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관 가치관 이념 이데올로기를 생각하는 삶이……………….
우루무치에 진입하다
풍력발전소 몇몇 개는 실물로 본적이 있지만, 저렇게 대량으로 돌아가는 풍력발전소는
처음 대해본다.
이 광경이 열차 속도로 약 20분간 펼쳐진다
또한 거리에는 이정표와 간판이 왕징에 한글과 한자가 같이 존재 했듯이
위구르어와 한자가 같이 새겨져 있다
신강우루무치 위그루자치구의 구도
객실내의 언어에는 중국어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고유언어인 위구르어를 사용하고 있다
전화를 꺼내 우루무치에서 식당을 경영하고있는 지인과 통화를 해보았다
약 1시간후면 도착합니다 역에서 택시비가 얼마나 나옵니까
11위안에서 13위안 정도라는 답변이 들려온다
중국인을 바꾸겠습니다 위치 메모 부탁합니다
중국인 승무원에게 부탁을 하니 친절하게 메모를 해주었다
이곳 시간대는 북경과 약 2시간대의 시차가 있어나 중국의 강제시간 맞춤으로 북경시간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위그루인들은 자기들만의 시간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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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인 우루무치에 도착
북경에서 2박3일을 꼬박 달려왔다
역 광장에는 얼마 전 티벳의 영향으로 무장한 인민해방군 병사들과 공안들이 판을 벌이고있다
유신정권시절 계엄령 선포하의 박정희 정권말기 부산역이 생각난다
조금은 살벌한 분위기 승강장에서 택시에 승차하자 위구르족 운전수가 나를 한족으로 알았는지
중국어로 행선지로 물어온다 워스 한궈런 한국인이라고 하자 방향을 지인이 말한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차를몰기 시작한다 이에 메모지에 적혀 있는 요금을 보여주자 쓴 웃음만 지어오고있다
타지에서는 정신 바짝 차려야지라는 생각에.............
지인이 경영하는 식당에 도착하다 총지배인 조선족청년 김기호군이 입구에 마중 나와있다
오시느라 수고 했습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하고 식당 내부로 안내를 한다
제법 넓은 규모이다 한국평수로 한50평 직원은 요리사 포함11명
사장님은 세무관계로 조금 전에 나가셨다고 한다
사모님이 반갑게 맞이 해주었다 구면이 아니기에
어-머 오랜만 이내요 어떻게 혼자 몸으로 이 먼 곳까지
오실 생각을 했어요 가족은 어떻게 하고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부산촌놈이 어디에라도 못 가겠습니까
아! 글쎄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약속을 했는데
위그루여자들이 상당한 미인들이라고 지척에
소문이 나 있어 확실히 보고 오라고 해서 대표로 왔습니다
한국에 가서 제대로 설명 못하면 혼납니다 라고 조우 커
분위기를 바꾸어 본다
마침 식당에는 러시아여자와 결혼하여 카자흐스탄에 거주 하고 있다는
동년배정도의 한국사람이 식사 중이었다
사모님이 말하기를 마침 잘되었네요 저분도 혼자인데 계시는 동안
두분이 같이 다니시면
어색한 인사후 명함을 받고 보니 우루무치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국제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
내일 돌아간다는 그에게 첫인상은 그 동안 사회의 경험인지 지금까지
삶의 무게인지 어딘가 모를 절반만의 미소가 느껴진다
그가 말했다 반갑습니다 사장님한테 안형에 대해서 애기 들었습니다
어색한 감정을 뒤로하고 15도라는 중국 맥주를 서로 권해본다
강동호 나이는48세 경북 경산 출신으로 카자흐스탄에 온 것은 4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대한통운에 입사 부산진CY에서 6년 경산지점에서 7년 근무한후
퇴직금과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대출 그리고 펀드에 투자에 놓았던 자금으로
크레인을 구입 울산 항에서 조그만 사업을 시작 했으나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투자 금 전액을 모두 탕진해버렸다고 했다
그 결과 부인과이혼 아이들과의 헤어짐
형제도 친구도 모두 곁을 떠나버리고 조그만 보따리형태의 회사
몇 군데를 옮겨 다니며 재기에 안간힘을 써보았으나 적응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실의에 빠져 하루 하루를 알코올중독자처럼 술로서 나날을 보내고 우울증으로
자살도 시도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모진 것이 사람목숨이라 죽지도 못하고
방황하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의 충고와 도움으로 카자흐스탄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카자흐현지에서 약 1년 정도의 실무경험을 쌓은 후 형제자매로부터
자금을 융통 받아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4개월 전부터 흑자를
조금씩 내기 시작한다고 했다 데리고 있는 직원만 기사포함 10명이라고
그는 인생을 호사다마라고 말했다
믿었던 사람의 비애 가족과의 비애 냉정한 사회의 비애
이런 경우를 말할 때를 무엇이라고 할까 “다시 다난의 삶”
그냥 옛날 오랜 지기를 만난 것 같은
어떻게 지나온 삶의 여정이 이렇게도 나와 비슷한 무게가 주어 지는 것일까
그냥 간단한 식사 후 바자르 시장에 갈려고 했는데
이미 그와 나는 서로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간다 오늘 낮 동안의 일정을
모두 취소한 채 맥주병이 하나 둘씩 쌓여간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외출을 했던 지인이 들어온다 5년만의 만남 이다
내가 부산의 신양선박대행사 재직시 검수회사 직원과 하역회사 지게차기사로 같이 근무했기에
7년 연상 이제는 장년의 남자로 변해 버린 그가
동생 왔는가 반가움의 포옹을 해온다 표정은 잔주름만 조금 늘었을 뿐 예나 지금이나
항상 서글서글한 모습이다
사실 그는 부산의 모 중학교 역사교사 출신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상대방이 아무리 높은 직책에 있더라도 잘 잘못은
짚고 넘어가는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해서는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지금의 나 같은 융통성 없는 사람
그 놈의 성격 때문에 교장과 또한 동료 교사와의 마찰이 대단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과 거리를 두고 생활했고 회식이나 술자리 모임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다 이러니 그 조직에서는 항상 외톨이 신세
