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리 맥일로이
스물두 살 북아일랜드 청년 로리 맥일로이, <골프 월드>의 존 휴건과 함께 경이롭고 파란만장했던 한 해를 돌아보다 25년쯤 후에 선수로서 걸어온 내 발자취를 돌아본다면 2011년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자 프로 생활의 토대였다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US오픈에서 거둔 메이저 대회 첫 승이지만, 그 밖의 2승도 이제부터 차근차근 승수를 쌓아가기 시작할 거라는 신호탄이 되어주었다.
내가 메이저 대회에서 첫 승을 거뒀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다양한 자리에서 실감했지만,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콩그레셔널에서 우승한 다음 날 엄마와 통화를 했을 때이다. 나는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메이저 챔피언이야.”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엄 맥도웰이 2010년 페블비치에서 우승했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런 엘리트 그룹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다섯 살 때부터 꿨던 꿈이 이루어졌다.
콩그레셔널에서 우승했을 때 제일 좋았던 건 그걸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선두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린에 올라갈 때마다 기립박수를 받았다. 나는 모든 순간을 만끽했다. 토너먼트에서 일진일퇴의 경쟁을 벌이면 이런 상황을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큰 점수 차이 덕분에 나는 갤러리를 바라보며 그들이 내 플레이를 즐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아빠를 찾아내는 느낌도 특별했다. 마스터즈의 마지막 라운드는 초반에 틀어지기 시작했다. 1번 홀의 그린을 향해 세컨드 샷을 할 때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주 들어 처음으로 주저하는 스윙이 나왔다. 다행히 볼은 그린 가장자리에 멈췄지만, 임팩트에서 손을 잡아 뺐다. 그리고는 당연하게도 3퍼팅을 했다. 마지막 라운드의 이상적인 출발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사실은 오거스타에서 일요일 날 1번 홀의 티 박스로 올라갈 때 느낌이 평소와 달랐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메이저 대회에서 선두로 나서는 것이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마스터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대회다. 그런 것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됐던 것이다. 그 위치에 설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은 내 선수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날이었다. 내 자신과 내 실력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그런데 마스터즈는 감정적으로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며칠이 지나고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오거스타에서 우승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으면 어떻게 하지? ” 엄마랑 통화를 하면서 눈물을 조금 흘렸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하지만 실력을 분석하고 개선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따져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보다는 플레이를 냉철하게 바라보기가 한결 쉽다.
마스터즈의 일요일 후반 나인은 너무 묘했다. 사실상 완전히 잘못한 샷은 없었지만(10번 홀의 티 샷도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볼을 홀컵에 넣을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긴장하고, 퍼팅에 지나치게 과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저 평소처럼 스트로크를 하면서 라인을 따라서 볼을 굴리는 데 집중했어야 했다. “이걸 꼭 집어넣어야 해” 대신 “들어가면 좋고, 안 들어가도 상관없다”는 마음을 가졌어야 했다.
선수 경력이라는 측면에서 US오픈에서의 우승은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내가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마스터즈를 상당히 빨리 잊을 수 있었다. 나는 실력을 향상하려고 노력했고, 그 기억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물론 대회가 끝나고 2주 동안은 힘들었다. 하지만 일단 토너먼트에 다시 나가기 시작하니까 괜찮아졌다. 오거스타는 금세 과거의 일이 됐다.
사람들은 ‘메이저 대회 챔피언이 되자 주변 사람의 태도가 달라졌느냐’고 묻는다. 잘 모르겠다. 내가 무슨 기운을 발산하거나 화제의 중심이 되더라도, 정작 나는 그걸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밖에서 나를 지켜보는 사람은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투어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카드를 손에 넣으려고 노력했던 2007년이나 지금이나 나를 똑같이 대한다. 반응이 달라진 건 팬, 그리고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올해에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두 번쯤 했다. 신중하려고 노력하고 충분히 생각한 다음에 말을 하려고 하지만, 가끔은 그럴 경우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기가 힘들 때가 있다. 내 의견을 말하면서도 그럴 듯하게 표현하기가 힘들다. 요령을 배워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요즘도 너무 솔직하게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릴 때가 있다.
그래도 올해 헤드 라인을 장식한 건 대부분 적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았다. 브리티시오픈에서 악천후에 플레이한 것에 대해서도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제이 타운젠트라는 캐스터에 대해 한 말도 실수였다. 내 캐디인 J. P 피츠제럴드에 대한 그의 비난을 그냥 들어 넘겼어야 했다. 제이를 ‘실패한 투어 프로’라고 말한 것은 조금 가혹했다! 그리고 PGA챔피언십에서 나무뿌리 옆에 떨어진 볼을 맞히려다가 부상을 입은 건 조금 민망했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다시는 그런 샷을 시도하지 않을 작정이다. 원치 않게 헤드 라인에 올라간 적도 있었다.
US오픈 직전에 아이티에 갔었다. 비행기에서도 수도인 포르토프랭스가 사실상 초토화됐다는 게 한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거리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마실 물도 없었다. 하나뿐인 골프코스에서 12만5000명이 지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접하니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나은 골퍼가 되었다. 예전처럼 결과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 이제는 인생이라는 큰 그림에서 골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안다. 보기나 나쁜 샷을 한 걸 놓고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에이전트를 바꾸기로 한 결정(앤드루 처비 챈들러에서 코너 리지로)은 알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중대한 사안이 되었는데, 거기에는 골프계의 전반적인 상황도 한 몫을 했다. 처비의 선수가 세 번째 메이저 대회까지 전부 석권하면서 이른바 ‘처비 슬램’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처비가 화제의 중심이 되고, 그의 의견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곧 원만히 처리되었다. 처비와 나는 지금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건 순수하게 사업적 결정이었다.
