作扁鵲倉公列傳第四十五.
維仲之省,155) 厥濞王呉, 遭漢初定, 以填撫江淮之閒. 作呉王濞列傳第四十六.
呉楚為亂, 宗屬唯嬰賢而喜士, 士郷之, 率師抗山東滎陽. 作魏其武安列傳第四十七.
智足以應近世之変, 寛足用得人. 作韓長孺列傳第四十八.
勇於當敵, 仁愛士卒, 號令不煩, 師徒郷之. 作李將軍列傳第四十九.
自三代以來, 匈奴常為中國患害;欲知彊弱之時, 設備征討, 作匈奴列傳第五十.
直曲塞, 広河南, 破祁連, 通西國, 靡北胡. 作衛將軍驃騎列傳第五十一.
大臣宗室以侈靡相高, 唯弘用節衣食為百吏先. 作平津侯列傳第五十二.
漢既平中國, 而佗能集楊越以保南藩, 納貢職. 作南越列傳第五十三.
呉之叛逆, 甌人斬濞,156) 葆守封禺157)為臣. 作東越列傳第五十四.
燕丹散亂遼閒, 満収其亡民, 厥聚海東, 以集真藩,158) 葆塞為外臣. 作朝鮮列傳第五十五.
唐蒙使略通夜郎, 而邛笮之君請為內臣受吏. 作西南夷列傳第五十六.
子虛之事, 大人賦説, 靡麗多誇, 然其指風諫, 帰於無為. 作司馬相如列傳第五十七.
黥布叛逆, 子長國之, 以填江淮之南, 安剽楚庶民. 作淮南衡山列傳第五十八.
奉法循理之吏, 不伐功矜能, 百姓無稱, 亦無過行. 作循吏列傳第五十九.
正衣冠立於朝廷, 而群臣莫敢言浮説, 長孺矜焉;好薦人, 稱長者, 壯有漑.159) 作汲鄭列傳第六十.
自孔子卒, 京師莫崇庠序, 唯建元元狩之閒, 文辭粲如也. 作儒林列傳第六十一.
民倍本多巧, 姦軌弄法, 善人不能化, 唯一切厳削為能斉之. 作酷吏列傳第六十二.
漢既通使大夏, 而西極遠蠻, 引領內郷, 欲観中國. 作大宛列傳第六十三.
救人於厄, 振人不贍, 仁者有乎;不既信,160) 不倍言, 義者有取焉. 作遊俠列傳第六十四.
夫事人君能説主耳目, 和主顔色, 而獲親近, 非獨色愛, 能亦各有所長. 作佞幸列傳第六十五.
不流世俗, 不爭埶利, 上下無所凝滯, 人莫之害, 以道之用. 作滑稽列傳第六十六.
斉、楚、秦、趙為日者, 各有俗161)所用. 欲循162)観其大旨, 作日者列傳第六十七.
三王不同亀, 四夷各異蔔, 然各以決吉凶. 略闚其要, 作亀策列傳163)第六十八.
布衣匹夫之人, 不害於政, 不妨百姓, 取與以時而息財富, 智者有采焉. 作貨殖列傳第六十九.
維我漢継五帝末流, 接三代(統)[絶]業. 周道廃, 秦撥去古文, 焚滅詩書, 故明堂石室金匱玉版164)図籍散亂. 於是漢興, 蕭何次律令, 韓信申軍法, 張蒼為章程,165) 叔孫通定禮儀, 則文學彬彬稍進, 詩書往往閒出矣. 自曹參薦蓋公166)言黃老, 而賈生、晁錯明申、商, 公孫弘以儒顕, 百年之閒, 天下遺文古事靡不畢集太史公. 太史公仍父子相続纂其職. 曰:「於戯! 餘維先人嘗掌斯事, 顕於唐虞, 至於周, 複典之, 故司馬氏世主天官.167) 至於餘乎, 欽念哉! 欽念哉!」
罔羅天下放失舊聞,168) 王跡所興, 原始察終, 見盛観衰, 論考之行事, 略推三代, 錄秦漢, 上記軒轅, 下至於茲, 著十二本紀, 既科條之矣.
並時異世, 年差不明,169) 作十表.
禮樂損益, 律暦改易, 兵権山川鬼神,170) 天人之際, 承敝通変, 作八書.
二十八宿環北辰, 三十輻共一轂,171) 運行無窮, 輔払股肱之臣配焉, 忠信行道, 以奉主上, 作三十世家.
扶義俶儻, 不令己失時,172) 立功名於天下, 作七十列傳. 凡百三十篇, 五十二萬六千五百字, 為太史公書.173) 序略, 以拾遺補蓺,174) 成一家之言, 厥協六経異傳,175) 整斉百家雑語,176) 蔵之名山, 副在京師,177) 俟後世聖人君子.178) 第七十.
太史公曰:餘述歴黃帝以來至太初而訖, 百三十篇.
<아버지 사마담까지의 사마씨 집안 내력>
옛날 전욱(顓頊)은 남정(南正) 중(重)에게 천문에 관한 일을, 북정(北正) 여(黎)에게는 지리에 관한 일을 맡겼다.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시대에 와서도 중과 여의 후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 일을 맡겨 하․상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중과 여 가문은 대대로 천문과 지리에 관한 일을 맡아왔다. 주대에 이르러 정백(程伯)에 봉해졌던 휴보(休甫) 또한 여의 후손이었다. 그러다가 주 선왕(宣王) 때에 와서 여의 후손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 군사 일을 담당하는 사마(司馬)씨가 되었다. 그 뒤 사마씨는 대대로 주나라의 역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주나라의 혜왕(惠王)에서 양왕(襄王)에 이르는 기간에 사마씨는 주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갔다. 진나라의 중군(中軍) 수회(隨會)가 진(秦)나라로 달아났을 때 사마씨는 소량(少梁)으로 들어가 살았다.
사마씨가 주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간 뒤로 위․조․진나라 등지로 흩어져 살았다. 위나라로 간 일족 중에는 중산(中山)의 재상을 지낸 사마희가 있었고, 조나라로 간 일족 중에는 검술 이론을 전수하여 이름을 날린 사람도 있었는데 괴외(蒯聵)가 그 후손이다. 진나라로 간 사마조(司馬錯)는 진 혜왕 앞에서 장의와 논쟁을 벌였다. 혜왕은 사마조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촉을 공격하게 하여 사마조는 촉의 땅을 빼앗았고 그곳의 군수로 임명되었다. 사마조의 손자 사마근(司馬靳)은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를 섬겼다. 이 무렵 소량은 이름을 하양(夏陽)으로 바꾸었다. 사마근과 무안군 백기는 장평(長平)의 조나라 군대를 파묻고 돌아왔지만 두 사람 모두 두우(杜郵)에서 죽임을 당했고, 사마근은 화지(華池)에 매장되었다.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司馬昌)은 진나라의 주철관을 지냈는데, 당시가 진시황 때였다. 괴외의 현손 사마앙(司馬卬)은 무신군(武信君)의 부장이 되어 조가(朝歌)를 공략했다. 제후들이 서로 왕을 자처하고 나섰을 때 사마앙은 은(殷)나라의 왕이 되었다. 한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하자 사마앙은 한나라에 귀순했고, 그 땅은 하내군(河內郡)이 되었다. 사마창은 무택(無澤)을 낳았고, 무택은 한나라의 시장을 지냈다. 무택이 희를 낳았고, 희는 오대부를 지냈다. 죽은 뒤 모두 고문(高門)에 안장되었다. 사마희(司馬喜)는 사마담(司馬談)을 낳았는데, 담은 태사공(太史公)이 되었다.
<아버지 사마담의 학문과 ‘논육가요지’>
내 아버지 태사공은 당도(唐都)에게서 천문학을 배웠고, 양하(楊何)로부터 『역』을 전수받았으며, 황자(黃子)로부터 도가의 이론을 익혔다. 태사공은 건원에서 원봉에 이르는 기간에 벼슬을 했다. 그는 학자들이 각파 학설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고 그릇된 것만 배우고 있는 것을 걱정하여 6가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역(易)』의 「대전(大傳)」에 “천하는 하나인데 생각은 각양각색이고, 귀착점은 같은데 가는 길은 다 다르다.”고 했듯이 음양가(陰陽家) · 유가(儒家) · 묵가(墨家) · 명가(名家) · 법가(法家) · 도덕가(道德家)들은 다 같이 세상을 잘 다스리는 일에 힘을 쓰지만 그들이 따르는 논리는 길이 달라 이해가 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일찍이 음양가의 학술을 가만히 살펴본 적이 있는데, 길흉의 징조에 너무 집착하여 금하고 피하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구속하고 겁을 먹게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일해야 한다는 것은 놓칠 수 없는 점이다.
유가의 학설은 너무 넓어 요점을 파악하기 힘들다. 애는 쓰지만 얻는 것이 적기 때문에 학설을 다 추종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군주와 신하 사이의 예를 세우고, 부부와 장유의 구별을 가지런히 한 점은 바꾸어서는 안 된다.
묵가의 지나친 근검절약은 따르기가 어렵다. 그것을 일일이 그대로 할 수는 없지만 생산의 근본을 강조하고 비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주장은 없애서는 안 된다.
법가는 너무 근엄하고 각박하지만 군주와 신하의 상하 구분을 명확하게 한 것은 바꿀 수 없다.