하루는 1학년 학생들의 단체하복 주문 시 갑자기 거래하던 업체가 바뀌자
교장실 문을 차고 들어가 따졌다고 한다
교장에게 지금까지의 교재 식당운영 수학여행 관련 건 그리고 수집한 정보를
조목조목 기록한 메모를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여기에 관련된 교감 교무주임
고참교사에게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교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건방진 놈 세상물정을 모르는 한심한 놈” 너 같은 놈
필요 없어 당장 나가라는 말에 격분하여
그자리 에서 어금니와 코뼈를 부셔버리고 밖으로 나와 교장의 그랜저 승용차에
불을 질러 버렸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얼마 동안 영어의 신분이 되었고 다시는 학교로 돌아 가지 못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화려한 과거”
술자리가 한사장이 합류하여 계속된다
그사이 사모님도 끼어 들었다
그냥 사는 이야기일 뿐이다
한사장은 내가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자
동생 요즘 고민이 많지 하고 슬며시 분위기를 바꾸려 한다
다 알고 있네 이 사람아 절대 조급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생각 하라고 충고한다
진로 문제를 진지 하게 토의 해보았다
한사장과 강동호씨는 나에게 이곳에서 1,2년 정도 실무경력을 쌓아볼 것과
트루판과 하미 쪽으로의 버스의 사업성을 진지하게 설명을 해 주고있다
나는 카스쪽으로 마음을 두고 있었지만 상당한 분쟁지역이라
절대 갈 곳이 못 된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하고있다
제법 밤이 깊었다 지인이 그만하고 노래방에 가자고 꼬신다
셋이서 노래방에 가다
K T V란 간판을 걸고 있는 업소 내부에 들어가보니 여기 또한 다민족
각양각색의 아가씨 한족 장족 카자흐족 티벳족 위그루족 회족 우즈벡족
머리가 아프다 룸에 들어가자 잠시 후 다양한 피부의 여자들이 족히 20명 정도는 들어온다
지인이 말하기를 여기 아가씨들은 25세 이상의 나이는 없다고 한다 또한 술값에 그들의 봉사료가
책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손님에게 수단 것 팁을 받는 것이 전부라고
또한 일단 룸에 들어오면 시간제한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받은 팁을 가지고 생활비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업소와 아가씨 는 별도라는 이야기
돈을 벌려고 서로 나오려고 하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되면 업소에서
인원을 제한 한다는 설명을 해준다
손님이 룸에 입장하면 무더기로 몰려가고 선택 받은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또 다른 손님의 선택을 기다린다 사람이 많다 보니 하루종일 선택받지도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했다
또한 특이한 것은 북경시간으로 오후 1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다니……………………
그만큼 취업하기도 어렵고 젊은 사람들이 할 일들이 없다는 현실이다
알고 보니 지인과 강동호씨 두 사람은 이 업소에서 꽤 유명한 인사였다?
두 사람 다 중국어도 상당히 유창하다
한국노래 칩도 반주기에 내장되어 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위그루 아가씨가 중국어로 물어온다 여기도 한류의 열풍인지 장동건 장나라 그리고 한국 드라마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표명해온다
또한 한국하고 자오시엔(북한)과 조선족이 어떤관계가 있는 것인지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투르키스탄과 위그루의 관계라고
차차 인사불성이 되어간다 오랜만에 제법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이른 새벽 숙소로 돌아와 그냥 골아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식사 후 강동호씨와 우루무치 탐방에 나섰다
그는 오늘 오후 3시 비행기로 알마타로 돌아 간다고 했다
몸도 피곤할 텐데 동행을 해주니 그저 미안함의 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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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강 위그루자치구 면적은 중국전체의 1/6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몽고. 러시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과거 실크로드의 최대의 도시 우루무치 주요자원은 철, 아연, 석탄 또한 소량의 석유도 매장 되어 있다
택시를 타고 바자르 시장에 도착하니 나 같은 피부의 인종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방대한 역사의 이슬람사원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과거 무굴제국의 찬란했던 영화가
살아나듯 벽면의 무늬가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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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입구에는 이제 7.8세쯤 되었을까 위그루소년들이 구두 통을 메고 구걸하듯
사람들에게 매달리고 있다 그것도 한, 둘이 아니라 아예 무리를 지어서
빛 바랜 사진 속 우리의 자화상
내가 유년기를 보내던 그때 그 소년 들처럼................
특히 이곳을 방문하는 외지인이 주요 대상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해봐야 고작 10위안(\1700)정도의 벌이라고 강동호씨가
이야기 하고 있다 그나마 재료비와 상납금을 빼고 나면 2-3위안이 전부라고
마음이 아프다 한참 재롱이나 부릴 나이에 생활전선 이라니
서서히 발길을 시장 중심부로 옮겨본다 이때 강동호씨가 양 꼬치를 대접하겠다며
즉석에서 화로에 구운 양고기 몇 점을 권한다
그러나 사실 시장입구에 진입할 때 느꼈지만 그들 특유의 매-쾌한 채취가 별로 와 닫지 않는다
고기 맛은 그렇다 하더라도 향이 너무 진하다
또한 조금의 살벌함에 (?)