캐롤라인 워즈니아키와 나는 사귀기 시작할 때부터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이고, 나는 랭킹 2위(12월19일 현재 3위)의 골퍼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아직 얻지 못한 걸 성취했고(메이저 대회), 그녀는 내가 오르지 못한 순위에 올랐다는 건 조금 아이러니하다.
나는 한 번도 앞으로 메이저 대회 몇 승을 하겠다거나 토너먼트 몇 승을 목표로 한다는 식으로 숫자를 따져본 적이 없다. 나는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있지 않다. “2012년에는 메이저 대회 2승을 하고, 2013년에 2승을 더 해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아무리 그럴 능력이 있다고 해도 상황이 그런 식으로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목표를 세우는 건 준비하고 연습하는 부분일 뿐이다. 그래야 토너먼트에 나가 티오프를 했을 때 우승할 확률이 높아진다.
얼마 전에 타이거가 셰브론에서 우승하는 걸 봤다. 마지막의 플레이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는 직관과 우승을 향한 의지를 잃어버릴 사람이 아니다. 2012년에는 그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걸 보고 싶다. 세계 최고와 실력을 겨루고 싶고, 일요일에 타이거와 승부를 겨룬다면 내 인생 최고의 도전이 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날이 기다려진다. 엄청난 경험이자 그런 상황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내년 중에 그런 기회가 온다면 참 좋을 것 같다.
나에게 골프는 누군가를 위압적으로 누르려는 차원이 아니다. 코스에 나가서 내 게임에 집중하며 최선의 플레이를 이끌어내는 게 중요할 뿐이다. 코스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그렇게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전세계를 돌며 12주 동안 연속 대회에 출전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대회에서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내가 원해서 한 일이기는 하지만, 많은 걸 배웠고 두 번 다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연속 출전은 2~3주가 한계다. 그런 다음에는 두 주 정도 쉬어야 한다.
얼마 전에 라이더컵 직전까지 내년도 일정을 정리했다. 캐롤라인과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면서 최선의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도록 균형을 추구하는 데 중점을 뒀다.
캐롤라인을 내 친구에게 데려가서 레슨을 받게 했다. 나는 레슨에는 영 소질이 없는데, 골프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설명하기가 힘들다. 레슨을 다 받은 후에 캐롤라인은 7번 아이언을 약 140야드 정도까지 보냈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녀의 골프 실력이 내 테니스 실력보다 월등할 전망이다. 나는 테니스를 할 때마다 잘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속이 상한다!
올해는 내가 아이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에 따른 책임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다. 내가 어린 아이, 그리고 나와 골프에 대한 그 아이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이 다가와서 ‘나처럼 되고 싶다’거나 ‘가장 좋아하는 골퍼가 나’라고 말해주면 기분이 아주 좋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몇 주 정도 사라졌다 돌아올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가끔은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죄책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현실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지고 있던 자동차도 몇 대 팔았다. 부동산을 조금 구입하기는 했지만, 지나친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아일랜드에 있는 집에 개인 연습 시설을 만들었다. 내 선수 생활에 투자를 한 것이다.
2012년에 PGA투어에 재합류해도 미국 일정은 두 대회 정도만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미국에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에 좀 더 오랫동안 머물면서 플레이를 하기가 수월해졌다. 그렇다고 유러피언투어를 등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러피언투어에는 최대한 힘을 보탤 것이다. 루크 도널드는 올해 양쪽 투어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입증해 보였다. 올해는 나에게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근사한 한 해였다. 순간마다 즐거웠다.
글 로리 맥일로이 에디터 존 휴건 사진 샘 그린우드, J. D. 쿠반
타이거 우즈
별은 땅으로 떨어졌지만 부상과 부진, 추측과 예단의 와중에 스윙을 되찾으려는 그의 노력에서 희망이 엿보인다
타이거 우즈의 연대기에서 몇 해는 ‘엄청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마땅하지만 ‘난처한’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할 해도 있다. 그리고 2011년에는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은’이라는 수식어를 제안하고자 한다.
헤드 라인에서 뭐라고 떠들든 골프에서 위대한 모습을 보인 한 해는 아니었다. 사실상 선수로서는 그러니까, US주니어대회에서 첫 승을 거두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최악의 해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2011년 초에는 재기의 가능성을 보였는데, 그런 예측이 나온 건 2010년 말에 라이더컵의 월요일 싱글 매치에서 완승을 거두고 셰브론월드챌린지에서 우승을 거의 손에 넣었었기 때문이었다(어딘가 익숙하게 들린다고?). 하지만 토리파인스와 WGC액센추어매치플레이, 도럴과 베이힐, 지금까지 그가 가장 강세를 보였던 네 곳의 코스 그리고, 또는 대회에서 모두 무기력한 플레이를 펼쳤다. 그러다가 그의 게임이 퇴행했다는 게 더없이 확실해진 순간에 그는 다시 한 번 마스터즈에서 아깝게 우승을 놓쳤다.
