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어느새 모든 사람의 일상적 이슈가 되었다. 해외 단체 여행에 아웃도어 웨어를 입지 말라는 여행사의 안내문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TV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가 입고 나온 농촌 일바지 스타일이 여름내 인기를 끌기도 하고, 요 며칠 사이엔 핼러윈 파티를 앞두고 무슨 옷을 입을지 열렬히 고민하는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때와 장소에 맞게 적절한 차림새를 갖추는 것은 상식이 되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무엇을 입느냐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패션사진가 닉 나이트(Nick Knight·58)는 일찍이 자신의 사진을 통해 패션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런 그가 생애 첫 번째 개인전을 영국도 유럽도 아닌 한국에서 열었다. 서울 통의동 대림미술관의 ‘닉 나이트 사진전-거침없이, 아름답게’(10월 6일~2017년 3월 26일)다.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을 찾은 닉 나이트를 중앙SUNDAY S매거진이 따로 만났다.
닉 나이트와 만나는 동안 내 머릿속엔 “패션은 정치적 코멘트이며 당신이 입는 옷을 통해 그것은 고스란히 표현된다”라는 그의 말이 계속 떠다녔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패션사진가 중에 가장 단정하고 검박해 보이는 흰 셔츠와 검정 수트 차림을 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역시 그의 차림새처럼 튀는 재미는 없어도 절제와 성실과 확신으로 충만했다.
사실 패션은 단순히 옷차림의 문제가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의 영역으로 확장된 지 오래다. 그의 말대로 패션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진술이며 성명 같은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패션사진가는 패션이 제안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첨예하게 드러내는 첨병의 역할을 담당하고, 패션사진은 패션이라는 본진의 돌격대 역할을 맡는다. 사람들은 패션사진을 보고 정보를 얻기보다는 감수성을 훈련한다. 잘 찍은 패션사진은 옷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낯선 것’을 ‘멋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닉 나이트는 모두가 동의하는 아름다움의 표준을 전파하는 대신 기존의 틀을 깨는 아름다움을 추구해 왔다. 역시나 그는 “나는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규정하기보다는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정형화된 아름다움을 뒤집는 일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우리가 왜 그의 사진을 미술관에서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차별적 시각이 창의성을 만들고, 창의성이 예술성을 낳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남다른 해석은 그의 사진에 예술성을 부여했고, 남다름에 대한 의지는 이제 패션의 상식으로 모든 이의 생활 속에서 공감을 얻게 된 것이다.
[시각적 효과 구축해 내는 ‘이미지 메이커’]
경력의 대부분을 패션사진가로 살아온 닉 나이트의 회고전 형식을 띤 이번 전시의 시작은 그가 학생이었던 1979년에 촬영하고 82년 출판된 ‘스킨헤드’ 연작과 아이디(i-D) 매거진의 의뢰로 100명의 셀러브리티를 촬영한 ‘초상사진’ 작업으로 시작한다. 특히 발표된 지 34년 만에 처음으로 전시되고 있는 스킨헤드 사진들은 언뜻 보기에는 거친 흑백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시작부터 대상과 조우하는 방식으로 사진을 찍는 작가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카메라를 든 사람의 자세는 크게 ‘부딪혀서 반응’함으로써 취하거나(take)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만들거나(make)로 나뉜다. 전자는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관찰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후자는 찍는 사람의 의지나 미적 감각에 따라 장면의 시각적 효과를 구축해 내고자 하는 경우를 말한다. 닉 나이트가 자신을 ‘이미지 메이커’라고 부르는 것은 철저하게 후자에 속하는 사진가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명한 예술 저널리스트인 한스 울리히 오블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에게 영감을 준 작가로 바우하우스를 이끌었던 라즐로 모호이-나지와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 알렉산더 로드첸코를 꼽았다. 사진의 역사에서 20세기 대표 거장으로 꼽히는 그들의 작품은 이미지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기 위한 표현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탐구했던 작가라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생물학과 의학에서 사진으로 전공을 바꾼 닉 나이트는 학생시절 도서관에서 그들의 작품집을 접하면서 사진이 어떻게 타인의 정서와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배웠다고 한다. 이미지 메이커로서의 그의 정체성은 그의 대표작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정교한 스튜디오 라이팅과 파격적인 세트 구성은 물론이고, 모델과 의상 중 어느 한쪽을 과감하게 부각시키거나 배제하는 실험적인 어법은 오랜 그의 경력만큼이나 많은 이들을 매료시켜 왔다.
