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서는 연신 “우리 군이 북한군을 격퇴하고 있다. 아니 이미 38선을 넘어 해주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라고 전한다. 그러나 그런 북한군의 전투기는 서울시 상공을 휘젓고 다니고 있고, 대포 소리가 외곽으로부터 점점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서울시민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이런 와중에 1950년 6월 27일 밤 9시, 중앙방송(KBS)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울려 퍼진다. 생중계였다.
“동포여러분”으로 시작한 이승만 대통령, “의정부를 탈환했다. 계속 진격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잘 돼가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불과 몇 시간 뒤에, 의정부는 물론, 창동, 미아리, 길음교, 남산까지 수도 서울의 전역이 적의 수중에 힘없이 넘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방송한 장소는 서울이 아니라 대전이었다.
대국민 사기 방송의 원조, 이승만
사건 개요는 이렇다. KBS대전방송국(현 총국) 유병은 방송과장은 6월 27일 저녁 7시 반에 갑자기 청사로 들어온 초대형 고급 승용차에 실려 간다. 당도한 곳은 충남지사 관사.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아니, 이 박사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놀라기가 무섭게 권총 든 비서관은 문을 잠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떨고 있는 KBS대전 방송과장에게 6가지 지침을 내렸다.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밤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라.
4. 내가 방송한 것을 서울에서는 녹음해서 밤에 여러 번 재방송하라.
5. 누가 묻더라도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6. 사전에 대통령 연설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해서는 안 된다.
방송과장은 우체국, 대전방송국, 중앙방송국(서울 본사)에 연락하고는 90여분 만에 밤 9시 생방송을 성사시켰다. 국민은 이승만 대통령이 중앙청 또는 경무대에서 방송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방송을 듣고 안심했던 국민은 낭패를 보게 됐다. 눈 뜨고 보니 서울이 온통 인민군의 소굴이 된 것이다. 방송을 듣고도 ‘무슨 소리냐, 국군이 연일 후퇴하고 있는데’ 이러며 늦게나마 남쪽으로 발길을 이어갔던 사람들, 이 사람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방송 후 몇 시간 뒤인 28일 새벽 2시, 북새통을 이루던 한강다리가 폭파됐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다리를 건너고 있던 800여 시민과 장병들을 비명에 보내버린 원흉은 국군이었다.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한 거라고는 하나 이 순간까지도 대한민국 정부에게 국민은 속여도 되고 죽여도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언제 ‘도망’했을까?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북한 인민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된다. 전황은 갈수록 불리하게 전개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머무는 맥아더 장군에게 도움을 구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도 S. O. S 신호를 날렸다. 서울 함락이 시간문제라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각료들은 27일 화요일 새벽 2시, 비밀리에 특별열차를 탄다. 수원을 거쳐 대전에 이른 이승만 대통령 일행, 그날 밤 9시 방송을 하게 된다. 이런 행정부의 대탈출을 국회의원들도 잘 몰랐던 모양이다. 210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설마 설마’하며 서울을 지키던 62명 중 8명은 피살되고 27명이 납북되거나 실종됐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군에 쫓겨 한양을 떠나던 조선시대 선조의 피난 행차가 생각난다. 당시 성난 백성들은 형조와 장예원(掌隸院, 노비문서를 보관하는 곳)에 불을 질렀다. 형조가 관할하던 옥에서 죄수들이 쏟아져 나왔고, 장예원이 소장하던 노비문서는 잿더미가 됐다.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내 팽개친 군주에 대한 반란이었다. 선조의 수난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행차 중에 돌을 맞았고, 원성을 샀던 관리들은 몰매 맞았으며, 심지어 선조의 왕자들을 왜놈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만으로도 국부의 권위는 물론,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마저 상실했다.
국민은 속여도 죽여도 되는 존재?
더 분노할 사안은, 국민으로 하여금 피난을 지연시켜서 더 많은 희생자를 유발했고, 서울시민을 공산치하에 넘기도록 원인 제공을 한 6.27 사기방송에 대해 정부 차원의 사과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한강 인도교 폭발은 또 어떤가. 군은 책임을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몽땅 뒤집어 씌웠다. 훗날 알려지게 된 사실이지만, 이 일은 육군 참모총장이 시킨 것이었다. 상부의 지시대로 한 죄로 목숨을 내놓게 된 것이다. 정직하지도 당당하지도 못한 정부였다.
