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권 시인>>
<<박형권 시인의 양력>>
* 1961년 부산 출생
* 경남대학교 사학과 졸업.
* 200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2009년 시집 <우두커니>, <전당포는 항구다>.
* 김달진 창원문학상, 한국 안데르센상 수상.
<<박형권 시인의 대표 시>>
우두커니/ 박형권
겨울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둔 산 아래 밭에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빵 딸기 우유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농부 하나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머리 위로 까치 지나가다 똥을 찍 갈겨도 혹시 가슴에 깻잎 심어두어서
까치 똥 반가이 거두는 것인지
피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 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내가 어머니에게 빵 우유 드리면서 손 한번 지그시 어루만져 보는 것처럼
그도 뭔가 어루만지고 있긴 한데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그것을 내가 볼 수 없듯이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 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다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의 배경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
상추 한 아름 받쳐 들고 내려오며 보니 마른 풀도 사철나무도 농협 창고도
지그시 지그시 오래 서 있었다
게국지/박형권
서산 가면 게국지 한 그릇 먹어봐야겠더라
인터넷에서 만난 한 시인이
게국지 사진 올린 걸 보니
꼭 옛날 우리 일소가 먹는 저녁 여물 같더라
우뭇가사리 같은 새하얀 손이 쭈글쭈글해져 발굽이 될 때까지
김치를 치대면
발자국이 슬슬 드러날 것 같은
게국지란 음식이 서산에는 있다더라 서산 하면 어리굴젓만 있는 줄 알았지
서산사람 표정 같은 게국지 있는 줄 나는 몰랐다
능쟁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에도 발가락 열 개로
개펄을 누르고 선 게가 있는데, 그것도 몰랐다
능쟁이 간장에 넣고 그 삭은 국물로 치댄 소박한 김치를
투가리에 넣고 지지면
엄마 아빠 할머니 손자들까지
석기시대처럼 모여앉아 김 내면서 먹는 게국지 된다는데
맛을 상상해보니
밥 두 그릇은 거뜬하고 혀까지 꼴깍 삼키겠더라
내 청춘일 때 군대에서 만난 안종남 병장, 그가 서산 사람인데
서산자랑을 그렇게 하면서도
게국지 이야기는 쏙 빼먹고 제대하였다
게국지 이야기는 길고도 길어서 삼년 내내 게국지 이야기만 하다가
군대생활 끝낼까봐 그랬던 것일까
나는 안 가 봐도 알 것 같다
안 먹어봐도 알 것 같다
그 소탈하고 털털하고 말을 눅일 줄 아는 안병장 생각하면
게국지가 어떤 맛인지 나는 안다
안병장 찾아서 서산 가게 되면 그때 꼭 게국지 한 그릇 먹어봐야겠더라
손님되어 내가 찾아가고 싶은 안병장이
시큼하게 그립다면
그것이 게국지 맛처럼 그리운 것일 게다
사진 올린 그 시인도 서산 살이 십년 만에 게국지 진미를 알았다고 하는데
내가 하루 만에 알까? 그것은 모르겠다
나는 사실 게국지도 게국지지만 투가리라는 그릇 주위에
둥그렇게 모여 앉는 사람이 그리운 건지 모를 일이다
게국지 찾아 서산가면
둥그렇게 모여앉는 격의 없는 사람들을 나는 만날 것이다
산수박/박형권
할머니는 손자에게 일 시키지 않고 산 아래 밭까지 꽁지 물고 따라오는 것 대견해하시지
털매미 노래가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로 들리고 멀리 바다에는 통통통통 전마선 한 척 게으르게 지나가지
혹시 부산에 신발공장에 일 나간 엄마가 고기 한 근 끊어 올지도 모르는 신작로 옆구리엔 땀이 삐질삐질, 배꼽시계가 정오를 가리키지
꼬르륵 꼬르륵 눈치 없게시리 배 안에서는 개구리가 울고 할머니 호미날에는 감자알만한 돌멩이가 이마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지
이 꿩 저 꿩 이 산 저 산 구운 콩은 다 먹고 사르르 잠이 찾아오는 묵정밭
길어진 밭이랑을 참다 참다 할머니
산그늘에 들어가 쉬이 소피를 보시지
졸졸졸 개울물소리 끝에서 할머니 이리 오너라 손 흔드시고
투덜투덜 몇 발 안 되는 여름은 뜨거워라
할머니 부끄럽게 산자락을 적신 그 뜨뜻한 공백 옆에 덩그렇게 놓인 산수박 한 통
눈도 밝으신 우리 할머니
퍽 쪼개면 새까만 씨앗들, 우리 씨 할 고추 어서 많이 먹어라 우리 할머니 산수박 낳으시러 이제 산그늘에 드셨지
덕배는 파도 위에서 한다/박형권
나이 오십 바라보니 세상에 꽉 찬 것들도 다 헐렁해 보이기 시작하고
또 세상의 보드라운 것들이 나 잡수시오 하고 다가와도 가슴 벌렁거리지 않는데
쌍끌이기선망처럼 밀어주고 당긴
네 살 터울 마누라는
늦여름 모자반처럼 부쩍 감겨온다
덕배는
어제와 다름없이 일 톤짜리 조각배에
마누라를 태우고 달맞이꽃 살포시 오므린 밤에 기름 한 드럼을 채워 넣었다
덕배를 힘껏 짝사랑하던 머큐리 엔진도
우당탕탕 내질러야 할 터인데 이제는 삐걱삐걱 수조기 우는 소리를 낸다
이런 날에는 노래미 볼락들이 심해를 견디기 지루하여 물가로 밀려와
뻐끔뻐끔 담배 피듯 플랑크톤을 흡입하는데 별빛과 검은 밤에 취하여 해롱거리는데
뜰채로 걷어 올려도
사내 몸 끌어당기는 첫 밤처럼 다소곳하다
일하듯 놀듯 물칸 가득 활어를 싣고 보니
큰놈 등록금 머잖아 맞추겠다 싶어 마음이 널찍해지고
고요하고 적적한 바다가 뽀얀 인광을 뿌리며 배의 겨드랑이를 핥는다
바다가 까닭 없이 반딧불이 꽁지처럼 환해지는 밤
마누라가 이 지점이다 싶은지
홍어냄새로 발효하여 덕배의 살점을 포옥 쓸어 쥔다
물그림자 황홀하고 별빛 초롱하다
아직 바다는 전복같이 납작하거나 개불같이 길쭉하다
바다의 凹凸이 새 바다를 낳나니 오목 하나 볼록하나 따로 남지 않는
그런 무탈한 세상 올 것만 같은 밤
덕배가 그거 한다
물칸: 배의 갑판 아래 바닷물을 담아 두는 곳, 활어를 보관한다.
