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빗점골이야기
일시;06년2월25일(토)
함께하신분;김해섭님.뽓 때(2명)
걸어간길;삼정마을-이현상최후격전지-아지터-산
태골-명선봉-연하천대피소-절터골-이
현상아지터와격전지-삼정마을
삼정마을 출발 ;07;20
작전도로갈림길;07;38
최후 격전지 ;07;40
아 지 터 ;07;52
산태골산행시작;08;10
계곡 끝남 ;09;20
주능선 도착 ;10;50
명 선 봉 ;10;58
연하천 대피소 ;11;10
식사후 출발 ;12;00
절터골초입 ;12;03
이현상아지터 ;14;09
삼정마을도착 ;14;50
산행시간;총7시간30분(휴식,점신시간포함)
새벽4시.
아니 그이전부터 잠은 깨어 있었으나 이번 한주는 거의 술로 몸이절여져 있었기에 잠이 깨어도 몹시 고단하기만 합니다.
시계의 알람소리에 마지못해 일어나 대충씻고는 어젯밤 준비해둔 베낭을 메고 아내가 깨지않게 뒷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빠져 나옵니다.
약속장소에는 이미 5분가량늦었으나 김해섭님 먼저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서는 길을 제촉합니다.
사천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하고는 하동IC를 빠져나와 화개장터를 돌아서 오른쪽1023번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동안 잠이와서 잠을 깨우느라 괜시리 소리도 질러보고 음악을 따라해보고.....음주운전과 졸음운전은 큰일납니다.
의신을지나 삼정마을까지는 포장된 도로가 잘연결이 되어 있어서 차로 이동하기가 수훨했고 일찍 입산하는 덕택에 입장료는 무료..삼정마을에 도착했읍니다
삼정마을에도착 마을 입구 적당한곳에 주차를 하고는 길을 나섭니다.
차량뿐만아니라 사람도 출입을 금지한다고 ..위반하면 과태료..조심해서 다녀와야지요...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벽소령으로 연결되는 작전도로이고 산태골과 절터골은 왼쪽으로 가야 합니다.
왼쪽으로는 왼골,산태골.절터골 ..등 네곳의 골짜기가 있고 이골짜기들이 합쳐져 빗점골이 되고 또 그아래 여러개의 골짜기가 합쳐져 의신골이되고 화개천이 됩니다.
길은 이현상의 최후 격전지와 아지터로 연결이 되고 있읍니다.
이곳이 이현상 남부군 총사령관의 최후 격전지입니다.
숱하게 그에관해서 글과 말을 접해왔으므로 최후를 맞은 자리를 찿아보니 마음한가운데에 민족의 아픈상처가 울컥쏟아져 나옵니다.
머리숙여 그의 죽음에 묵념을 표하고 이념으로 인한 전쟁이나 아픔은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내친김에 아지터도 찿아보고 산행을 할 요령으로 아지터로 올라갑니다.
절터골로 하산을 할때 찿아볼수도 있읍니다만 미리 봐두지 않으면 마음이 조급해질것 같아 쭉뻗은 산죽밭을 올라 갑니다.
빨치산의 아지터가 이 한곳 뿐이었을까마는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였을것이라는 추측으로 만들었을 것같은 느낌을 주는듯 아지터는 아무런 흔적을 찿을수가 없읍니다.
다만 바위뒤로 몸을 감추거나 비트를 파거나 지형조건이 토벌대를 감시하거나 신호를 보내기가 용이 할것같아 보일 뿐입니다.
다시 내려와서 빗점골마지막상단이자 이현상사령관 최후격전지앞인 이곳을 따라 올라가면
산태골과 왼골의 합수점이 나오며 보이는 이곳은 산태골이고 왼쪽으로 계속가면 토끼봉으로 연결이되는 왼골입니다.
오늘 산행지는 산태골입니다.
처음부터 계곡타기로 시작합니다.
계곡타기에 지치면 계곡왼쪽으로 연결된 산길도 따라걷기 하고요..
산길은 썩 좋은편이 못됩니다.차라리 계곡타기를 하는것이 마음이 편할지...