명가는 명분에 얽매여 진실성을 잃는 점은 있지만 명분과 실질의 관계를 바로 잡은 것은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도가는 정신을 하나로 모아 인간의 모든 활동의 보이지 않는 객관적 규율에 합치하게 하고 만물을 만족시킨다. 그 학술은 음양가의 사계절의 큰 운행이란 순서를 흡수하고, 유가와 묵가의 좋은 점을 취하고, 명가와 법가의 요점을 모으니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하고, 사물의 변화에 따라 변하고, 풍속을 세워 일을 시행하니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따라서 그 이치는 간명하면서 파악하기가 쉽고, 힘은 적게 들지만 효과는 크다.
유가는 그렇지 않다. 군주를 천하의 모범이라 여기기 때문에 군주가 외치면 신하는 답하고, 군주가 앞장서면 신하는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하면 군주는 힘들고 신하는 편하다.
도가의 기본 원칙은 그저 강하기만 한 것을 버리고 탐욕을 없애며 총명을 물리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위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객관적 형세에 순응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너무 많이 사용하면 말라버리고, 육체 또한 지나치게 혹사시키면 지쳐서 병이 나는 법이다. 육체와 정신을 못살게 굴면서 천지와 더불어 오래도록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무릇 음양가는 4계절, 8방, 12차, 24절기마다 거기에 해당하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그에 따라 잘 행하면 번창하고 거스르면 죽거나 망한다고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사람을 구속하고 겁을 먹게 하는 일이 많다.”고 했던 것이다. 봄에 태어나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두어들이고 겨울에 저장한다는 이 자연계의 큰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천하 모든 일의 앞뒤가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일해야 한다는 것은 놓칠 수 없는 점이다.”라 했던 것이다.
유가는 육예를 법도로 삼는다. 육예와 관련된 경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 몇 대를 배워도 그 학문에 통달할 수 없으며, 늙을 때까지 배워도 그 번잡한 예절은 제대로 배울 수 없다. 그래서 “너무 넓어 요점이 파악하기 힘들다. 애는 쓰지만 얻는 것은 적다.”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군주와 신하, 아비와 자식들 사이의 예절, 남편과 아내, 늙은이와 젊은이 사이의 규범을 정한 것은 어떤 학파도 바꿀 수 없다.
묵가도 요 · 순의 도덕을 숭상하여 그들의 덕행에 대해 “집의 높이는 겨우 세 자, 흙으로 만든 계단은 세 개뿐, 풀로 이은 지붕은 제대로 정돈도 하지 않았고, 통나무 서까래는 다듬지도 않았다. 흙으로 만든 그릇에 밥과 국을 담아 마셨는데, 현미나 기장쌀로 만든 밥에 명아주잎과 콩잎으로 끓인 국을 먹었다. 여름에는 갈포로 만든 옷을 입고, 겨울에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지냈다.”라고 말한다.
죽은 사람의 장례에서 오동나무 관의 두께는 세 치를 넘지 않으며, 곡소리도 그 슬픔을 다 드러내지 않게 했다. 천하 사람들에게 이를 표준으로 삼아 장례를 치르라고 한다면 존비의 구별이 없어질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고 시대가 바뀌면 모든 일이 꼭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지나친 근검절약은 따르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생산의 근본을 강조하고 비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주장은 가정을 풍족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는 묵가의 장점으로 어떤 학파라도 없애서는 안 된다.
법가는 가까움과 먼 관계를 구별하지 않고, 귀한 신분과 천한 신분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로지 법에 따라 단죄하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을 가깝게 대하고 존귀한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는 감정이 단절되고 만다. 한 때의 계책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너무 근엄하고 각박하다.”고 한 것이다. 다만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낮추며, 직분을 분명히 구분하여 서로가 그 권한을 침범하지 못하게 한 점은 다른 학파라도 고칠 수 없다.
명가는 너무 꼼꼼하게 따지다가 다 뒤엉켜버림으로써 각자의 진실된 본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 오로지 명분에만 집착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에 인정을 잃는다. 그래서 “명분에 얽매여 진실성을 잃는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명가가 명분과 실질의 관계를 서로 비교한 것은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도가는 ‘억지로 일삼지 않는’ ‘무위’를 말하면서 ‘하지 않는 것도 없는’ ‘무불위’도 말한다. 실제로 행동하기는 쉬운데 그 말이 이해하기 어렵다. 도가의 학술은 ‘허무’를 근본으로 삼고, 행동상 ‘순응’이란 객관적 형세를 강구한다. 그 자체로 이미 만들어진 세태도 고정불변의 형상도 없기 때문에 만물에 순응하여 만물의 정상을 추구할 수 있다. 만물에 앞서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으면서 순응하기 때문에 만물을 주재할 수 있는 것이다.
법이 있지만 법에 맡기지 않는 것을 법으로 여기고 때에 맞추어 일을 이루며, 법도가 있지만 고집하지 않고 만물과 서로 어울린다. 그렇기에 “성인은 기교를 부리지 않고 시세의 변화에 맞추어 변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허무는 도의 본질이며, 순응은 군주가 파악해야 할 강령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군주는 여러 신하들을 모두 소집하여 각자에게 맞는 일을 주어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실제 행동과 말이 일치하는 것을 ‘바르다’는 뜻에서 ‘단’이라 하고, 실질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비어 있다’는 뜻에서 ‘관’이라 한다. 빈말을 듣지 않으면 간사한 자가 생기지 않고, 어진 이와 불초한 자가 절로 가려지며, 흑백이 절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다음 군주가 현명한 자를 기용하면 무슨 일인들 못 이루겠는가? 이렇게 하면 큰 도에 부합하게 되고 원기가 두루 충만해져 온 천하를 환하게 비추게 되지만 결국은 다시 청정무위의 경지로 되돌아간다.
인간의 삶은 정신에 의탁하며, 정신은 육신에 의탁한다. 정신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고갈되고, 육신을 너무 혹사하면 병이 난다. 정신과 육체가 일단 분리되면 사람은 죽는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사람 역시 다시 합칠 수 없다. 때문에 성인이 정신과 육체를 모두 중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신은 생명의 근본이요, 육체는 생명의 기초다. 정신과 육체를 편안하게 만들어 놓지도 않고 “내가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니 대체 무엇을 믿고 큰소리를 치는 것인가?
<사마천의 일생>
태사공 담은 천문을 관장했고 백성을 다스리지는 않았다. 천(遷)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났다. 황하의 북쪽, 용문산의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자랐다. 열 살 때 고문을 배웠다. 스물 살에는 남쪽으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로 여행하며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우혈(禹穴)을 탐방한 다음 구의산(九疑山)을 살피고, 원강(沅江)과 상강(湘江) 두 강은 배를 타고 돌았다. 북으로 올라가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제나라와 노(魯)나라의 수도에서 유가의 학술을 배우며 공자(孔子)의 유풍을 살폈다. 추(鄒)와 역(嶧) 지방에서는 향사를 참관했다. 파(鄱)․설(薛)․팽성(彭城)에서는 곤욕을 치렀고, 양(梁)․초(楚)를 거쳐 돌아왔다.
얼마 뒤 천은 낭중(郎中)이 되어 조정의 명에 따라 서쪽으로는 파촉 이남 방면을, 남쪽으로는 공(邛) · 작(笮) · 곤명(昆明) 을 공략하고 돌아와 보고했다.
이 해(기원전 110년, 사마천 36세)에 천자가 처음으로 한 황실의 봉선 의식을 거행했는데 주남(周南)에 머무르고 있던 태사공은 이 행사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화병이 나서 그만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아들 천은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마침 황하와 낙수 사이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태사공은 아들 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 선조는 주나라 왕실의 태사(太史)를 지냈다. 그 위 세대는 일찍이 하나라 때 천문에 관한 일을 맡아 공업을 크게 떨쳤다. 그 뒤로 쇠퇴했는데, 내 세대에 와서 끊어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네가 다시 태사가 된다면 우리 선조의 유업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천자께서 천 년 동안 끊어졌던 대통을 이어받아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내가 수행하지 못하다니 운명이로다! 운명이로다! 내가 죽더라도 너는 틀림없이 태사가 되어야 한다. 태사가 되거든 내가 하고자 했던 논저를 잊지 않도록 해라.
효도란 어버이를 섬기는 것에서 시작하여 군주를 섬기는 것을 거쳐 입신양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효도니라. 세상이 주공을 칭송하는 것은 그가 문왕과 무왕의 덕을 노래하고, 자신과 소공의 기풍을 선양하고, 태왕과 왕계의 사상을 드러냄으로써 공유에 미치고 나아가서는 후직까지 받들었기 때문이다.
유왕과 여왕 이후 왕도가 사라지고 예악이 쇠퇴해지자 공자께서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적을 정리하고 폐기되었던 예악을 다시 일으켜 『시』와 『서』를 논술하고 『춘추』를 엮으니 학자들이 지금까지도 준칙으로 삼고 있다. 획린(기원전 481년) 이래 지금까지 400년 넘게 제후들은 서로를 집어 삼키려는 싸움에만 몰두해온 탓에 역사 기록은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한나라가 일어나니 천하는 통일되었다. 그 동안 역사적으로 많은 명군 · 현군 · 충신 · 지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태사령이란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해 천하의 역사를 폐기하기에 이르렀구나. 나는 이것이 너무나 두렵다. 그러니 너는 이런 내 심정을 잘 헤아리도록 해라!”
