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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기술>전 전시 소개 및 작가/작품 설명 창조적인 예술은 작가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감상자가 작품의 내적인 가치를 해석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비로소 예술은 세상과 소통 할 수 있게 된다. - 마르셀 뒤샹 동시대의 예술은 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을 알려주는 지표이다. 미술관에 들어온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은 아름다움을 감상하거나 미학적 기준을 재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을 향해 기능한다. 그러한 점에서 현대미술과 소통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미술사적 지식이 아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공감과 뜻밖의 순간에 다가오는 자기성찰이다. 소통은 가장 일상적인 주제이며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다.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소통을 위하여 사람들은 언어에 사회적 약속 의미인 랑그(Langue)를 부여하고 이러한 규칙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그러나 또한 개인은 말을 하고 글을 쓰는데 있어서 사회적 약속을 넘어 서서 자신만의 언어인 파롤(Parole)을 생성하고 상상한다. F. de Saussure, ed. Tulio de Mauro,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1974, Payot, p.419. '사과'의 사회적 의미는(랑그)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의 낙엽교목의 식물인 사과나무의 열매이지만 백설공주의 언어(파롤)에서 '사과'는 독이 든 무기이며 새어머니의 미움을 상징한다. 반면 애플Apple 마니아에게 '사과'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창조와 혁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백설공주와 애플 마니아가 사과에 관하여 이야기를 한다면 당연히 두 사람의 대화는 어긋날 것이다. 전시가 주목하는 '소통'은 파롤과 랑그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들 간의 관계와 대화의 확률이다. 예술은 색채와 음악, 환상과 은유를 통해 일상적인 소통의 한계와 그 확장을 실험한다. 1990년대 국제 미술계에 등장한 일련의 작가들은 예술과 일상, 개인과 사회의 소통에 큰 관심을 보이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들의 흐름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제시한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으로 짚어볼 수 있다. 니콜라 부리오는 1990년대 작가들의 작업의 특징을 작가 개인의 일상적인 삶과 사회의 인식의 연결고리에서 찾았다. 나와타자의 구분을 뚜렷이 하여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특징을 보였던 1980년대 미술과 달리 이들 작가들은 각각의 특징 있는 작업을 하며 다양하고 중성적인 사회적, 개인적 목소리를 냈다. Nancy Spector, The Anyspace Whatever, 2008, Solomon R. Guggenheim museum, p.16. 안젤라 블로흐Angela Bulloch,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리암 길릭Liam Gilick, 리크릿 티라바니자Rikrit Tiravanija,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Dominique Gonzalez Foester,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 카스텐 횔러Carsten Holler,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호르헤 파르도Jorge Pardo,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등 일련의 작가들은 영화제작과 출판, 전시 등의 분야에서 각자 목소리를 내면서 중첩되는 부분을 함께하고 있다. 1. 안리 살라(Anri Sala, 1974- ) 안리 살라(Anri Sala, 1974- )는 알바니아Albania 출신의 미디어 작가로 베를린과 파리를 베이스로 작업하는 작가이다. 유럽의 가장 폐쇄적인 국가였던 알바니아 출신으로 초기의 그의 관심은 폐쇄적인 사회에서의 소통과 개인의 관계에 있었다. <Dammi i colori>(2003)는 작가의 친구이자 예술가인 에디 라마Edi Rama가 수도 티라나Tirana의 시장이 되자 도시에 소통과 활기를 불어넣고자 시작한 프로젝트이다. 평양처럼 음울한 알바니아의 수도에서 작가가 소통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색채이다. 아무 색이 없던 무채색의 도시에 붉은색과 노란색, 푸른색의 색채가 입혀지면서 티라나의 도시풍경이 변하고, 사람들의 삶이 변하기를 기대한다. 에디 라마는 독백을 통해 정확한 목표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색채에는 소통을 위한 힘'이 있으며, '색이 칠해진 도시가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며 예술로 인해 조금 더 나아지는 삶을 기대한다. 색채로 가득 찬 활기찬 도시는 알바니아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동인이자 변화의 과정을 상징한다.