산길은 계곡을 끼고 왼쪽으로 쭉--연결이되다가 중간에서 계곡을 건너면서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지만 다시 왼쪽으로 산길이 연결됩니다.
간혹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이있으나 오른쪽 물줄기의 길은 명선봉으로 바로 이어지는길이고 왼쪽물줄기의 길은 명선봉아래 주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산행기에서 읽은 기억이 있어서 왼쪽물줄기의 길을 따라 걷읍니다.
잠시 휴식을 취해봅니다만 움직이면 덥고 쉬고 있으면 금방추워져서 오랬동안 휴식을 취할수가 없읍니다.
뒤에 가느다란 검은 호스는 고로쇠물을 옮기는호스입니다.
지리산은 이제 본격적으로 고로쇠물이 생산되는 싯점이어서 산길중간중간에 고로쇠물 채취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고 가장윗자리에 가득히 담긴 물봉지하나를 감사한 맘으로 제물통에 담았읍니다.
첯물이라 그런지 물이 무척이나 달고 맛잇읍니다.
이곳이 산태골 물줄기가 끝나는 지점입니다.
이 산죽밭을 시작으로 이제부터 급경사가 시작됩니다.
대충 등로의 경사각도는 6-70도정도 되는길이 하염없이 이어지고 갈수록 길은 이어졌다가 끊어지고를 되풀이하고 있읍니다.
길은 덤불과 더불어 산죽밭사이로 ..그리고 수직바위사이로 ...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이번한주 술에 찌든몸이 온전할리 있겠읍니까..?호흡은 가쁘고 종아리의 근육은 땡기고 앞의 무엇이라도 잡아야 올라설수 있는 급경사는 하염없이 계속되고... 나뭇가지는 베낭을 잡고 놓아주지않고 메마른 나뭇잎과 부러진 조그만 가지는 뒷덜미로 들어와 가슴.배.등줄기를 간질고..
그렇게 그렇게 위로 위로 향하며 올라갑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잔설의 양이 많아 이젠 미끄러움과도 한판을 해야합니다.
오르다 돌아보니 백운산과 황장산도 보입니다.
앞의 무엇이라고 잡아야 오르지 그렇지않으면 기어야 하는 급경사는 게속되고 오늘 김해섭님과 저는 머라카락 무척 많이 빠졌읍니다.
이제 거의 다올랐나봅니다 오른쪽으로 지리산 주능선이 보입니다.
멀리 중봉 천왕봉 연화봉 촛대봉..
급경사와의 1시간 30분 벌인 사투끝에 오른 주능선.
이제부터는 고속도로입니다.
붉은 시그널이 있는지점아래로 산태골이 연결됩니다.
명선봉에 도착하여 기념으로 ...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
몇몇산꾼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읍니다.
오늘 산행하면서 첨으로 사람을 만났읍니다.
점심메뉴는 삼겹살에 복분자술입니다.
아침을 일찍먹고 에너지를 많이 소진한 탓으로 배가 몹시 고파서 술과 고기가 금방 없어지지요.
물론 배가 고픈이유도 있겠지만 산에서 먹는 음식의 맛은 말로 표현 할수가 없읍니다.
식사후 대피소를 떠나면서..
이젠 하산로를 찿아야 하는데..길은 연하천 대피소에서 불과몇미터만가면 ..이런지점을지나서..
오른쪽 철망이 끝나는지점에 이렇게.."등산로 아님" 팻말아래로..
붉은 시그널이 붙어 있네요..
등로의 상태는 산태골로 올라오던 상태와 비슷합니다.
경사는 덜심하지만 덤불이 길을 막고 있어 머리를 들고는 내려 갈수가 없읍니다.
해발1250지점쯤에서 부터 계곡은 시작되고 물소리는 바위밑으로 해서 제법 기운차게 흐릅니다.