그리고 골프와 관련한 이야기는 이게 거의 전부였다. 타이거는 부상을 당했고(오거스타내셔널의 3라운드에서 솔잎 위에 떨어진 볼을 치려다가 왼쪽 무릎과 아킬레스건에 새로 무리가 갔다) 회복하는 데 거의 다섯 달이 걸렸다. 플레이어스에서는 아홉 홀 동안 끔찍한 플레이를 펼치다가 기권했고, US오픈과 브리티시오픈에는 부상 회복을 이유로 불참했으며, PGA챔피언십에서도 끔찍한 36홀 끝에 미스 컷했고, PGA투어 플레이오프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연말에 셰브론월드챌린지에서 우승을 하면서 2년간의 우승 가뭄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조금 가혹하더라도 PGA투어의 정규 시즌이 끝나고 두 달 후에 제한된 선수만이 출전한 대회였다는 걸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타이거는 늘 그랬듯이 올해도 끊임없이 뉴스를 만들어냈다. 7월에는 오랜 캐디였던 스티브 윌리엄스를 해고했고, 뒤이어 터져 나온 비난(양쪽에서 모두 나왔지만 주로 윌리엄스가)은 타이거와 행크 해니(또는 부치 하먼, 또는 엘린 노르데그린, 또는 휴즈 노튼)가 갈라선 이후 골프계 최고의 결별 사태를 끝없이 장식했다. 프레드 커플스는 주장 선발 카드를 이용해서 그를 프레지던츠컵 미국 팀에 선발했고(포인트로는 도저히 자격을 얻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사실조차 거의 한 달 뒤인 8월25일에야 발표함으로써 논란을 일으켰다. 10월에 우즈는 프라이스닷컴오픈에 출전했는데, 그가 가을 시리즈에 출전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측불허 통제불능의 한 해를 그래도 우승으로 마무리한 것은 우즈와 그의 팬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셰브론에서의 우승으로 그를 향한 세상의 관심이 코스 밖에서 코스 안으로 다시 옮겨간 것도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타이거는 앞으로도 그곳에서 뉴스를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프 러셀
벨리 퍼터
클럽을 배에 대고 플레이하는 게 이렇게 유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여러 선수(몇몇 PGA투어에서는 많을 경우 20명까지)가 사용하며 우승까지 거두자(PGA챔피언십 키건 브래들리(사진)를 포함해 6승) 얼마 전까지만 해도 퍼팅 할 줄 모르는 사람의 버팀목 정도로 여겨졌던 벨리 퍼터가 그야말로 대세가 됐다. 프로의 성공을 본 소비자가 프로숍으로 달려갔지만, 유럽의 한 미니투어에서 사용을 금지했고, 더 중요한 건 룰 운영기구가 클럽을 몸에 대는 것을 허용할지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 마이클 존슨
청야니
현재 LPGA투어의 지상과제는 청야니의 은퇴를 막는 것이다. 애니카 소렌스탐, 그리고 또 한 명의 은퇴 선수인 로레나 오초아 못지않게 투어를 장악하고 있는 청야니는 2011년에 메이저 대회 2승을 포함해서 LPGA투어에서만 7승을 거뒀으며 그밖의 투어에서도 5승을 더 보탰다. 대만 출신의 스물두 살인 청야니는 이미 메이저 대회 5승을 거뒀으며 LPGA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27포인트 가운데 20포인트를 획득했다. PGA투어의 푸에르토리코오픈에 스폰서 초청을 받았지만 거절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로서는. 론 시락
루크 도널드의 이중 플레이
루크 도널드가 같은 해에 미국PGA와 유러피언투어의 상금 랭킹 1위 타이틀을 동시 석권했다(타이거 우즈의 사례는 한 번 이상이었지만 그는 유러피언투어에 정식으로 소속되었던 적이 없다). 덕분에 서른네 살의 영국 출신인 그의 한 해도 찬란했다. 그는 작년 5월부터 세계 랭킹 1위를 지키고 있으며 2011년에 정상에 오른 세 명의 유럽 선수 가운데 한 명이다. 나머지 두 사람은 마틴 카이머(WGC액센추어매치플레이 결승전에서 루크 도널드에게 패했다)와 리 웨스트우드(BMW PGA챔피언십의 플레이오프에서 도널드에게 패했다)이다. 존 안토니니
대런 클라크
무뚝뚝한 이 북아일랜드 사나이가 로열세인트조지스에 도착했을 땐 세계 랭킹 111위였고, 제140회 브리티시오픈에서 그의 우승 확률은 170대 1이었다. 마흔두 살 나이, 브리티시오픈 19번 출전에 단 한 개의 클라렛저그도 얻지 못한 전력. 그를 우승 후보로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가 독특한 개성의 레이아웃과 변덕스런 날씨에도 흔들림 없이 2라운드 공동 선두로 올라서자 그에게 ‘암흑의 왕자’라는 별명을 붙여준 멘탈의 약점이 그 대회에서만큼은 자취를 감췄다는 게 분명해 보였고, 덕분에 54번의 시도 만에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클라크가 날씨, 그리고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미국의 스타 플레이어 2명을 제치고 뜻밖의 우승을 거두자 축하의 물결이 이어졌다. 팀 머피
세베, 잠들다
세베 바예스테로스는 뇌종양으로 투병한 끝에 아직 젊은 나이인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깊은 슬픔을 안겨줬지만, 그의 플레이는 골프팬에게 오래도록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될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메이저 대회 5승을 거두며 유럽의 골프 부흥을 이끌었던 스페인의 바예스테로스는 까다로운 성격과는 달리 클럽만 손에 쥐면 통찰력을 발휘하는 천재였다. 볼에는 귀가 없지만, 그의 전성기 시절 플레이를 보면 마치 볼이 그의 말을 듣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빌 필즈
팀 핀쳄
PGA투어 수장은 NBA나 NFL, 또는 MLB 커미셔너만큼의 보수를 받지 못하고, 어쩌면 스포츠계에서 가장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7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핀쳄은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난 속에서 투어를 이끌어오면서도 스폰서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팜스프링스와 힐튼헤드아일랜드 대회에 휴마나와 RBC라는 스폰서를 추가했고, NBC, CBS와 9년간의 중계권 계약을 맺었다. 같은 시기에 1인자였던 스타의 선수 인생까지 좌초된 걸 감안하면 결코 나쁜 성적이라고 할 수 없다. 론 시락
스티브 윌리엄스 & 회전목마 캐디
타이거 우즈가 얼마 전에 마지막 두 홀에서 버디를 기록하며 셰브론월드챌린지를 차지했을 때 그의 캐디인 조 라카바는 우즈가 2년 여 만에 거둔 우승의 공을 함께 나누고픈 유혹을 느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공치사를 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우승을 해본 적이 없다. 그것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라카바는 우즈의 캐디가 되어 단 4번째 대회를 마친 후 셔우드CC에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만 몇몇 대회에서 선수의 우승에 편승해본 적은 있고, 그건 즐거운 경험이었다.”