이곳은 사막의 건조한 기후 때문에 대형동물인 말이나 소 야크 당나귀 등 은 도살을 금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은 주단백질 공급원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양을 끌고 와 그자리 에서 목을 치고
칼과 도끼로 해체한 뒤 작살로 찍어 고기덩어리를 옷 전시하듯 걸어놓는 장면이란
또한 가게 앞 플라스틱 상자에는 도살된 양머리들로 가득하다
이 양머리를 위그루들은 솥에다 넣고 쪄서 손으로 양의 눈부터 취식하고 있다
처음 보는 사람 에게는 가히 엽기적인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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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의 공예품 어린시절 만화영화 신밧드의 모험이 생각난다
각종 양탄자 휘어진 칼 여러 종류의 악기 거의 수공예 품이다
예쁘장한 칼을 1자루 구입하고 싶었으나 이동을 해야하기에 문제가 될까 싶어 포기했다
점심을 간단히 한 후 강동호씨를 배웅하다
나에게 첫인상이 너무 좋았다고 계속 인연이 주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첫 만남 이었지만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고 따뜻한 마음의 위로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떠나면서 그는 언제라도 카자흐에 있는 자신의 회사로 꼭 한번 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힘을 내라는 말을 남기며 손을 흔들었다
그가 떠난 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상념에 젖어본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리고 무작정 걸어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거대한 중국의 공안건물 앞에서 발길이 멈추어진다
건물내의 펄럭이는 붉은색의 오성기가 을씨년스럽게 더 붉어 보인다 건물 앞의 경비병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밀랍처럼 서있다
거리를 오가는 소박한 위그루사람들 남자는 작은모자를 쓰고 여자들은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서민들이 사는 그들의 마을로 진입을 해본다 주로 5층 건물의 아파트 70년대 초. 중반경 우리의 주공, 시영
아파트가 생각이 난다 진입로에는 각종 야채와 옷을 판매하는 장이 서있고 길은 비포장이다
비포장길에는 띄엄띄엄 당구대가 보인다 이용자는 남 여 노 소 자연스럽게 이용하고 있다
아파트 사이의 공간은 밭으로 사용하고 있고 각종 쓰레기가 악취를 풍기며 쌓여있다
그곳을 벗어나 우루무치시 청사가 있는 광장쪽으로 가보니 조그만 저수지 형태의 양어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낚시에 열중이다
여기 사람들은 평생을 가봐야 바다구경 한번 하기가 힘들다는 지인의 말이 떠오른다
위치상으로 지구에서 바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기 때문에
큼지막한 향어가 눈에 들어온다 잡은 물고기는 바로 그자리 에서 기름에 튀겨 버린다
버스를 타고 미이라 박물관에 도착 했으나 오는 날 이 장날인가
내부 수리 중이다 이곳 기후상 사막에 방치된 사체는 제대로 썩지 않는다고 한다
주로 300년 이상 된 미이라와 소장품을 전시해 놓는 곳이다
위그루의 거리를 배외하다
오전6시쯤 잠에서 깨어보니 사모님이 하루치 김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음 변하면 바로 돌아오라는 당부도 함께
이곳 우루무치 치안은 그래도 양호 한편에 속하고있다 한국교민 사회도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리고 있고
신강에서 제일 많은 외국자본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카스의 경우 이라크 무장단체를 상기하듯이 사막곳곳에 무장단체가 상주하여
중국정부에 강력한 저항을 하고 있다
사실은 카스에서 우리의 선교사가 납치된 아프가니스탄까지 직선거리로 얼마 되지 않는다
지인역시 가능한 버스이용 자제와 함께 안전한 기차를 이용할 것을 권하고있다
그러나 소 귀에 경 읽기가 아니라 평범하게 그곳까지 가기는 왜 이렇게도 싫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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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대국 중국을 상대로 성전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일제시대 당시 우리 또한 일본을 상대로 그렇게 했었다
임시정부의 이봉창 윤봉길 나석주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 대한독립군의 홍범도 등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우리의 독립단체나 그들의 무장단체가 무엇이 다르랴
또한 테러와 레지스탕스의 차이란 생각의 차이 일 뿐이다
그렇다 주권 없는 약소민족이 대외적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보일 수 있는 것은 지배국가의 요인암살,
지배국민에 대한 응징이라는 것을
***************************그냥 저의 소견입니다 마음에 두지 마세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듯 조금의 피해는 누구나 입을 수 있기에
설령 내 자신이 해당된다 해도 후회는 결코 없다
인생은 듯 없는 것
힘 있고 가진 자 와 그렇지 못한 자
“유”를 가지지 못해 쓰러져 가는 소수의 길손에 불과 한 것을......
지인은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버스터미널까지라도 동행하려고 하기에
누구에게도 신세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나는
배우면서 가겠습니다 라고 끝까지 만류하였다
자네 고집도참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카스에 도착하기 까지 절대 입을 열지 말게
외국인이 라는 것이 들통나면 위험하니까 자네 때문에 골치 아픈 숙제가 하나 더 늘었다며
전화기를 항상 켜놓으라고 당부한다 또한 이곳은 소매치기가 도를 넘고 있다고 충고한다
한사장 내외의 배웅을 받고 이제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지대 카스로 가기 위해
터미널로 향하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매표소에 한자로 적은 메모를 보여주며 중국어로 우루무치 커스
꽁꽁지처 라고 하자 내가 일본인으로 보였는지 서양인을 닮은 매표소직원이 고니찌와 니뽄
하며 미소를 짓는다
카스행 티켓 구입 후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보니
협소한 공간 특유의 발 냄새 쉽게 적응이 안될 것 같다
이 침대버스 카스까지 거리 서울-부산 약3배인 1470km 요금 227위안
운행시간 26-30시간 승객정원 36명 운전기사3명 안내원1명
처음 대하는 문화라 숨이 막힌다
이 좁은 공간에 근40명이라니 다리를 쭈-욱 펼 수도 없다
그나마 정원이 차지 않으면 발차시간이 되어도 한, 두 시간쯤 기다리는 것은 예사이다
승객 대부분은 위그루 한족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또한 터미널과 버스 내부에는 온통 위구르어 지금에서야 이들 속의 내가 이방인이 라는
것이 새삼 실감 날뿐
말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내 들통나고 말았다
소지하고 있던 책을 발견한 위그루 승무원이 환한 얼굴로 나를 보며 코리아 하고 말을 걸어온다
한사장이 충고를 그렇게 했는데 그냥 그렇다 라고 대답을 해버리자
승객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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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미르고원을 넘어가고 있다
순간 이 지역의 안타까운 역사가 떠오른다
옛날 조국 고구려의 후예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간직한 채 숨져간 비운의 당나라장수
동양의 한니밭 고선지의 모습이………….