바위아래에 얼어붙은 얼음사이로 물줄기는 기운차게 흐르면서 대세는 이제부터 봄이다라고 외칩니다,
하기사 지난번 동해에서 근무하면서 잠시 시간을 내어 여행겸 오른 경주 골굴사뒷편 함월산에는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렸고 제주도에는 매화꽃소식이 전해지고있는걸보니 눈덮힌 이곳 지리산에도 얼마있지않아서 각종 꽃축제가 열리겠지요.
길은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시그널이 넉넉히 붙어있는 관계로 길을 잃어 버릴염려는 없읍니다.
특히 마산창원의 천봉산악회 시그널이 많이 붙어 있읍니다.
길은 계곡오른쪽으로 있읍니다만 우리는 길보다는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것이 나을것같아 그렇게 했읍니다.
그렇게 내려오던길은 다시 이현상 아지터로 돌아와서
절터골로 내려 왔읍니다.
절터골은 옛날에 절이 있었고 그 터가 있던곳이다하여 절터골로 부른다합니다.
이름도 참 잘짖네요..부서진 오토바이가 있었다하여 오토바이능선이라고 부르는곳도 있고..
이 파란 물통이 요즘한창 물오른 고로쇠수액을 뽑아 물호스로 이동되어 모이는 곳입니다.
삼정마을에는 염소를 많이 키운다합니다.
주말에는 염소를 잡아 보신하기위한 식도락가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한다하고 ..예약을 하지않으면 자리가 없다하기도 하고 ...
우리는 다시 이자리오면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 했읍니다.
돌아오는길에 또 졸음이 쏟아져서 길옆에 차를 세워 두고 늘어지게 한숨자고 나니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사천휴게소에 오니 빗방울이 제법 거칠게 내리고 있읍니다.역사의 아픈상처를 돌아보고나니 마음속의 아픔을 달레주는듯 비는 그렇게 내리고 있읍니다.이비가 내린이후는 봄을 제촉하는 발걸음이 빨라지겠지요..?
지리산을 포함 국립공원은 이젠 한동안 오지못합니다.
산불조심기간이 끝날려면 두달반을 기다려야 하고 그동안은 봄이 시작되는곳을 찿아 떠나볼랍니다.
이현상에 관한것을 별도로 발췌해서 한번 담아봤읍니다.참고하시길...
산을 찿는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항상 즐겁고 안전한 산행되시길 바랍니다.
06년2월26일 뽓 때
이현상은 어떻게 죽었나..그 미스터리.. "지리산의 빗점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남부군"이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을만한 빨치산의 행적이 가장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곳이 바로 빗점골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했던 곳이기에 이곳 빗점골이 갖는 한국 현대사의 의미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빗점골은 52년 초여름 즈음 빨치산들은 이곳에서 남로당 간부(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등이 참가)와 각 지구 유격대 사령관들이 회의를 열고, 이른바 5. 25결정(각도당을 해산하고 지구당으로 개편할 것에 관한 결정)을 토의한 곳이며, 53년 9월 6일에는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의 주재하에 지구당을 해체할 것을 결정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 회의에서 이현상은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수 없다. 빗점골은 그 자신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곳이기도 한데, 그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곳은 빗점골의 너덜지대로 알려지고 있다. 이 너덜지대는 "합수내 흐른바위"라고도 하는데 지리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인 빗점골이 다시 절터골과 산태골을 빚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이현상--고독한 공화국 영웅 이현상-- 1906 충남 군산군 군북면에서 남 지리산 누비던 빨치산 대장 <남부군>이후 최근들어 이현상의 실체에 대한 접근 노력이 부분적으로나마 있어 왔고 또 약간의 성과를 보았다. 그러나 이 또한 객관적 자료의 턱없는 부족으로 말미암아 곳곳에서 '이설'들이 등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현상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토벌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58년 사망)이 남긴 기록은 이렇다. "18일 오전 11시경 잠복중이던 돌격조 중 한조가 갈미봉 방면으로부터 3명 이상의 적이 개인거리 10m 간격을 두고 남하하는 것을 발견하고 약 15m까지 근접하였을 때 일제사격을 했다. 적이 당황해 침입로쪽으로 도주하려 할 때 대원중 이현상의 얼굴을 아는자가 '이현상이 도주한다'고 고함쳤으며 이에 전대원이 아연긴장, 맹추격하여 11시 5분부터 약3분간 교전 끝에 이현상은 사살되고 잔병은 분산도주했다." 당시 <제5지구 로동신문>주필로 이현상과 지리산에서 줄곧 같이 생활한 송영회(81, 일명 송시백, 현재 경기도 수원시 거주)씨는 이현상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회고한다. "지리산 비트에서의 이현상과의 마지막 만남은 9월 18일 오전에 있었다. 