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정이 친구를 집에 데려온 일이 없었기에 할머니는 계속 광호를 쳐다보며 의문의 눈동자를 굴렸다.
할머니가 입을 열려고 하자 혜정이 먼저 가로채듯 말했다.
“오늘 우리 집에 미싱 한 대 들여놓기로 했고 광호가 도와주는 기다.”
“아따 마, 이게 우얀 일이고?”
할머니 입가에 드리운 주름진 미소가 더욱 움푹해졌다.
방에 미싱 하나 겨우 들여놓고 나니 한 사람이 발 뻗고 누워 자면 딱 맞는 공간이었다.
당장 먹을 쌀을 사주고 남은 돈은 일정 기간 생활비로 쓰라고 톡 털어 건네주었다.
이제는 그녀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말을 꺼냈다.
“이제 잘 살아라.”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혜정이 나를 붙잡았다.
할매도 맨발로 뛰쳐나와 내 팔을 붙들었다.
“이 먼 길까지 와서 이렇게 가면 우짜노? 꽁보리밥에 된장국이라도 먹고 가야 우리 맘이 그나마 편하제.”
할매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손바닥만 한 마루에 주저앉혔다.
혜정과 나는 마루에 걸터 앉아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정지에서 나온 할매가 상을 차려왔다.
“차린 게 없어서 미안허이. 편히 자시소.”
할매 말 그대로 꽁보리밥에 김치 한 조각, 날된장, 찬물 반 바가지가 전부였다.
혜정은 상차림을 가만히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로 다녀오는 듯 하더니 참기름 한 종지를 가져왔다.
양푼에 된장과 참기름을 넣어 손수 밥을 비벼주었다.
“광호야, 이건 이렇게 참기름에 비벼 묵어야 맛있데이.”
숟가락이 양푼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시골 마을에 퍼졌다.
죽음에 삶을 밀어 넣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엷은 미소가 혜정의 입가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자, 내가 밥 먹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혜정이 입을 열었다.
“이 은혜 어떻게 갚지?”
“니도 열심히 돈 벌어가꼬 형편이 좋아지면 지금의 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똑같이 해줘라. 그러면 되는 거다.”
혜정이 입술을 지그시 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제 내 할 일을 다 한 것 같았다. 해는 졌고 그만 자리를 떠야했다.
“나 인제 간데이.”
그 한마디를 던져놓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혜정의 집을 나왔다.
한 사람이 나로 인해 새 삶을 찾았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보람이었고 설렘이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녀와의 소식도 한참 끊겼다.
4월의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일과를 끝내고 평소대로 달성 공원을 찾았다.
공원 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누가 불렀다.
“와, 광호다!”
돌아보니 혜정이었다.
“어?”
딱히 반가운 마음은 아니었는데, 그녀의 얼굴엔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해가 지는 늦은 오후나 눈 또는 비가 오는 날이면 달성 공원에 자주 온다는 걸 알았는지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 자신도 모르게 불쑥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니 안 죽고 살아있네. 이제는...”
묻지도 않았는데 혜정은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금은 정말 행복하게 지내고 있고 미싱을 볼 때마다 내가 생각난다고 했다.
꼭 성공해서 잘 사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니한테 받은 은혜 다 갚진 못하겠지만 밥 한번 사고 싶은데 시간 괜찮나?”
“그래, 괜찮다. 뭐 먹을라꼬?”
“이 근처에 마침 내가 봐둔 곳이 있다. 가자!”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봄에 다시 피어난 개나리처럼 생명의 궤도에 다시 들어온 그녀는 발랄했다.
그날 처음으로 혜정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 밝은 표정에서 행복으로 향해가는 희망을 보았기에,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죽을 것 같던 사람이 되살아나 이렇게 삶의 의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고,
어깨 위를 툭툭 두드리던 봄비는 보이지 않는 축복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표정을 읽던 혜정이 말을 건넸다.
“니한테 보여줄 게 있다. 함 따라와 볼래.”
뭘 보여줄 게 있나 싶어 궁금해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달성 공원 정문에서 나와 반대편 골목길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딜 가는 건데?”
“그냥 따라오면 안다.”
길고 긴 골목을 돌고 돌아 따라가니 그 끄트머리쯤에 여인숙이라는 희미한 회색빛을 머금은 간판이 나타났다.