서기668년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장자 남생과 신라의 김인문을 앞세우고 평양을 함락한 당나라 고종은 서기 681년
포로로 잡아왔던 백제의 의자왕과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을 귀양 보내고 점령지 요동지방(대련.단동.심양 장춘 하르빈.연길.훈춘)
약 300만(추정) 정도의 고구려유민들을 한족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당나라 전역으로 강제이주 시킨다 또한 대규모의
한족들을 (훗날 거란 여진 만주족으로 재탄생)요동지방으로 보내 정착하게 만들었다
당시 망국 고구려 유민이었던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는 이들 유민과 함께 요동을 떠나
당나라의 하서지방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고선지를 낳았고 항상 고구려의 후예임을 주지 시키며 아들을 키웠다
훗날 당나라 조정의 신임을 얻은 고사계가 안서(타클라마칸 사막주변) 사진교장으로 갈 때
고선지도 말을 잘 타고 활 잘 쏘는 젊은이로 성장하여 아버지를 따라 갔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사람이 살기 힘든 이 곳에도 군사를 두었다 이 곳은 당나라에서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남쪽으로는 인도 등지와 통하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이 중요한
길목으로 북쪽에서는 돌궐족이, 남쪽에서는 토번 세력이 끊임없이 침입해 왔다
바로 이 길목이 실크로드와 통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고사계 에게 바로 이 곳에서 외적을 막고, 낙타나 말을 몰고 다니는 상인을 보호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고사계는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아들 고선지를 데리고 갔다 고선지는 그 때마다 잘 싸웠고
이 무렵에 유격대장이 되었다 몽고족, 투르크족, 티벳족은 고선지를 매우 두려워했기에
고선지가 이끄는 유격대는 침입하는 외적들을 보는 족족 무찔렀다
이에 안서 도호는 고선지를 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청년 고선지는 고구려의 후예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전투에 임할 때 수나라 우중문 우문술의 30만 대군을 청천강으로 유인하여 괴멸시켜버렸던
을지문득 장군의 겸손함을 배우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20여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가서 아버지가 세운 공을 바탕으로
유격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 장군 전인완이나 개가운이 안서절도사로 있던 초기에는
그리 각광받지 못하다가 부몽영찰에 의해 여러 차례 발탁이 되어 언기진수사가 되었고
개원말에 이르러 병력 2천을 거느리고 천산산맥 서쪽의 달해부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가 되었다. 그리고 곧 사진도지병마사가 되었다
고선지의 급속한 승격은 그 자신의 출중한 자질과 더불어 당시 당나라정부의 변장
기용정책 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당나라황제 현종은 즉위 초(712∼755)에는 정치를 잘해
개원의 치'를 이룩하여 태종 이후 두 번째 당나라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 점차 자신이 신선을 즐기고 장생을 갈구하는 등 사치에 빠져들어 갔고
수많은 궁녀 그리고 양귀비와의 향락에 빠져 들었다
더불어 변방의 군사부담이 가증되고 백성이 궁핍에 허덕이는 등 정세가 점차 악화되었다
이런 시기 왕의 환심을 사 재상에 등용된 간신 이임보 는 중국인들 보다 중국
변방의 장수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였다 이는 당나라 초기 변방수비를 위해 일부 변장들을
기용했으나 요직은 주지 않았던 당의 정책에 커다란 변화였다 이임보가 변장들을
기용한 이유는 이들 당나라 변방의 장수들이 당파의 후원이 없어 자신이 쉽사리
조종할 수 있었던 것과 막강한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장군들이 재상이 되는
길을 막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생각하는 '빈천 '하고 '문맹'인 전장들을
등용시키는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정치적으로 무기력했던 현종은 이임보의 건의에 따라 변인 가운데
고선지·안녹산 등을 절도사로 기용하고 지방군정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임보의 정책은 후에 변장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면서
당을 멸망의 길로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이 때부터
고선지는 변장 기용정책의 호기를 타고 요직에 올라 5차에 걸친 서정을 통해 명실상부한
파미르고원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고선지의 여러 차례에 걸친 서역원정의 목적은 서역에 대한 당의 경영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수나라말 당나라초 서역제국(신강위그루자치구)은 서 돌궐에 신속되어 있었는데 정관
서 돌궐이 내분으로 동·서 이부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화되는 기회를 이용해
당은 서역에 대한 경영을 본격화하였다
당의 서역경영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태종시대로서 이 시기에
당은 현재 신강 동부와 중부일대를 개척함으로써 서역경영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제2기는 고종∼현종시대로서 당의 서역경영 범위를 페르시아까지 확대해간
전성기였다 이와 같은 경영과정은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소국들
특히 그 중 큰 세력을 갖고 있던 고창 구자 ·토번 등의 국가들에
대한 제압을 통해 이루어졌다
현종대에 이르자 토번(티벳)은 서 돌궐을 비롯한 주변의 변국들과 연합해
당의 서부지역을 위협해왔고 마침내 안사의 난 이후 당의 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당나라중기 이후 가장 위험한 적수로 등장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740년 고선지는 달해부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일약 안서부도호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된다
실크로드의 온갖 전투에서 연전연승의 신화를 이룩한 고선지 뒤에는
천재적인 참모가 있었다
그는 봉상청이란 인물이었다
봉상청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 학문이 깊었다
깡마르고 애꾸인데다가 한쪽 다리마저 절었던 그는 나이 30살이 넘도록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봉상청은 제갈공명이 유비에 의해 발탁되는 것과 흡사 하다
단지 제갈공명은 유비를 3번 찾아가서 유비의 사람이 되지만
봉상청은 자진해서 고선지 에게 자신을 시종으로 삼아달라고
수십 일을 성문에서 농성한 끝에 발탁되는 차이가 있다
그 후 유비의 제갈공명처럼 고선지의 봉상청이 되었는데 그 시작은 이렇다
어느 날 봉상청은 고선지 에게 편지를 썼다 고선지는 그가 보내온 편지를 보고
깜짝 놀라 고선지는 얼른 봉상청을 만나 보았으나 어찌나 못생겼던지
고선지는 부하가 되겠다는 봉상청을 잘 타일러 보냈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봉산청은 유창한 문장으로 편지를 써 보냈으나
고선지는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자 봉상청이 직접 찾아왔다
고선지는 그 자리에서 그를 꾸짖었지만 봉상청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계속
자신을 써달라고 간청했다
그래도 고선지가 거부하자 봉상청은 이튿날부터 고선지의 집 앞에 버티고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그 곳에서 그렇게 한 달 동안 버티는 봉상청을 보고
고선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고선지는 그의 끈기에 감동하여 봉상청을 부하로 삼았다
이후 봉상청은 크고 작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뛰어난 지략을 고선지 에게
일러주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얼마 후 텐산산맥 서쪽 끝의 달해부를 점령한 고선지는 그의 상관 부몽영찰에게
승전보고서를 보냈다
부몽영찰은 보고서를 보고 놀랬다 명문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승리의 소식과 함께 봉상청은 명문장가로 알려졌다
고선지는 봉상청의 명문장 덕분으로 안서도호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고선지는 사진도병마사가 되었다.
