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신라왕조는 김씨로 창씨개명한 모용선비(선비족50%=흉노)
이 나라에는 자신의 민족사도 제대로 모르는 박사들과 정치인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문제투성이의 나라다. 정치와 교육과 종교에 종사하려거든 역사학은 기본이다. 그리고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박사학위 받아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박사학위 자랑말아라! 1세기 초원의 주인은 흉노족이 아니라 선비족이다! 선비족은 흉노족을 격퇴하면서 10여만 가구의 흉노족을 흡수하였으며, 선비족으로 유입된 흉노족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경주지역까지 유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주지역의 신라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선비족이다. 4세기 모용선비족의 나라 연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여 북부전선에서 고무 장군에게 대패한 모용선비족의 기마군이 동해안을 따라 경주지역으로 들어 와 사로국을 무너 뜨리고 모씨왕조를 세우니 신라이고, 법흥왕부터 김씨로 창씨개명하니 신라의 김씨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한 근거를 구체적으로추적한 장상식張漢植 KBS기자의 주장으로써 대신한다. [자료]한 記者의 근거있는 대담한 역사추리 서기 342년 겨울, 「半흉노」의 일파인 鮮卑族 모용황은 5만 5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험준한 길인 南路에 4만을, 평탄한 길인 北路엔 1만5천을 투입했다. 거꾸로 고구려는 수비병력의 전부를 北路방어에 쏟았다. 결국 고구려는 대패했고 반면 北路로 침공했던 선비족 기마군단 1만 5천은 고구려군에 의해 모두 죽은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그때 그들 가운데 일부가 고구려軍에 쫒겨 들어간 곳이 지금의 新羅였다고 추정한다 신라계와 가야계, 크게 두 줄기로 대별되는 한국 金씨의 뿌리가 흉노족의 피가 이어진 기마민족, 「선비족 모용씨(鮮卑族 慕容氏)」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풀빛출판사)」를 쓴 KBS 장한식 기자는 신라 김씨 왕족과 가야 김씨 왕실이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모용씨 군대 가운데 낙오한 무리의 후예라는 가설을 펼치고 있다. 기존의 역사 지식으로는 선뜻 수긍하기 힘들지만 문헌에 근거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한국인 가운데 20%나 차지한다는 金씨의 뿌리를 탐색한다는 의미에서 「金씨의 기원은 흉노족의 후예 모용 선비」라는 그의 가설을 소개한다. 경주와 말의 문화 /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장상식 KBS기자) 慶州(경주)에서는 최근 몇년째 「말(馬) 싸움」이 심각하다. 보문관광단지 인근에 약 29만 평 규모의 경마장을 건설하겠다는 경주시의 방침에 대해 전국의 문화계 인사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市(시) 당국과 대다수 시민들은 수백억원은 족히 될 馬券稅(마권세) 수입에다 관광객도 연간 1백만명 정도 늘어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적극 추진하자는 입장이다. 반면 문화계 인사들은 천년 古都(고도) 경주가 말이 뛰노는 투기장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며 결사반대다. 게다가 경마장 부지로 지정된 지역에서 白炭(백탄) 숯가마 10여 기가 확인되고, 토기 工房(공방)이 발굴되고 있는 등 보호가치가 높은 역사유적지란 점을 들어 경마장 건설은 안된다고 버티고 있다. 문화유적 보존과 경건한 역사·문화도시의 명성 유지를 위해 경마장 설치를 반대하는 논리에 필자 역시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경주와 말(馬)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만큼은 再(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경주는 한동안 騎馬文化(기마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이기 때문이다. 4세기 중반의 어느 날, 말을 탄 一團(일단)의 무사들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경주 땅에 밀려 들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었지만 그들은 우세한 武力(무력)으로 경주 땅을 정복하고는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리고는 한 동안 馬上(마상)에서 권력을 휘두르다 기마족의 문화를 짙게 남겨둔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匈奴(흉노)의 피를 이어받은 「鮮卑族 慕容氏(선비족 모용씨)」, 훗날 金(김)으로 성을 바꾸는 신라 왕족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4세기께 신라 땅 경주에는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 출현하고 있다. 바닥에 냇돌을 깔아 목관을 안치하고 그 주위에 통나무로 상자모양의 목곽, 즉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바깥에는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적석목곽분은 경주 시내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황남동의 大陵園(대릉원)이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왔으면 틀림없이 이 곳을 둘러 보았을 것이다. 