라카바의 말에는 그의 선임자이자 어느 날 갑자기 달변가로 돌변한 스티브 윌리엄스를 향한 직격탄이 담겨 있었다. 우즈는 메이저 대회 13승을 포함해서 PGA투어 63승을 함께 했던 윌리엄스를 지난 7월에 해고했다. 윌리엄스의 새 선수인 아담 스콧이 WGC브리지스톤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하자 윌리엄스는 대단히 공개적으로(일부에서 보기엔 꼴사납게) 승리의 춤을 췄다. “지금까지 33년 동안 캐디를 하면서 모두 145번의 우승에 동참했지만, 나에겐 이번 우승이 최고였다.” 윌리엄스가 애크론에서 한 말이다.
프로 골프에서 캐디 교체야 일상다반사지만, 2011년은 몇 건의 큼직한 이동과 한 사람의 요란한 입 때문에 유난히 주목을 받았다. 발단은 스콧이었던 것 같은데, 운이 따르지 않았던 더스틴 존슨과 보비 브라운이 결별하고 존슨이 프레드 커플스의 오랜 파트너였던 라카바를 유인해낸 지 몇 주 후에 스콧은 늘 믿음직했던 토니 나바로를 내보냈다.
하지만 진짜 사건은 그때 일어났다. 우즈는 자신이 무릎과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플레이를 못하고 있는 동안 US오픈에서 스콧의 캐디로 가욋일을 했던 윌리엄스가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부상선수 명단에서 빠진 지 2주 만에 오래 호흡을 맞춰 온 캐디를 해고했지만, 파이어스톤CC에서 ‘스콧이 우승했다’며 깍깍거리는 윌리엄스의 환호성을 들어야했다.
알고 보니 윌리엄스는 11월에 열린 연례 ‘캐디 어워드’ 만찬에서 우승보다 피부색과 예전 선수에 대해 더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나중에 무례한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그 전에 라카바는 젊고 앞길이 밝은 존슨을 떠나 나이가 많지만 여전히 앞길이 밝은 우즈와 손을 잡았다. 세계 랭킹 1위였던 우즈는 시즌 막판에 호주오픈에서 3위를 하고, 프레지던츠컵에서 미국 팀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포인트를 획득했으며, 자신이 주최하는 인비테이셔널 대회에서 우승했다. 라카바? 그는 우즈 상승세에 편승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데이브 세들로스키
처비 챈들러
앤드루 (처비) 챈들러는 2011년에 거물로 급부상했지만 어쩌면 너무 갑작스럽게 몸집이 커졌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세 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소속 선수가 우승을 거두면서 이른바 ‘처비 슬램’의 가능성이 예상되고 그의 이름이 끝없이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유러피언투어에서 활약하다가 1급 에이전트로 전향한 그는 시즌 막판에 스타 선수 두 명을 잃었다. 어니 엘스와 로리 맥일로이가 ‘좀 더 개인적인 관리를 받고 싶다’면서 인터내셔널 스포츠 매니지먼트로 소속을 옮기자 잔뜩 부풀었던 처비의 거품이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팀 로사포르트
마스터즈 일요일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즈 일요일에 서른한 번째 생일을 맞으며 공동 선두로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타이거의 귀환’. 하지만 우즈는 12번과 13번, 15번 홀에서 중요한 퍼팅을 놓쳤고, 아담 스콧과 제이슨 데이, 찰 슈웨첼이 그를 추월해서 질주했다. 결국 슈웨첼이 전례 없는 막판 네 홀 연속 버디로 데이와 스콧을 2타 차로 제치고 그린재킷을 차지했고(우즈와는 4타 차) 마스터즈의 파란만장한 역사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승부를 보여주었다. 론 시락
게임의 판도를 바꾼 사람들
성장을 멈춘 골프의 침체기는 2011년에 정점에 도달했고, 유명인사들이 행동에 나섰다. 1월에는 선마이크로시스템즈의 CEO 출신인 스콧 맥닐리가 지휘하는 ‘플로그톤’(영어 철자를 거꾸로 나열하면 ‘골프가 아니다’라는 뜻이 된다)을 출범했는데, 장비 관련 규칙을 완화하는 등 골프를 보다 재미있고 젊게 만들어서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두 달 뒤에는 <골프 다이제스트>의 회장인 제리 타드가 테일러메이드의 CEO 마크 킹의 제안에서 영감을 얻어 제1회 와이드오픈챔피언십을 개최했다. 모든 그린에 15인치의 홀컵을 설치한 노스캐롤라이나의 파인니들스에서 60명의 골퍼가 플레이를 펼쳤다. 7월에는 미국PGA와 USGA에서 12일에 걸쳐 ‘티잇포워드(Tee it Forward)’ 전국 예선을 개최했다. 골퍼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긴 코스 때문에 좌절을 느낄 때가 많다는 아담스골프의 바니 아담스 전 회장의 주장에 따라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잭 니클러스도 일익을 담당했다. 노동절 주말에 뮤어필드빌리지GC의 회원들은 정상보다 2배 큰 홀컵을 놓고 12홀 대회를 펼쳤다. 팀 머피
키건 브래들리
무명에서 세계 랭킹 30위로 뛰어오른 뉴잉글랜드 출신의 브래들리는 고모(LPGA 31승의 팻 브래들리)에게서 물려받은 강인함을 발휘해 독자적인 입지를 다졌다
크리스토퍼 월켄이 “열이 날 때 이걸 낫게 해줄 유일한 처방은 더 많은 카우벨뿐! ”이라고 단언하고 윌 페럴이 그걸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에서 패러디한 후로, 2011년의 키건 브래들리처럼 이 조그만 타악기로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재미를 안겨준 사람은 없었다. 검은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이 호리호리한 사나이는 과소평가했다간 큰 코 다친다. 뉴잉글랜드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애틀랜타AC에서 열린 PGA챔피언십에서도 브래들리 가문의 전통에 따라 용감하게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연주했다.