그 이후로도 고선지는 봉상청을 지극히 신임했다
비단 글씨와 문장 때문이 아니었다
봉상청의 작전은 일찌감치 앞서려는 고선지의 작전을 일단 멈추게 하여
신중히 작전을 수립할 수 있도록 보조하였다
그래서 고선지는 꼭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봉상청에게 의논하였다
단 1번을 제외하고는 온갖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었고 언제나 생사고락을 같이하였다
훗날 고선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도 봉상청은 고선지 와 죽음까지 같이 했던 것이다
연달아 승리를 이룬 고선지는 천보 6년(747) 제2차 정복활동인 소발률원정 을 단행한다
즉 747년에 토번(티벳)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여 당의 서방경계의 요충지인 소발률과
연합해 서 북방 20여 국을 자신들에게 예속시켰 다
소발률은 당이 서방으로 향하는 문호로서 이 곳을 장악하지 못하고 토번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이 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가 끝장나게 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당나라 현종은 고선지를 행영절도사에 발탁하여 토번족의 정벌임무를 주었다
그는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식닉국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유명한 힌두쿠시 준령을 넘어서 소발율국의 수도 아노월성을 점령하고
사라센 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과의 제휴를 단절하였다
그는 그 해 9월 소발률왕과 토번공주를 대동하고 개선하는데 이 1차원정 에서
당은 불름(동로마)·대식(아라비아) 제호의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했다
고선지는 그 공으로 홍로경어사중승에 오르고 이어서 특진겸좌금오 대장군동정원이 되었다
이어 천보 9년(750) 12월에 고선지는 석국(투르키스탄 지금의 신강위그루자치구)
에 대한 역사적인 제4차 서정을 단행한다
예로부터 석국은 지리적 특성상 당 제국과 아랍-이슬람제국의 사이에서 양면부연 사대주의정책을
시행해 왔고 우수한 품종의 말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였다
이러한 석국이 현종 때에 이르러 이미 당의 서쪽지역으로 진출을 시작한
아랍제국과 가깝게 지냈고 당나라를 멀리하였다
이것이 고선지가 석국을 정토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당시 안서절도사로서 당의 서역경영을 책임진 고선지로서는 석국의 이러한 경향을 용인할 수는 없었으며
이에 석국원정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이 원정에서 너무나 난폭한 정벌 전을 벌였고 이는 후일 탈라스 전투의 불씨를 낳게 된다
한편 석국 정벌에서 당군이 범한 난폭성에 석국인들이 한을 품게 되었고
이시기에 장안(시안)에 호송된 석국왕은 무모한 문신들에 의해 참살된다(750)
이로 인해 석국왕자 원은의 주도하에 서역 각국과 이슬람제국이 대당 전쟁을 위한 동맹을 맺게 된다
결국 고선지가 인솔한 당나라군과 석국-이슬람 연합군과의 격전은 751년 7월 탈라스에서 발발하였다
이 전투는 외형상으론 단순히 당을 일방으로 석국과 이슬람제국을 타방으로 하는 대 결전이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각방의 상이한 이해관계가 뒤얽힌 전쟁이었다
석국측은 한풀이 보복 전으로 당의 사진을 공격하기 위해 대당 전쟁을
선포했고 당은 석국의 보복 전에 대응하여 그 경영권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 대석국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한편 이슬람제국은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타고 서역일원에 대한 대당의 통치권과 영향력을 제어·약화시킴으로써
그 지역에 대한 새로운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군사 전으로 당과 대결하게 된 것이다
당은 이에 대응하여 7만 정벌군을 탈라스에 파견했으나
당나라와의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에게 양쪽으로 좌우협공을 당 했고
수십일 간 강행군을 해온 원정군이기에 지칠 대로 지쳐 사기 왕성한
적군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선지는 이러한 진퇴양난의 전황 속에서 부하들이 백석령에서
고선지의 퇴각을 엄호 함으로서 구사일생으로 안서로 귀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당군은 괴멸되고 일부(아랍 사서에 의하면 2만)는
이슬람군에게 포로가 되어 이슬람제국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렇게 고선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패전의 고배를 마셨다
이 패전으로 그가 당나라 정부로부터 어떠한 문책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쟁이 있은 직후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돌아와 당나라 황제로부터
두 채의 큰 저택을 하사 받는다
또 얼마 후(755) 그는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밀운군공의 봉작을 받는다
그리고 당나라 관직에서는 완전히 물러나버린다
5차에 걸친 연전연승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의 탈라스전투 패배로 빛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적부원수가 되어 출정했으나
이번에는 억울한 모함에 빠져 어이없는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또한 이 탈라스 전투에서의 패배로 고선지가 현종을 비롯한 당나라 지배세력들에게
