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온몸으로 주님을 모시고 있는가?조재형 신부 서울대교구 성소국장
1999년 10월 1일입니다. 저는 8년간의 보좌 신부를 마치고 지금은 의정부교구인 적성본당의 주임 신부가 되었습니다. 본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는데 교우 다섯 분이 오셨습니다. 한 분은 해설이었고, 한 분은 독서였고, 아이 둘은 복사였습니다. 또 한 분은 아들이 본당 신부가 되었다고 의정부에서 오신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작은 성당이었지만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성당입니다.
주일이면 교우분들을 위해 봉고차 4대를 운행했습니다. 시골이라 거리가 멀고 대중교통으로는 성당에 오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3년 동안 차량을 운행했지만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고, 사고가 난 적도 없었습니다. 설날과 추석에는 저와 수녀님이 직접 차량을 운행했습니다. 교우분들은 직접 농사지으신 것들을 가져오셨습니다. 감자, 도토리묵, 계란, 쌀, 배추도 있었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은총과 봉사의 번호표’를 뽑았습니다. 은총의 번호표를 받은 분들에게는 작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봉사의 번호표를 받은 분들에게는 주보 정리, 성당 청소, 마당 정리, 화장실 청소의 기회를 드렸습니다. 어린이날에는 어린이에게, 군인주일에는 군인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적성에서 맞은 두 번째 성탄절에 본당에서는 가족 노래자랑을 하고 성탄 자정 미사를 봉헌했는데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눈이 무릎까지 쌓여 차량을 운행할 수 없었고, 집에 가지 못한 분들은 성당에서 머물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목동들이 밤을 새워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던 것처럼 본당 교우 분들도 성당에서 밤을 새우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였습니다.
적성성당을 떠나 교구청에서 일하다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어려운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한 달에 한 번 있었던 유학 사제들과의 미사였습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말씀을 나누는 시간은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현지에 계신 신부님의 부탁으로 요양원에 계신 분들을 위한 미사를 가곤 했습니다. 떠듬거리는 영어로 미사 경문을 외우고, 강론을 했지만 어르신들은 무척 즐거워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십자가 경배를 할 때였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십자가 경배를 하시면서 슬피 우셨습니다. 살아오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적이 많았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미사는 때와 장소, 인원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성사입니다. 베드로 대성전에서 봉헌하는 미사도, 버스에서 봉헌하는 미사도, 광야에서 봉헌하는 미사도, 병원에서 봉헌하는 미사도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나는 성사입니다.
성체를 모실 때 무척이나 몸을 떠셨던 요셉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는 평소 활달하고 말씀도 잘하셨는데 성체를 영할 때면 예수님을 모신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사제인 저는 매일 성체를 모십니다. 할아버지처럼 신앙의 열정으로, 온몸으로 주님을 모시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기쁘고 떨리는 마음으로 미사를 준비하고 봉헌하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하느님께로 나아가리라 다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나의 미사 이야기’에 실릴 원고를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8매 분량 글을 연락처, 얼굴 사진과 함께 pbc21@cpbc.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