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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대가 치안대로 바뀐 다음날이다. 이인국 박사는 치안대에 연행되었다.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반신이 저려 오고 옆구리가 쑤신다. 이것만으로도 자기의 생애를 통한 가장 큰 고역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앞으로 닥쳐올 얘기할 수 없는 사태가 공포 속에 그를 휘몰았다.
지나가고 지나오는 구둣발 소리와 목덜미에 퍼부어지는 욕설을 들으면서 꺽이듯이 축 늘어진 그의 머리는 들릴 줄을 몰랐다.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짓눌렸던 생각들이 하나씩 꼬리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어디든지 가 숨거나, 진작으로 남으로라도 도피했을 걸.....그러나 이 판국에 나를 감싸줄 사람이 어디 있담. 의지할 곳은 다 나와 같은 코스를 밟았거나 조만간에 밟을 사람들이 아닌가. 일본인! 가장 믿었던 성벽이 다 무너지고 난 지금 누구를....
'그래도 어떻게 되겠지.......
이 막연한 기대는 절박한 이 순간에도 그에게서 완전히 떠나 버리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인민 재판의 첫 코에 걸리지 않은 것만 해도... 끌려간 사람들의 행방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즉결 처형을 당했다는 소문도 떠돈다. 사흘의 여유만 더 있었더라면 나는 이미 이곳을 떴을지도 모른다. 다 운명이다. 아니 그래도 무슨 수가 있겠지.......'
"쪽발이 끄나풀, 야 이 새끼야."
고함 소리에 놀라 이인국 박사는 흠칫 머리를 들었다.
때도 묻지 않은 일본 병사 군복에 완장을 찬 젊은이가 쏘아보고 있다. 춘석이다.
이인국 박사는 다시 쳐다볼 힘도 없었다. 모든 사태는 짐작되었다.
이제는 죽는구나, 그는 입 속으로 뇌까렸다.
"왜놈의 밑바시, 이 개새끼야."
일본 군용화가 그의 옆구리를 들이찬다.
"이 새끼, 어디 죽어 봐라."
구둣발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전신을 내지른다.
등골 척수에 다급한 충격을 받자 이인국 박사는 비명을 지르고 꼬꾸라졌다.
그는 현기증을 일으켰다. 어깻죽지를 끌어 바로 앉혀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한쪽으로 쓰러졌다.
"민족과 조국을 팔아먹은 이 개돼지 같은 놈아, 너는 총살이야, 총살......
어렴풋이 꿈속에서처럼 들려 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말도 아무런 반항을 일으키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자기 앞자락에서 부스럭거리는 감촉과 금속성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다.
노란 털이 엉성한 손목이 시계줄을 끄르고 있다. 그는 반사적으로 앞자락의 시계 주머니를 부둥켜 쥐면서 손의 임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파란 중대가리 소련 병사가 시계 줄을 거머쥔 채 이빨을 드러내고 히죽이 웃고 있다.
그는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양복 안주머니를 감싸 쥐었다.
"흥..... 야뽄스키........"
병사의 눈동자는 점점 노기를 띠어 갔다.
"아니, 이것만은!"
그들의 대화는 서로 통하지 않는 대로 손아귀와 눈동자의 대결은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병사는 됫박만한 손으로 이인국 박사의 손가락 끝에서 시계를 채어 냈다. 시계줄은 끊어져 고리가 달린 끝머리가 이인국 박사의 손가락 끝에서 달랑거렸다.
병사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죽음과 시계......" 이인국 박사는 토막난 푸념을 되풀이하고 있다.
양쪽 팔목에 팔뚝시계를 둘씩이나 차고도 만족이 안 가 자기의 회중 시계까지 앗아가는 그 병정의 모습을 머릿속에 똑똑히 되새겨 갈 뿐이다.
감방 속을 빼곡히 찼다.