나는 순간 겁이 좀 나기 시작했다.
“왜 여기로 오는 건데? 안에 뭐가 있는 건데?”
“따라 들어오면 알게 된다. 다른데 더 좋은 데가 있지만 돈을 모아야 해서 돈을 많이 못 쓴다.”
도대체 안에 무엇을 숨겨놓았기에 여기까지 왔나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방에 따라 들어갔더니 아무것도 없는 빈방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뭔가 보여줄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물 주전자랑 컵 2개만이 쟁반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 그녀를 쳐다보니 다짜고짜 훌러덩 옷을 벗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바로 앞에서 여자가 옷 벗는 것은 처음 본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녀가 이번에는 옷을 다 벗고 그곳에서 죽으려고 하는 줄 알았다.
“죽지 마! 죽지 마! 이번에는 왜 벗고 죽을라꼬 하는데?!”
그렇게 그녀를 말리고 있는데 되려 내게 말했다.
“자기도 벗어라.”
“내가 왜 벗어? 나는 죽기 싫어. 안 죽어. 싫어, 싫어.”
나는 손사래를 치고는 옷을 벗기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줄 거 있다고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도대체 뭐 주려고 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살고 보니 내가 왜 죽으려고 했던지 그게 후회가 돼.
내가 정말 죽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옥에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니 때문에 생명의 귀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지.
진짜 성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주고 도와주고 싶다. 그렇게 살 끼다.”
눈가가 촉촉해진 혜정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암만 생각해도 내가 니한테 줄 수 있는 게 딱 하나밖에 없더라.
다 더럽혀졌어도 입술만큼은 이날까지 지키고 있었어. 진짜 너한테 선물해 줄건 입술밖에 없더라.”
그녀가 내 팔을 잡고 당겼다. 나는 그녀를 있는 힘을 다 모아 힘껏 밀어냈다.
“난 니 입술 같은 거 필요 없다!”
겨우 혜정을 떨쳐내고 그 길로 줄행랑을 쳤다.
신발을 어떻게 신고 뛰쳐나왔는지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도로 밖으로 한참 뛰어나와서야 숨을 골랐다. 그날 얼마나 심장이 요동쳤는지 모른다.
‘이놈의 가스나, 줄 거 있다고 기껏 따라왔더니... 이게 대체 뭔 일이고? 아이고 심장이야.’
시간이 좀 지나 그날의 일을 떠올려 보면 ‘그 애도 참 민망하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넘 아름답고 애닮은 사연입니다
감사합니다
한 생명을 살려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신 작가님 정말 대단하시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 여성분도 좋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야기 감사합니다.
친구의 따뜻한 마음에 보답하고 싶은 심정,
새로운 삶을 선물한 작가님의 따뜻한 마음이 감동입니다 .
그분도 행복하게 잘 사시리라 생각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다는 혜정이의 마음이 느껴지는 글인것 같습니다
희망으로 가득찬 혜정님의 모습이 좋습니다.
소중한 생명에 희망을 담아준 이야기 감사합니다.
생명의 귀중함을 알게 해 주신
작가님께 보은하고 싶은
혜정이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동백꽃 인연.
가슴 아리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감사합니다~*
하나의 소중한 생명을 구해주셨네요
가슴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생명을 살려주시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가슴 따뜻한 글 감사드립니다.
씩씩하게 열심히 살고 있는 그녀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위기의 순간, 누군가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뀔 수 있음을 동백꽃 인연 연제를 읽으며 인과 연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그녀의 행동에 작가님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해집니다.
감사합니다.
절망과 죽음앞에서 작가님의 소중한것을
내어 구입한 미싱 한 대가 두 분에게 희망과 행복씨앗을 선물하고 그 보답으로 혜정님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드리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 가슴이 저립니다
작가님이 사주신 미싱이 혜정님에게는 다시 살아갈 수있는 힘이 되었네요. 그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했던 혜정님의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어쨌든 혜정님이 잘 살아가시니 참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의 도움으로 누군가는 다시 삶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네요.
가슴 뭉클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된 혜정님이 작가님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하였네요.
그동안 만난 모든 남자들이 그런 것을 원했기에....
하지만 작가님은 달랐음을 혜정님도 알게되었군요.
한 사람의 인생을 죽음에서 삶으로 바꾸어주신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