천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면서 “소자가 비록 못났지만 아버지께서 정리하고 보존해온 중요한 기록들을 빠짐없이 다 편찬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사공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기원전 108년) 천은 태사령이 되어서 사관의 기록과 석실․금궤에 소장된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5년 뒤인 태초 원년(기원전 106년) 11월 갑자일 초하루 동지, 새로운 달력인 태초력(太初曆)을 반포하면서 명당에서 의례를 거행하고 제후들에게 새로운 달력을 받들게 했다.
< 『사기』의 저술 동기>
나 태사공 사마천은 말한다.
선친께서는 “주공이 세상을 뜨고 500년 만에 공자가 태어나셨다. 그리고 공자가 세상을 뜨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시 500년이 지났다. 이제 누가 성인의 사업을 이어받아 『역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춘추』를 잇고, 『시』· 『서』· 『예』· 『악』의 본질을 밝힐 수 있을까?”라고 하셨다. 바로 지금이란 뜻이구나! 바로 지금이란 뜻이구나! 그러니 내 어찌 감히 이 일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상대부 호수(壺遂)가 “이전에 공자께서는 왜 『춘추』를 지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 태사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듣기에 동중서(董仲舒) 선생께서 “주나라의 왕도가 쇠퇴하자 공자는 노나라의 사구가 되었다. 그러자 제후들은 공자를 시기하고 대부들은 공자를 방해하고 나섰다. 이에 공자는 자신의 말과 주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242년에 이르는 여러 나라의 역사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져서 천하의 본보기로 삼았다. 천자라도 어질지 못하면 비판하고, 무도한 제후는 깎아내리고, 간악한 대부는 성토함으로써 왕도의 이상을 나타내려 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공자께서도 “내가 본래 추상적인 이론으로 기록하려 했으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훨씬 분명하고 절실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춘추』는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간사의 기강을 가리고, 의심스러운 바를 구별하고, 시비를 밝히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결정하게 하고, 선은 장려하고 악은 미워하게 하며, 유능한 사람은 존중하고 못난 자는 물리치게 하고, 망한 나라의 이름을 보존하게 하며, 끊어진 세대의 후손을 찾아 잇게 하며, 모자란 곳은 메워주고 못쓰게 된 것은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바 이것이야말로 큰 왕도입니다.
『역』은 천지․음양․사시․오행의 원리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변화의 이치를 논하는데 장점이 있습니다. 『예』는 인간관계를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행동에 좋습니다. 『서』는 선왕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므로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도움을 줍니다. 『시』는 산과 내, 골짜기, 날짐승과 들짐승, 풀과 나무, 암컷과 수컷에 관한 기록이라 풍토와 인정에 대한 서술이 뛰어납니다. 『악』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춘추』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사를 처리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따라서 『예』는 사람의 행동을 절제시키고, 『악』은 평화로운 마음을 이끌어내며, 『서』는 정치를 말하고, 『시』는 감정을 표현하며, 『역』은 변화를 말하고, 『춘추』는 정의를 말합니다. 그래서 어지러운 세상을 수습하고 바로 돌려놓는 데는 『춘추』만한 것이 없습니다.
『춘추』는 글자로 수 만 자나 되지만 거기에 나타나 있는 대의도 수 천가지나 됩니다. 만사의 성공과 실패, 흥망과 성쇠가 모두 『춘추』에 응집되어 있습니다. 『춘추』에는 시해당한 군주가 36명에 멸망한 나라가 52개나 되며, 사직을 보존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떠돈 제후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까닭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스림의 근본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에서는 “터럭만큼의 실수가 천 리나 되는 엄청난 잘못을 초래한다.”고 했고, 또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아들이 아비를 살해하는 일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결과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춘추』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춘추』를 모르면 바로 코앞에 나쁜 말만 일삼는 소인배가 있어도 못보고, 등 뒤에 음흉한 간신이 있어도 알지 못합니다. 신하된 자도 『춘추』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춘추』를 모르면 평범한 사무인데도 전례에 집착하여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긴급한 일을 당해도 상황에 맞추어 대처할 줄 모릅니다. 군주나 아비가 되어 『춘추』의 큰 뜻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면 최악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신하나 자식된 자로서 『춘추』의 큰 뜻을 통찰하지 못하면 틀림없이 찬탈이나 군주 시해와 같은 죽을 죄에 빠집니다.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했겠지만 큰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행동한 것이기 때문에 여론의 질책을 받아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의의 요지를 잘 모르면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게 됩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에게 농락당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죽음을 면키 어렵습니다.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면 무도한 아비가 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불효자식이 됩니다. 이 네 가지는 천하의 큰 잘못입니다. ‘천하의 큰 잘못’이라는 죄명을 갖다 붙여도 감히 변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춘추』는 예의의 커다란 근본입니다. 예의란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막는 것이고, 법이란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의 적용 효과는 쉽게 보이는 반면 예의 예방 효력은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호수가 또 물었다.
공자 때는 위로 영명한 군주가 없고 아래로는 유능한 인재가 기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춘추』를 지어 예의의 득실을 논단하고 제왕의 법전으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대는 위로 영명한 천자를 만났고 아래로 벼슬을 받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모든 일이 알맞게 순서를 찾아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책을 써서 그대가 밝히려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태사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에, 에.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런 뜻이 아니지요. 저는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가장 온화하고 후덕했던 복희는 『역』의 팔괘를 만들었다. 요․순의 넘치는 덕은 『상서』에 기재되어 있고 예악이 바로 여기에서 만들어졌다. 탕왕과 무왕 시대의 융성함에 대해서는 시인들의 노래가 있다. 『춘추』는 선을 취하고 악을 물리치며, 삼대의 성덕을 칭송하고, 주나라 왕실을 칭찬하고 있는바 풍자나 비방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들은 바 있습니다.
한나라가 개국한 이래 현명하신 지금의 천자에 이르러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 봉선 의식을 거행하고, 달력을 개정하고, 의복의 색깔을 바꾸는 등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황제의 은택이 한 없이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풍속이 우리와 다른 해외의 나라들도 몇 번 통역을 거쳐 변경에 와서는 공물을 바치고 황제께 인사드리겠다며 줄을 섰습니다. 조정의 백관들이 황제의 성스러운 덕을 열심히 칭송하고는 있지만 그 뜻을 다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유능한 인재가 기용되지 못하는 것을 군주는 치욕으로 여깁니다. 지금 주상께서는 확실히 영명하십니다. 그런데도 그 성덕이 온 나라에 널리 퍼져 백성들에게 알려지지 못한다면 이는 담당 관리의 잘못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그 자리를 관장하면서 영명하고 성스러운 황제의 덕을 기록하지 않거나 공신, 세가, 어진 대부들의 공업을 서술하지 않고 없앰으로써 아버지의 유언을 실추시킨다면 그보다 더 큰 죄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옛 사건들을 서술하는 것은 지난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려는 것이지 창작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선생께서 『춘추』와 그렇게 비교하시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리하여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7년 뒤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당하여 감옥에 갇혔다. 나는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몸은 망가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구나!”라며 깊이 깊이 탄식했다. 그러나 물러나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시』나 『서』의 뜻이 함축적인 것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표출하고 싶어서였다. 문왕은 갇힌 상태에서 『주역』을 풀이했고, 공자는 곤경에 빠져 『춘추』를 지었다. 굴원(屈原)은 쫓겨나서 『이소』를 썼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을 잃은 뒤에 『국어』를 지었다. 손빈(孫臏)은 발이 잘리는 빈각이란 형벌을 당하고도 『병법』을 남겼으며, 여불위(呂不韋)는 촉으로 쫓겨났지만 세상에 『여람』을 남겼다. 한비자(韓非子)는 진나라에 갇혀서 「세난」과 「고분」편을 저술했다. 『시경』 300편의 시들도 대개 성현이 발분하여 지은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그 무엇이 맺혀 있었지만 그것을 밝힐 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일을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요 임금에서 ‘획린’에 이르는 긴 역사를 서술하게 되었다. (그 시작은 황제부터다.)
<‘본기’ 12편의 요지>
그 옛날 황제는 하늘과 땅을 법칙으로 삼았고, 전욱․제곡․요․순에 이르는 네 성인은 황제의 질서를 준수함으로써 각각 법도를 세웠다. 요 임금이 제왕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순은 자신의 공업을 자랑하지 않고 근신했다. 이들 제왕의 공덕은 만고에 길이길이 전할 것이다. 이에 본기 첫 편인 「오제본기」를 지었다.
우의 공적으로 구주가 두루 혜택을 입었으며, 요․순 시대를 빛내고 그 공덕이 후손에까지 이르렀다. 하의 걸은 음란하고 교만하여 명조로 쫓겨났다. 이에 제2 「하본기」를 지었다.
설이 상을 일으켜 성탕에 와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태갑은 동으로 쫓겨났으나 개과천선하고, 아형 이윤의 도움으로 공덕이 빛나게 되었다. 무정은 부열을 얻음으로써 고종으로 일컬어졌다. 제신은 술과 여자에 빠져 제후들로부터 공납을 받지 못함으로써 나라가 끊겼다. 이에 제3 「은본기」를 마련했다.
기는 농업을 창시하여 후직이 되었고, 서백 문왕 때 공덕이 융성하였다. 무왕이 목야에서 승리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 유왕과 여왕이 어리석고 난폭하여, 풍과 호를 잃었다. 이후 점점 쇠락하더니 난왕에 이르러 낙읍의 제사가 끊어졌다. 이에 제4 「주본기」를 지었다.