그러나 고참자와 신입자의 서열은 분명했다. 달포가 지나는 사이에 맨 안쪽 똥통 위에 자리잡았던 이인국 박사는 삼분지 이의 지점으로 점차 승격되었다.
그는 하루종일 말이 없었다. 범인 속에 섞여 있던 감방 밀정이 출감된 다음날부터 불평만을 늘어놓던 축들이 불려 나가 반송장이 되어 들어왔지만, 또 하루 이틀이 지나자 감방 속의 분위기는 여전히 불평과 음식 이야기로 소일되었다.
이인국 박사는 자기의 죄상이라는 것을 폭로하기도 싫었지만 예전에 고등계 형사들에게서 실컷 얻어들은 지식이 약이 되어 함구령이 지산 명령이라는 신념을 일관하고 있었다.
그는 간밤에 출감한 학생이 내던지고 간 노어 회화 책을 첫장부터 꼼꼼히 뒤지고 있을 뿐이다.
등골이 쏘고 옆구리가 결려 온다. 이것으로 고질이 되는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사뭇 내려가고 있다. 아무리 체념한다면서도 초조감을 막을 길 없다.
노어 책을 읽으면서도 그의 청각은 늘 감방 속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있다.
그들이 예측하는 식대로의 중형으로 치른다면 자기의 죄상은 너무도 어마어마하다. 양곡 조합의 쌀을 몰래 팔아먹은 것이 칠 년, 양민을 강제로 보국대에 동원했다는 것이 십 년, 감정적인 즉결이 아니라 법에 의한 처단이라고 내대지만 이 난리 판국에 법이고 뭣이고 있을까. 마음에만 거슬리면 총살일 판인데.....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일 투사 치료 거부, 일제의 간첩 행위......'
이건 너무도 어마어마한 죄상이다. 취조할 때 나열하던 그대로 한다면 고작해야 무기 징역, 사형감인지도 모른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며 후 큰 숨을 내쉬었다.
처마 밑에 바싹 달라붙은 환기창에서 들이비치던 손수건만한 햇살이 참대자처럼 길어졌다가 실오리만큼 가늘게 떨리며 사라졌다. 그 창살을 거쳐 아득히 보이는 가을 하늘이 잊었던 지난 일을 한 덩어리로 얽어 휘몰아 오곤 했다. 가슴이 짜릿했다.
밖의 세계와는 영원한 단절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마누라, 아들, 딸, 혜숙이, 누구누구....그러다가 외과계의 원로 이인국 박사에 이르자, 목구멍이 타는 것 같이 꽉 막혔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침을 삼켰다.
'그럼, 어쩐단 말이야, 식민지 백성이 별수 있었어. 날구 뛴들 소용이 있었느냐 말이야, 어느 놈은 일본놈한테 아첨을 안 했어. 주는 떡을 안 먹은 놈이 바보지. 흥, 다 그놈이 그놈이었지.'
이인국 박사는 자기 변명을 합리화시키고 나면 가슴이 좀 후련해 왔다.
거기다 어저께의 최종 취조 장면에서 얻은 소련 고문관의 표정은 그에게 일루의 희망을 던져 주는 것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억지의 자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지만.
아마 스텐코프 소좌라고 했지. 그 혹부리 장교, 직업이 의사라고 했을 때, 독또오루 독또오루 하고 고개를 기웃거리던 순간의 표정, 그것이 무슨 기적의 예감 같기만 했다.
이인국 박사는 신음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복도에 켜져 있는 엷은 전등 불빛이 쇠창살을 거처방 안에 줄무늬를 놓으며 비쳐 들어왔다. 그는 환기창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동도 트지 않은 깜깜한 밤이다.
생똥 냄새가 코를 찌른다. 바짓가랑이 한쪽이 축축하다. 만져 본 손을 코에 갔다 댔다. 구역질이 난다. 역시 똥 냄새다.
옆에 누운 청년의 앓는 소리는 계속되고 있다. 찬찬히 눈여겨보았다. 청년 궁둥이도 젖어 있다.