신망을 잃었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탈라스전투에서 패배한 고선지는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4년 동안 은거하였다
얼마 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당황한 현종은 고선지 에게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황명을 내린다
그러나 오랫동안 착실히 전쟁준비를 해왔던 안록산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북에서 남으로 밀고 내려왔다
적의 가공할 위력이 계속되자 고선지는 수도 방위의 요충지인 동관으로 일시 후퇴하면서
태원창이라는 국가의 창고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려 하자 이 창고의 물건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적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태워버렸다
동관은 천형의 요새였다
소수의 병력으로 절대다수의 병력을 막아낼 수 있는 당나라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파견한 감군 변령성은 이 기회에 군부의 신임이 두터운 고선지를 제거하고자
당나라 황제에게 극히 불리한 보고를 했다
"고선지와 봉상청은” 적이 두려워 섬주를 적에게 내주고 동관으로 도망쳤사옵니다
그 뿐이 아니옵니다. 황실 창고를 제 맘대로 열어 착복했사옵니다
그 말을 그대로 믿은 이 미련한 늙은 황제 현종은 크게 노하여 자초지정을 확인 하지 않고
변령성에게 고선지와 봉상청의 목숨을 거둘 것을 명령한다
명을 받은 변령성은 동관에 이르러 먼저 봉상청을 끌어내 봉상청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고선지를 소환했다
고선지는 변령성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후퇴한 것은 분명히 죄이다
그러나 내가 태원창의 물자를 훔쳤다는 것은 무고다 그런 다음 고선지는 자신의
참모와 군사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동관으로 후퇴를 명한 것은 적군의 군세가 막강해 잠시 지연작전을 펴기 위해
전법상 그렇게 한 것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 동관 요새를 공고히 방어 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대들은 큰소리로 말해주게 그렇지 않으면 억울하다고 외쳐주게
흥분한 병사들은 일제히 발을 구르며 "억울하다” 라고 외쳤다
군사들의 고함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황제의 사자인 변령성을 베어버리자고 마구 외쳤다
또한 황도로 쳐들어가 황제를 폐위 시켜버리자고 참모들은 극도로 흥분했다
고선지의 말 한마디에 역사가 바뀔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부하들에게 차분히 말했다
나는 황제의 신하이며 부하로서 황명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미 황제의 명령은 내려졌고 그대들의 변호가 명령을
돌이킬 수 는 없는 것이라고 흥분한 부하들을 타일렀다
그리고 고선지는 봉상청의 참수된 피투성이의 머리를 가슴에 품고 말했다
자네는 지금까지 줄곧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다 그대와 나도 함께 죽으니
이 또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있기에 내가 존재했고 그대가 없이는 내가 살아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한참을 통곡을 했다
저항 없이 고선지는 황명에 따라 태연하게 참수를 받아 들였다
최후를 자신이 그토록 신뢰했던 부하와 함께한 이 장엄한 죽음 앞에 조용히 역사와
무언의 대화가 흘러가고 있다
시간을 초월하여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본다
영웅과 역적이란 무엇인가?
순간 조선조초기 홍위(단종)를 복위 시키려다 수양(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성삼문의 시가 생각이 난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 봉에 낙랑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 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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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을 벗어나고 있다 직선도로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다
그러다 조그만 마을에 진입한다 초가만 덥혀 있지 않을 뿐 주로 진흙을 빗어 만들어 놓은 집
노인과 아이들의 모습이 정겹다
손을 들면 무조건 차가 정차한다 도시를 제외 하고는 정류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벌판을 달린다 사람들이 당나귀수레를 타고 기다리다 차에 승차한다
이 침대버스에도 입석은 있나 보다 비좁은 통로에 그냥 누워버린다
그렇게 타고 내리기를 반복 타클라마칸 사막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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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의 지는 노을
버스에서의 밤을 보내어 본다
물과 김밥 한 줄로 한끼의 식사를 해결 하자니 체력이 조금은?
버스가 어느 한곳에 정차한다 그리고 기름을 채운다
주위에는 어디서 왔는지 노점상이 즐비하다
주유소 앞의 화장실은 만원이다 들어가기가 겁이 난다
지금 이곳 현지모습은 사진 속 우리의 50년대 시골 정류장
화장실 입구에 누군가 가 돈을 받고 있다
한번 사용료 0.5위안 (\85원) 화장지는 달랑 휴지 1장
내부는 칸막이와 문이 없는 재래식 화장실 비위가 약한지라
그 독특한 향기에 토해 버릴 것만 같다
또한 이 화장실 비용을 아끼려는 사람은 남 여 노 소 할 것 없이
벌판이 바로 그들의 고충 처리장이니까.