진나라의 선조 백예는 우 임금을 보좌했다. 목공은 뉘우칠 줄 알아 효 계곡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애도했다. 목공이 죽자 산 사람을 함께 묻었고, 『시』의 ‘황조’가 이에 대한 노래다. 소왕과 양왕은 통일과 황제를 위한 터를 닦았다. 이에 제5 「진본기」를 지었다.
시황이 즉위하여 6국을 합병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표시로 무기를 녹여 종을 만들었으며, 스스로를 높여 황제라 불렀지만 무력에만 의존하여 폭력을 마구 휘둘렀다. 2세가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자영은 항복하여 망국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제6 「진시황본기」를 남겼다.
진이 도를 상실하자 영웅호걸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항량이 맨 먼저 창업했고 항우가 그 뒤를 이어 일어나 송의를 죽이고 조를 구하니 제후들이 그를 추대했다. 항우가 자영을 죽이고 회왕을 저버리자 천하가 그를 비난했다. 이에 제7 「항우본기」를 지었다.
항우는 포악하였으나, 한왕 유방은 공덕을 베풀었다. 한왕은 촉․한에서 분발하여 돌아와서 삼진을 평정하였다. 항우를 죽이고 제왕의 업을 이루어 천하를 안정시키고 제도와 풍속을 개혁했다. 이에 제8 「고조본기」를 지었다.
혜제는 일찍 세상을 떴고 여씨 일족들은 민심을 얻지 못했다. 여록과 여산의 권력이 커지자 제후들이 이를 걱정했다. 여후가 조왕 여의를 죽이고 그 아들 유우를 감금하자 대신들의 두려움과 의심을 품었고, 마침내 여씨는 멸족의 화를 당했다. 이에 제9 「여태후본기」를 남겼다.
한이 초창기에 후계자가 분명치 않았으나 대왕을 맞이하여 천자로 세우니 천하의 인심이 제대로 돌아왔다. 육형을 없애고, 관문과 다리를 활짝 열어 소통하고, 널리 은덕을 베푸니 태종이라 불렀다. 이에 제10 「효문본기」를 지었다.
제후들이 교만방자해지더니 오왕이 앞장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정벌에 나서 7국을 모두 굴복시키니 천하는 다시 평화와 안정을 찾고 크게 풍요로워졌다. 이에 제11 「효경본기」를 남겼다.
한이 건국되어 5대를 지나면서 건원 연간(140~135년 기원전)에 융성을 누렸다. 밖으로는 이적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법도를 정비했다. 하늘에 제사드리는 봉선을 행했고, 달력과 복장의 색을 바꾸었다. 이에 제12 「금상본기」를 지었다.
<‘표’ 10편의 요지>
하․은․주 삼대는 연대가 너무 오래되어 구체적인 날짜를 고찰할 수 없다. 대개 족보나 연보와 같은 옛 기록들을 얻어 그것에 근거하여 대략 추정했다. 이렇게 해서 표의 첫 편인 「삼대세표」를 지었다.
주 유왕과 여왕 이후 왕실이 약해지자 제후들이 천하를 호령하며 정치를 휘두르니 『춘추』에도 기록되지 못하는 것이 생겼고, 족보나 연보에도 대강만 기록되어 있는 바 5패가 번갈아 가며 번성했다가 쇠퇴했다. 이에 주대의 전후 사정을 밝히려는 뜻에서 제2 「십이제후연표」를 남겼다.
춘추 이후 제후 아래의 배신들이 정권을 장악했고, 강한 나라들이 서로 왕을 자처하고 나섰다. 진에 이르러 마침내 중원 제후들을 합병하여 그들의 땅을 없애고 혼자 황제로 높여 불렀다. 이에 제3 「육국연표」를 지었다.
진나라의 폭정으로 초나라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으나 항우가 다시 어지럽히고, 한나라가 정의를 내걸고 이를 정벌했다. 8년 동안 천하가 세 번이나 주인을 바꾸니 사건은 복잡하고 변화는 많았다. 이에 상세한 제4 「진초지제월표」를 남겼다.
한나라가 흥기하여 태초 연간에 이르는 100년 동안 제후들이 부침을 거듭했건만 과거 족보나 연보의 기록이 부실하여 담당 관리들이 계속해서 기록할 수가 없었다. 제후들이 강하고 약했던 그 원인 정도만 언급했다. 이렇게 해서 제5 「한흥이래제후연표」를 지었다.
고조가 개국했을 때 팔다리처럼 보필한 공신들은 신임을 얻어 땅과 작위를 받아 그 은택이 후손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선조의 유지를 망각하다 죽거나 나라를 망친 자도 있다. 이에 제6 「고조공신후자연표」를 지었다.
혜제에서 경제에 이르는 동안 공신의 후손들에게 땅과 작위를 내려 주었다. 이에 제7 「혜경간후자연표」를 지었다.
북으로 강력한 흉노를 토벌하고, 남으로 굳센 월나라를 무찌르는 등 오랑캐를 정벌했다. 그 무공에 따라 제후로 봉해진 자들이 많았다. 이에 제8 「건원이래후자연표」를 지었다.
제후들이 지나치게 강해져 7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제후의 자손들이 늘어나면서 땅과 작위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조정에서 은혜를 베풀어 땅과 작위를 내려주니 제후국의 힘은 서서히 약해지고 조정의 은혜에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9 「왕자후자연표」를 마련했다.
나라의 유능한 재상과 뛰어난 장수는 백성들의 사표다. 한이 개국한 이래 장수와 재상 그리고 이름난 신하들의 행적을 살펴 잘한 사람은 그 치적을 기록하고 그렇지 못한 자라도 그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이를 근거로 제10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를 지었다.
<‘서’ 8편의 요지>
하․은․주 삼대의 예제는 나름대로 늘었다 줄었다 하면서 그 운용이 달랐다. 그러나 그 요지는 인정에 가깝고 왕도와 부합하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예제란 사람의 실제적인 생활에 근거하여 절제하고, 과거와 현재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서의 첫 편인 「예서」를 지었다.
음악이란 풍속을 바꾸는 기능을 한다. 『시』의 ‘아’와 ‘송’이 유행하자 정과 위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래서 정과 위의 음악이 오래도록 전해졌다. 사람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같아서 풍속이 다른 멀리 있는 사람도 품을 수 있다. 『악서』를 정리하여 음악의 변천사를 서술하기 위해 제2 「악서」를 지었다.
병력이 없으면 강해질 수 없고, 덕이 없으면 번창할 수 없다. 황제․성탕․무왕은 이것 때문에 일어났고, 걸․주․진 2세는 이것 때문에 무너졌다. 깊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겠는가? 『사마법』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강태공․손자․오기․왕자 성보가 뒤를 이어 그 의미를 더 밝혔는데 요즘 사회상과 맞아떨어지고 인간사 변화를 제대로 짚어냈다. 이에 제3 「율서」를 지었다.
음율은 음에 깃들어 있으면서 양을 끌어당기고, 역법은 양에 깃들어 있으면서 음을 끌어당긴다. 음율과 역법이 서로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터럭만큼의 오차나 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황제력․전욱력․하력․은력․주력은 서로 다 달랐고, 태초 원년(기원전 104년)에 제정한 역법이 가장 정확하다. 이에 제4 「역법」을 지었다.
별과 기상으로 점을 치는 책에는 황당하고 근거없는 길흉화복의 내용이 복잡하게 섞여있다. 그 문장과 효험을 따져보아도 별 다를 것이 없다. 이와 관련된 일들을 모아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의 운행과 궤도와 맞추어보고 그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 제5 「천관서」다.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되지만 봉선 대제를 거행하는 제왕은 아주 드물었다. 봉선을 거행하게 되면 모든 신령이 제사를 받게 된다. 여러 신과 명산 그리고 큰물에 대한 제사 의례의 근본을 추구하여 제6 「봉선서」를 지었다.
대우가 하천의 물길을 터서 구주의 백성들이 안녕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선방궁을 지으면서도 물길을 터서 서로 통하게 했다. 이에 제7 「하거서」를 지었다.
화폐는 농업과 상업의 교역을 위해 발행한다. 그런데 그 폐단이 극에 이르면 교묘한 수단으로 투기하고 재산을 늘리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는다. 투기와 이익 때문에 싸우다보면 농사는 팽개치고 돈 버는 쪽으로만 달려간다. 이에 제8 「평준서」를 지어 그 상황의 변화를 관찰했다.
<‘세가’ 30편의 요지>
오 태백은 막내동생 계력의 즉위를 위해서 멀리 강남 야만족 땅으로 피해가서 살았다. 그 후 문왕과 무왕이 주 왕조를 일으킨 것은 일찍이 고공단보 때 왕이 될 만한 흔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합려는 요를 시해하고 형초를 굴복시켰다. 부차는 제나라와 싸워 이기고, 오자서가 자살하니 시체를 말가죽에 싸서 물에 던졌다. 부차는 간신 백비를 신임하여 월나라와 가까이 지내더니 결국 망했다. 태백의 양보를 칭송하는 뜻에서 세가 첫 편으로 「오세가」를 남긴다.