지칭개 골목/박형권
지하방 창에 딸깍 불이 켜지면
지칭개 핀 골목이 어딘가로 간다
어딘가, 어딘가, 어딘가로 가고 있지만 선언하노니 그 끝은 없다
지칭개 골목은 떡 골목과 어깨를 걸고
걷다보면 전파상 골목과 만나고
또 치킨 골목과 손을 잡는다
골목에서 시작한 모든 새벽들이
사거리에 모여 사거리로 흩어진다
어디로 가든 서울로 가고 어디로 가든 로마로 간다
그 자하방 창의 목발 짚는 아이는
우루무치로 가고 싶어
매일 이백원씩 저금통에 넣고 외삼촌이 사다준 지구의를 돌린다
어디로, 어디로, 어디로 아버지는 지금 가고 있을까
지상의 모든 길을 다 걸어야
치킨가게의 훈제닭을 사서
아버지는 돌아올 것이다
엄마의 손등으로 봉제공장의 미싱바늘이 지나가고
급히 병원 다녀오는 사이 하루가 지나가고
길들이 돌아온다
어깨를 걸고 손을 잡고 밀고 당기면서 지칭개 골목으로 돌아온다
모든 골목이 롤스로이스처럼 기다린다
엄마가 새벽밥 먹고 타고 나갈 지칭개 골목
봄, 봄/박형권
두 젊음이 다리 끝에서 아지랑이를 피워올린다
연애질 하고 있다
눈빛 마주칠 때 참꽃 피고
손닿을 듯 할 때 개나리 벙글어지고
내일 들에서 쑥 캐는데
너 나올래
불쑥 오지 말고
늑대처럼 침 흘리며 빙글빙글 둘러서 다가올래, 할 때
목련꽃 흐드러지고
동네가 눈을 틔우는 마늘 싹 만해서
봄비 기다리는 마루 끝에 앉아서도
아닌 체 서로 끌어당기는 모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의 좋은 시절도 복숭아꽃 피었고 복숭아 털 같은 최루탄 사이를 이리
저리 피해 다니며
잘 모르는 자유, 노래하다 지치고
전자석처럼
문득 나를 끌어당기는 여자가 있었다
이제는 예쁘게 노는 모습에 참으로 눈이 부시기 시작하는 나이
해줄 것은 없고 시계를 한 시간씩 되돌려놓으면 그것도 부질없다
봄은 노루꼬리보다 짧으니 힘껏 하는 만큼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고
속마음은 제비꽃처럼 부리가 뾰로통해지고
그때 그 나이인 저 아이들 믿고
봄을 맡겨도
괜찮을까 하며
겨울이 능구렁이 꼬랑지를 담부랑에 남긴다 누구나 한번쯤은
꽃봉오리로 팬티를 해 입고 싶은
봄이
쑥 캐는 년 궁둥짝만큼 염치없다
봄은 저 아이들 연애질하게 오는 것이니 행여 나비처럼도 밟지 마시라
봄, 봄 해봐도 젊음 속의 봄 만한 게 없다
여우와 홍합/박형권
한 여인이 옷을 말리고 바다에 종아리를 씻었네
갯바위까지 내려 온 달맞이 꽃처럼
오늘 하루 피워 올린 꽃대가 말쑥하였네
대출금 이자도 밀려 있고 어촌계 회비도 밀려
물일에 푹 빠져 몇 푼이라도 건져야겠는데
반 백년 오줌 누기에 바빠 돌아보지 못한 나의 순정이
간지러운 곳을 따라갔네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꽃봉오리까지
흠뻑 젖은 잎맥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였네
발치의 파래 청각이 오늘따라 칭칭 감겨
온 세상이 향긋한데
-저 배 주인이세요? 포구까지 좀 태워 주실래요?