닉 나이트는 처음부터 자신의 작품이 책이나 전시장을 통해서만 보여지기를 원치 않았다. “신문이나 잡지, 버스나 길거리 광고판 등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눈과 마음에 다가가는 사진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초심은 끝없는 변신을 이끌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매체의 환경이 변화하고 누구나 영상을 만들고 즐길 수 있게 된 지금, 2000년에 그가 설립한 쇼스튜디오(SHOWstudio)는 웹사이트를 통해 아티스트들의 영감과 창작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실험적 콘텐트를 대중에게 실시간 공개함으로써 연일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작업 방법과 영역에 있어서도 지속적인 변신을 꾀해왔다. “기술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3D프린터로 인간의 장기까지 복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대리석으로 된 조각상에서만 아름다움을 느낄 순 없게 된 것이지요. 나는 언제나 새로운 것에 매료되고 경계를 넘어서는 것에 흥미를 느낍니다.”
[“관계 맺기를 통한 협업이 내 창의성의 비결”]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 사진가인 그에게 창의성의 비결을 물었다. 그는 의외로 관계와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는 관계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과 30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고, 디자이너들과도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랫동안 서로를 이해하며 신뢰 관계를 쌓아왔습니다. 패션사진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지 않으면 만족스러운 작업을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작업은 전형적인 아름다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삶의 비극적인 측면을 들춰내듯이 과감한 시도를 감행한다. 이 같은 태도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디자이너를 클라이언트로만 대하지 않고 긴 시간을 두고 깊은 속내를 나눌 수 있는 친구로 만들어 온 태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현업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요지 야마모토,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 등 수많은 브랜드의 사진을 만들어온 닉 나이트는 놀랍게도 스스로를 한 번도 상업적인 작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작품이 상업적인 작업인지 예술적인 작업인지를 구분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말은 대중예술과 고급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진 현대에 당연한 태도일 수도 있지만, 한국의 패션사진 현실에 비추어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업을 발주하는 주문자가 있어야만 일이 시작되는 패션사진의 영역에서 사진가가 한 사람의 작가로서 자신의 관점과 해석의 방식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렵지 않다면 닉 나이트 자신도 거기에 끊임없이 도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경력으로 보나 지명도로 보나 이번 전시가 닉 나이트의 인생을 통틀어 첫 번째 개인전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모두가 놀라는 이 사실에 대해 작가가 설명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랫동안 나에게 전시는 그리 큰 도전이 아니었습니다. 미술관 기획전에 초대되어 작품을 전시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고, 개인전에 대한 제안도 꾸준히 받아왔지만 선뜻 실행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새로운 도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낯선 곳에서의 전시는 새로운 도전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그간의 작품을 정리하고 프린트 톤과 표면 재질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일에 몰두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의 약점을 발견할 수 있어서 가장 좋았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아이처럼 명랑했다.
이번 전시가 그간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하는 작가들을 꾸준히 선보여온 기획력의 산물이라는 점도 짚지 않을 수 없다. 대림미술관 이정은 총괄실장은 “유르겐 텔러, 라이언 맥긴리에 이어 이번 닉 나이트의 전시도 상업적인 캠페인 작업 위주로 알려져 왔던 작가들의 작품을 예술성이라는 맥락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작가적 역량을 재조명하고자 한 것”이라고 밝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라”]
우리나라에서 패션산업이 본격적인 양적 성장기에 들어선 1990년대만 하더라도 패션은 곧 ‘유행’으로 이해됐다. 옷을 잘 입으려면 일단 유행에 민감해야 하고, 유행을 잘 따르면 패션을 아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던 것이다. 친구들과 비슷한 헤어 스타일을 하고 한 집에서 찍어낸 듯한 패턴의 재킷을 입는 것만으로도 멋쟁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시대엔 패션에 정답이라는 게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 시절 패션사진은 교과서 같은 역할을 했다.
헌데 그에 비하면 지금의 패션은 그야말로 복잡다단해졌다. 패셔니스타들이 몰려드는 곳에서도 뚜렷한 외형적 공통점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잔뜩 차려입고 나선 자리에서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과 마주치는 상상만으로도 쥐구멍을 찾고 싶어진다. 닉 나이트에게 무엇이 아름다움이냐고 물으니 “아름다움은 길거리에서 눈가리개를 하고 처음 마주치는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우문에 현답이다. 옷 좀 입을 줄 안다는 말을 들으려면 일단 남과 달라야 하고, 멋 좀 안다고 말하려면 누구에게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유명 브랜드의 옷이나 가방을 소위 명품이라는 이름 아래 경쟁적으로 소비하던 문화가 지배적인 시대는 지나갔고, 바야흐로 패션을 통해서 ‘나만의 존귀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시대가 왔다. 패션에서도 스스로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개별적 소비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패션의 궁극적인 목표가 소비 주체로서의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닉 나이트의 사진은 여전히 “이것이 아름다움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
글 신수진 사진심리학자·문화역서울 284 예술감독 artfuleye@gmail.com, 사진 대림미술관·NK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