신․여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상보 강태공은 미천한 신분이 되었다. 마지막에는 서백(문왕)에게 귀의했고, 무왕은 태사로 모셨다. 은밀하고 치밀한 권모술수로 상을 멸망시키니 상보의 공은 신하들 중 으뜸이었다. 머리카락이 황백색으로 변한 노년에 영구를 봉지로 받았다. 가에서 약속한 맹약을 배신하지 않았기에 환공은 번창했고, 아홉 차례나 제후들을 불러 모으니 패자로서의 공적이 두드러졌다. 전상과 감지 두 권신이 권력을 다투었고, 강씨 성의 정권은 망했다. 상보의 모략을 높이 평가하여 제2 「제태공세가」를 지었다.
주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여 주공이 섭정하자 이에 따르는 제후도 있고 반대하는 제후도 있어 정국이 어지러웠지만 주공이 이를 안정시켰다. 예악으로 힘껏 교화하자 천하가 화답했다. 이렇게 성왕을 보필하니 제후들은 주 왕실을 종주로 떠받들었다. 노나라 은공과 환공에 이르러 어쩌다 그렇게 나라가 혼란스러워졌을까? 삼환의 무력 다툼으로 노나라는 끝내 번창하지 못했다. 주공 단의 ‘금등’을 칭송하여 제3 「주공세가」를 지었다.
무왕이 주왕을 무찔렀으나 천하의 화합이 이루어지기 전에 세상을 떴다. 어린 성왕이 즉위하고 주공이 섭정하자 관숙과 채숙이 의심하여 회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소공은 앞장서서 협력하여 왕실을 편안하게 하고 동방도 안녕을 되찾았다. 연왕 쾌의 섣부른 선양이 재앙과 난리를 불러일으켰다. ‘감당’이란 시를 칭송하며 제4 「연세가」를 지었다.
관숙과 채숙을 보내 무경을 감시하고 옛 상의 유민을 다독거리게 했다. 그러나 주공 단이 섭정하자 관숙과 채숙은 복종하지 않았다. 주공은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추방하고는 충성을 맹약했다. 문왕의 비 태사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어 주 종실이 강성해졌다. 잘못을 뉘우친 채숙의 아들 중을 평가하여 제5 「관채세가」를 남겼다.
덕 있는 제왕은 제사가 끊어지지 않으니 순․우의 혼령이 기뻐할 것이다. 그들의 아름답고 밝은 덕 덕분에 후손이 혜택을 입어 백세가 지나도록 제사를 누리니 주 왕실의 진․기와 같은 제후국이 그랬다. 초나라에게 망했지만 그 후손이 다시 제나라에서 전씨로 일어났으니 순이란 분이 얼마나 대단한가! 이에 제6 「진기세가」를 지었다.
주공이 은나라의 유민들을 거두어 강숙을 위에 봉했다. 상의 혼란했던 상황을 일깨우기 위해 『상서』의 ‘주고’와 ‘자재’를 예로 들어 일러주었다. 삭(혜공)이 태어날 무렵 위나라는 편치 못했다. 남자가 태자 괴외를 미워하여 내쫓으니, 아들과 아비가 싸우고 자리가 뒤바뀌는 명분없는 일이 벌어졌다. 주 왕실의 덕이 미미해지고, 전국의 열강들이 강해졌다. 위나라는 약했지만 각왕 때까지 버티다 마지막에 망했다. 저 ‘강고’를 찬미하여 제7 「위세가」를 지었다.
안타깝도다, 기자여! 안타깝도다, 기자여! 바른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노예가 되었구나. 무경이 죽자 주 왕실은 미자를 송에 봉했다. 양공이 홍에서 초나라와 싸우다 부상을 입고 패했지만 의리라는 명분을 앞세운 덕에 군자라는 칭송을 얻기도 했다. 경공이 겸양의 덕을 쌓으니 좋지 않은 징조인 화성이 자리를 바꾸어 물러났다. 천성이 포악하여 마침내 멸망했다. 미자가 태사에게 가르침을 청한 뒤 떠난 일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제8 「송세가」를 지었다.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숙우는 당에 도읍을 정했다. 진 목공이 아들 이름을 잘못 지은 것에 말들이 많았고, 이 때문에 난이 일어나 과연 무공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헌공이 여희에게 홀리니 진나라는 5대에 걸쳐 혼란스러웠다. 진 문공 중이가 처음에는 뜻을 얻지 못했으나 결국에는 패업을 이루었다. 육경이 권력을 좌우하니 진나라의 국력이 소모되었다. 문공이 천자로부터 패자를 위한 예물을 받은 일을 칭송하여 제9 「진세가」를 지었다.
중려가 창업하고 오회가 이어받았다. 은나라 말년에 육웅이 족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주 성왕이 웅역을 기용하고 웅거가 계속 그 일을 이었다. 현명한 장왕은 진나라의 사직을 다시 복구시켜 주고, 정백의 죄를 용서했으며, 송나라를 포위했다가 화원의 말을 듣고 군대를 돌렸다. 회왕은 진나라에서 객사했고, 자란은 굴원을 박해했다. 초나라는 아부꾼을 좋아하고 모함하는 자를 믿는 바람에 결국 진나라에 합병되었다. 장왕의 대의를 높이 평가하는 뜻에서 제10 「초세가」를 마련했다.
소강의 아들 무여는 남해로 가서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는 짧게 잘랐으며, 물가에서 자라나 큰 거북 등과 더불어 살았다. 봉산과 우산을 지키며 우 임금의 제사를 받들었다. 구천은 부차에게 치욕을 당한 뒤 문종과 범려를 중용했다. 구천이 오랑캐였지만 적극적으로 덕과 의리를 닦아 강력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주 왕실을 존중한 것을 칭찬하여 제11 「월왕구천세가」를 지었다.
정 환공은 주 태사의 건의를 듣고 동쪽을 경영했다. 장공이 주나라의 화라는 곳을 공격하자 주나라의 군신과 백성들이 이를 비방했다. 제중이 송나라의 강요로 강제로 맹약을 맺은 이후 줄곧 발전하지 못했다. 자산의 어진 정치는 여러 대에 걸쳐 칭찬을 받았다. 삼진이 침략하자 한나라에게 합병되었다. 여공이 주 혜왕을 돌려보낸 일을 기리며 제12 「정세가」를 지었다.
조보가 길러서 바친 명마 기와 녹이가 조보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조숙은 진 헌공을 섬겼고, 아들 조최가 유업을 계승했다. 조최는 진 문공이 패주가 되도록 도와 진나라의 대신이 되었다. 조양자는 지백에게 곤욕을 치른 뒤 한․위나라와 함께 지씨를 멸망시켰다. 주부 무령왕은 사구궁에 갇혀 새 알로 배고픔을 때우다 굶어죽었다. 조왕 천은 속 좁고 음탕하여 좋은 장수를 배척했다. 조앙이 주 왕실의 난을 토벌한 공을 기리며 제13 「조세가」를 지었다.
필만이 위에 봉해졌고, 점쟁이는 이를 예언한 바 있다. 위강이 양간의 마부를 죽이고, 융적과 진이 우호관계를 주선했다. 문후는 인의를 귀하게 여겨 자하를 스승으로 모셨다. 혜왕이 교만에 빠져 자신을 과시하다가 제․진나라의 공격을 받았다. 안희왕이 신릉군을 의심하자 제후들이 위나라를 돕지 않았다. 그러다 끝내 수도 대량이 점령 당하고 왕 가는 포로로 잡혀 노복이 되었다. 진 문공의 패업 성취를 도운 무자를 칭송하며 제14 「위세가」를 지었다.
한궐의 음덕으로 조무가 조씨 집안을 부흥시켜 끊어진 대를 잇게 하고 폐지된 제사를 회복케 하니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소후가 열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신불해를 중용하였기 때문이다. 안왕이 한비자를 의심하여 믿지 않으니 진나라가 공격해왔다. 한궐이 진나라를 돕고 주 천자를 수호한 일을 칭송하여 제15 「한세가」를 지었다.
전완이 난리를 피해 제나라로 가서 도움을 청했다. 이후 5대에 걸쳐 은밀히 은혜를 베푸니 제나라 사람들이 칭찬했다. 전성자 때 제나라 정권을 독점했고, 전화 때는 제후에 봉해졌다. 제왕 건이 간계에 빠져 진나라에 항복하니 진나라는 그를 공으로 옮겨 살게 했다. 선왕과 위왕이 난세임에도 홀로 주 왕실을 받든 것을 높이 평가하여 제16 「전경중완세가」를 지었다.
주 왕실은 쇠퇴해졌고, 제후들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예악이 무너지는 것을 슬퍼한 공자는 고대 전적들을 연구하고 왕도를 선전하고 고취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에 자신의 사상을 글로 나타내어, 천하를 위한 규범을 만들고 육예의 강령을 후세에 남겼다. 이에 제17 「공자세가」를 지었다.
걸나라와 주나라가 왕도를 잃자 탕과 무왕이 일어났고, 주 왕실이 왕도를 잃자 『춘추』가 나왔다. 진나라가 바른 정치를 잃어 진섭이 들고 일어났다. 제후들도 따라서 난을 일으키니 바람과 구름이 몰아치듯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천하의 봉기는 진섭의 난으로부터 발단되었으므로 제18 「진섭세가」를 지었다.