'설산가 보다.'
그는 살창문을 흔들며 교화 소원을 고함쳐 불렀다.
"뭐야!"
자다가 깬 듯한 흐린 소리가 들려 왔다.
"환자가.....이거, 봐요."
창살 사이로 들여다보는 소원의 얼굴은 역광 속에서 챙 붙은 모자 밑의 둥그스름한 윤곽밖에 알려지지 않는다.
이인국 박사는 청년의 궁둥이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들여다보고 있다.
"이거, 피로군, 피야."
그는 그제서야 붉은빛을 발견하곤 놀란 소리를 쳤다.
"적리야, 이질....."
그는 직업 의식에서 떠오르는 대로 큰 소리를 질렀다.
"뭐, 적리?"
바깥 소리는 확실히 납득이 안 간 음성이다.
"피똥 쌌소, 피똥을.....이것 봐요."
그는 언성을 더욱 높였다.
"응, 피똥......"
아우성 소리에 감방 안의 사람들은 하나 둘 눈을 뜨며 저마다 놀란 소리를 쳤다.
"적리, 이건 전염병이오, 전염병."
"뭐. 전염병......"
그제서야 교화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마 후 환자는 격리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똥을 닦느라고 한참 법석을 치고 다시 잠을 불러일으키질 못했다.
이튿날 미결감 다른 감방에서 또 같은 증세의 환자가 두셋 발생했다. 날이 갈수록 환자는 늘기만 했다.
<저작권 보호와 관련하여 출판사측의 요청에 의해 중략합니다>
이인국 박사는 일본인 시장의 혹을 수술하던 일을 회상하면서 자신있는 설복을 했다.
'동경 경응 대학 병원에서도 못하겠다는 것을 내가 거뜬히 해치우지 않았던가.'
그는 혼자 머릿속에서 자문 자답하면서 이번 일에 도박 같은 심정으로 생명을 걸었다.
소련 군의관을 입회시키고 몇 차례의 예비 진단이 치러졌다.
수술일은 왔다.
이인국 박사는 손에 익은 자기 병원의 의료 기재를 전부 운반하여 오게 했다.
군의관 세 사람이 보조하기로 했지만 집도는 이인국 박사 자신이 했다. 야전 병원의 젊은 군의관들이란 그에게 있어선 한갓 풋내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수술을 진행하는 동안 그들 군의관들을 자기 집 조수 부리듯 했다. 집도 이후의 수술대는 완전히 자기 진단하의 왕국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아까 수술 직전에 사인한, 실패되는 경우에는 총살에 처한다는 서약서가 통일된 정신을 순간순간 흐려 놓곤 했다.
수술대에 누운 스텐코프의 침착하면서도 긴장에 찼던 얼굴, 그것도 전신 마취가 끝난 후 삼 분이 못 갔다.
간호부는 가제로 이인국 박사의 이마에 내 맺힌 땀방울을 연방 찍어내고 있다.
기구가 부딪는 금속성과 서로의 숨소리만이 고촉의 반사등이 내리비치는 방안의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을 헤살 짓고 있다.
수술은 예상 이상의 단시간으로 끝났다.
위생복을 벗은 이인국 박사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완치되어 퇴원하는 날 스텐코프는 이인국 박사의 손은 부서져라 쥐면서 외쳤다.
"꺼비딴 리, 스바씨보."
이인국 박사는 입을 헤벌리고 웃기만 했다. 마음의 감옥에서 해방된 것만 같았다.
"아진, 아진......오첸 하라쇼."
스텐코프는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면서 네가 첫째라는 듯이 이인국 박사의 어깨를 치며 칭찬했다.
다음날 스텐코프는 이인국 박사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가 이인국 박사에게 스스로 손을 내밀어 예절적인 악수를 청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적과 적이 맞부딪치면서 이렇게 백팔십 도로 전환될 수가 있을까. 노랑 대가리도 역시 본심에서는 하나의 인간임에는 틀림없는 것이 아닌가.'