지금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건 과연 앞으로도 카우벨이 키건을 위해 계속 울려줄 것인지의 여부이다. 루키가 PGA투어에서 우승한다는 건 대단한 성과다. PGA챔피언십에서 제이슨 터프너를 이긴 것을 비롯해서 두 번의 플레이오프를 통해 2승을 거둔다는 건 광란의 파티라도 벌일 만한 일이다. 그런데다가 생전 처음 출전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이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브래들리는 지금 은퇴를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는데, 시간이 갈수록 메이저 대회 승률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11년에는 ‘올해의 선수’가 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12개월 전에는 그의 이름이 후보에 오를 확률은 얼마나 됐을까? “작년 이맘때는 선수로서 아주 고민이 많았다. 소니대회 출전을 위해 떠나기 전날까지도 나는 엉망이었다. 긴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걱정이 됐다.” 그는 처음 10번의 대회에서 단 한 번 톱10에 진입했다. 그러다가 발레로텍사스오픈에서 지금의 캐디인 펩시를 만났다. “거기서 톱10에 들었고, 그 후로는 계속 승승장구했다.” 브래들리는 봅 로텔라 박사와 스윙 코치인 짐 맥린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브래들리는 프레지던츠컵에 뽑힐 수도 있었지만, 미국 팀 중에서 시즌을 맞바꾸고 싶은 선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공손한 말투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 바꾸지 않겠다. 하지만 팀원으로 선발된 선수는 전부 팀에 합류할 자격이 충분했다.”
브래들리의 PGA 우승을 단지 루키나 롱 퍼터만으로 정리할 수는 없다. 그의 우승으로 미국이 다시 한 번 메이저 대회의 지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스물다섯 살의 키건 브래들리가 멘토로 꼽는 필 미켈슨이 2010년 마스터즈에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한 후 오랜 가뭄 끝에 나온 귀중한 우승이었다.
찰 슈웨첼이 오거스타내셔널에서 버디로 우승을 낚고 로리 맥일로이가 US오픈에서 마치 해피밀 사은품을 받듯이 낙승을 거뒀을지 몰라도 2011년 골프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업적을 하나만 꼽는다면 메이저 챔피언십의 69번째 홀에서 트리플 보기를 하고도(제아무리 강인한 황소라도 기절할 만한 사건) 우승을 차지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에는 그린에 드러눕고 싶었다. 너무 기가 막혔다.” 브래들리는 파3인 15번 홀에서 기록한 트리플 보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 주에 WGC브리지스톤인비테이셔널에서도 마지막 나인 홀에서 무너진 게 속상했다. 너무 속상했다. 끔찍할 정도였다. 그 경험을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선수로 낙인찍히길 원치 않았다. 16번 홀에서 버디를 했을 땐 트리플 보기 후에 버디를 한 나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믿기지 않을 정도였고, 토너먼트의 우승은 잊어버렸다.”
10대 시절에 그는 부모가 이혼한 후 골프 프로인 아버지와 함께 6개월 동안 ‘틴컵2’라고 이름을 붙인 트레일러에서 살았다. “내 방에는 TV가 놓인 테이블이 있는데, 워너메이커 트로피와 트레일러 사진을 그 위에 올려놓고 아버지가 사용하던 투어 가방을 옆에 세워놨다.”
골프에서 앙코르란 아무리 카우벨 연주라도 접하기 힘들다. “다들 똑같은 얘기를 한다. 스스로에게 너무 부담을 주지 말고 플레이를 즐기라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짐 모리아티
패트릭 캔틀리
요즘 아마추어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신예들은 실력뿐만 아니라 능숙한 요령까지 갖추고 있을 때가 많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주 로스알라미토스 출신의 열아홉 살인 캔틀리의 독특한 태도는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허례허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태도 사이로 재능이 드러났다. UCLA 1학년 때 대학 최고 선수의 영예를 차지한 그는 PGA투어 대회에서 네 차례 톱25에 이름을 올렸다(트래블러스 2라운드에서 그가 기록한 60타는 투어의 2011년 최저타 기록이었다). 그러자 워커컵 미국 팀으로 뽑힌 그에게 프로 전향을 묻는 질문이 쏟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8월에 US아마추어 결승전에서 켈리 크래프트에게 패한 것은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라이언 해밀턴
프레지던츠컵
19대15로 미국 팀이 우승을 차지했지만, 스코어에서 짐작되는 것처럼 손쉬운 승리는 아니었는데 그렉 노먼이 이끈 인터내셔널 팀이 일요일 싱글 매치에서 초반에 승기를 잡은 탓도 있었다. 하지만 타이거 우즈가 등장하면서 다시 미국 팀으로 흐름이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 대회의 진정한 스타는 단단하고 빠른 로열멜버른이었다. 넓고 짧은 코스도 세계적인 선수를 시험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하면서 전략의 진검승부를 이끌어냈다. 제프 셰켈포드
필 vs 리스
시카고에 있는 코그힐은 PGA투어 프로(필 미켈슨)와 설계가인 리스 존스 사이에 벌어진 말싸움의 폭격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막말을 쏟아낸다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나온 말인 줄 알았다. 섬을 배경으로 촬영하는 프로에서 참가자의 투표로 또 누가 탈락했군, 아니면 입이 거칠기로 유명한 동료의 심기를 누가 건드리기라도 한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실제로 어느 도시에 사는 실제 가정주부들이 떼로 모여서 또 다른 어떤 가정주부를 윽박지르는 건가. 막말, 막말. 하여간 막말이 문제야.