하남궁 성고대에서 박씨가 황제의 총애를 처음 받았다. 두씨는 뜻을 꺾고 마지못해 대나라로 갔지만 대왕이 황제가 되는 통에 두씨 일족 모두가 귀하신 몸이 되었다. 율희는 존귀한 자리만 믿고 교만하게 굴다가 그 틈을 탄 왕씨가 뜻을 얻었다. 진 황후가 너무 교만하게 군 탓에 위자부가 귀하신 몸이 되었다. 위자부의 이 같은 덕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제19 「외척세가」를 지었다.
한 고조는 속임수로 한신을 진나라에서 사로잡았다. 월나라와 초나라 사람들은 사납고 호전적이어서 고조의 동생 교를 초왕으로 봉하고 팽성에 도읍하여 회수와 사수 유역의 통치를 강화하니 한나라 종실의 울타리가 되었다. 유무가 사악함에 빠졌으나 유예로 하여금 유교의 제사를 다시 잇게 했다. 유교가 고조를 보필한 공을 높이 평가하여 제20 「초원왕세가」를 지었다.
고조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유고가 동참했다. 영포의 공격을 받아 형․오나라를 잃었다. 영릉후 유택이 여태후를 감격시켜 낭야왕에 봉해졌다. 축오에게 속아 제나라로 갔다가 돌아올 수 없게 되자 꾀를 내어 서쪽 관문을 넘어 장안으로 돌아왔다. 효문제를 옹립한 공으로 다시 연왕에 봉해졌다. 천하가 미처 평정되지 못한 때 유고와 유택은 친족의 신분으로 한 고조를 보좌하여 울타리가 되었으므로 제21 「형연세가」를 지었다.
천하는 평정되었으나 친족들이 적었다. 도혜왕 유비가 먼저 장성하여 동쪽 제나라 땅을 단단히 다스렸다. 애왕은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여씨 일족을 토벌했고, 난폭한 그의 외삼촌 사균 때문에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여왕은 누이와 간통하다가 주보언의 조사를 받고 자살하는 화를 당했다. 황제의 손발과 같았던 유비를 기리며 제22 「제도혜왕세가」를 남겼다.
초 패왕의 군대가 한왕을 형양에서 포위하여 3년 동안 서로 대치했다. 소하는 산서(관중)를 잘 지키고 호적에 따라 군사를 보충하고 양식이 끊어지지 않게 했다. 백성들로 하여금 한나라를 사랑하고 초나라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만들었다. 이에 제23 「소상국세가』를 지었다.
한신과 함께 위나라를 평정하고, 조나라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함락시킴으로써 마침내 초나라를 약하게 만들었다. 소하를 이어 상국이 되었으나 바꾸지도 개혁하지도 않으니 백성들이 편안했다. 자기 공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은 조참을 가상히 여겨 제24 「조상국세가」를 기록했다.
군대의 장막 안에서 책략을 구사하여 귀신도 모르게 승리를 거둔 것은 장량이 그 일을 꾸몄기 때문이다. 이름을 떨칠 만한 큰일을 하지도 않았고 용감한 공적을 세운 적도 없지만 어려운 문제는 쉽게 해결하고 큰일은 작은 곳부터 처리했다. 이에 제25 「유후세가」를 지었다.
여섯 가지 기발한 계책을 사용하니 제후들이 모두 한에 복종했다. 여씨의 일도 진평이 주모한 것으로, 끝내는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이에 제26 「진승상세가」를 지었다.
여씨 일족이 결탁하여 황실을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주발이 바른 방법은 아니었지만 잘 대처하여 여씨 일족을 제거했다. 오․초의 반란 때 주아부는 창읍에 주둔하며 제나라와 조나라의 진출을 막았고, 양나라가 초나라의 힘을 빼도록 고의로 구원하지 않았다. 이에 제27 「강후세가」를 지었다.
오․초나라 등 7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울타리가 되어 황실을 지켜준 것은 양나라뿐이었다. 훗날 총애를 믿고 공로를 뽐내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오․초나라를 막은 공을 가상하게 여겨 제28 「양효왕세가」를 지었다.
다섯 후비의 자식들인 오종이 왕이 되어 친족이 화목을 이루고, 크고 작은 제후들이 울타리가 되어 각자 자기 직분을 다하니 분수를 모르고 천자 행세를 하려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제29 「오종세가」를 지었다.
지금 황제의 세 아들이 왕으로 봉해졌는데 그에 관한 황제와 신하들의 책문이 볼만하다. 이에 세가의 마지막 편인 제30 「삼왕세가」를 남긴다.
<‘열전’ 69편의 요지>
말세에는 이익을 다투지만 오직 저들만은 의리를 추구했다. 나라를 양보하고 굶어 죽으니 세상이 이들을 칭송했다. 이에 열전 첫 편으로 「백이열전」을 지었다.
안자는 검소했고, 관중은 사치스러웠다. 제 환공은 패업을 이루었고, 경공은 나라를 잘 다스렸다. 이에 제2 「관안열전」를 지었다.
노자는 사람이 일부러 일삼지 않으면 만물은 절로 조화를 이루고, 맑고 깨끗하면 만물이 절로 바르게 된다고 했다. 한비자는 사물의 발전과 변화에 근거하여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려고 했다. 이제 제3 「노자한비열전」을 지었다.
옛날 제왕들 때부터 『사마법』이 있었는데 양저가 이를 보다 더 해설했다. 이에 제4 「사마양저열전」을 지었다.
믿음과 청렴, 어짊과 용기가 없이는 병법을 전수하고 검술을 논할 수 없다. 이를 갖추어야만 안으로는 자신의 몸을 닦고 밖으로는 임기응변할 수 있다. 군자는 이를 기준으로 덕을 따졌다. 이에 제5 「손자오기열전」을 지었다.
태자 건이 모함을 당하자 그 화가 오사에게 미쳤다. 오상은 아버지를 구하려다 잡히고 오원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제6 「오자서열전」을 지었다.
공자가 사상과 문화를 전수하니 제자들이 이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하나 같이 인의를 숭상하는 스승의 표상이 되었다. 이에 제7 「중니제자열전」을 남겼다.
상앙이 위를 떠나 진으로 가서 법가의 학술을 밝히니 진의 국력은 강해지고 효공은 패주가 되었다. 후대에도 그 법을 그대로 지켜며 따랐다. 이에 제8 「상군열전」을 지었다.
천하가 진나라의 연횡책과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을 걱정하자 소진이 합종을 내세워 강력한 진나라를 억제하고 제후국들을 지켰다. 이에 제9 「소진열전」을 지었다.
6국이 소진의 합종을 따르자 장의는 자신의 주장(연횡)을 내세워 제후국들을 다시 흩어 놓았다. 이에 제10 「장의열전」을 지었다.
진나라가 동방의 제후국들을 압도한 것은 저리자와 감무의 책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제11 「저리자감무열전」을 지었다.
황하와 화산 일대를 휘어잡고 대량을 포위하여 제후들로 하여금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진나라를 섬기게 한 것은 위염의 공이었다. 이에 제12 「양후열전」을 지었다.
진나라가 남으로 초나라의 언과 영을 공격하고, 북으로 조나라를 장평에서 무찌른 다음 수도 한단을 포위한 것은 무안군이 통솔에 의한 것이었다. 초나라를 격파하고 월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왕전의 계책이었다. 이에 제13 「백기왕전열전」을 지었다.
유가와 묵가의 남겨진 저작들을 섭렵하고, 예의의 체계를 천명하여 이익을 앞세우는 혜왕을 단념시킨 맹자와 과거의 흥망성쇠를 종합한 순자를 위해 제14 「맹자순경열전」을 지었다.
빈객과 선비를 좋아하니 인재들이 설 땅으로 몰려들어 제나라를 위해 초나라와 위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 이에 제15 「맹상군열전」을 지었다.
풍정을 받아들이길 고집하다 진나라의 공격을 초래하여 초의 구원병으로 한단의 포위를 풀었으며, 자신의 군주를 제후들 사이에서 행세할 수 있게 했다. 이에 제16 「평원군우경열전」을 지었다.
부유하고 귀한 몸으로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 존중하고, 현명하고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몸을 낮추었으니 이는 오직 신릉군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제17 「위공자열전」을 지었다.
군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강국 진나라에서 빼내고, 유세가들을 남쪽 초나라로 오게 만든 것은 황헐의 의로움 때문이었다. 이에 제18 「춘신군열전」을 지었다.
범수는 위나라와 제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참아내고 강국 진나라에서 위세를 떨치다 유능한 인재채택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이 두 사람을 위해 제19 「범수채택열전」을 지었다.
모략으로 5국의 군대를 연합하여 약한 연나라를 위해 강국 제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고 선조의 치욕을 씻었다. 이에 제20 「악의열전」을 지었다.
강한 진나라를 상대로 자신의 의지를 펼치고, 염파에게는 자신을 낮추었다. 나라를 위해 개인의 은원을 따지지 않으니 두 사람 모두 제후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에 제21 「염파인상여열전」을 지었다.
민왕이 수도 임치를 잃고 거나라로 달아났지만, 오로지 전단이 즉묵을 지키며 기겁을 격파하고 제나라의 사직을 보존했다. 이에 제22 「전단열전」을 지었다.
교묘한 말로 진나라에게 포위된 성을 구했으나 자리와 녹봉을 가벼이 여기며 자신의 뜻대로 자유롭게 살았던 이들을 위해 제23 「노중연추양열전」을 지었다.
글로 정치를 풍자․비판하고, 비유를 들어 의로움을 나타냈으니 「이소」가 그것이다. 이에 제24 「굴원가생열전」을 지었다.