작은 동산을 연상케 하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 23기의 고분들로 공원이 조성돼 있다. 적석목곽분에 앞서 조성된 고분은 「낙랑형 토광목곽묘」다. 많은 학자들은 두 묘제 사이에는 계승 관계가 없다고 보고 있다. 즉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사람과 토광목곽묘를 만든 사람들의 뿌리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경주 땅에서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세력은 4세기 중반 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金씨 왕족이란 것이 정설이다. 이 적석목곽분이 匈奴族(흉노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조성했던 무덤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이를 만든 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임을 알게 해 주었다. 무덤 형식만 바뀐 것이 아니라 적석목곽분에서 나온 출토물도 과거와 크게 달라진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가히 「騎馬文化의 타임캡슐」이라 할 만하다.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의 기마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각종 제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금관과 장신구, 금으로 만든 허리띠, 띠 고리(버클), 각배(뿔잔), 보검, 유리제품 등은 스키타이族과 흉노族 등의 기마민족들이 즐겨 사용한 것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품들로 밝혀졌다. 게다가 말을 순장한 무덤을 비롯해 안장과 등자(발걸이), 배가리개 등 호화롭게 장식한 각종 馬具類(마구류)가 다수 발굴되고 있어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金씨왕 세력이 기마족임을 거듭 확인시켜주고 있다. 4세기께 「말을 탄 사람들」이 신라 땅으로 들어와서 살았고 죽음에 이르러 아끼던 말을 순장하고 무덤 안에 마구류를 부장했다는 애기다. 이같은 적석목곽분과 그 속에서 나온 각종 출토물들을 종합해 볼 때 신라 金씨왕은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에서 이동해온 기마族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정설이라 할 정도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신라의 북쪽 고구려,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匈奴風(흉노풍)의 유적과 유물이 어찌하여 한반도의 동남단 신라(그리고 가야)에서만 나타나고 있는지는 한국 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필자는 이에 대해 서기 342년 고구려를 침공한 기마민족 「慕容 鮮卑(모용 선비)」 군대의 일부가 신라로 들어가 왕권을 찬탈했고,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또 하나의 무리가 가야(나아가 왜국)까지 진출했다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다. 鮮卑族은 원래 東胡(동호:내몽골-만주 일대에 살던 옛 민족)의 일파로서 흉노족의 지배를 받은 민족이다. 기원 전 200년께, 좀 어리숙했던 東胡族의 임금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흉노에 싸움을 걸었다가 冒頓 單于(묵특 선우:묵특은 이름이고 선우는 왕을 뜻하는 흉노족 단어)가 거느린 흉노군에게 멸망당했다. 참고로 묵특은 왕위계승 분쟁으로 그 아비를 살해하고 선우 位(위)에 오른 뒤 30만명의 騎馬 弓兵(궁병)을 이끌고 아시아의 대초원지대를 석권한 인물이다. 漢(한)나라 창건자 劉邦(유방)도 묵특에게 도전했다가 패해 죽음의 위기를 맞자 한나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매년 막대한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빌어 겨우 목숨을 건질 정도였다. 이런 묵특을 얕잡아 보고 싸움을 벌인 결과 「동호」는 망하고 그 무리는 크게 세 갈래로 흩어진다. 한 무리는 흉노로 흡수되고 하나는 烏桓(오환), 나머지는 鮮卑로 통합된다. 묵특의 흉노軍에 박살이 난 鮮卑족은 약 3백년이 지나서야 흉노에 앙갚음을 하게 된다.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이 後漢書에 나온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원래 선비족의 인구는 40만명 정도였는데 이때 2배 이상 커지게 된다. 필자는 선비족 가운데 절반 이상이 본래 흉노족이었다는 이 대목을 중시한다. 선비족의 인종적 특징이나 문화가 흉노의 그것과 깊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대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글의 제목에서 「한국 金씨의 혈관에는 흉노의 피가 흐른다」고 한 것도 흉노족이 기마민족의 대표격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다 鮮卑族의 절반 이상이 애초 흉노족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金씨의 선조가 한나라 武帝가 藿去炳(곽거병)을 보내 흉노를 토벌했을 때 붙잡힌 흉노의 王子(왕자) 金日(김일제)라는 가설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어 흥미롭다. 