"내일부터는 집에서 통근해도 좋소."
이인국 박사는 막혔던 둑이 터지는 것 같은 큰 숨을 삼켜 가면서 내쉬었다.
이번에는 이인국 박사가 스텐코프의 손을 잡았다.
"스바씨보, 스바씨보."
"혹 나한테 무슨 부탁이 없소?"
이인국 박사는 문득 시계가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곧이어 이 마당에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오히려 꾀죄죄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 미련이 가셔지지 않았다.
이인국 박사는 비록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더라고 솔직히 심중을 털어놓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는 통역의 보조를 받아 가며 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회상하면서 시계를 약탈당한 경위를 상세히 설명했다.
스텐코프는 혹이 붙었던 뺨을 쓰다듬으면서 긴장된 모습으로 듣고 있었다.
"염려없소, 독또우루 리. 위대한 붉은 군대가 그럴 리가 없소. 만약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슨 착각이었을 것이오. 내가 책임지고 찾도록 하겠소."
스텐코프의 얼굴에 결의를 띤 심각한 표정이 스쳐 가는 것을 이인국 박사는 똑바로 쳐다보았다.
'공연한 말을 끄집어내어 일껏 잘되어 가는 일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는 솟구치는 불안과 후회를 짓눌렀다.
"안심하시오, 독또우리 리, 하하하."
스텐코프는 말을 큰 웃음으로 넌지시 말끝을 막았다.
이인국 박사는 죽음의 직전에서 풀려나 집으로 향했다.
어느 사이 저렇게 노어로 의사 표시를 할 수 있게 되었느냐고 스텐코프가 감탄하더라는 통역의 말을 되뇌이면서......
차가 브라운 씨의 관사 앞에 닿았다.
성조기를 보면서 이인국 박사는 그날의 적기(赤旗)와 돌려온 시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응접실에 안내된 이인국 박사는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대사관으로는 여러 번 찾아갔지만 집으로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 년 전 딸이 미국으로 갈 때부터 신세진 사람이다.
벽 쪽 책꽂이에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대동야승(大東野乘)> 등 한적(漢籍)이 빼곡히 차 있고 한쪽에는 고서의 질책(帙冊)이 가지런히 쌓여져 있다.
맞은편 책상 위에는 작은 금동 불상 곁에 몇 개의 골동품이 진열되어 있다. 십이 폭 예서(隸書) 병풍 앞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도 세월의 때묻은 백자기다.
저것들도 다 누군가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이인국 박사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는 자기가 들고 온 상감진사(象嵌辰砂) 고려 청자 화병에 눈길을 돌렸다. 사실 그것을 내놓는 데는 얼마간의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국외로 내어 보낸다는 자책감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그였다.
차라리 이인국 박사에게는 저렇게 많으니 무엇이 그리 소중하고 달갑게 여겨지겠느냐는 망설임이 더 앞섰다.
브라운 씨가 나오자 이인국 박사는 웃으며 선물을 내어놓았다. 포장을 풀고 난 브라운 씨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기쁨을 참지 못하는 듯 탱큐를 거듭 부르짖었다.
"참 이거 귀중한 것입니다."
"뭐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만 그저 제 성의입니다."
이인국 박사는 안도감에 잇닿은 만족을 느끼면서 브라운 씨의 기쁨에 맞장구를 쳤다.
브라운 씨가 영어 반 한국말 반으로 섞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인국 박사는 흐뭇한 기분에 젖었다.
"닥터 리는 영어를 어디서 배웠습니까?"
"일제 시대에 일본말 식으로 배웠지요. 예를 들면 '잣도 이즈 아 걋도'식으루요."
"그런데 지금 발음은 좋은데요. 문법이 아주 정확한 스텐더드 잉글리시입니다."
그는 이 말을 들을 때 문특 스텐코프의 말이 연상됐다. 그러고 보면 영국에 조상을 가진다는 브라운 씨는 알(R) 발음을 그렇게 나타내지 않는 것 같게 여겨졌다.