자초와 친분을 맺어 제후들이 앞 다투어 진나라를 섬기게 만들었다. 이에 제25 「여불위열전」을 지었다.
조말은 비수로 빼앗겼던 노나라 땅을 되찾고, 제나라는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양은 의리를 위해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 이에 제26 「자객열전」을 지었다.
큰 계획에 따라 시기적절하게 진나라의 세력 확대를 도움으로써 진나라가 천하의 뜻을 얻게 했으니 참모로서는 이사가 으뜸이었다. 이에 제27 「이사열전」을 지었다.
진나라를 위해 땅을 개척하고 인구를 늘렸다. 북으로 흉노를 몰아내고 황하를 거점으로 요새(장성)를 만들었다. 산의 견고함을 따라 유중을 건설했다. 이에 제28 「몽염열전」을 지었다.
조나라를 지키고 상산을 확보하여 하내를 확장했다. 초나라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한왕의 신의를 천하에 밝혔다. 이에 제29 「장이진여열전」을 지었다.
위표는 서하와 상당의 군대를 거두어 한왕을 따라 팽성에까지 이르렀다. 팽월은 양을 침략하여 항우를 괴롭혔다. 이에 제30 「위표팽월열전」을 지었다.
회남에서 초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귀의했다. 한나라는 그를 이용하여 대사마 주은을 얻고 마침내 해하에서 항우를 물리쳤다. 이에 제31 「경포열전」을 지었다.
초나라가 한나라의 경과 삭을 압박할 때 한신이 위나라와 조나라를 공략하고 연나라와 제나라를 평정하여 천하의 2/3를 한이 차지함으로써 항우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에 제32 「회음후열전」을 지었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공과 낙양에서 대치하고 있을 한왕 신은 영천을 지켰고, 노관은 항우의 군량 수송로를 끊었다. 이에 제33 「한신노관열전」을 지었다.
제후들이 초왕 항우를 떠나갈 때도 제왕은 성양에서 항우를 견제했다. 한왕이 그 틈에 팽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에 제34 「전담열전」을 지었다.
성을 공략하고 야전에서 공을 세워 승전보를 알린 것으로 말하자면 번쾌와 역상이 최고였다. 한왕을 위해 말채찍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이에 제35 「번역열전」을 지었다.
한나라가 겨우 안정을 이루었으나 문물제도가 분명치 못했다. 장창이 재정을 맡아 도량형을 정비하고 율력을 새로 제정했다. 이에 제36 「장승상열전」을 지었다.
언변으로 관계를 맺고 제후들을 회유하여 신임을 얻었다. 제후들은 모두 한나라와 가까워지고 한나라에 귀순하여 울타리와 같은 신하가 되었다. 이에 권37 「역생육고열전」을 지었다.
가까운 진․초나라 시기의 사건들을 상세히 알고 싶다면 늘 고조를 따라다니면서 제후들을 평정하는 것을 목격한 주설이 있다. 이에 제38 「부근괴성열전」을 지었다.
강한 호족들을 이주시키고 관중에 도읍을 정할 것과 흉노와 화친할 것을 건의했다. 조정의 의례를 밝히고 종묘 제례의식에 관한 법을 제정했다. 이에 제39 「유경숙손통열전」을 지었다.
강직한 성격을 부드럽게 바꾸어 끝내 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위세에 눌리지 않고 죽은 팽월을 배신하지 않았다. 이에 제40 「계포난포열전」을 지었다.
감히 군주의 싫어하는 안색에도 개의치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나타냈으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에 제41 「원앙조조열전」을 지었다.
법을 지키고 큰 이치를 잃지 않았다. 옛 현인의 덕을 말해서 군주를 더욱 현명하게 했다. 이에 제42 「장석지풍당열전」을 지었다.
너그럽고 넉넉하며 인자하고 효성스럽다. 말은 느리고 행동은 민첩했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처신하니 군자요 장자로다. 이에 제43 「만석장숙열전」을 지었다.
절개는 굳고 강직했다. 의리는 청렴이라는 말에 충분히 어울렸다. 행동은 어진 이들을 격려하기에 충분했다. 권세가 있는 자리에 임용되었지만 무례한 수단으로는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에 제44 「전숙열전」을 지었다.
의술을 논한 편작은 의학계의 조종이다. 그의 의술은 대단히 정교하고 분명하여 후세에도 그것을 따르며 바꾸지 못할 정도였다. 창공 정도라야 그에 접근한다 할 수 있다. 이에 제45 「편작창공열전」을 지었다.
유중은 작위가 깎였으나 아들 유비가 오나라 왕이 되었다. 한나라 초기 장강과 회수 사이를 진압했다. 이에 제46 「오왕비열전」을 지었다.
오․초나라가 난을 일으켰을 때 종실과 외척들 중 오직 두영이 어질고 선비들을 좋아했다. 선비들도 그를 따랐다. 군사를 이끌고 산동 형양에서 반란군에 맞서 싸웠다. 이에 제47 「위기무안열전」을 지었다.
지혜는 최근의 변화에 대응하기에 충분하고, 너그러움은 인재를 얻어 쓰기에 충분했다. 이에 제48 「한장유열전」을 지었다.
적을 만나서는 용감했으며, 사졸들에게는 어질게 사랑으로 대했다. 군령은 번거롭지 않았으니 장수와 사병들도 그를 사랑했다. 이에 제49 「이장군열전」을 지었다.
삼대 이래 흉노는 늘 중국의 근심과 피해를 주었다. 그들이 언제 강하고 언제 약한가를 살펴서 군비를 갖추거나 정벌에 나서고자 했다. 이에 제50 「흉노열전」을 지었다.
변방 요새를 곧바로 개통하여 황하 이남의 넓은 땅을 개척했다. 기련산에서 적을 격파하고 서역의 길을 통하게 하여 적을 북으로 몰아냈다. 이에 제51 「위장군표기열전」을 지었다.
대신과 종친들이 서로 서로 사치를 다툴 때 공손홍만은 먹고 입는 것을 절약하여 백관의 솔선수범이 되었다. 이에 제52 「평진후열전」을 지었다.
한나라가 중국을 평정하자 조타는 양월을 모아 남방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고 한 왕조에 조공했다. 이에 제53 「남월열전」을 지었다.
오나라가 난을 일으켰을 때 동구 사람들이 오왕 유비를 죽이고 붕산과 우산을 굳게 지키면서 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이에 권54 「동월열전」을 지었다.
연나라 태자 단이 요동 일대로 흩어지자 위만은 망명자들을 거두어 바다 동쪽에 집결시켜 진번을 안정시키고 변방을 지키면서 한나라의 변두리 신하인 외신이 되었다. 이에 제55 「조선열전」을 지었다.
당몽이 사신이 되어 야랑과의 교통로를 개척하니 공․작 지역의 우두머리들이 내신이 되고자 하여 관리들을 보내 통치했다. 이에 제56 「서남이열전」을 지었다.
「자허부」 같은 글과 「대인부」는 문장이 화려하고 과장된 부분이 많지만 그 요지는 풍자를 이용하여 ‘무위’의 정치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이에 제57 「사마상여열전」을 지었다.
경포가 반역하자 아들 유장이 그 나라를 받아 장강과 회수 남쪽을 다스렸다. 유안은 사납고 호전적인 초나라 지역의 백성들을 눌러 다독거렸다. 이에 제58 「회남형산열전」을 지었다.
법을 받들고 이치에 따라 일하는 관리들은 자신들의 공로와 능력을 뽐내지 않는다. 백성들이 그들을 칭찬하지도 않지만 그들 스스로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에 제59 「순리열전」을 지었다.
옷매무새를 반듯하게 하고 조정에 서면 신하들이 감히 허튼 소리를 못 꺼냈는데, 급암에게 그런 장중함이 있었다. 인재를 추천하길 좋아하여 장자라는 칭찬을 들었는데, 정당시에게 바로 그런 기개가 있었다. 이에 권60 「급정열전」을 지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조정에서는 학교 교육을 중시하지 않았다. 오로지 건원에서 원수에 이르는 동안 문교가 빛났다. 이에 제61 「유림열전」을 지었다.
순박한 본성을 버리고 간교하게 속임수나 쓰는 백성들로 변하여 죄를 범하고 법을 우롱하니 착한 사람으로는 교화할 수 없어 모든 것을 오로지 엄격한 형벌로 다스려 바로잡으려 했다. 이에 제62 「혹리열전」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한나라가 사신을 대하로 보내 교통을 트게 하니 서쪽 끝 먼 오랑캐들이 목을 길게 뺀 채 중국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에 제63 「대완열전」을 지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빈곤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은 어진 사람의 자세다. 믿음을 잃지 않고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의로운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다. 이에 제64 「유협열전」을 지었다.
군주를 모시며 군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안색을 편안하게 만들어 친근한 감정을 얻어낸다. 그저 미모만 가지고 총애를 얻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제65 「영행열전」을 지었다.
세속에 흐르지 않고 권세와 이익을 다투지 않으며 위아래 어디와도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세상의 큰 도를 따르니 사람들이 해를 가할 일도 없다. 이에 제66 「골계열전」을 지었다.
제․초․진․조나라의 점쟁이들은 풍속에 따라 점을 치는 방법이 달랐다.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제67 「일자열전」을 지었다.