김일제는 漢무제의 말치기로 생활하다 성실성을 인정받아 끝내는 무제의 총애를 받는 귀족이 되었고, 金씨 성과 侯(투후:지금의 중국 하남성 일대인 「투」지방을 다스리는 제후 벼슬)라는 작호를 하사 받은 인물이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번창해 한나라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왕망이 新(신)나라를 세우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이유로 멸문의 지경에 이르자 한반도로 도망쳐 나왔다는 것이 「김씨 선조는 김일제」설을 펼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신라 문무왕의 비석에 「□侯 祭天之胤傳七葉(□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기록이 나왔는데 이들은 「侯(투후)」 즉 김일제가 문무왕의 옛 조상이었음을 기록한 증거라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에 의견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한국의 최대 성씨 金씨의 기원을 찾아보려는 진지한 노력을 평가하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金씨의 기원을 나와 마찬가지로 흉노족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金씨 선조는 흉노족의 피가 절반 이상 섞인 선비족 모용씨」라는 필자의 가설과 「김씨 시조는 흉노 왕자 김일제」라는 주장은 시대 상황과 경로 설정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한국 金씨의 뿌리를 흉노족에서 찾아보자고 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半匈奴(반흉노)」라 할 수 있는 선비족 가운데 한 일파가 「慕容부족」이다. 모용 부족의 명칭은 서기 150년경에 활동했던 「慕容」이란 추장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은 추장의 성씨나 이름을 部族名으로 하는 관습이 있었다. 선비족 내부에는 拓跋部(탁발부)와 宇文部(우문부) 등 여러 부족이 존재했지만 「모용」의 5대손쯤 되는 涉歸(섭귀)가 추장이 되었을 즈음 모용부가 汎(범)선비족 가운데 최강의 부족으로 떠오른다. 섭귀는 「선비 單于(선우)」에 올랐다. 선우는 최고지도자를 뜻하는 흉노의 단어. 여기서 모용부가 원래 흉노족에서 선비족으로 귀속됐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흉노의 정치체제나 풍습을 대폭 수용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섭귀의 아들 慕容(모용외)가 추장이 되면서부터 모용부는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고 韓(한)민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모용외는 서기 285년 부여를 침공해 부여왕 依慮(의려)를 자살하게 만들고 부여 백성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또 제집 안방 드나들 듯 고구려를 침공하니 고구려 봉상왕이 『모용씨는 兵馬가 精强(정강)해 걸핏하면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탄식할 정도였다 (삼국사기). 모용외를 뒤이은 아들 慕容(모용황)은 337년 자신의 영역이 춘추전국시대 燕(연)나라와 겹친다는 점에서 제멋대로 국호를 燕(연)이라 정하고는 왕위에 오르니 바로 「5호16국 시대」 모용씨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慕容의 고구려 침공과 모용씨의 신라 진출 모용황은 꿈이 컸던 인물이다. 요서와 요동지방을 삽시간에 아우르고는 中原(중원)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용황이 중원 공략에 나서려 하자 동방의 고구려가 눈엣가시로 다가왔다. 고구려를 그대로 두고 대륙 깊숙이 진출했다가는 등 뒤에서 칼을 받을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다. 훗날 後金(후금)이 中原을 석권하기에 앞서 조선을 침략(정묘호란, 병자호란)한 것과 같은 이치에서 모용황은 고구려를 정복해 굴복시키고자 했다. 342년 겨울, 드넓은 만주 벌판이 두터운 눈으로 뒤덮였을 즈음 모용황은 5만5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기마족이었던만큼 대부분이 騎兵(기병)이었을 것이다. 당시 모용황의 군대가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침공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南路(남로)와 北路(북로)가 있었다. 남로는 험준하고 좁은 산악지대였던 반면 北路는 평탄한 개활지였다. 따라서 주력부대가 평탄한 北路를 택하고 험준한 南路에는 조력부대가 진출하는 것이 병법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모용황은 이같은 병법의 상식을 거부하는 전략을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모용황의 서자 형 慕容翰(모용한)이 「고구려는 분명 우리 대군이 北路로 쳐들어올 줄 알고 북쪽만을 엄중히 막고 남로를 소홀히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대군을 南路에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고 주장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모용한의 작전은 제2차 포에니전쟁 때인 기원 전 218년경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기습공격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전략을 떠올리게 한다. 모용황은 형 모용한과 동생 慕容覇(모용패)를 선봉장으로 삼아 자신이 4만 대군을 이끌고 험준한 南路로 침공하고 北路에는 1만5천 병력을 보냈다. 