-그럽시다, 뭐 그 정도쯤이야
그 순간,
뱃놀이에 빠져 한세상이 얼얼하였네
내 배 위에 올라탄 그녀,
파도가 옴찔옴찔 나의 뱃머리도 꼬물꼬물
바다의 자식들이 물메기처럼 한 두름, 걸려서 학교도 보내고
나는 행복하여서 그만 죽고 말았네
선창에 배를 대는데 훌쩍 뛰어내리는 그녀
아, 노랗고 귀여운 꼬리가 열 두 폭!
뒷골 여우였었네
돌아와 조개밭에서 해종일 딴생각만 하였네
별들도 엉겨 붙어 서로 불 지르는 열대야에 천장에 모기장을 쳐놓고
땀 냄새를 알아주는 여우에게 안겨
여우를 진정 그립게 하고 싶었네
툇마루 끝에서 파도가 찰랑거리며
여우가 삶아주는 새빨간 홍합 오물오물 까먹고 싶었네
해벌쭉 벌어진 홍합 같은 일몰
오늘따라 대강대강 살고 싶었네
비, 포구에서 내리는
사흘째 넉넉히 비가 내린다
받쳐 든 우산 속에 빗방울 뛰어든다
내가 펼쳐 든 갯메꽃 오산 아래
꽃도 잘 모르면서 뛰어드는 청년처럼
약간 무례한 빗방울이 좋다
비가 내리면 어디서 삭은 홍합냄새 끼어들어
선창에 내려가 술 한 잔 내고 싶고
물컹한 농담이 안주로는 편안하다
바람 불지 않는다면 파도 높지 않다면
비는 풍어를 불러온다
자산어보 한 권이 은비늘을 씻고 펄쩍펄쩍 선창에 펼쳐진다
뒷집에서 오늘은 젓볼락을 한 배 가득 실어 내년엔 온 동네 젓국냄새 나겠다
아버지들이 배 묶어 놓은 선창으로
청년들 몰려나와 바다를 꿈꾸기 시작하는
튼튼한 손아귀 힘 보기 좋다
우줄우줄 내렸다가 우당탕 내리는 비가
다 그들의 비라서 좋다
고래 잡은 듯 벗겨지는 삿갓산의 안개도 내 것이 아닌데
내가 써도 눈감아 준다
조개잡이 배는 왜 이리 늦게 오나
이 바다 언제까지 우리 먹여 살리려나
번뇌 망상 적당히 자라라고 비 뿌려 주어서 비가 좋다
사나흘 더 내려도 넘치지 않는 바다 옆에 창문 하나 내고 살아도
똑똑 문 두드려 주는 비하고 손발이 맞아
지구에 내려 반 백년 산 것이
아, 행진이었다
바지락조개 한 리어카 밀고 끌고 지나간다
팔 걷고 밀어주면 저녁반찬 얻는다
썰렁한 농담/박형권
가을볕이 노릇노릇하다
밭에서 농부가 익어가듯 물에서 어부가 익어간다
일흔둘 아버지와 조개밭에 들어가 허리까지만 바다에 넣으니
바닷물에서 꾸꿉한 수건 냄새가 난다
잘 삭은 조개젓 냄새로 아버지는 눅진한 한 생을 쉬엄쉬엄 닦아 왔다
아버지와 내가 두루미처럼 굽히고 바다의 등 긁어 줄 때
거제도로 가는 공기부양선은 허파에 바람 잔쯕 불어넣고
건들건들 유람이다
저 배에 올라 거제 장목으로 문주리 낚시를 갈 때만 해도
네 칸 반 민장대처럼 아버지는 빳밨했다
바닷바람 먹은 호미처럼 아버지의 빳빳한 것들은 어느듯 뭉툭해졌다
파도를 밀어붙이는 힘과 슬쩍 놓아주는 꾀가
어느새 그 뭉툭함 속에 배 묶는 녹부줄처럼 사려져 있다
아직도 아버지는 말술을 뱃속에 담고도 한 말 더 짊어지고 오는 강골이지만
가을 들어 몇 번 허리를 쉬고 몇 번 먼 섬을 보았다
우리의 가을은 풍성하여 광주리마다 굵은 조개가 넘쳐난다
모두 아버지의 알통에서 살 던 것
파내면 등짝에서 피 흐르는 것들
오늘 물옷을 갈아입는 아버지의 나체를 본다
앙상한 가지에 나를 만든 도구만 덜렁거린다
어쩌다 그리 마르셨습니까?
아버지는 끈적한 묵음으로 딸막딸막하다가
내 죽으면 들고 가지 좋겠제?
뜬금없는 농담 한마디에 어디서 칼칼한 바람 불어온다
썰렁한 농담인데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추녀 끝에서 담담하게 웃고 싶은 것이다,
바다오 주민등록증을 까도 밀리지 않는 아버지는
한 덩이의 어머니
간에 바람이 들어서 물옷 걸어두고
두척산에서 화왕산으로 비슬산으로 속리산으로 진달래 따라갔다가
우리 동네 뒷산으로 돌아와 보니
우리 조개밭에 나무 밑동 하나 흘러든 것 같다
한편으로 보면 옛날 큰댁의 일소 같고 나자빠진 바다사자 같고 투실투실 물에 떠내려온 시체 같다
꿈지럭꿈지럭 움직이다가 가끔 고요하다
우둔살 한 덩이가 왜 우리 조개밭에 던져져 있나 가서 보고 썩었으면 내다 버리자
코에 묻은 진달래 향기 지워버리고 호미로 파낼 듯 달려갔더니
뒷산 언덕배기 늦게 핀 진달래 꽃대궁이 같은 우리 엄마!