9월 15~18일에 일리노이주 코그힐G&CC에서 BMW챔피언십이 열렸을 때 까칠한 공개 비난에 시달린 장본인은 일흔 살의 저명한 설계가 리스 존스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역사를 간직한 퍼블릭 코스를 손본 그의 리모델링에 불만을 제기했다.
“아무래도 돈을 돌려받아야 할 것 같다.” 스티브 스트리커는 US오픈을 유치하고 싶어서 3년 전에 존스에게 작업을 의뢰했던 코그힐의 소유주인 젬섹 가(家)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 안타깝다.”
이런. “다른 결과가 나왔어야 한다는 게 모두의 한결같은 마음이다. 이 작업을 맡을 만한 사람들 가운데 얼마든지 다른 인물을 선택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처음부터 다시 손을 본다면 정말 특별한 곳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이건 필 미켈슨의 말이다.
세상에. “설계가의 입장에서 볼 때 나는 리스 존스의 열렬한 팬은 아니다. 전략을 많이 요하지 않는 홀이 꽤 많다.” 루크 도널드도 합세했다.
쿠쿵. 전설적인 설계가인 로버트 트렌트 존스의 아들인 존스는 7번의 US오픈, 7번의 PGA챔피언십, 4번의 라이더컵, 2번의 워커컵과 1번의 프레지던츠컵을 개최한 코스를 작업하면서 ‘오픈 닥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최근 네 번의 오픈을 치른 코스 가운데 세 곳(토리파인스, 베스페이지블랙, 콩그레셔널)을 그가 재설계했다. 불도저로 지형을 바꾸고 나무를 심었으며, 과감하거나 은근한 변화로 각각의 코스를 더 어렵고 까다롭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투어선수 사이에서 인기 없는 인물이 되었다. 어렵고 까다로운 그의 코스는 어쩔 수 없이 필요에 의해 플레이하는 코스라는 얘기를 들었다. 존스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독설가가 되어버린 듯했다.
“내 코스를 논란거리로 만드는 건 오로지 플레이를 제대로 못하는 선수들뿐이다.” 그가 했던 말이다. 그의 코그힐은 2009년 BMW를 통해 공개되자마자 선수의 비난에 직면했다. 무조건 멀리, 무조건 높이, 변화가 없고 지루해. 오픈 닥터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올해는 비난의 기세가 더 거세졌다. US오픈을 유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BMW마저도 여러 코스에서 대회를 개최하겠다며 발을 빼기로 결정했다. 코그힐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선수의 비판이 정당성을 얻은 것이다.
“여기에는 사실상 샷 메이킹의 여지가 없다.” 언제나 달변인 미켈슨의 말이다. “그린 앞쪽이 막혀 있고, 할 수 있는 샷이라곤 높은 플롭 샷뿐이기 때문에 볼을 다루는 선수의 실력을 검증하지 못한다. 칩 샷 지역, 그린 주변에서 요구되는 샷의 가치, 일정한 실수에 따르는 대가, 그런 것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길 핸스나 크렌쇼 - 쿠어, 아니면 카일 필립스 같은 사람들, 자신의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뭔가 특별한 걸 만들어낼 사람의 작업을 보고 싶다.”
존스는 골퍼들이 토리파인스와 PGA챔피언십을 개최했던 애틀랜타AC를 비난하자 연초에는 미켈슨의 말에 즉각 반박했었다. “미켈슨이 본인의 설계 작업을 위해 다른 코스의 설계를 폄훼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그힐의 아웅다웅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존스는 골프채널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켈슨은 공동 56위를 했다. 스트리커는 36홀을 마친 후에 경기를 포기했다. 루크 도널드는 4위, 오길비는 10언더파로 3위를 차지했다.
아이고 골치야. 차라리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고 말지.
리 몬트빌
골프 채널
2011년에 골프채널에서 뭔가 그럴듯한 프로그램을 기대했던 골프팬은 과연 실망하지 않았다. 마이크 맥칼리가 사장으로 부임하고 베테랑 프로듀서인 톰 스타테이크스를 영입한 골프채널은 의욕적인 새 프로그램(<페허티>, <모닝 드라이브>)을 시작하고, 기존 프로그램(<골프 센트럴>, <빅 브레이크>)은 강화하면서 골프계 최고의 스타인 타이거 우즈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모든 투어와 시간대에 걸쳐 기록적인 시청률을 거뒀다. 한 관계자는 “모든 건 NBC와의 협력, 그리고 골프계에 끝없이 유입된 반가운 소식 덕분”이라고 말했다. 제프 러셀
렉시 톰슨
미국 선수가 LPGA ‘올해의 선수’로 뽑힌 건 94년의 베스 다니엘이 마지막이었다. 톰슨은 오랜 가뭄에 종지부를 찍을 새로운 희망으로 급부상했다. 올해 16세인 그녀는 9월에 나비스타LPGA클래식에서 우승하면서 투어 역사상 최연소 우승자가 되었고, 투어의 18세 이상 규정에 예외를 적용해줄 것을 청원해서 통과되었다. 12월에는 유러피언여자투어 두바이마스터즈에서도 우승했다. 톰슨은 벌써부터 2012년 ‘올해의 루키’로 손꼽히고 있다. 론 시락
오바마 vs 뵈이너
6월18일에 앤드루스공군기지GC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존 뵈이너 하원의장(공화당, 오하이오)이 한 팀을 이뤄 부통령인 조 바이든과 오하이오의 존 캐식 주지사를 상대로 1인 당 2달러의 매치를 벌였을 때가 2011년을 통틀어 공화당과 민주당이 보여준 최고의 공조였다. 백악관은 ‘의미 있는 만남’이라고 평했으며, 오바마와 뵈이너가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를 논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1년이 끝나도록 두 당은 적자감축에 대한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론 시락