그는 '지난밤 잠자리가 뒤숭숭했다'며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난 지하로 들어가네, 진주로 가겠네'하였다. 나는 '어떻게든 내가 일본으로 빠져나가 자네를 돕겠네'라고 말했다. 헤어져야 할시간이 됐다. 나는 내가 아끼던 포킷용 <소련공산당사>와 일어판 노어사전을 그에게 전해줬다. 그는 내게 자신이 항상 즐기던 마도로스 파이프를 쥐어주었다. 그리곤 그가 말했다. '또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싱거운 소리하네'라고 대꾸했지만 '이 사람 마음이 약해진 게로구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날 이현상은 동료들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쪽으로 내려갔다. 송씨는 산을 타고 넘어 뱀사골쪽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송씨는 '이현상이 사살됐다'는 삐라가 비행기에서 뿌려지는 것을 받아보았다. 이현상의 죽음에 대해 토벌대의 발표는 조작된 것이며 '사살'이 아니라 '자살'이었을지도 모근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기는 하나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많나 근거는 아직 없다. 이현상은 사망 당시 줄이 선 미제 사지옷에 깨끗한 군용 농구화를 신고 있었는데 주머니에는 염주가 들어 있었다. 그의 수첩엔 한시 몇수가 적혀 있었다. "지리산의 평정없이 남한의 편정없고, 이현상을 잡지 않고는 지리산이 평정될 수 없다"며 이현상을 생포하도록 지시했고 그를 보고 싶어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죽은 이현상을 보려하지 않았다. 이현상과 동향인 임영신, 유진산씨 등이 그가 숨졌음을 확인했다. 그의 유품은 창경원에 전시되었다. 이현상의 죽음을 놓고 군과 경찰사이에 낯뜨거운 공훈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내무부장관, 치안국장, 서남지구 전투사령관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현상에 얽힌 설화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구전되고 있다. 이현상은 축지법을 쓴다느니, 몇길 담장을 훌쩍훌쩍 뛰어넘는 다느니 하는 소문이 지리산 언저리에서는 짜하게 퍼져 있었다. 실제로 그는 토벌대를 농락하듯 신출귀몰했다. 앞서 언급한 송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번은 벼랑 끝에 천막을 치고 이현상을 포함해 3-4명이 같이 자는데 새벽녘에 갑자기 총소리가 났어요. 순간 드러누운 채 벼랑으로 굴렀습니다. 한참 뒤 정신을 차리고 올라가 보니 이현상이 혼자있더군요,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더니 '뭔가 기분이 찜찜하고 소변도 보고 싶어 나와보니 권총을 빼 신호사격을 해서 적을 쫓았다'고 하더군요.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행동이 민첩한 데다 산중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위험을 간파하는 뛰어난 촉각이 온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어요, 같이 밥을 먹다 갑자기 자리를 옮기자며 뛰길래 멋보르고 쫓아가서 화를 면한 적도 두어번 있습니다." 그는 또 포로를 살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토벌대 사이에는 "남부군에 잡히면 안 죽는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그는 포로에게 각서를 쓰게 한 뒤 총만 빼앗고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벌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은 "이현상이 고도의 심리전을 펴는 것인지, 아니면 철학이 그런 것인지 궁금하다."는 말을 되뇌이곤 했다고 한다. 그는 적군 사병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다기보다는 '같은 피해자'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조그맣고 뚱뚱한 몸집에 팔자 콧수염을 기른, 온후한 중년신사 타입의 이현상은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한편으론 깊은 정이 있었다. 남부군이었던 김웅씨는 이런 기억을 털어놓았다. "어느날 행군에 지쳐 짐을 간신히 지고 가는데 웬 중년남자가 '짐을 달라'더니 대신져 주었다. 얼마쯤 그러고 가는데 뒤에서 청년들이 달려와 '선생님, 이게 무신 일이십니까' 하며 짐을 내려놓는 거였다. 알고 보니 그가 이현상이었다." 이현상은 1906년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에서 3백석쯤하는 부농 이면배의 4남 2녀 중 다섯째(아들로는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씨가 일제 때 면장을 지냈는데 생존시 면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 비가 지금도 금산-대전간 도로변에 서 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맏형과 둘쩨형도 면장일을 보았고, 셋째형은 6.25 뒤 행방불명되었다. 