"얼마 전부터 개인 교수를 받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인국 박사는 자기의 어학적 재질에 은근히 자긍을 느꼈다.
브라운 씨가 부엌 쪽으로 갔다오더니 양주 몇 병이 놓인 쟁반이 따라 나왔다.
"아무 거라도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하십시오."
이인국 박사는 워드카 한 잔을 신통한 안주도 없이 억지로라도 단숨에 들이켜야 속이 시원해 하던 스텐코프를 브라운 씨 얼굴에 겹쳐 보고 있다.
그는 혈압 때문에 술을 조절해야 하는 자기 체질에 알맞게 스카치 한 잔을 핥듯이 조금씩 목을 축이면서 브라운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거, 국무실에서 통지 왔습니다."
이인국 박사는 뛸 듯이 기뻤으나 솟구치는 흥분을 억제하면서 천천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탱큐, 탱큐."
어쩌면 이것은 수술 후의 스텐코프가 자기에게 하던 방식 그대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인국 박사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나의 처세법은 유에스에이에도 통하는구나 하는 기고만장한 기분이었다.
청자병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면서 술잔을 거듭하는 브라운 씨도 몹시 즐거운 표정이었다.
"미국에 가서의 모든 일도 잘 부탁합니다."
"네, 염려 마십시오. 떠나실 때 소개장을 써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역사는 짧지만, 미국은 지상의 낙토입니다. 양국의 우호와 친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탱큐......"
다음날 휴전선 지대로 같이 수렵하러 가기로 약속하고 이인국 박사는 브라운 씨 대문을 나섰다.
이번 새로 장만한 영국제 쌍발 엽총의 총신을 머리에 그리면서 그의 몸은 날기라도 할 듯이 두둥실 가벼웠다. 이인국 박사는 아까 수술한 환자의 경과가 궁금했으나 그것은 곧 씻겨져 갔다.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포부와 희망이 부풀어올랐다.
신체 검사는 이미 끝난 것이고 외무부 출국 수속도 국무성 통지만 오면 즉일될 수 있게 담당 책임자에게 교섭이 되어 있지 않은가? 빠르면 일주일 내에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브라운 씨의 말이 떠올랐다.
대학을 갓 나와 임상 경험도 신통치 않은 것들이 미국에만 갔다오면 별이라도 딴 듯이 날치는 꼴이 사나왔다.
'어디 나두 댕겨오구 나면 보자!'
문득 딸 나미와 아들 원식의 얼굴이 한꺼번에 망막으로 휘몰아 왔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듯 긴장을 띠다가 어색한 미소를 흘려 보냈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그는 허공을 향하여 마음껏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면 우선 비행기 회사에 들러 형편이나 알아볼까.....'
이인국 박사는 캘리포니아 특산 시가를 비스듬히 문 채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그는 스프링이 튈 듯이 부스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도 호텔로......"
차창을 거쳐 보이는 맑은 가을 하늘이 이인국 박사에게는 더욱 푸르고 드높게만 느껴졌다.
핵심정리 * 갈래: 단편 소설, 인물소설, 풍자소설 *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 배경: 시간 - 해방과 6·25를 전후한 1940∼1950년대 공간 - 북한과 남한 * 성격: 풍자적, 냉소적, 비판적 * 구성: 역순행적 구성, 몽타주 구성 * 경향: 신심리주의적 수법 * 표현: 몽타쥬 수법 * 주제: 시류와 타협하면서 자신의 안녕만을 위해 변절적으로 순응해 가는 기회주의적 인간 비판.