브라질 올림픽을 향해
심사위원단에서 2016년 올림픽 코스 설계 공모 후보작을 8개로 좁혔지만, 최종 당선자가 공개되는 2012년 1월이면 거센 정치적 논란과 자존심이 걸린 이번 싸움이 다시 헤드 라인을 장식할 전망이다. 그때까지 잭 니클러스-애니카 소렌스탐, 그렉 노먼-로레나 오초아, 그리고 게리 플레이어 등이 끝까지 경합을 벌일 것이다. 미니멀리즘 쪽에는 톰 도크와 길 핸스, 마틴 호크트리 등이 버티고 있으며, 정치적 수완의 달인인 피터 톰슨과 로버트 트렌트 존스 등이 앞서 나가고 있다. 제프 셰켈포드
R11드라이버
예술적으로는 반 고흐가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화가 한 수 위지만, 색칠을 해 번 돈으로 치면 테일러메이드 R11 드라이버를 능가할 수 없다. 이 클럽은 출시되자마자 골퍼의 눈에 띄었고, PGA투어에서 9승을 거두면서 성능도 입증되었다. 세르히오 가르시아와 마틴 카이머를 내세워서 맨해튼 거리에서 샷을 하게 만들고 거대한 R11 모형을 샌디에이고 펫코야구장 우익수 파울 표시막대로 세우는 등, 영리한 마케팅 전략도 성공을 거두면서 하나에 400달러인 R11은 수십만 개가 팔려나갔다. 얼마나 벌었을지는 간단한 산수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존슨
솔하임컵
유럽은 이번에 반드시 이겨야 했다. 그러지 못할 경우 아시아와 그밖의 지역을 솔하임컵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2003년 이후 우승을 경험하지 못한 홈 팀은 아일랜드 더블린 인근에 있는 킬린캐슬에서 패색이 짙었지만, 수잔 패터슨과 아자하라 무노즈, 캐롤라인 헤드월, 그리고 크리스텔 뵐론 등이 마지막 4포인트 가운데 3.5포인트를 합작하면서 15대13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노르웨이와 스페인, 스웨덴, 그리고 네덜란드 출신의 4인조 덕분에 유럽 골프 전체가 갑자기 상승세를 띠게 되었다. 론 시락
웹 심슨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웹 심슨뿐일 것이다. “나는 내가 PGA투어의 위대한 선수가 될 재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심슨은 <골프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1년에 첫 승을 거둔 14명 가운데 한 명인 스물여섯 살의 심슨은 투어의 깜짝 스타로 등극했는데, 탄탄한 실력 덕분에 PGA챔피언인 키건 브래들리보다 오히려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윈드햄과 도이체방크에서 우승한 것 외에도 심슨은 2위를 세 번 차지했다. 취리히클래식에서는 본인의 잘못이 아니지만 볼이 움직였다면서 스스로 벌칙을 더하는 바람에 정규 라운드 우승을 놓친 후 플레이오프에서 패했다. 상금 랭킹 2위를 차지한 데 이어 프레지던츠컵에 미국 팀으로 출전하면서 시즌을 멋지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의 시즌은 더 화려할 수도 있었다. 10월에 USGA와 R&A는 뉴올리언스에서 그에게 벌칙을 가했던 규칙을 개정했다. 존 안토니니
수염
골프의 성장이 침체됐다고 누가 그랬나? 적어도 수염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2011년에는 다양한 선수가 수염을 기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프 시즌에 거의 회색곰 수준으로 수염을 기른 글로버부터 프레지던츠컵 때 <핑크 팬더>에 나오는 클루소 형사처럼 콧수염을 기른 채 나타나서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은 제프 오길비까지, PGA투어에서 대회가 열릴 때면 누군가는 면도기를 잃어버린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수염을 유행으로 볼 수도 있고, 면도기를 사다가 안겨주고 싶을 수도 있다. 팀 머피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열린 US여자오픈은 위험한 기상 상태로 인해 여섯 번이나 플레이를 중단하면서 월요일에야 끝이 났다.
악천후
버몬트의 대규모 홍수부터 장기간 이어진 텍사스의 고온현상까지 극한의 기후는 코스와 대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버몬트 동부에 있는 우드스톡CC의 프로숍 출입문에는 작은 공지를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골프 코스 올해 폐장합니다.’ 컴컴한 내부에는 옷도 입히지 않은 마네킹이 세워져 있었다. 잔뜩 흐린 10월의 어느 날 아침, 클럽하우스 앞의 넓은 주차장에는 자동차가 단 두 대뿐이었고, 들리는 소리라곤 길가의 나무에서 돌능금이 떨어지는 소리뿐이었다. “조용하다. 여긴 완전히 유령 마을이 되어버렸다.” 로터리클럽의 오찬모임을 준비하던 클럽 직원이 말했다.
8월28일에 허리케인 아이린으로 인한 홍수가 버몬트를 휩쓴 후, 두 달 가까이 주변은 기괴할 정도로 조용했고 골퍼로 들썩였어야 할 단풍 시즌도 있었는가 싶게 지나가버렸다. “그 일요일에 나는 오후 1시쯤 이곳을 떠났다.” 1995년부터 우드스톡의 코스 관리인으로 일해온 팀 스탠우드는 말했다. “그때 이미 강수량이 17cm가 넘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 갔다.” 2011년에는 다양한, 그리고 대부분 극단적이었던 자연 현상의 여파로, 이런 반응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스포츠업계는 악천후에 시달렸고, 토너먼트의 중단과 취소부터 중서부와 남서부의 가뭄으로 인한 잔디 훼손, 동부를 휩쓴 파괴적인 홍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손실을 겪었다. 2012년 라이더컵 개최지인 메디나CC는 무더위로 인해 그린이 훼손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뉴욕주 엔디콧에 있는 앙주아GC는 허리케인으로 서스쿼해나강이 범람하면서 2011년 남은 시즌을 포기했고, 2012년 딕스스포팅굳즈오픈도 6월에서 8월로 연기했다.