어머니 원주 김씨는 "우리 현상이 죽지 않았다."며 아들을 기다리다 지난 75년 90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고, 인근으로 출가한 누이들도 모두 세상을 떴다. 조카들만이 서울과 전주 등지에서 살고 있다. 이현상은 부인 경주 최씨와의 사이에 딸 무영과 아들 극 남매를 두었는데, 이들의 행방이 알려지지 않다가 얼마 전 북한에서 발행한 잡지에 이현상 관련기사가 실린 가운데 아들 극의 입당보증을 김정일이 서주었다는 내용이 나온 것으로 보아 아들은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인 최씨도 북한에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현상의 호적에 34년생으로 둘째딸로 올라 있는 문영씨는 그의 소생이 아니라 갈 곳 없어 데려다 기른 의붓딸이다. 실제 나이가 73살인 의붓딸은 이현상의 고향마들에 지금도 살고 있다. 이 할머니는 '그분이 오갈 데 없는 나를 거두어 주었다'"고 말하곤 한다. 지리산에서 이현상의 시중을 들어주었다는, 당시 20대 초반이었고 가냘프고 작은 몸매의 '하 여인'은 53년 여름께 산에서 내려와 수용소를 갇혔다가 얼마 안 있어 풀려났다고 한다. '하 여인'은 바로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 아들이 이현상의 자식이며 현재 부산지역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하 여인'과 이 아들은 자신들과 이현상과의 관계를 극구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하 여인'은 89년초 그동안 청주보안감호소에 줄곧 수감돼 있다가 76세의 나이로 병사한 이현상 부대의 정치위원 김삼홍의 장례식에 조용히 모습을 나타냈었다. 이현상의 고향마을 외부리엔 그의 생가와 살림집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마을에 눌러앉아 사는 그의 일가는 이제 거의 없고, 그에 관한 기억도 아슴푸레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이현상은 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창고보에 다니다 중도에 그만두고 서울 중앙고보로 옮겼다. 중앙고보 재학때인 1925년 박헌영등의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6년 6·10만세사건 당시 유인물을 배포하다 출판법위반 협의로 경성지방 법원 검사국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27년 보성전문 법과에 들어간 그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산하의 학생부의원회,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야체이카회, 독서회 등에서 상무위원·상무집행위원·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하면서 반일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일제의 대대적인 공산당 검거에 걸려 1928년 구속됐다. 이것이 세칭 'ㄱ당학생사건'이었다. 당시의 일본경찰 신문조서를 보면, 이현상은 1927년 4월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한인청년회에 입회하여 '사회주의 선전에 전력'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피의자 소행조서'에서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 하다고 기재돼 있고 "극력한 사회주의자로서 개전의 가능성은 없음"이라고 적혀있다. 또 신문조사에 따르면 이때 그는 서울 익전동에서 처와 1남 1녀와 함께 하인 한사람을 두고 생활하고 있었는데 생활비와 학비는 형이 대주고 있었다. 이현상은 치안유지법·보안법·출판법 등 위반혐의로 기소되었는데 ML당사건까지 겹쳐 징역4년을 살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박헌영·김삼룡 등과 함께 지하활동을 하면서 당 재건을 위해 경성콤그룹을 결성했다. 그는 이 시기에 집에서 돈을 끌어다 공산주의 운동 자금으로 썼다. 2차대전 말기 일제의 발악이 심해지고 동료 공산주의자들의 투옥·전향이 속출하자 이현상은 한때 지리산으로 숨어들기도 했다. 일제하에서 그가 감옥에서 생활한 기간은 12년여였다. 해방이 되자 이현상은 박헌영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고 이후 남로당으로 개편되고 나서는 연락부장을 맡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해나갔다. 이 무렵 이현상의 처는 서울에서 자식 둘을 데리고 하숙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남한에서 공산당의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박헌영·이승엽등과 함께 평양으로 간 이현상은 그곳에서 머물다 48년 당의 결정에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5년 동안의 빨치산 투쟁이 시작된다. 지리산속에서 6·25를 맞은 이현상은 낙동강 전선으로 옮겨가 후방 교란작전을 폈다. 50년 9월말 인민군이 패퇴하자 이현상 부대 역시 북상해 후퇴길에 올랐다. 그해 11월 강원도까지 올라갔던 그와 그의 부대는 다시 남하하라는 명령에 따라 혹한을 헤치고 단양 인근 소백산 지역으로 내려온다. 연합군에 기습작전을 펴며 속리산-민주지산을 거쳐 51년 5월 덕유산에 이르게 된다. 