-그래 코에 바람은 많이 넣었나?
물어 오는 입에 꽃잎 한 장 물려 있다
학교에서 학부형 좀 보자고 했을 때 내가 무전취식으로 끌려갔을 때 발랐던
전투용 위장크림 같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조개를 캐고 있다
-오늘 니 아부지 생신인 거 아나?
내가 진달래에 미쳐, 봄 밖으로 밀쳐둔 한 덩이의 어머니가 꽃 피고 지는 통증을
숭덩숭덩 잘라
피 흐르는 그대로
몇 점 드셨나보다
"한 물때만 보고 와서 꽃구경 가자더니"하며
저녁노을 속의 아버지가
선창에서 바다채송화처럼 마중 나와 계시겠다
아버지의 걱정/박형권
올해는 중랑천 둔치 길의 장미가
가시가 여물기도 전에 피었는데
각시붓꽃은 보름이나 늦게 피었다
입시를 앞둔 딸들의 보충학습처럼
어쩐지 지구의 자전도 늦게 귀가할 것 같다
눈 한 쪽을 흐릿하게 하는 백내장에 관한 일기를
최근에는 자정이 넘도록 적었지만
유월로 접어드는 첫날에도
황사는 자욱하다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이제 물들기 시작하는
버찌를 쪼아 먹는 광경을 보면서
먹고 사는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엄숙하다고 생각해 보았는데
하루 두어 끼니 건너뛰며 사는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오래 걸어둔 냄비는 왜 저렇게 땡그랑 땡그랑
풍경소리를 내는지
21세기에도 왜 이토록 가난은 힘이 센지
개똥지빠귀처럼
날개도 부리도 가지지 못한 내가
아, 착한 내 딸이 대학에 들어가고
걱정마라 등록금쯤은 아비가 마련해 놓았다고 말할 그날에도
지구여
무탈하기를
오늘은 일요일이라 노인도 청년도, 데리고 나온 시츄 강아지도
일본발 방사능이 절망처럼 스며드는
산책길에서 나른하다
물색없이붉은 장미 한 송이도
모두 내가 지은 결과이오니
꽃들아 할 말이 없다
비 내리는 이사/박형권
지금 난 이삿짐 옆에서 담배를 피우네
빗소리와 얼크러진 니코틴이 희미한 악수를 청하네
어제 널어두었던 구멍 난 양말과
뜯어보긴 했지만 사용하지 못한 즐거운 섹스도
라면박스에 포장되어 있네
이사를 위해서 몇 가지는 버렸네
이 동네에 들어와 아옹다옹 싸우다가도 돌아서면 잊어버리자고
부지런히 돌렸던 시루떡의 행방을 모르겠고
비바람이나 피하자고 지붕한 귀퉁이 얻어
꼬박꼬박 바친 월세 34만 원은 누구의 뱃속에서 이자를 벌고 있는지
사람 좋아 보이락 벙글벙글 웃었던
그 아까운 웃음이
골이깊은 골목에서도 메아리로 돌아오지 않아
웃음마저 버렸네
새로 이사 갈 집에는 한 평 남짓 텃밭과 옆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으면 좋겠네
이제 내 등짝을 갈아엎어 오이 심고 부추 심는
낭만을 버리고
그 낭만 위로 별빛 쏟아지는 꿈도 버려야겠네
하지만 그 곳에는
여전히 하수도 냄새도 나고 찢어지게 우는 아이도 있고
젊은 여자의 브라자도 옥상에서 펄럭여, 내 식구들이 쉽게 적응할 것 같네
시끄러운 봉제공장이 옆에 있어
깊은 잠 들지 않아 좋겠네
나는 아직 이 방에서 신을 신지 못하는데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정든 내 방에젖은 신을 신고 들어오네
중랑천 달빛/박형권
나 보러오는 스무 살 엄마가 막배에서 내려
섬길 걸을 때
손에 뭐 들었나 기웃거리던 달빛이
오늘은 추석을 하루 앞두고
중랑천 여울물에 기대었습니다
추석에 일 나가면 만원 더 받아
밥집 일 나간 아내 기다리며
중랑천을 걸으면
이곳도 누군가의 고향
총총걸음을 걷는 엄마 달빛들이 예쁩니다
물에 뛰어들기 전에
신발 벗 듯
무거운 간과 쓸개 다 꺼내어, 연휴 끝나면 돈만 벌어야겠다 결심을 하고
달빛 끌고온 마음 아는지
딸이 킁킁 술 냄새를 맡아봅니다
딱 한잔만으로도 가득한 달빛에
벌써 나는 중천에 떠올랐습니다
소나기 공장/박형권
함박눈 오는 날에도 차르륵 차르륵
끈 공장 안에서는 소나기가 내린다
소나기를 모아서 긴 끈을 만드는 처녀들은 사연의 직공
그대와 그대들 사이의 간격은 멀어봐야 지구 한 바퀴여서
이어 붙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빗소리로 이어진 생은 꼭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리
추녀 아래에서 버스정류장에서
운명적으로 마련된 우산 아래에 서리
소나기 소리로 직조기가 돌아가는지
직조기가 소나기 소리를 내는지
잘 모르겠는 축축한 정오
처녀들은 언제나 빗속의 첫 키스를 새 작업복처럼 개켜두고 있다
오늘 만든 등산화 끈으로 짧게 이어진 인연이라면
새벽 약수터를 지나가다 누군지 모르면서
인사하게 되리
장터목산장에서 새벽 커피를 나누게 되리
파란 작업복을 입은 처녀들이 까르륵대며 점심을 먹으러 가는 시간
꼭 한 명은 공장에 남아
소나기 속으로 멀어져간 끈의 저쪽을 궁금해한다