<Long Sorrow>(2005)는 작가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도시인 베를린Berlin에 대한 즉흥적인 느낌을 담은 작업이다. 이 작품에서 소통의 도구는 음악이다. 뉴욕 출신의 색소폰 연주자 자밀 몬독Jameel Mondoc의 즉흥적인 연주를 배경으로 60년대와 70년대 빌딩이 들어선 베를린의 한 구역을 천천히 움직이는 카메라로 찍어낸 이 작품에서 연주자는 언어보다 진한 음악으로 자신의 느낌을 전달한다. 연주자는 허공에 뜬 상태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음악을 연주하고 카메라는 회색빛 건물의 방과 창밖 너머 빠르게 변하는 도시 베를린의 게토의 한 구역을 담고 있다. 연주자의 찡그린 표정과 색소폰의 소리, 쓸쓸한 카메라의 시선은 다른 어떤 말보다 강력한 힘으로 베를린의 표정을 전달한다. <After Three Minutes>(2007)는 이미지와 소리가 가지고 있는 전달력과 그 차이에 한층 더 주목한 작품이다. 작가가 두드린 심벌즈는 1초에60번의 진동을 통해 귓가에 닿지만 실제로 스크린의 카메라가 담아낼 수 있는 진동은 1초에25프레임이다. 그리고 심벌즈가 놓인 전시장의 정경을 촬영하는 감시 카메라는 겨우 1초에 2번의 진동을 담아낸다. 60번의 진동이 가지고 있는 진실이 카메라를 통해 25번으로, 다시 2번의 진동으로 줄어드는 과정에서 소통은 길을 잃고 헤맨다. 2. 함양아(Yang Ah Ham, 1968- ) 함양아(Yang Ah Ham, 1968- )는 개인과 사회의 내밀하고 불편한 내러티브를 서술적인 영상과 설치로 표현하는 작가이다. 서울과 암스테르담, 이스탄불 등을 베이스로 옮겨 다니며 작업을 하는 작가는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본다. 글로, 혹은 이미지로 서술해 내려가는 담담하고 건조한 다큐멘터리 속에서 미처 소통하지 않았던 낯선 사회의 구조적 불안이 우스꽝스럽게 혹은 진지하게 드러난다. <Bird's Eye View>(2008)는 비둘기의 시선으로 서울 구 역사를 촬영한 작업이다. 작품은 감상자의 시선이 닿는 높이의 3면에 설치된다. 가득한 먼지 사이로 비둘기들이 날아다니는 어지러운 화면이 보여주는 것은, 함께 하지만 소통하지 않는 인간과 비둘기의 관계이자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이다. 한편 작가는 감상자와의 소통을 위하여 은유를 즐겨 사용한다. 특히 작가는 가상의 사회와 상황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서 익숙한 사회의 관계를 유추해 낸다. 바닷속으로 잠겨있는 길을 따라 보이지 않는 유토피아를 향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남자와 여자들을 그린<One Day Escaping>(2004), 사회의 축소판인 가상의 팩토리를 설정하여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낸 <넌센스 팩토리>(2011), <I came for 행복/항복>(2011) 등은 모두 현재를 살고 있는 감상자에게 작가가 내미는 손짓이다. 그리고 그 손짓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에는 정답이 없다. 감상자가 살고 있는 일상과, 감상자가 느끼는 감정이 작품의 의미를 결정한다. <One Day Escaping>에서 2채널로 이어져서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과 청년들, 초로의 부부, 연인들은 전설의 몽유도원을 향해 걷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비극의 종말을 향해 바다를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상의 사회인 <넌센스 팩토리>에서 통제실과 복지정책을 만드는 방, 쿠폰을 만드는 방, 예술가의 방 등 각 기능을 하는 방들이 더 나은 삶을 향해 쓰일지, 혹은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를 견고히 하는데 쓰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두운 방에서 빛나는 <I came for 행복/항복>이라는 네온사인을 보며 '행복'을 먼저 읽어낼지, 혹은 '항복'을 먼저 읽어낼지는 작품을 감상하는 감상자만이 알 수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하여 새로 제작한 작품 <영원한 황홀Perpetual Euphoria>(2011)은 이러한 수동적인 읽기에서 한발 짝 더 나아간 작품이다. 말벌들의 싸움과 서울 도시풍경을 보여주는 두 개의 커다란 스크린과 스크린들이 겹치는 부분에 조그맣게 등장하는 광고판 스크린의 3채널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여전히 작가는 은유의 기법을 사용한다. 함양아는 집단생활을 하는 말벌들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두었을 때 서로를 침으로 찔러 죽이는 현상에 주목을 하였다. 인간과 벌들은 사회적인 집단을 이루어서 살아간다. 같은 공동체 내에서 혹은 다른 공동체까지 포괄하여 이들은 영양과 정보들을 공유하고 집단의 DNA를 남기는 것을 공동 목표로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과 공유에는 한계가 있다. 좁은 공간에 갇힌 말벌들이 서로를 찔러 죽이듯이 한정된 자원과 공간을 두고 대도시에 갇힌 인간들은 경쟁하고 싸운다. 