전광용 호 백사(白史). 함남 북청(北靑) 출생. 1946년 경성고등상업학교, 1951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1953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일찍이 문학에 심취, 1939년 《동아일보》에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입선되고, 1947년 《시탑(詩塔)》 등 동인으로 활동, 1955년 단편 《흑산도》가 《조선일보》에 당선되고, 논문 〈신소설 연구〉가 《사상계》에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문단생할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동혈인간(凍血人間)》 《충매화(蟲媒花)》 등의 단편을 발표, 현실에 아부하지 않는 건실한 작풍을 보여주었다. 1962년에는 세속적 출세주의자를 풍자한 단편 《꺼삐딴리》로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받았고, 이어 장편 《태백산맥》 《나신(裸身)》 《창과 벽》, 단편 《세끼미》 등을 발표했다. 한편, 학자로서도 역할이 커, 1955∼1984년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1972년 문리대 문학부장으로 있으면서, 1973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 소설연구에 착수하여 〈설중매(雪中梅) 연구〉(1955), 〈이인직(李人稙) 연구〉(1957) 등을 비롯하여, 〈한국어문장의 시대적 변천〉 등 평론과 논문을 다수 발표, 한국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 사회활동에도 참여, 1974∼1981년 펜클럽한국본부 부회장, 1980∼1985년 한국비교문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4년부터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로 지냈다. 대한민국 문학예술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그 밖의 주요 작품에는 《모르모트의 반응》 《G.M.C.》 《편지의 미학》 등이 있다.
해설 1 [꺼삐딴 리]는 1962년 7월 [사상계] 109호에 발표하여 그 해 '동인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기주의자이며 기회주의자인 전형적 인물을 통해서 사회 지도층 인물들의 그러한 행태를 비판하고 있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단편 소설이다.
작가로 출발하였으나 신소설을 연구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결과 국문학자로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았다. 또한 그는 소설가로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쳐 사회 의식이 투철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소설들은 냉철한 사실적 시선을 바탕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끈질긴 생명력을 추구하려는 일관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전광용은 현장 답사를 통해 확인하는 등 작품 소재의 충분한 소화로 분단의 비극과 우리 나라가 처한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을 등장 인물을 통하여 훌륭하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의 문장 표현은 간결하고 정확하다는 점이 특징이기도 한다.
[꺼삐딴리]에서도 그러한 특징들을 잘 살리고 있다. 작가는 뛰어난 변신술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주인공'이인국', 지조도 신념도 없는 이인국, 이웃과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자신과 자기 가족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이인국이란 인물을 통하여 철저한 이기주의와 기회주의의 전형을 보여 준다.
주인공 이인국 박사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면서도 종합 병원에 버금가는 명성과 수입을 올린다. 그의 병원은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청결과 다른 병원에 비해 두 배나 되는 비싼 병원비를 특징으로 하여 성장한다. 그리고 환자들을 선별해서 받아들인 까닭에 그의 병원을 이용하는 대상은 일제 때는 주로 일본인들이었고 지금은 권력층이나 재벌에 속한 축들이 대부분이다.
이인국은 미국 대사관 브라운 씨와의 약속을 생각하면서 애지중지하는'18금 회중시계'를 꺼내 본다.여기서 이야기는 30년전 제국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 돌아가며 그의 전력이 나온다.
일제 시대에는 철저한 친일파로 행세하여 아이들을 일본인 소학교에 보내 일본어만 쓰도록 강요한 이인국은 잠꼬대까지 일본어로 할 정도로 처신하여'국어 상용(국어 상용)의 가(가)'라는 액자까지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인들에게 밉보일 것이 두려워 형무소에서 풀려난 사상범을 냉정하게 외면해 버린다.