쏴아 쏴아 소나기 공장에선 소나기 내리고
소나기의 뒤끝을 단단히 잡고 생의 비밀을 찬찬히 짚어가면
거기에 잔업을 밝게 켤 플러그가 나온다
아직도 누군가의 사연이고 싶은 내 정전(停電)에 꽂아주면 좋겠다
소나기 공장에는 소나기 내려, 소나기로 단단히 단화를 묶는다
아내는 더 낮은 음역에서 산다/박형권
아침 밥상에 올라오던 우유가 한 달째 뚝 끊어져
집에 돈 떨어졌구나 싶었던 그날도
집 앞에는 낡은 오토바이 한 대 묵묵히 서있었다
타이어는 뼛속까지 닳았고
칠이 벗겨져 검버섯 같았다
고단한 노년 같은 그것이 뒷심은 있어
새벽 네 시만 되면 푸다다다 시동을 걸어서 잠 깨기 딱 좋았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우유 돌리고 전단지 돌리고
비 오면 비에 맞고 눈 오면 눈에 맞을 그 젊음의 미래는 분명 밝을 것이라고
이불 속에서 아내에게 말했다
그를 혹시 만나면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를 낼 줄 아는 젊음과 같은 골목을 쓴다는 것이 좋았다
나도 서너 살 젊어져서
아내의 배에 슬그머니 손을 올려놓는데
저 소리는 안 들리세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한 할머니가 우리 식구 먹을 우유를 두근거리며 가져가고 있었다
아내는
더 낮은 음역을 들을 줄 알지만
그 동안 모른 체 하고 있었다
더 낮은 음역을 듣기 위해서는 내가 눈 내리는 소리보다
낮아져야 했다
보리밭/박형권
그 보리밭을 지날 때는
쑥쑥 자라는 몸을 참을 수 없었다
소녀가 사는 창문에
냅다 돌을 던져 놓고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빌 빌 빌 보리밭에 숨어들면
소녀는 나를 보고도 모른 체했다
종달새 자지러지던 그 봄을
알까지 둥지째 담아왔다
아파트가 들어선 지금에 와서야
겨우
은행나무/박형권
나는 밥할 줄 모르고, 낙엽 한 줌 쥐어주면
햄버그 한 개 주는 세상은 왜 오지 않나
낙엽 한 닢 잘 말려서 그녀에게 보내면
없는 나에게 시집도 온다는데
낙엽 주고 밥 달라고 하면 왜 뺨맞나
낙엽 쓸어 담아 은행가서 낙엽통장 만들어 달라 해야겠다
내년에는 이자가 붙어 눈도 펑 펑 내리겠지
그러니까 젠장
이 깔깔한 돈 세상에는
처음부터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낙엽 주워 핸드백에 넣는 네 손 참 곱다
밥 사먹어라
할로겐 히터 씨의 고독/박형권
스탠드형 할로겐 히터 씨 무탈하신가요
당신은 당신 사용법을 숙지하셨나요
당신이 교류 220볼트 전용임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만큼 당신은 들키며 살았지요
당신이 먹이를 습취하는 콘센트는 단독으로 사용해야 하고
습기가 있는 곳에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아버지들처럼 전천후가 아니니까요
유아니 반려동물이 당신 근처에서 얼씬거리는지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당신은
켜짐보다 꺼짐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특히 외출하거나 청소를 할 때
반드시 전원 플러그를 뽑아야 해요
다른 사람을 감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당신에게 감전되는 것은 어쩌면 축복일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은 전율할 것이 눈곱만큼도 없는 세상이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목욕탕이나 세탁기 주변에서
당신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목욕은 죽어라고 싫고 세탁은 번거롭잖아요
어느 해인가, 당신이라는 이름을 내밀고
애프터서비스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당신은 고독으로 바로 서야 하고 달구어져야 해요
당신은 폐기처분해야 할 나이가 지났으니까요
커피를 한 잔 들고 스탠드형 할로겐 히터 씨 창밖을 봐요
사부작사부작 밖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들여다보고 있어요
새들이 나를 나무로 볼 때/박형권