‘한미 두 나라의 북한 침략 유도설’이 한 때 힘을 얻었던 배경도 당시 한국 정부의 어이없는 안보 태세에 있었다. 당시는 미군이 철수한 상태였다. 우리에겐 단 한 대도 없었던 전차 242대를 북한은 몰고 내려왔다고 한다. 뭘 믿고 그렇게 유유자적했던 것일까. 군의 대비 태세는 더 기막혔다. 전쟁 전날인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북한의 병력이 38선 근처로 집결중이라는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없이 군 수뇌부는 장병들에게 주말 휴가를 줬고, 일상적으로 행동했단다. 밤에는 육군본부에서 전방 사단장까지 집합해 새벽 2시까지 ‘뒤풀이’를 벌이기도 했다고 하니 말 다한 것 아닌가. 얼마나 화가 났던지 당시 이형근 2사단장은 “군 수뇌부에 적과 내통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이들
이승만 정부의 적폐(積弊)는 이걸로 끝이 아니다. 국민방위군사건을 아는가. 1.4 후퇴 때 일이다. 당시 제2국민병 말하자면 예비군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을 이끌던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해 착복했다. 이 때문에 제 때 보급 받지 못해 굶어서, 얼어서 죽은 사람만 9만 명이었다. 거창민간인학살사건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거창은 지리산과 가깝지? 거창 신원면 주민들 700명이 지리산 공비와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학살당했다. 아무리 전시라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외면할 민심이 아니었다. 때마침 이승만 대통령의 임기 1951년 11월 30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권교체는 명약관화했다.
그러나 권좌를 새 주인이 차지했던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 후 10년 동안 권좌를 유지했다. ‘전쟁 때 장수를 바꾸면 안 된다’는 정서와, 유엔군을 불러들이고 북한까지 진격한 점을 토대로 쌓은 ‘국난 수습의 공로’에 기댄 측면이 있다. 그러나 본질은 따로 있었다.
암울한 재집권 전망...'정치공작'으로 한방에!
‘정치 공작’을 시도한 것이다. 자기가 대통령되기 좋은 구조로 헌법을 바꾸려 했던 것이다. 야당은 물론 여당도 반대했다. 그래서 개헌안은 부결됐다. 여기에 굴할 이승만 대통령이었을까. 아니다. 훗날 4.19 혁명으로 무너지게 되는 자유당을 창당하고, 어용단체를 동원하고, 정치깡패 집단까지 앞장 세워 비판세력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겁박했다. 공권력은 쉬고 있었느냐. 그럴 리가. 경찰은 반대파 의원들을 속속 체포했다. 압권은 또 다시 내놓은 개헌안이 부결되지 않도록 야당 국회의원 50여 명을 태운 버스를 통째로 강제로 헌병대가 끌고 갔던 일이다. 물론 잡아가는데 있어 명목이 없지 않았다. “이 의원들이 국제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거짓 혐의였다.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또 한 번 대통령을 하게 됐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 재건된 이 씨 왕조 시대의 군주 이승만 대통령. 그의 말기엔 온통 아첨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여기서 이익흥 씨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일본 경찰 출신의 이익흥 당시 내무부장관은 1956년 어느 날, 광나루로 낚시하러 간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방귀를 뀌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이익흥 장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한마디 한 것이다. 낯 뜨거운 아부가 아닐 수 없다. 여담인데, 4.19 혁명이 나고 이익흥 씨가 야인이 됐을 때, MBC라디오 PD가 이 사람의 증언을 듣고 싶어했다. 특히 이익흥 씨 입으로 하는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따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 이익흥 씨가 해주겠나.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하지만 PD는 기지를 발휘해 뜻을 이루었다. 이익흥 씨에게 “장관님, 많은 사람들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마치 장관님이 한 것인 양 알고 있는데, 아니지요?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것이다. 모처럼 자기편을 만났다고 판단한 이익흥 씨, 한참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그래서 내가 그랬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내가 언제 했냐고!’”라고 했다. 말려든 것이다. PD는 쾌재를 부르고는 그 녹음 커트를 에코까지 넣어서 “보도특집, 그때 그 사람,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편”라는 타이틀을 만든 것이다. 이익흥 씨는 노발대발했지만, 이미 전파가 공중에 흩어진 후였다.
이렇게 권모술수로 독재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한 채 아첨꾼에 둘러싸여 견제다운 견제를 받지 못했던 이승만 정부. 부정선거라는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다가 결국 국민에 의해 축출된다. 민심은 하늘이다.
현 정부는 국가 안보를 책임질 능력과 권위가 있나
두 번 다시 이 나라에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데 과연 이견이 있을까. 그러나 실천 방안을 두고는 편이 갈린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감히 도발할 생각을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 군사 강성대국화 돼야 한다는 쪽과, 두루두루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화해 공존의 기틀을 세워야 한다는 쪽으로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정부는, 어떤 기조, 어떤 상황이건 유사시에 대비해야 한다.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면 한국 전쟁 당시 무방비로 당했던 상황과 무엇이 다를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는 위기, 이 위기를 방지할 능력과 권위가 현 정부에게 있을까.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새삼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