어느 위그루 여자가 바나나를 권해온다
성의를 거절 할 수 없어 그냥 받아만 놓았다
이윽고 땅거미가 진다 잠시 후 에너지를 충전한 버스는 다시 길을 재촉한다
피곤하다 초 강행군에 이런 상태에서 잠을 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이 소박한 위그루들은 하나 둘 꿈나라를 찾아가고 있다
짧은 문화 체험이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가난 속의 행복으로 피어있다
이제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김춘수의 시가 생각이 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지도를 펴놓고 위치를 확인해보니 천산산맥을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주변이다
앞으로 가야 할 거리가 800km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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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가 가까워질수록 검문이 심해진다 이놈의 중국 공안
그저 지긋지긋 하게도 한다 아무리 국경지대 라지만
그러나 테러가 발생하는 것이 언론에 다 보도 되는 것은 아니기에
크고 작은 마찰이 이 사막주변에는 무수히 발생한다
도로곳곳에는 차량이 불에 타있는 채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되었다
버스가 카스로 진입하고 있다
변방중의 변방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지대
진흙으로 지은 집 말, 낙타, 당나귀, 양, 주위의 풍경은 마치 시간이 40년 전에서 멈추어 버린 기분이다
터미널에 도착하다
이제 이곳은 무늬만 중국 아랍인종에 가까운피부색
![](https://t1.daumcdn.net/cfile/cafe/2772754850CB4DF730)
또한 이 버스터미널은 국제터미널 기능도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인접국가 키르기스탄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이곳에서 넘어가고 있다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중앙아시아계 아랍상인들의 모습이 분주하다
TV에는 아랍풍의 방송이 나오고 있다 또한 아랍풍의 음악도 들려온다
위구르어와 한자 그리고 인민광장 마오쩌뚱의 거대한 동상과 펄럭이는 오성기가 무늬만 중국임을
확인시켜 줄뿐이다
터미널에서 가까운 MIDDLE-WEST ASIA INTERNATIONAL HOTEL (중국명:중서아국제대빈관)
짧은 영어와 중국어로 체크인을 한다 카운터에 여권을 제시하니
한족으로 보이는 중국인 아가씨가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고 서툰 한국어발음을 하며 인사를 해온다
모레 다시 우루무치로 되돌아 가기 위해 기차표 예약을 부탁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68964D50CB509601)
호텔에 여장을 풀고 잠시 후 카스의 거리를 배외해본다
거리에는 무장한 공안이 곳곳에 배치 되어 있다
한족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동 중 전화가 울린다 우루무치 지인에게서
가급적 택시를 이용 하지말 것과 시내에서 일정을 소화 하라는 것
그리고 마을 가까이는 절대 접근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특히 시내를 벗어나 밤늦게 혼자 사막지대로 가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극구 만류해오고 있다
호텔에서 10분 거리의 이슬람 사원
까만 옷의 상의를 입은 남자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을 보이지 않는 차도르 복장을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
마침 라마단 기간 이라 사원이 꽤 붐빈다
사원 안으로 진입을 시도 해 보았으나 거절 당한다
사원 앞 광장에는 대형 시장이 형성 되어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68224750CB50F70F)
![](https://t1.daumcdn.net/cfile/cafe/1306594B50CB514F0E)
양고기와 향어튀김으로 허기를 달래어본다
서서히 그곳을 나와 인민광장 옆 번화가 쪽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그러나 이슬람 특유의 채취 그들의 향신료에 머리가 아프다
제법 큰 규모의 화장품 가게로 보이는 곳에 들어가보니 한국 제품이 꽤 진열 되어있다
남성용 스킨에 손이 가자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있는 푸른 눈동자의 위구르점원
아가씨가 나를 한족으로 보았는지 중국어로 말을 해온다
이에 내가 한궈런 코리아 라고 하자 뜻밖이었는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코리아 하고 말을 되받는다
어느새 주위에는 매장내의 위그루 아가씨들이 몰려들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도 궁금한 게 많은 것인지 표정들이 상당히 천진난만 해 보인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 청나라 건륭제의 비였던 향비의 무덤으로 향해본다
조금은 음침한 기분이 …………
이른바 이슬람 훠줘 가문의 무덤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런지 한산하다
뛰어난 미모가 죄가 되어 청나라에 압송 강제로 건륭제의 비가 되었던 가련한 운명
청나라 도착 후 사무치게 남편을 그리워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거부하고 끝내 머나먼
북경의 자금성에서 쓸쓸히 요절한 위그루여인 향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앞에서 갑자기 숙연해져 오는 심정은……………
누루하치(태조)라는 인물이 심양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후금국(서기1616년)
우리에게 삼전도의 치욕이라는 굴욕의 역사를 강요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이혼(광해군)을 명분 없는 쿠데타로 축출하고 왕위를 찬탈한 이천윤(인조)의
자존심을 잔인하게 짓밟아 버린 누루하치의 아들 홍타이지(태종)
국호를 청으로 변경한 뒤 1644년 명나라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새로운 왕조를 선포한 여진족의 청나라 라는 제국
조선의 장군 임경업의 가슴에 끝내 못질을 해버리는
비정의 왕조
이 비정의 왕조6대 황제인 건륭제(고종)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재임 기간의 절대권력자였다
그는 1711년 옹정제(세종)의 아들로 태어나 세상과 인연을 맺는다
또한 그의 조부 강희제(성조) 부친 옹정제 두 대에 걸쳐 이룩한 정치적 기반과 풍부한
재정을 물려받은 행운아였다
그는 부왕이 제정한 태자밀건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했다
재위 60년간 대내적으로 정치제도가 정착하고 경제력이 최 절정에 이르렀고
대외적으로는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사상 최대의 판도를 자랑하던 시기였다
그가 존재하던 시기 청나라는 물론 중국 전 왕조를 걸쳐 최 전성기였다
또한 그의 재위기간은 중국 역사상 가장 길었다
그의 조부이전 중국 역대 황제 가운데 한 무제(세종)의 재위가 54년간으로 가장 긴 편이었으며
명의 만력제(신종) 48년 명의 가정제(세종) 45년 당의 이융기(현종)가 44년이다
그런데 그의 조부 강희제가 일거에 61년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강희제의 손자인 그는 조부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서인지 즉위 60년이 되자 아들 가경제(인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제로 물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군권 등 중요한 사무나 인사 행정에 관한
일은 자신이 직접 주재하면서 4년을 더 생존 했다 그의 아들 가경제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그는 무려64년 이라는 긴 세월을 정사를 보았고 사실상 중국 역사상 제일 오래 제위에 있었다
강희제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초기 수년간은 직접 통치권을 행사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25세에 즉위하여 제위기간은 완전히 직접 통치권자로서 군림했다