내가 한 소년이었을 때, 동네 뒷산에 올라가 참꽃을 꺾으며 휘휘 분 휘파람 소리에 박새가 날아왔다 내 휘파람 소리에 새들이 알아듣는 자음과 모음이 섞여 있었던지 새들이 들으러 왔다 내가 새들의 허수아비였던지 새들이 내 옆에서 안심하였다 내가 새들의 우체통이었던지 새들이 사연을 맡기고 갔다 나는 새들의 속기사처럼 새들의 노래를 받아 적었다 내 안에 어떤 부호가 있어서 새들이 나를 보고파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는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새들과 나는 멀리서 멀뚱멀뚱 쳐다보는 사이가 되었다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아비가 되어 중랑천 옆으로 이사 온 뒤에 나와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아들을 데리고 중랑천 둑길을 걸었다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오목눈이 떼가 우리를 지나갔다 머리에 앉아서 이마를 톡톡 쪼아보고 진주 같은 똥도 떨어뜨렸다 내 어깨에 삭정이를 물고 와서 집을 지으려는 놈도 있었다 새들이 갑자기 나를 나무로 보아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돕는 길이었다 단지 팔을 벌려 새들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아, 그때부터 아들이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내 귀가 뚫려 아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새들이 나를 나무로 볼 때에 이르러서야 한 아이의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았다
어제오늘 휘영청 고욤나무로 서 있었더니 날개가 날개를 데리고 와서 감도 아닌 것을 달게 맛보고 갔다
털 난 꼬막/박형권
아버지와 어머니가 염소막에서 배꼽을 맞추고 야반도주할 때
가덕섬에서 부산 남포동에 닿는 물길 열어준 사람은 오촌 당숙이시고
끝까지 뒤를 추적하다 선창에서 포기한 사람들은 외삼촌들이시고
나 낳은 사람은 물론 어머니이시고
나 낳다가 잠에 빠져들 때 뺨을 때려준 사람은 부산 고모님이시고
나하고 엄마, 길보다 낮은 집에 남겨두고
군대에 간 사람은 우리 아버지시고
젖도 안 떨어진 나 안고 '천신호'를 타고, 멀미를 타고 가덕섬으로 돌아온 사람은 할머니시고
빨아 먹을 사람 없어지자 젖이 넘쳐나
염색공장 변소 바닥이 하얗도록 짜낸 사람은 다시 우리 어머니시고
젖 대신 감성돔 낚아서 죽 끓여 나를 먹인 사람은
큰아버지시고
무엇을 씹을 때부터
개펄에서 털 난 꼬막 캐와서 먹인 사람은 큰어머니시고
그렇게 저녁마다 차나락 볏짚으로 큰아버지 주먹만 한 털 난 꼬막 구워주신 사람
큰어머니시고
한 번씩 나 안아보러 오는 우리 엄마에게
덕석에서 늦은 저녁상을 받으며
욕 잘하는 우리 큰어머니
니 털 난 꼬막으로 나왔다고 다 니 새끼냐 하셨을 것 같고
우리 엄마 울고
우리 엄마 울고
털 난 꼬막 목젖에 걸려 넘어가지 않고
전당포는 항구다/박형권
방세 두어달 밀리고 공과금 고지서는 쌓여만 가는데
죽을 땐 죽더라도 삼겹살 몇 덩이 씹어보고 싶어서
전당포 간다
육질이 쫄깃했던 내 젊음은 일회용 반창고처럼 접착력이 떨어져
오늘 하루 버티는 일에도 힘껏 목숨을 건다
언제나 돈 떨어지면 공연히 허기지는 것처럼
봄비 내리면 입이 궁금해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김치! 김치! 벙싯벙싯 웃었던
수동식 디카를 맡기고 십만원을 받는다
고기도 고기지만 우선 급해서
잔치국수 곱빼기! 커다랗게 시켜놓고 디카를 먹는다
필름 없는 국물에
찰칵찰칵 떠오르는 식구들을 먹는다
처음 내린 서울역 국밥집에서 땀 흘리며 씹었던 나의 쓸개는 어디 갔나
홍릉수목원 생강나무 옆에서
나에게 쏟아지던 샛노란 양념, 온몸에 스며들 때까지
꾹꾹 절여놓은 나라는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먼 것 당겨주고 벅찬 것 밀어주던 디카, 허기 속에 밀어 넣고
우적우적 깍두기를 씹으며
울렁거리는 서울을 새삼 사랑한다
멀미로 채워진 위장을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보니 멀리
개나리 흐드러진 정육점이 아련한데 고기 생각 어디론가 사라지고
봄비 내린다는 이유 하나로
저기 저 내가 전당포 간다
그래, 불러야겠다 이쯤에서는
아직도 잔술을 파는 골목 안 밥집처럼
전당포는 항구라고
탬버린만 잘 쳐도/박형권
옆방 젊은 여자하고는 이사 첫날부터 찌그러졌다
이삿짐 다 옮겨놓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보니
출입문이 두 개 있는데 어느 문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 문이나 열긴 열었는데
꽃 같은 장롱에 복어 주둥이 같은 살림살이들
아, 이 문이 아니었다
얼른 닫고 옆문을 여니 마누라 같은 두루마리 화장지
딸 같은 시집詩集
그래 여기가 내 집이지 한시름 놓는데
누가 문을 쾅쾅 두드린다
―야, 너 뭐하는 놈이야? 여자들만 사는 집을 왜 들여다봐?