이해 7월 이곳에서 이현상의 주재하에 처음으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의 '남한 6도 도당위원장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이현상은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수가 된다. 각 도당 유격대는 남부군 사령부의 지휘하에 들게 된다. 이때부터 남부군은 전황의 변화에 따라 지대편성→지구당체제로의 개편→지구당 해체의 과정을 밟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현상이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는 반면, 한편으로는 남부군 내부의 노선싸움 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말기에 들어서는 이현상이 반대파에 의해 평당원으로 강등되기까지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설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아 그 사실여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현상은 53년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더 이상의 빨치산 활동이 무의미하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자 새로이 지하조직운동을 모색하려던 과정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현상이 더 이상 '전설속의 영웅'이 아니라 '역사속의 인물'로서 제자리를 찾게 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의 잣대에 당연히 그의 사상적 배경이 가미돼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흩어져 있는 '사실'들을 꿰어 맞추는 작업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라야 분단과 전쟁이라는 우리 시대의 비극적 상황속에서의 그의 역할이 정확히 가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회색 인조털을 입힌 반코트를 입고 눈보라치는 산마루에 서서 저편 언덕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상의 어딘가 우수에 잠깃 듯하던 옆모습‥…"에서 이제 그 우수는 무엇이었는가를 역사가 밝혀야 할 때이다.
빗점골이라는 숨은 골짜기가 있다.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아마도 가장 깊고깊은 곳에 숨어있는 계곡으로 짐작된다. 그 빗점골은 또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절터골과 산태골, 온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더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 놓고 있다.
1925 중앙고보 재학중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
1927 보성전문 법학과에 들어감
해방후 박헌영등과 조선공산당 재건, 남로당 연락부장을 맡음
1948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시작
1951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수가 됨
1953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사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외로운 방랑자' '고독한 공화국 영웅'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당시를 몸소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남부군>이란 수기를 펴내 일반의 관심을 끌어모았던 이태(본명 이우태)씨가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술회하는 말들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이현상만큼이나 '전설'속에 가리워 있고 개인의 역정이 대중에 전달되고 있지 않은 인물도 드물 듯싶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중의 '궁금증'도 그만큼 드세다 할 수 있다. 이현상의 족적이 뚜렷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상식적이지만, 지리산 첩첩산중에서 그의 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활동을 펼쳤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그가 추구하였던 이데올로기는 이사회에서 '금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몇 안되는 살아남은 그의 측근들초자 이사회의 전면에 나서려 하지 않은 체 너나없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현상은 이렇게 묻혀온 존재이다. 그에겐 인물사진 한 장도 변변히 남아 있지 않다.
첫댓글 뽓때님 날씨 따뜻해지고 경방 풀리면 명선봉 정상에서 별보면서 한잔하시죠..
좋읍니다.그런날을 기다리도록 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