거북 껍데기로 점을 치는 방법은 삼대가 다 달랐으며, 사방의 오랑캐들도 다 다른 방법으로 점을 쳤다. 그러나 그것으로 길흉화복을 결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략적으로 그 요지를 엿보려고 제68 「귀책열전」을 지었다.
정치를 방해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물건을 사고팔아 재산을 늘린 벼슬 없는 보통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혜롭기로 이름난 사람들도 이런 일을 한 바 있다. 이에 제69 「화식열전」을 지었다.
< 『사기』의 체제 및 ‘자서’의 요지>
우리 한나라는 오제의 뒤를 이었고 삼대의 위업을 이어 받았다. 주 왕조의 도가 바닥에 떨어지고, 진나라는 옛 문자들을 폐지하고 『시』․ 『서』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명당과 왕실 도서관인 석실과 금궤의 귀중한 도판과 전적들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말았다. 한나라가 일어나 소하가 법령을 정비하고, 한신이 군법을 확실하게 밝히고, 장창은 문물제도를 만들고, 숙손통은 의례를 정하니 학문의 기풍이 점점 발전하고 『시』와 『서』도 다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조참이 개공을 추천하여 황로를 말하게 하고, 가의와 조조는 신불해와 상앙의 법가 학문을 알리고, 공손홍은 유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렇게 해서 지난 100년 동안 천하에 남아 있던 서적이나 고문서가 모두 태사공에게로 수집되었다.
태사공은 부자가 대를 이어 그 자리를 맡게 되었는데 일찍이 아버지께서는 “오호라! 내 선조께서 일찍부터 이 일을 주관하여 당우 때부터 이름이 났고, 주 왕조에서도 다시 그 일을 맡았으니 사마씨는 대대로 천문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일이 우리에까지 왔으니 너는 단단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단단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에 천하에 흩어진 오랜 이야기들을 두루 모아 제왕들이 일어나게 된 자취를 살폈는데,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고 그 흥망성쇠를 보되 사실에 근거하여 결론을 지었다. 삼대 이상은 간략하게 추정하고, 진․한나라는 상세하게 기록하되, 위로는 황제 헌원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12편의 본기로 저술되었는데 모두 나름대로의 뼈대를 제시했다.
사건은 많은데 발생한 시간이 달라 연대가 분명치 않은 사건들이 있다. 그래서 10편의 표를 지었다.
예악의 증감, 율력의 개역, 병가의 지혜와 모략, 산천지리의 형세, 귀신에 대한 제사, 하늘과 인간의 관계, 각종 사물의 발전과 변화를 살피기 위해 8편의 서를 지었다.
28수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수레바퀴살 30개가 바퀴 안에 모여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제왕의 팔다리와 같은 신하들의 충성스러운 행동과 주상을 받드는 모습을 30편의 세가에다 담았다.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잘한 일에 매이지 않으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세상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 위해 70편의 열전을 남긴다.
이렇게 해서 총 130편에 52만 6,500자에 『태사공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간략한 서문을 통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으고 빠진 곳을 보충하여 나름의 견해를 밝혔다. 아울러 6경의 다양한 해석을 취하고, 제자백가의 서로 다른 학설도 절충했다. 그리하여 정본은 명산에 감추어두고, 부본은 서울에 남겨 나중에 성인군자들이 참고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 열전의 마지막 편인 제70 「태사공자서」다.
나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황제(黃帝)로부터 태초(太初) 연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편찬하고 서술하였으니 모두 130편이다.”
♣司馬遷 :
▴사마천의 <사기>의 마지막 권인 <太史公自序>는 그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요약 : 출생 BC 145경 ~사망 BC 85경.
사마천은 2세기까지 중국에서 나온 역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史記>의 저자이다.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 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太史令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후 같은 관직으로 뒤를 이었다. 太史令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와 조정 의례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BC 105년 중국 달력의 개편 작업을 담당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중국 역사서 <史記>의 집필에 착수하여 BC 90년에 완성했다. 그에게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준 이 책은 과거의 복잡한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이 돋보였다. 또한 주제가 후기의 역사서들처럼 궁정 중심의 정치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훨씬 폭넓은 사회계층을 다루고 있어서 훗날 중국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개요
2세기까지 중국에서 나온 역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사기 史記〉의 저자이다.
▴생애
그는 BC 140~110년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大事)와 조정 의례(儀禮)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 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BC 110년 황제가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례인 봉선(封禪)을 거행하기 위해 타이 산[泰山]으로 갈 때 수행원의 자격으로 따라갔다. 그해 아버지가 죽었고, 의무적인 상례기간이 지난 후인 BC 1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BC 105년 무제(武帝)의 즉위가 한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중국 달력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어 사마천이 이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이었던, 중국 역사서의 집필에 착수했다. 역사서 집필에 대한 열망은 무제의 통치하에서 중국의 발전이 절정기에 달했으므로, 그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겠다는 믿음으로 인해 한층 강해졌다. 그러나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당시 평판이 나쁘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황제 비방혐의로 심문을 당했다.
무제가 그를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마천 자신이 역사서를 완성하기 위해 처형의 연기를 간청했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처형되는 대신 궁형(宮刑:去勢刑)을 선고받았다. 훗날 무제의 화가 누그러지자 다시 황실의 총애를 받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당한 치욕을 잊지 못한 채 은퇴해서 역사서 완성에 몰두했다.
▴〈사기〉의 구성과 내용
〈사기〉는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 책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역사서가 있었으며, 궁정의 연대기 기록은 이미 이전의 황실에서는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 작은 제후국이었던 노(魯)의 〈춘추 春秋〉가 그러한 종류이다. 공자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기록된 사건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유교 경전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역사서인 〈사기〉가 이 위대한 경전 〈춘추〉와는 전혀 비교될 수조차 없으며, 자신은 공자와 같은 창작자가 아니라 단지 과거의 사실들을 전달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한의 역사가로서 그의 뒤를 이은 반고(班固:32경~92)는 사마천이 여러 학파의 주장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도가사상에 몰두한 점을 비난했다. 그러나 반고 및 그의 동시대인들이 당연한 규범으로 받아들였던 유교적 도덕기준은 사마천의 시기에는 반고의 시대(1세기경)와 같은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자신과 동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학파를 절충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국교(國敎) 혹은 널리 통용되는 도덕적·정치적 기준이 아직은 유동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주술적·초자연적인 힘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내린 도덕적 평가는 어느 하나의 일관된 이론에 부합될 수 없었다.
〈사기〉에서 그의 주된 업적은 과거의 복잡한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이다(역사학). 그가 서술한 과거의 사실들은 대부분 각자의 연대기를 따로 가지고 있던 많은 독립적인 제후국에서 유래하는, 서로 모순되는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과거의 사실들을 이전의 역사가들처럼 단순히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5부분으로 분류하여 기술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5부분 가운데 본기(本紀)는 당시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왕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표(表)는 연표(年表)인데 여러 독립적인 제후국들의 복잡한 역사를 명확하게 밝혀 어떤 시기에 각 제후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각 제후국의 상세한 역사는 세가(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행정의 중요한 측면들을 다루었다. 이들 부분으로부터 그가 유교의 도덕적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보다는, 당시 점점 중앙집권화되고 있던 조정에서 새로운 정책을 추구하던 실제적·개혁지향적인 정치가들을 더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끝부분은 열전(列傳)으로 다양한 유형의 유명 인물들의 전기를 다루었다. 여기에 선정된 인물들은 여러 가지 유형의 행위에 있어서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열전에는 여러 이민족에 관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국과 이들 이민족 간의 관계는 무제 때 점점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사기〉는 뒷날 기타 왕조사(正史)의 모범이 되기는 했지만, 다른 정사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사기〉는 다루고 있는 시대가 훨씬 긴데, 사마천 이후의 역사가들은 이 책에서처럼 인류의 전역사를 다루려는 시도를 한 경우가 드물었다. 또한 책을 저술하기 위해 모은 자료도 훨씬 다양했다. 그는 진(秦)·한(漢)의 황실 문헌뿐만 아니라 그보다 이전에 나온 여러 역사서, 제후국들의 궁정 연대기, 경전이나 제자백가의 저술 등의 기록을 모았다. 심지어 역사적인 사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가공의 이야기까지도 자료로 이용했다.
이 책의 주제는 후기의 역사서들처럼 궁정 중심의 정치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훨씬 폭넓은 사회계층을 다루어 대부호·상인·협객·비적떼·배우·총신(寵臣)과 훌륭하거나 혹은 그렇지 못한 관리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는 객관적인 역사를 구성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 역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인 역사를 고집해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들에게 도덕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 다루고 있는 인물들을 특징에 따라 유형화해 어떤 인물의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한 장(章)에서 기록했는가 하면, 동일한 인물의 잘못된 행동을 다른 장에 기록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가 역사에서 이끌어낸 교훈은 다양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사료(史料)에 대한 그의 비판적 안목이야말로 훨씬 더 주목할 만하다. 그는 각 장의 끝부분에 예리한 비판적 논평을 첨가했다.
▴영향
그는 역사가로서 뿐만 아니라 생동감있고 유연한 산문의 거장으로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후대의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초기 설화문학이나 소설에 미친 영향이 컸다. 그가 살던 시대 이래로 〈사기〉는 줄곧 중국 역사서의 걸작으로 인정받아왔으며, 훗날 중국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물론이고 중국 문학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던 여러 나라에서도 역사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