인의 목소리여서 더욱 가슴을 시리게 한다. 이 시집은 정채봉 시인이 천국으로 떠난 다음해에 발간되었다. 나는 이 시집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도중에 몇 번이나 시집을 덮고 창 밖으로 흐르는 이스트 리버(East River)에 내 눈을을 씻었는지 모른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 정채봉,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단 5분만이라도 휴가 얻어 오신다면 원이 없겠다고 한 시인.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엉엉 울고 싶다고 한다.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모르고, 어렴풋한 젖냄새로만 기억나는 품. 그래서 더 사무치는 ‘엄마’. 그는 거기서 그렇게 불러보고 싶다던 어머니를 만났을까. 엄마 손잡고 엉엉울었을까.
그를 만난 어머니는 ‘그랬었구나. 가여운 내 새끼!! 힘들었었니?’ 하며 얼굴을 비비며 그의 눈물을 닦아 주는 장면을 상상해 보며 눈물을 흫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와 살아본 사람들은 다 안다. 엄마만이 누가 뭐래도 내 편이요. 엄마만이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었다는 것을. 그런 엄마와 영상통화라도 누랄 수 있는 시대에 살고있음에도 감사한다.
나는 지난번 통화이후로, 어머니가 아닌 ‘엄마’로 부르기로 했다.내일 모래가 한국의 어버이날이다.
그날은 “어머니 저예요” 대신 “엄마! 나야!”할것이다. 그때, 엄마의 입가의 피어나는 잔잔한미소가 다시 보고 싶다.
曉泉
[꽃 한송이 구름에 실어 보내요 -어머니 날에] 조광렬 / 미주 한국일보
https://m.cafe.daum.net/krcho45/62ll/149
[아버지 날에] 조광렬 / 미주 한국일보
https://m.cafe.daum.net/krcho45/62ll/210
[자식들에게 아버지란?] 조광렬 / 미주한국일보
http://www.koreatimes.com/article/1469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