조부 강희제는 68세에 사망했지만 그는 88세의 장수를 누린다
강희제보다 훨씬 오랫동안 실질적으로 재위 했었다
그는 또한 재임 기간 중 역대 어느 황제보다 여인 편력이 심했다
후궁의 수는 정확히 몇 명인지 밝혀진바 없으나 자식은 무려 17남 10녀를 두었다
오늘날의 위구르, 티베트 이들 지역이 중국의 판도에 들어오게
된 것은 실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강희제․옹정제 때부터 이곳은 청조 최대의 관심지역으로
특히 서몽골부가 천산북로 근처에 중가르 왕국을 세운 이후 청조는 이들을 정복하고자 했다
청과 중가르 왕국은 옹정제 때부터 일단은 평화가 유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청은 틈틈이 공격의 명분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754년에 중가르에 내분이 일어나고
그곳의 수령 아무르사나가 청나라에 망명해온다
건륭제는 이틈을 타 중가르를 차지하고자 그 이듬해에 몽고군, 만주군 각각 2만 5천여
군사를 이끌고 아무르사나를 선두로 세워 중가르 왕국을 침공했다
내분으로 국력이 분열되어 있던 중가르는 청군의 침공 후 100여일 만에 청에 복속되어
천산북로가 완전히 중국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천산 남로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회족(위구르)이 중가르부의 압력에서 벗어나
저항을 하려고 하자 청은 1758년에 이 지역도 무력으로 토벌하여 군신관계를
맺고 조선처럼 이 지역을 간접 통치 하였다
또한 그의 재위기간은 강희제나 옹정제 시대보다 궁궐 건물이 더 호화로웠다
자금성을 여러 차례 손질했으며 특히 황제와 황후들의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내정을 새롭게 꾸미거나 보수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향비 그녀는 위구르 지방 종교귀족인 허줘 집안의 딸로 이슬람교도였으며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서쪽 야루간드 지방을 지배하던 추장의 부인이었다
그녀가 절세미인이라는 것은 북경의 궁정에까지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건륭제가 이 지역을 침공할 때 장군 조혜를 출정시키면서 위구르추장의
부인을 사로잡아 올 것을 명령했다
위구르지방을 점령한 조혜는 그녀를 사로잡아 황제에게 바친다
22세의 이 아름다운 미녀를 본 황제는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확실히 향비는 건륭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뛰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지니고 있었다
절세미인을 얻은 그는 무척 기뻐하면서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사실 그녀의 중국 정식 명칭은 용비 이다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항상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고 해서 그녀를 향비라 불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698F5050CB52EE15)
황제는 그녀를 위해 자금성안에 이슬람 식 궁궐을 지어 향비가 즐겁게 거처하도록 했다
그녀가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을 때에는 신장 위구르 지방에서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그녀가 위구르 전통 복장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도
하면서 황후나 다른 비빈들보다 그녀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그녀는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황제가 그토록 애정을 가지고 사랑을 표현해도 그녀의 마음은 요지부동 이었다
그녀는 오직 두고 온 남편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정절을 지키며 절대군주의 총애를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녀는 위구르족을 점령한 황제를 칠 기회를 노리면서 늘 단도를 몸에 품고 다녔다
나이든 황제가 젊은 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정사를 소홀히 하는 것을 본 황태후는 몹시 불안했다
황태후는 이 여인을 쫓아내거나 살해하여 제거하려고 했으나 황제인 건륭제가 항상 관심을 가지고
향비의 궁중생활을 직접관리하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궁정생활을 무척 힘들게 한 그녀는 결국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자금성 안에서 29세를 일기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에는 자살, 타살 등 여러 설이 있지만 황제가 지방순행 차 궁궐을 비웠을 때
황태후가 향비를 불러 자살을 명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향비의 죽음을 뒤늦게 알고 건륭제가 급히 달려 왔으나 향비는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으며
이 때 주위에는 이상한 냄새가 온 공기를 진동했다고 사서에는 전해온다
흥미 있는 사실은 그녀의 무덤이 여기 카스에 있는데 건륭제의 능 안에도 존재 한다는 사실
두 곳에 존재하는 한 사람의 무덤 전설 같은 이야기 이지만
그녀 사후 카스 사람들은 그들이 제작한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북경에서 향비의 사체를 운구한 다음 허줘가의 묘에 묻어 주었다고 믿고 있다
이 묘는 향비묘라기 보다는 허줘가의 가족묘라고 함이 맞는데
이곳 사람들은 향비묘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향비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드러내고 싶은
위구르인들의 저항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호텔로비 에서 잠시 휴식 후 중앙광장쪽으로 나가보니
낮 시간대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던 한족들이 거대한 마오쩌뚱의 동상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것 역시 정복자의 권한인가
아니면 위그루들의 숙명인 것인지
카스에서의 밤을 보내며 창문을 열어 보니 모래바람의 스모그가 짙다
또한 흙먼지의 시내는 불빛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티벳자치구 라사로 들어가기 위해 지인식당의 조선족 지배인 김기호군에게
전화를하여 라사 외국인여행허가증을 요청했다
우루무치에서 시안을 경유하여 라사로 들어가는 일정을 잡아본다
그러나 잠시 후 김기호군이 유선상으로 알려오기를
티벳인들의 독립시위로 모든 외국인은 오늘부터 라사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순간 너무 허탈이 차오른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들어가고픈 충동이 강하게 다가온다
사실 나는 라사에서 천장의식을 내 눈으로 목격하고 싶었다
또한 인도와 네팔의 국경지대 까지도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기에
그러나 현실은 현실 북경으로 돌아가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
잠을 설친다 자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아쉬움의 새벽을 맞이 하고 있을 뿐이다
흙색의 이 도시 카스는 아직도 모래바람의 스모그가 걷히지 않고 있다
북경에 도착하여 단동->심양->연길->하르빈->만주리->대련으로 이어지는
동북공정 3개의성(랴오닝 길림 흑룡강)을 새로운 일정으로 잡아본다
간단한 요기후 거리로 나가보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389E4C50CB552F15)
![](https://t1.daumcdn.net/cfile/cafe/2577113B50CB56AC2E)
소박하고 별로 바쁠 것 없는 그들의 일상
우리 같으면 지금쯤 출근전쟁을 하고 있을 시간
가진 것은 비록 적지만 표정 많은 여유가 넘쳐 보인다
첫댓글 정말이지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