이 작전은 그대로 고구려의 허를 찔렀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아우 高武(고무)왕자에게 5만 병력을 맡겨 北路를 방어하게 하고, 혹시나 싶어 예비대 1만명으로 하여금 南路를 지키게 했던 것이다. 4만의 기병군단을 1만명으로 막기에는 역부족, 전투는 삽시간에 끝나고 모용황의 大軍은 환도성으로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형세가 다급해진 고국원왕은 단웅곡이란 깊은 산골짜기로 달아났고 고구려 백성 5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모용황은 고구려 수도 환도성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본국 사정이 궁금해진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항복을 받지 못한 채 철수 길에 올랐다. 모용황은 고구려가 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왕비와 왕대비를 볼모로 잡아갔고 왕의 부친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屍身(시신)까지 꺼내가는 파렴치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모용황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쑥대밭이 되자 고구려는 어쩔 도리 없이 연나라에 머리를 숙여야 했고 모용황은 이때부터 고구려의 배후공격 위험에서 벗어나 中原도모에 주력할 수 있었다. 모용황의 주력군이 고구려에 대승을 거뒀지만 北路로 간 1만5천명의 운명은 정반대였다. 삼국사기는 「왕우(북로 침공군 대장) 등은 북쪽 길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모두 죽었다(會王寓等戰於北道, 皆敗沒)」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의 기록을 다소 축략해 전재한 것이다. 자치통감은 물론 모용황측이 전한 기록을 담았을 것이다. 「(고구려 군에게)패하여 모두 죽었다」는 말은 북로로 진군한 1만5천명이 아무도 본진으로 귀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만5천의 병력으로 5만 대군을 맞아 싸웠으니 전투에서 패했을 것은 분명한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으니 자세한 내용은 담지 못하고 「모두가 죽었다(皆敗沒)」고 간주해 이런 짧은 기록만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燕나라로 귀환한 모용황의 병사가 없다고 해서 北路로 진군한 1만5천명 모두가 전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1만5천명의 별동대는 자신들이 버림받은 처지임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고구려 주력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전선에 투입되고 있다. 5만명의 고구려 군대와 맞서 싸우면 질 것이 뻔하다. 모용황은 우리가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에서 북쪽 길로 보낸 것이다』 임금에게서 버림받은 데 대한 울분과 질 것이 뻔하다는 불안감을 갖고 출전한 1만5천명. 이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 리가 있을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구려군과의 전투에서 패하자마자 살기 위한 목적에서 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부터 방향을 정하고 달아났다기보다는 대오를 갖추기 힘든 상태에서 고구려 軍의 추격을 받다보니 고구려 지경을 벗어나 신라 땅으로까지 밀렸을 개연성을 상정해본다. 고구려와 신라를 잇는 동해안 루트는 예부터 열려 있었다. 4세기 중반 이후 기마族의 신라 진출 흔적이 뚜렷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1만5천명 가운데 적어도 수천명의 군단이 신라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내물왕 26년, 즉 서기 381년 신라는 북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前秦(전진)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符堅(부견)과 신라 사신 衛頭(위두)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海東(해동: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대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符堅問 衛頭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變革 名號改易, 今焉得同)> 이 기록에 대해 지금까지는 신라가 내물왕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풀이해 왔지만 시대변혁·명호개역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넘어선다. 이전까지의 昔(석)씨 임금 시대가 끝장나고 외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모든 면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음을 내포한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내물왕 이후 昔(석)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진다. 왕은 물론 왕비나, 재상, 학자, 장군 가운데서 昔씨는 찾아볼 수 없다. 신라 金씨보다 역사가 오래된 昔씨지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昔씨는 대단한 희성이다. 이는 내물왕 집권기에 昔씨가 철저히 제거됐음을 암시한다. 昔씨가 사라지는 것과 위두가 밝힌 시대변혁이라는 문구를 통해 이 시기에 강력한 군사력에다 선진적 국가체계를 경험한 새로운 세력이 신라 땅을 정복했음을 거듭 시사받을 수 있다. 사실 4세기경 고구려 땅을 뚫고 신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마족은 선비족 모용씨 외는 달리 거론하기 힘들다. 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