광복이 되고 소련군이 진주하자 이인국은 변신을 꾀하지만 치료를 거부했던 사상범 춘식이의 밀고로 러시아인에게 붙잡혀 아끼던'회중시계'도 빼앗기고 감독에 갇힌다. 그러나 그는 빠져나갈 방도를 찾으며 러시아어를 부지런히 공부한다. 마침 의료 요원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이인국은, 실력자인 스텐코프에게 잘 보여 아끼던 회중 시계까지 수소문해서 돌려받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인국은1.4후퇴 때 월남한 후에 또다시 변신. 친미 행동으로 일관하여 영어를 부지런히 배우고. 능란한 처세술을 발휘하여 병원의 고객을 권력층과 재벌과 같은 부유층으로 제한하면서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룩한다. 미국인의 도움으로 딸까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그런데 믿었던 딸이 미국인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커다란 실망을 느끼지만, 그 딸을 만나기 위해 귀중한 골동품을 미국 대사관에 선물하고 국무성을 초청비자를 허락받고 의기양양해 돌아오면서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샅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혁명이 알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라고 하는 데서 그의 인물됨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작품은 10개의 장절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과 끝장이 현실이고, 8장은 주로 과거의 회상으로 된 역전적 구성이다. 이러한 구성에서는 시간 문제가 중요한 구실을 하는데,'회중시계'가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매개체로써 아주 중요하게 쓰인다. 이 회중 시계는 역사적 전환기마다 변신하는 이인국의 행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약삭빠르게 변신하는 속물 근성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널려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지도층들이 역사 발전을 저해하면서도 주도해 나가는 참담한 현실을 자각 전광용은[꺼삐딴 리]에서 형상화하여 날카롭게 풍자 비판하는 한편, 새로운 도덕 의식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해설 2 이 작품은 10개의 장절(章節) 중 첫째와 마지막이 현재이며, 가운데 8개 장절(章節) 중 7개는 과거에 대한 회상이고, 5번째 장절에 현재가 잠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시대적으로 구분된 장절을 모아서 엮은 '타임 몽타주(time montage)' 구성이다.
일제 시대 이인국은 자식들을 일본인 학교에 보내어 일본어만 쓰게 하여 철저한 친일분자로 지나다가, 광복이 되어 북쪽을 소련군이 점령하게 되자 러시아어와 자신의 의술로 소련군 장교에게 환심을 사고, 아들을 소련으로 유학 보낸다. 또한 월남해서는 미 대사관에 붙어 아부하고 친미주의자가 된다. 작가는 이인국 박사의 이러한 인물됨을 '직접적 제시'와 '간접적 제시' 방법을 적절히 섞어 잘 보여 주고 있다.소설의 서두는 이인국 박사가 딸 '나미'가 미국인과 국제 결혼을 한다는 사실에 가벼운 분노를 느끼면서도, 자신의 경력에 윤기(潤氣)를 더할 셈으로 도미할 계획을 세우고, 미 대사관 직원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결말 부분은 이인국 박사가 브라운을 만나 선물을 주고 나와서는 반도 호텔로 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작품의 서두와 결말을 제외한 부분에서 독자는 일제 때부터 해방기를 거쳐 1950년대에 이르는 그의 삶의 과정을 보게 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이인국 박사의 과거의 추악한 삶의 방식을 확인하고 현재의 삶과 관련지어 평가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다. 쉽게 말하면, 과거의 행적이 그러했기에 현재의 삶도 그러하다는 인과적 접속인 것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을 초점으로 전개되는 인물 소설이다. 따라서, 이인국 박사의 삶의 방식이 철저히 해부된다. 그는 민족사적 비극과 역경을 정신으로 이겨낸 승자가 아니라 자기 일신(一身)만을 위한 처세술로써 개인적 위기를 넘겨온 도덕적 파탄자이다. 그런 그는 삶의 태도에 대하여 반성하기는커녕 정당화하기만 하다. 역사의 흐름을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하려 하기보다는 그 흐름에 안주함으로써 만족하는 반(反)역사적, 이기적 인간의 전형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러한 주인공을 지칭할 때, '박사'라는 호칭을 붙여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 의도는 다분히 비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풍자 문학이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본분을 잊고 언제나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는 처세술과 속물 근성을 풍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정신의 뿌리를 잃고 부동(浮動)해야 했던 우리 정신사를 풍자한다. '하나'를 가지고 '열'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단면으로써 전체를 드러낸 이 작품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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