이렇게 엄청난 인명 피해에 비하면 약 한 달 뒤에 HP바이런넬슨챔피언십에서 일어난 일은 심각성은 훨씬 덜하지만, 여전히 이례적이었다. 텍사스주 어빙에 있는 TPC포시즌즈라스콜리나스에서 대회를 치르기 이틀 전에 테니스볼만한 크기가 섞인 우박이 코스를 난타해서 그린에 수천 개의 곰보자국을 만들었고, 관리 팀에서는 허둥지둥 보수에 나서야 했다.
그래도 넬슨은 예정대로 시작해서 차질 없이 끝났는데, 다른 대회였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PGA투어의 플레이오프 대회가 54홀로 축소되는 일도 있었다. 뉴저지주 에디슨에 있는 플레인필드CC에서 열렸던 바클레이스가 일정을 단축한 건 허리케인 아이린이 임박했다는 예보 때문이었다.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던 대회 측은 금요일에 54홀만 치르기로 결정했는데, 2009년 AT&T페블비치내셔널프로암 이후 3라운드로 축소한 첫 번째 PGA투어 대회였다. 대회는 일기가 나빠지기 훨씬 전인 토요일 오후 2시에 마무리됐다.
“비가 15~25cm 내릴 경우 카누를 타고도 가지 못할 홀이 네 개는 될 것이다.” PGA투어 관계자인 슬러거 화이트는 말했다.
콜로라도스프링스의 브로드무어에서 열린 US여자오픈은 72홀까지 완료하긴 했지만 위험한 날씨를 피해 여섯 번이나 대회를 중단하며 멈췄다 다시 시작하길 반복한 끝에 월요일 오후에야 간신히 마무리가 됐다. “이렇게 정신없는 토너먼트에서 플레이해보긴 처음이다.” 전년도 챔피언이었던 폴라 크리머는 말했다. “매일 아침마다 4시30분에 일어났다. 처음 이틀 동안 여섯 홀쯤 플레이했던 것 같다.” 목요일 오후 3시에 플레이가 중단됐을 때 18홀을 모두 마친 선수는 25명에 불과했고, 72명은 아예 첫 라운드를 시작하지도 못했다.
번개 재난 예방업체인 토르가드의 그렉 퀸은 USGA의 현장 기상예보관이었는데, 97년에 폭풍우 속에 멤피스에서 치른 PGA투어를 제외하면 아마 가장 바쁜 한 주였을 거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브로드무어는 산과 평원 사이에 놓여 있다. 폭풍은 산에서 콜로라도스프링스로 계속 이동하게 된다. 산에서는 폭풍이 16~20km 거리에 있어도 플레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폭풍이 산을 내려오기 시작하면 플레이를 할 수 없다. 대단히 위험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지역의 코스는 여름 내내 갈증에 시달렸다. 텍사스는 가뭄이 유난히 심해서 몇몇 지역은 두 달 넘게 37~38도를 넘나들면서도 비는 거의 내리지 않았다. 그러자 들불이 기승을 부렸고, 오스틴 외곽의 바스트롭 일대가 특히 심각했다. 바스트롭주립공원에서 로스트파인스GC의 총지배인으로 일하는 일흔 살의 로비 로빈슨은 9월4일에 간발의 차이로 집에서 도망쳤다(그의 집을 포함해서 모두 1600채가 들불에 소실됐다).
“불이 날 가능성은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끔찍할 줄은 몰랐다. 시속 64km의 바람이 불길을 몰아쳤다. 불이 나무 꼭대기에서 나무 꼭대기로 옮겨 붙는 수준이었다. 아내와 애완동물을 끌다시피 데리고 나와 차 두 대를 몰고 간신히 도망쳤다.”
로스트파인스는 그래도 피해가 크지 않았다. 불길이 코스를 조여오는 동안 여러 번 코스에 나가서 스프링클러를 튼 관리인 빈센트 티에리나 덕분에 잔디를 잃지 않았다. 몇몇 협곡의 관목이 일부 훼손된 코스는 10월1일에 전면 재개장했지만, 대부분이 불에 탄 주립공원은 12월 2일에야 문을 열었다. “화재로 인해 사업은 엉망이 됐다.” 로빈슨은 이번 달 초에 예전 집터에 새 집을 짓기 시작했다. “코스가 망가졌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회원도 많이 떠나갔다.”
버몬트에 떠내려 왔던 쓰레기이며 두껍게 쌓였던 흙(우드스톡은 10cm 남짓, 36홀 시설인 퀴치클럽의 경우 최대 90cm)은 오래 전에 치웠다. 퀴치의 레이크랜드 코스는 18홀이 모두 홍수로 훼손됐고, 하이랜드 코스의 6홀도 마찬가지였다. 우드스톡은 올 봄에 18홀을 개장할 계획이다. 퀴치의 하이랜드도 그때쯤 다시 문을 열고, 레이크랜드는 7월에 나인 홀은 개방했다가 2013년에 남은 나인 홀을 마저 오픈할 예정이다. 홍수가 나기 전에 계획했던 대대적인 재단장에도 가속이 붙었다. 4년이 아닌 3년 안에 모든 작업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재단장을 마치고 새롭게 꾸밀 수 있다는 것에 한 줄기 희망을 걸어본다.” 랠리어는 말했다.빌 필즈
첫댓글 헐 ~~ 용량 많아 일단 그림과 제목만 보고 패스합니다. ㅎㅎ여유 있을때 다시 볼께요.
글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