그렇게 꼬이기 시작한 인연은 일 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았다
할머니 한 분과 여자와 여자의 어린 딸이 사는 것 같은데
모두
가을바람 앞의 코스모스 같았다
이슬만 먹고 사는지 그 방에서는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며칠째 옆방에서 탬버린 소리가 났다
딸 운동회에 응원단장을 맡은 것일까
내 딸의 운동회에서 이인삼각 경주를 할 때
꼴찌인 우리 식구를 함박웃음으로 반기던 저녁달을 떠올리고 있는데
옆집 여자가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고
밤 열두 시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노래방 도우미로 가면 탬버린만 잘 쳐도 월 300이라는데
새벽에 눈화장이 흘러내리도록 울면서 돌아온들 어떠리
다음날부터
사람 살지 않는 것 같은 그 방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도축사 수첩/박형권
트럭에 실릴 때 한 번 우시고
도축장에 도착했을 때 한 번 우시고
보정틀에 섰을 때 마지막으로 우셨다
그는 모든 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그가 보정틀 안에서 모로 누웠을 때
나는 안면의 중앙을 전용 총으로 타격했다
나는 모든 인간과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뻗어버린 그가 예기치 못한 눈물을 주르르 흘렸을 때
나는 그가 그분인 걸 칼에 베인 듯 알았다
무논의 써레질이 있게 하시고
쇠죽 끓이는 가마솥이 있게 하시고
오뉴월 땡볕 아래에서의 일을 있게 하신
그분인 걸 알았다
그분이 쏟아놓으신 눈물을 어떤 그릇에 담아야 할지 망연하였다
아주 작은 우주 하나가 소멸하셨다
저 먼 곳 더 크신 우주의 누군가가 대신 흘리는 눈물이었다
인간 세상에 내려 전생을 반추할 줄 모르는
나의 식욕을 위해
우주 밖의 더 크신 공백이 안타깝게 부어주는 숭늉 한 그릇이었다
애초에 소처럼 반추위를 가지지 못한 나는
위장을 더부룩하게 채우면 그만이고
이웃과 우주와 우주의 심오한 계획을 위해
한 번도 되새김질하지 않았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은
흘려도 흘려도 담을 줄 모르는 나에게
오래전부터 그분이 보낸 서신이었다
이렇게 늦게 오시다니, 아니었다
다만 좀처럼 확인하지 않는 내 우편함에 이미 도착해 있었을 뿐이었다
이 행성의 이름으로 뜨겁게 견뎌낸 그분의 여름을
나는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단지 고기덩이셨지만
우물우물 여물 씹는 소리로 온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셨다
가덕도 탕수구미 시거리 상향/박형권
달이 뜨지 않는 그믐밤이면 바다는 스스로 밝다
파도에 뛰어든 뿌연 인광이 항구의 앙가슴처럼 스스스 무너진다
아직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순결한 밤일수록 더욱 빛난다
빛도 바다의 일부분인 것을 어부들은 안다
가덕도 사람들은 어두운 밤바다의 인광을 ‘시거리’라고 부른다
인도에서 흑조(黑潮)를 타고 온 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다의 인광은 바다의 말일 것이다
사실은 야광충이 내는 빛이지만 나는 여전히
말이 빛을 내는 거라고 믿는다
누구나 한번은 어휘가 많은 인생을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말의 고향인 인도로 한번 놀러가고 싶었다
그 그믐밤 아버지는
나를 저어 탕수구미로 낚시를 갔다
칠흑 같은 바다가 노의 궤적을 그렸다
몰고씨이를 꿰고 바다에 넣자 바다가 몰고씨이의 궤적을 그렸다
그런 밤은 붕장어의 밤이다
섬광 같은 신호가 왔다 바다 밑이 외등을 켰다
꿈틀거리는 빛의 반란!
바다는 살아있는 빛을 모국어로 썼다
모두 몸으로 뒤채는 언어였다
그 사이 이 행성의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가덕도의 밤은 육지에서 꺼졌고 이제 시거리로 말하지 않는다
밥 묵었나? 하고 이웃을 빛나게 하지도 않는다
아름다운 말의 시대는 내가 시거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떠나가고 있었다
가덕도 탕수구미의 황홀한 말씀이시여······ 상향!
냉잇국/박형권
어제 저녁 식탁에서
공연히 냉잇국을 화제에 올렸더니
식전에, 아버지 어머니가 나물 칼을 들고
아직 어려서 향기도 없을 처녀의 가슴을 베러 가셨다
흰 젖을 내비치는 냉이
이제 막 돌기 시작하는 유선을 위해 초봄은 춥다
모든 계절을 향해 왈칵 풋가슴을 열어 보이는
여린 것들에 이끌려 두 분은 연둣빛의 신도가 되셨다
좀 더 키워서 초대해야 할 봄이 있다
이 애처로운 걸 어떻게 먹으라고 캐 오시는지
그러나 모르시는 말씀
냉이 찾았어! 하는 순간 애가 어른 되고 어른은 늙어버린다
그러므로 냉잇국은 순간의 음식
인생은 쏘아놓은 화살 같아서 향기로운 것
냉잇국 한 숟갈 떠서 머금어보는 사이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벌써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캐다가 바구니 집어던지고
꿈을 꾸기 시작한 그 위대한 봄바람이다
수캐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킁 킁 킁 냄새 맡게 된 냉잇국에서
최초로 사내를 다리사이로 끌어들인
수십만 년 전 처녀의 움푹한 풀냄새가 난다
나는 나른해져서 그럭저럭 살다간 사람들의 무덤가에
따뜻하게 눕는다
우리 동네 집들/박형권
좋은 사이들이 말을 할 때 가만히 눈매를 바라보는 것처럼
손끝으로 입을 가리는 것처럼
겨드랑이를 쿡 찌르고 깔깔대는 것처럼
우리 동네 집들이 말을 한다
파란 대문 집은 아직 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외등을 켜고
군불 때는 집은 쇠죽 끓이는 소리로 오래된 말을 한다
옥상에 노란 수조가 있는 집은 취직시험 볼 삼촌이 있어서
옥탑방이 하얗게 말을 한다.