인간은 함께하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현실세계에서의 소통과 공유는 차갑고 뼈아픈 일상에 기반을 하고 있다. 3.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1964- )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1964-)는 알제리(Algeria) 출생으로 필름 메이커이자 글을 쓰는 작가이다. 필립 파레노는 연극의 무대와 같은 전시장의 설치를 통해 현실을 가공하는 예술의 힘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이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듯이 미술관과 전시장은 상상력과 현실이 교차하는 통로가 된다. <The Boy from Mars>(2003)는 치앙 마이Chiang Mai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건축가 프랑소와 로체Francois Roche가 디자인한 건물과 그 건축물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물소의 모습을 촬영한 작품이다. 공상과학 영화에 나올 법한 날개가 달린 건물 앞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물소, 그리고 데빈드라 반하트Devendra Banhart 의 음악이 어우러져 작가와 작가의 친구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건물은 현실세계에 실재하지는 건물이지만, 주거와 상업행위 등을 목적으로 하는 보통 건물의 용도와 달리 이 건물은 오로지 영화를 위해 존재하고 전력을 공급한다. 건물은 오로지 상상력과 허구를 위한 존재인 셈이다. 고화질로 촬영된 화면은 마치 움직이는 회화와 같은 효과를 준다. 존 콘스터블 John Constable(1776-1837)의 회화작품 <건초마차The Hay Wain>(1821)의 평화로운 목가풍경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화면 속에서 상상과 현실의 밤과 낮이 함께 흘러간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색 말풍선들이 천장을 가득 메우는 작품인 <Speech Bubbles>(2009)은 감상자의 상상력이 부풀어 오르는 공간으로서의 전시장을 상징한다. 차마 다 내뱉지 못한 말들과 머릿속을 맴도는 말들은 노란빛이 도는 환한 공간 안에 펼쳐져서 금빛천장을 가득 메운다. 전시장에 들어온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속으로만 생각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말풍선으로 형상화 되어 따라다닌다. 현실과 상상의 관계는 모호하지만 소통은 양쪽의 이야기에 함께 귀 기울일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4. 호르헤 파르도(Jorge Pardo, 1963- ) 호르헤 파르도(Jorge Pardo, 1963- )는 쿠바(Cuba) 출신으로 일상의 디자인과 건축, 예술을 함께 엮어서 작업한다. 색채와 빛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오브제들은 감각적이고 시적이며 리드미컬하다. 전시장 안에서 전시되는 오브제들은 램프와 식탁, 의자와 같이 개인적인 물건인 동시에 예술작품으로서 공적인 기능을 한다. 또한 이러한 일상의 오브제들은 이들이 태어난 사회적 맥락과 배경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Bulgogi>(2010)는 작가가 살고 있는 LA의 한인문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LA는 한국인들이 특히 이민을 하여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다. 쿠바 출신의 작가가 그러하였듯이, 미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한국인들은 나름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한인타운을 형성하고 고유의 문화를 만들어나갔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싶어한다. 다른 이의 말을 들으며 스스로를 몰입시켜 상상하고,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역사를 통틀어 항상 그러하듯이 소통은 결코 쉽지 않다. 부모와 자식간에, 연인과 연인 사이에 혹은 사회와 개인간에도 오해와 불이해는 끊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끊임없이 소통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 불가능의 미션이 갖고 있는 끝없는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이에 관하여 폴 오스터Paul Auster는 『뉴욕 3부작The New York Trilogy』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삶을 살면 살수록 사람들은 다른 이를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잃어가게 된다. 다른이를 이해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자기 자신조차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소통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다. 이수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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