오랫동안 살을 맞댄 이웃집들은 오래된 부부처럼 닮아간다
된장 맛이 같아지고 김치 맛이 같아지다가
우리 담장 허물까 한다
그러다가 한방 쓸까 한다
돌아설 수밖에 없는 어려운 처지에서는 등으로 말을 한다
뒤란으로 말을 한다 거기 목련 한 그루 심어둔다
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한 집들은
활짝 열린 입술로
키스 할까 말까 오랫동안 망설인다 문을 열고 사람이 나와
골목을 쓸면서
잘 잤어? 하는 것은
사람이 집의 혀이기 때문이다
집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달콤하게 들리는 것은
우리 불 끌까? 이다
밤에 집이 하는 말을 들으려고 옥상에서 귀를 귀울이면
응, 거기 거기 하는데
우리 동네 밤하늘이, 반짝반짝 별들이 그런 밤에는 불끈불끈 자란다
우리 동네 집들은 다른 동네 집들보다 조금 크게 말을 한다
바다에서는 목청껏 말해도 파도소리를 넘을 수 있기에
그런 어부 새벽마다 낳아야 하기에
배에 힘 가두고 출렁이듯 말을 한다
여우와 홍합/박형권
한 여인이 옷을 말리고 바다에 종아리를 씻었네
갯바위까지 내려온 달맞이꽃처럼
오늘 하루 피워 올린 꽃대가 말쑥하였네
대출금 이자도 밀려 있고 어촌계 회비도 밀려
물일에 푹 빠져 몇 푼이라도 건져야겠는데
반 백년 오줌 누기에 바빠 돌아보지 못한 나의 순정純情이
간지러운 곳을 따라갔네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꽃봉오리까지
흠뻑 젖은 잎맥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였네
발치의 파래 청각이 오늘따라 칭칭 감겨
온 세상이 향긋한데
- 저 배 주인이세요? 포구까지 좀 태워 주실래요?
- 그럽시다, 뭐 그 정도쯤이야
그 순간,
뱃놀이에 빠져 한세상이 얼얼하였네
내 배 위에 올라탄 그녀,
파도가 옴찔옴찔 나의 뱃머리도 꼬물꼬물
바다의 자식들이 물메기처럼 한 두름, 걸려서 학교도 보내고
나는 행복하여서 그만 죽고 말았네
선창에 배를 대는데 훌쩍 뛰어내리는 그녀
아, 노랗고 귀여운 꼬리가 열두 폭!
뒷골 여우였었네
돌아와 조개밭에서 해종일 딴생각만 하였네
별들도 엉겨 붙어 서로 불 지르는 열대야에 천장에 모기장을 쳐놓고
땀 냄새를 알아주는 여우에게 안겨
여우를 진정 그립게 하고 싶었네
툇마루 끝에서 파도가 찰랑거리면
여우가 삶아주는 새빨간 홍합 오물오물 까먹고 싶었네
해벌쭉 벌어진 홍합 같은 일몰日沒
오늘따라 대강대강 살고 싶었네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박형권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장마전선이 물폭탄을 쏟아부은 동네의
자작한 하수도를 따라
늘 곰팡이가 솟아오르는 우리의 정오(正午)를 지나서
나팔꽃 아래 듬성듬성 파인
골목으로 들어선다
비가 새지 않으면 방이 아니라고 믿는
공인중개사의 늙수그레한 자전거가 앞장을 서고
딸 자전거를 타고 나온 비옷 같은 아내가 그 뒤를 따르고
나는 아내의 젖은 꼬리를 물고
아직은 종아리가 단단한 페달을 밟는다
이 서울의 지표면에는
창틀이 마당과 맞물린 우리의 꿈을 품어주려고
축축하게 젖어서 기다려주는
반지하 단칸방이 있어
우리의 미래는 송이버섯처럼 번창하리
보증금 삼천오백만원은 우리 생명보다 소중하여
왼쪽 가슴에 단단히 찔러넣고 두근두근 돈이 심장소리를 들을 때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대체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기에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남는지
참새들이 골목에 나와 고단한 날개를 말린다
언젠간 바퀴를 크게 저을 수 있지만 오늘은 기어를 저속에 놓고
우린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우리 네 식구가 냄새를 풍기며 구더기처럼 꼬물거릴
그 기도(祈禱)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